농민신부와 프란치스코 교종
내가 전북 진안군 부귀면 금계곡의 '만나 생태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최종수 신부를 만난 것은 여행 중간 쯤인 3월 31일이다. 전주 인근을 지나던 중 연락되어 하루 틈새를 내어 다녀 왔다. 그때 일을 순례기 마무리에 쓰게 된 것은 그동안 내가 그곳에서 느꼈던 복잡한 감정을 기록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떠한 문장을 동원한다 해도 그분의 깊고 넓은 '사람에 대한 순수한 사랑'의 실체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쨋든 그날 나는 최 신부와 통화한 후 전주역 앞에서 하루 서너 차례 다니는 버스를 기다려 타고 부귀면에서 내렸다. 잠시 후 완전 농군차림의 최 신부가 낡은 반트럭을 타고 나타났다. 전주교구 최종수 신부는 특이한 분이다. 스스로 '사랑수' 신부로 불리우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사람과 옳음에 대한 사랑을 사제생활의 최고 가치로 삼아 몸으로 실천하며 살고 있는 분이다. 내가 최 신부를 처음 만난 것은 2천년 대 초 그가 캐나다 피터보로 한인성당에 부임해서이다. 그는 초면에 내 나이를 물어 자신보다 19살 많은 것을 확인하고는 그때부터 형님이라고 부른다. 그는 20년 이상 연상이면 아버님 또는 어머님이라 부르는데 나는 한 살 차이로 천만다행하게 아버님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천주교 사제들 가운데 평신도들을 나이에 따라 아버님, 어머님, 형님, 누님으로 호칭하는 사람은 모르긴해도 최 신부가 유일할 것 같다. 당시 그는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 신부로서 한국에서 정의구현과 사회운동에 앞장서다 그의 신변을 염려한 주교의 배려로 캐나다에 파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교포사목 후 귀국한 최 신부는 전주 공단지역에 신설된 팔복성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해 2008년 임기가 끝나자 지금은 진안성당 부귀공소를 돌보면서 생태마을에 전념하고 있다.
최 신부가 캐나다를 떠난 뒤 나는 간혹 인터넷을 통해 그가 시골 성당에서 농민들과 한 해의 농사를 수확한 후 기쁨을 나누는 사진들을 볼 수 있었다. 얼마 전 최 신부가 메일로 보내 온 글에도 "밥이 하늘이다. 먹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농민 없이 아무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밥인 농민은 하늘이며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최 신부는 "농산물을 사주는 건 농민을 살리는 일이고 하느님과 하늘을 돕는 일입니다. 하느님과 하늘은 농민을 돕는 사람을 도울 것입니다. 농산물을 선물하는 당신이 하늘입니다. 사랑은 멀리 날아가는 향기입니다. 농민을 사랑하는 만큼 멀리 멀리 퍼 날랐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농민들에 대한 그의 애틋한 마음을 담아 우리 농산물을 구입해 농민을 돕자고 호소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그의 말을 기억하면서 그가 운전하는 반트럭으로 타고 '만나생태마을'에 들어섰다. 생태마을은 뒤로 병풍처럼 둘러쌓인 갈매봉 기슭 해발 450미터에 자리잡고 있다. 친환경적으로 지어진 목재 2층 건물과 사제관과 기도실, 식당으로 쓰이는 또 다른 2층 건물 그리고 황토흙으로 지어진 다른 한 채의 건물이 있었다. 마을의 첫 인상은 저온창고와 생태화장실, 헛간이며 온실과 장독대, 온갖 농기구들로 복잡했다. 개울 옆 방죽에는 잉어와 미꾸라지를 키우고 있다. 이곳에서는 주로 블루베리와 고추, 고구마 농사를 짓고 있는데 화학비료와 농약을 일체 사용하지 않고 오직 효소와 쌀겨, 생선발효액, 부엽토와 EM, 목초액, 유박과 막걸리 등을 비료로 사용한다. 밭에 잡초를 뽑는 것도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일일히 손과 예취기로 뽑는다. 최 신부는 그러나 화학비료와 농약을 살포하는 재래식 농법보다는 블루베리 나무도 작고 수확량도 삼분의 일 정도라고 한다.
이날 '만나생태마을'은 적막했다. 아주머니 한 분이 식사를, 남자 한 분이 일손을 돕고 있었는데 그 분들도 상주인원이 아닌 형편껏 와서 봉사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최 신부는 한창 바쁜 농사철에는 일손이 없어 무척 힘들다고 했다. 그 넓은 생태마을을 사실상 최 신부 혼자 가꾸는 것이다. 그가 생태마을을 시작한 것은 스스로 농민이 되기 위함이다. 그는 자유무역 협정과 농산물 수입개방으로 어려움에 처한 농민들의 삶을 함께 살면서 이들의 지혜를 모아 어려움을 헤쳐나가기 위해 농민이 된 것이다. 나는 목재건물 2층에 여장을 풀고 식구들과 함께 식사한 후 기도실로 갔다. 최 신부는 여러 권의 시집과 수필집을 낸 시인이자 수필가이다. 그의 저서 '첫 눈같은 당신'이나 '지독한 갈증'에는 그의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감동적으로 녹아 있다. 최 신부는 아침저녁 기도시간에 자신이 만든 기도문을 노래하면서 오체투지(五體投地)가 포함된 특수한 체조를 한다.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기를 염원하며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노랫말과 함께 하는 체조는 그대로 훌륭한 기도이자 운동이다. 나도 따라 해 보았는데 몸이 굳어 유연하게 되지 않는다. 나는 조국여행 중 어디서나 대부분 성직자들이 가난하던 시절과 달리 비교적 안락한 중산층 생활을 영위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제는 목탁치며 탁발하는 스님도 볼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본 최종수 신부는 일반적인 농민들보다 더욱 심한 육체노동으로 6년 째 스스로 혹사하고 있다. 최 신부는 농사 뿐 아니라 메주도 직접 만들고 간장, 된장도 직접 담근다. 겨울에도 쉴 틈이 없다고 한다. 그도 얼마든지 편안하게 사제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농사일은 한가한 시간이 없을만큼 제대로 하려면 무척 바쁜 직업이다. 특히 황무지에 새로 생태마을을 일구어가는 최 신부는 농사만으로도 눈코 뜰새없이 바쁘게 마련이다. 과거 왕성하게 정의구현을 위한 사회참여를 하던 최 신부는 농군이 된 후 다른 일에는 좀체 여유가 없다. 그는 오래 전부터 함께 사회운동을 하던 동료, 선배 신부들과 다른 사람들 일부는 그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이 식었다거나 변절했다고 비난한다며 서운한 마음을 비쳤다. 최 신부는 생태마을 넓은 면적에 블루베리를 심었는데 유기농으로 재배하는 까닭에 수확량도 적고 손이 무척 간다고 했다. 그는 과일에 다른 색갈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온전한 블루만 따기 때문에 1킬로 따는데 천 번 이상 손길이 가야 된다고 설명했다. 최 신부는 이토록 참을성 있게 한 일 한 알 감사하고 기도하면서 수확하지만 판매하는 것이 더욱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봉사자들과 블루베리를 천공필름에 아이스백을 넣어 크기별로 주문자들에게 택배로 발송한다고 한다. 그는 농산물은 생물이라 수확 후 2, 3일 내로 팔아야 신선도가 유지되는데 판매가 저조할 때는 애가 탈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최 신부는 판매가 저조해 한 번은 블루베리를 차에 싣고 아는 신자를 찾았는데 종내 팔아달라는 말을 못하고 "올 처음 수확한 것이니 맛있게 드십시요"하고 그냥 놓고 나왔다고 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사제로서 물건을 팔러다니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농사를 짓게 되면서 부터는 농민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많다고 한다. 말만 '농자천하지대본' (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하면서 너무 천대받고 정당한 노동의 댓가도 받지 못하고 희생만 당하는 이 땅의 농민들이 너무 불쌍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음날 새벽 최 신부까지 네 사람이 기도실에 둘러앉아 미사를 봉헌한 뒤 아침기도를 예의 체조와 함께 바쳤다. 최 신부 숙소에는 '사제의 고백과 다짐'이라는 글이 적힌 족자가 걸려 있었다. "사제는 하느님을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이 체험은 오직 이웃을 위한 십자가의 삶 안에서만 확인되고 가능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사제적 삶의 근거와 존재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없이 사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로 시작되는 다짐에는 오직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십자가의 길을 걷겠다는 최 신부의 각오를 보는 것 같았다. 식사 후 나는 생태마을 뒷산 갈매봉에 올랐다. 멧돼지가 내려와 고구마를 캐먹고 아침마다 부엉이가 울어댄다는 최 신부의 말처럼 갈매봉에서 흐르는 계곡물은 생태마을의 젖줄처럼 콸콸 넘쳐 흐르고 산세는 깊었다. 약 두 시간에 걸친 등반을 마치고 최 신부와 작별할 시간이다. 그는 나를 진안 터미날까지 바래다 주었다. 차 안에서 최 신부는 최근 정부의 자유무역 협정과 농산물 개방에 따른 농민들의 어려움이 갈수록 심해진다고 걱정했다. 그는 농민들이 일년 농사를 지어 봐야 비료와 재료비를 빼면 인건비도 건지기 어려운데 정부는 농업정책을 너무 시장논리에 따라 결정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최 신부는 외국 농산물이 쏟아져 들어오면 우리나라는 농업주권을 빼앗기고 결국 경제 식민지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나는 나이 50이 넘은 중견사제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직접 농업현장에 뛰어들어 농민들과 애환을 함께 하는 최 신부의 용기와 농민에 대한 사랑에 감동했다. 한편 이날 농사일로 바쁜 최 신부의 시간을 많이 빼앗은 것 같아 미안했다.
이러한 최 신부의 삶이 크게 위로받는 경사가 발생했다. 내가 한국여행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 온 후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종이 최 신부를 만나 격려한 것이다. 교종은 한국 방문 마지막날인 8월 18일 아침 숙소인 교황청 대사관에서 최 신부를 면담하고 격려했다. 최 신부는 자신이 맡고 있는 진안성당 부귀공소 노인들과 교종을 환영하는 '프란치스코 파파, 우리 사랑'이라는 동영상을 만들어 통역인 예수회 정제천 신부를 통해 교종에게 전달했는데 그 인연으로 교종을 만나게 된 것이다. 동영상은 교종이 부귀공소를 방문하고 신자들이 ‘프란치스코 파파, 우리 사랑’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환영한다는 내용으로 최 신부가 하얀 수단을 입고 얼굴 마스크를 쓰고 교종역을 연기한 것이다. 최 신부는 나에게도 이 동영상을 메일로 보내 주었다. 그는 동영상을 교종에게 보내면서 통역신부에게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은 농부다. 밀농사 짓는 농부가 없으면 성체를 축성할 수 없다. 포도농사 짓는 농부가 없으면 성혈도 축성할 수 없다. 공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하루 종일 고추 따고 밭에서 일하고 밤에 모여 연습했다. 교종께서 꼭 보셨으면 좋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동영상과 메일 내용을 본 교종은 정 신부를 통해 ‘깊이 동감합니다’라며 좋아하면서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한다고 전했다. 그런데 최 신부가 갑자기 교종을 면담한 것은 엉뚱하게도 스님 덕분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최 신부와 막역한 사이인 조계종 보련산 주지 지원 스님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낮은 곳으로 임하는 교종의 모습에 마음의 스승으로 삼고 꼭 뵙고 싶었다. 최 신부는 교종을 뵐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내가 동영상을 보고 통역인 정제천 신부의 연락처를 얻어 간절히 부탁하는 문자를 보냈다”고 밝혔다.
이날 최 신부는 얼굴 마스크를 쓰고 프란치스코 교종 앞에 나타났다. 교종은 "어어, 저 번 그 신부님"하면서 활짝 웃으며 최 신부를 반겼다. 최 신부는 이날 교종께 "너무 힘들어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교종님을 생각한다"고 말씀드렸다고 했다. 또한 최 신부가 교종에게 책과 CD를 선물하자 교종은 "나는 내 얼굴을 당신에게 선물했습니다"라고 받아넘겨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한바탕 웃었다고 한다. 사제의 신분으로 지난 6년동안 농업현장에 몸으로 뛰어든 최 신부의 고생이 교종의 격려로 단번에 위로받은 셈이다. 이에 앞서 지난 5월에는 내가 추자도에서 인연맺은 배상권 전교회장이 생태마을에 합류해 최 신부의 일손을 덜어주기 시작했다. 배 회장은 4월 중순 내가 한국에 있을 때 앞으로 여생을 최 신부의 '만나생태마을'에서 함께 살기로 결정했다고 알려 왔다. 나는 이미 생태마을을 방문했던 뒤라 무조건 잘된 결정이라고 격려했다. 나는 최 신부와 진안 터미날에서 포옹으로 작별했다. 나는 그가 참으로 사제로서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 교회 안에 머물지 말고 거리로 뛰쳐나가 낮은 곳으로 임하라"고 하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평소 안일하게 생활하는 나를 비롯한 많은 신앙인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이 시대의 강한 죽비가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생태마을은 도시사람들이 식구들과 하루이틀 유숙하면서 봉사하기에 적당한 장소다. 또한 신선한 무공해 블루베리 등 농산물을 전화로 주문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조그만 관심이 착한 삶을 사는 사제에게는 큰 격려가 될 수 있으리라. 010-4614-4245 최종수 신부.
(2014.9.20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