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지"를 통하여 재경총동문회 임병준회장께서 개교 70주년을 맞은 모교의 역사를 되짚어 본 내용으로 저희 동문들의 자랑스럽고 훌륭한 면면을 다시 한번 돌아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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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 70년을 돌아보며
재경총동문회장(21회)
경영학박사 임 병 준
한국과 일본 정부는 올해를 “한일우정의 해”로 정하였다. 가장 가까운 이웃임에도 얼마나 많은 반목과 배반이 있었기에 이런 해를 만든 것일까? 일본 시네마현이 “다께시마(독도)의 날”을 선포한 것만 보아도 두 나라 사이의 갈등과 불신의 골을 짐작케 한다. 과연 일본은 무슨 저의로 우리나라의 주권을 침해하는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그들은 집요하면서도 계획성 있는 주권침탈야욕을 실천하는 나라였기에 우리의 우려는 크다. 오늘날 우리나라 국민의 교육수준이 높아졌고 선진국대열에 들어섰다고 선언하며 OECD회원들과 산책을 즐기는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도 일본의 속심을 아직도 잘 모르고 있으니 답답하고 한심한 일이다.
일본이 1905년 슬그머니 독도를 다께시마라고 부르며 자기 지도에 그려 넣으면서 우리나라 침략을 시작했다. 당시 우리국민은 대다수가 문맹이었고 식자라 해도 수십 년간의 쇄국정책으로 국제사회에 관해 무지한 상태였다. 일본은 우리 보다 조금 앞서 서구 열강과 교류하고 개화되었기에 우리나라의 주권을 빼앗는 수순을 교묘히 밟을 수 있었으리라. 이렇게 우리 주권을 빼앗은 일본이 36년간 이 나라를 통치하면서 우리글과 말도 못 쓰게 하고 역사를 말살하는 등 민족정신마저도 뿌리뽑으려했던 것이다.
그 암울했던 시기에 우리 국민들이 더 많이 공부하고 빨리 깨우치지 않으면 영원히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선각자들이 있었다. 그들 애국계몽운동가 중에 김원근, 김영근 형제는 1920년대부터 청주에서 젊은이들이 학업을 연마할 수 있도록 학교를 세우고자 동분서주하였다. 우민정책으로 일관하던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학교인가를 받아내기란 매우 어려웠고, 또 소요자금의 마련에 어려움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처럼 집요한 노력은 결실을 맺어, 1935년에 드디어 육영법인의 출범과 청주상업학교의 개교를 이루어냈다.
처음 입학한 학생은 50명에 불과했던 조그만 학교였으나 일제 치하에서 그 어린 싹들을 나라의 간성으로 양성하기 위하여 일본 사람을 교장선생으로 영입하기도 하면서 차원 높은 교육을 추구하였다. 당시 상황에서는 학생들이 불굴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강건한 체력을 연마하면서 폭넓고 깊은 지식을 습득성이 무엇보다 시급하였다. 이런 다목적 교육의 결과 동경에서 열린 훈련교육시합에서 우승하기도 하면서 체육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곤 하였다. 이때의 졸업생 가운데 송재만(3회)은 학교의 응원가를 작사 작곡함으로써 모든 학생들이 오늘날까지 애창하고 있고 단결과 협동정신의 상징이 되어왔다. 한운사(3회)는 문인으로 대성하여 수많은 글을 써서 국민정신을 드높이는 한편 “잘 살아보세”를 작사하여 새마을 정신을 일으킨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1945년 광복 이후 1950년 한국전쟁 전후의 암울했던 시기에도 계속 학생수를 늘리는 한편 새 나라의 방향설정과 국토방위에 부심하였다. 당시 학생가운데는 좌익계도 있었지만 졸업생 가운데 우리 국군에 투신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특히 육장균(5회) 육군소장, 이동용(8회) 해군중장과 윤종화(12회) 육군소장 등 많은 장성도 배출되었다.
상업이 발전하기 시작한 1950년 중반부터는 국가사회 및 경제계의 주역 등을 배출하고자 학생들의 특기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처음에는 가난으로 대학진학이 불가능하였던 학생들이 많아 실업계학교의 역할이 매우 컸으므로 사회진출을 원하는 학생들의 실업교육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대학진학을 원하는 학생들에게도 선별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다. 본교 졸업생으로서 모교에서 봉직한 선생들을 중심으로 특히 정열적으로 학생교육과 훈육에 앞장섰는데, 이범로(1회)와 박완순(6회) 등은 그 후 모교 교장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이때 사회진출 희망학생들을 위하여 이창원(3회) 등 많은 선생들이 주산연습과 상업부기 등 실업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그 결과 수많은 졸업생(많은 때는 연간 4-50명)이 은행에 취업되어 1960-80년대 우리나라 고도경제성장을 지원하는 금융인으로써 활동하였다. 그 가운데 고위직에서 금융계의 발전을 주도한 사람이 많았으며, 황창익(7회), 이관영(13회) 및 곽완영(14회)은 은행장에까지 올랐고, 송석우(18회)는 현재 농협중앙회 축산경제 대표이사로 재직 중에 있다.
실업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은 각종 기업에 취업하여 전문경영인의 수업을 하는가 하면 직접 기업을 설립하여 경영하는 사람이 많았다. 현재 기업을 대표이사 재직하는 사람으로는 이병순(16회)이 (주)현대식모를, 이종성(19회)이 (주)한국원유를, 박희순(21회)이 (주)티멕스소프트를, 정봉규(25회)가 (주)지엔텍을, 백동기(26회)가 (2회)나우테크를 경영하는 등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또한 공인회계사나 세무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졸업생도 많다.
비슷한 시기에 미술계의 거목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국전초대작가가 된 박로수(7회)와 윤형근(7회)이 여러 미술전에서 수상하드니, 김봉구(18회), 정해일(20회), 박영대(20회) 등이 이 전통을 이어받는 등 수많은 졸업생이 미술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는 김종현(1회)선생이 미술선생으로 재직하면서 기초를 튼튼히 한데 기인한 때문이리라.
운동으로서는 1950년대 이래 축구가 모교의 전통적인 운동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김흥우(12회), 조성달(14회) 등이 국가대표를 역임하는 등 축구를 사랑하는 전통이 계속 이어졌다. 축구 외에도 기계체조 및 탁구 등에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에게 특별교육을 실시하였다. 등산의 경우 이원근(제16회) 선생의 지도를 받았던 고상돈(27회)이 1977년에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우리나라 최초로 등정함으로써 일약 영웅이 되었고, 대한 건아도 세계정상을 정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공직사회에도 많은 졸업생이 진출하였는데,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부장판사를 역임한 변종춘(32회)과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하여 법제처 국장(이사관)에 재직중인 홍두표(33회) 등 많은 졸업생이 행정고등고시, 사법고시 또는 보통고시 등을 통하여 공직에 진출하였다. 유성종(11회)은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공직에 진출하여 충청북도 교육감과 교육부 평가원장을 역임하였으며, 그밖에 교육계에서 봉직한 동문들이 많았고, 이관영(13회)은 건설부 차관을 역임하고 김영회(18회)는 충청북도 부지사를 역임하였다. 한편 현직에 재직중인 동문도 많은데, 충북부교육감을 역임한 후 경기도부교육감에 재직중인 유선규(27회)와 브라질대사에 재직중인 김광동(27회) 등이 더욱 크게 발전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우리나라는 부존자원이 부족하고 인구가 밀집한 결과 해마다 “보릿고개”를 경험하며 만성적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가난한 국가였다. 1950년대에는 미국을 위시한 우방들의 원조에 의지하여 연명하는 실정이었는데, 정부는 부정부패에 빠져있었고 정부는 정권연장에만 혈안이 되어 1960년에 조직적인 3.15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이에 정의감에 불타는 본교 학생들이 그해 4월18일에 궐기하였다. 이때 신광성(21회), 이세현(21회) 등 수많은 학생들이 3. 15 부정선거와 김주열 사망의 진상규명 등을 외치며 데모를 함으로써 거국적인 4. 19혁명의 불씨를 지피게 된 것이다. 필자도 이때 신광성, 이세현과 함께 구속수감되었다가 김창수 변호사의 무료변론에 힘입어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났지만 기소중지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근 3년간 기소상태에서 고심하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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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임회장님의 그동안 모교의 변천상황을 역사로 기록해 놓으신걸 고맙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