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시사 주간지 타임은 최신호(24일 발간)에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인터뷰를 싣고 '게임 끝'(Endgame)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엔드게임은 체스에서 '게임의 끝내기 국면'을 말한다. 타임의 젤렌스키 대통령 인터뷰는 전쟁 발발 후 이번이 3번째다. 인터뷰한 기자는 사이먼 슈스터다.
타임 최신호 표지/캡처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타임(지) 회견 내용이 24일 공개됐다며 "이 잡지의 제목을 통해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추적할 수 있다"고 썼다.
타임이 첫 인터뷰를 실은 것은 전쟁 발발 후 두어달이 지난 뒤인 2022년 5월. 러시아의 공격에 맞선 젤렌스키 대통령의 리더십을 극찬하는 기사로 눈길을 끌었다. 1년 6개월 후인 2023년 11월에는 대통령 주변 측근들도 1991년 국경(구 소련 붕괴 당시 국경)내 우크라이나 영토를 모두 탈환하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을 이미 믿지는 못하고 있다는 기사를 표지로 올렸다. 스트라나.ua는 "이 기사는 당시 우크라이나 안팎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했다.
타임의 첫번째 젤렌스키 대통령 인터뷰 기사(위)와 두번째 기사의 표지/캡처
그리고 또 1년 5개월이 지난 시점에 슈스터 기자는 타임 최신호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이 제안한 전면 휴전에 동의하면서 1991년 영토 탈환이라는 목표를 끝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적었다. 기사는 "젤렌스키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열린 미국과의 고위급 회담에서)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에게 전제 조건 없이 휴전에 동의하라고 지시했다"며 "어떤 의미에서 이 결정은 그에게 또 다른 큰 후퇴였다"고 평가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 내내 미국에 안보 보장을, 러시아에 철군을 요구했지만, 거의 모두 거부됐다"는 이유에서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그는 이제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푸틴 대통령이 겉보기만큼 강하지 않다'는 점을 확신시키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고 스트라나.ua는 지적했다. 또 "그(푸틴 대통령)를 신뢰할 수 없으며, 워싱턴이 모스크바에게 너무 많은 양보를 하면,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팀이 약해 보일 것이라고 설득하는 일 정도로 생각하는 듯하다"고 했다.
주목을 끄는 대목은 미-우크라 정상간의 백악관 다툼에 대한 젤렌스키 대통령의 언급 부분이다. 타임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권투의 WBC, WBA, WBO 헤비급 통합 챔피언인 올렉산드르 우식의 챔피언 벨트와 고문 흔적이 뚜렷한 우크라이나 전쟁 포로들의 사진첩을 백악관으로 가져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그는 챔피언 벨트를 자리 바로 옆에 두었지만, 막상 브리핑이 시작되자 사진첩을 먼저 건넸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진첩을 여는 순간 얼굴이 '납빛'으로 변했다. 그는 사진첩을 넘기며 "무거운 내용"이라고 내밷었다.
미 백악관에서 말다툼을 벌이는 젤렌스키-트럼프 대통령/영상 캡처
미국 관리들은 "그 사진첩이 정상회담이 어긋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이 챔피언 벨트를 먼저 건네줬다면 회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타임은 "그 사진첩은 역효과를 냈다"며 "그 사진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그 군인들의 고통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고 비난을 받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고 썼다.
그러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내가 모든 것을 계획했다"며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인간적으로 다가가려고 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건넬 시간이 없었던 우식의 챔피언 벨트는 다른 선물들과 함께 미국 대통령의 전용 식당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우식은 "그것이 나의 챔피언 벨트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또 "미국 대통령의 측근들이 러시아의 선전 (문구)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며 "러시아가 미 백악관의 일부 인사들에게 보낸 신호는,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멈추고 싶어하지 않으며, 그들을 압박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러시아 쿠르스크주(州) 점령 우크라이나군이 현재 러시아군에게 포위당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대표적인 예를 들었다. 타임은 또 "미국 관리들은 푸틴 대통령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심지어는 미국의 정보기관이 그의 말과 안맞는 정보를 갖고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고 지적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과거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의 이야기'(프로파간다)를 퍼뜨린다고 불만을 제기한 적이 있다. 양측의 이같은 갈등이 끝내 백악관에서 충돌로 이어졌다고 스트라나.ua는 평가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집무실 옆 부속실에 걸린 사진들 앞에 포즈를 취한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스트라나.ua
타임은 이번 호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의 집무실 옆 부속실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 곳에는 침대와 그림 몇점이 걸려 있었다. 흑해에서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으로) 침몰하는 러시아 군함과 쿠르스크주를 점령한 우크라이나군, 불타는 크렘린 등이다. '불타는 크렘린'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라고 타임은 적었다. 그는 "이 그림들은 모두 전쟁 승리와 연관돼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