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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복음사가는 주님의 하루 일과를 보여 줍니다. 이 대목을 사람들은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마르 1,21-34)라고 이름 붙입니다. 주님의 하루 일과는 참으로 바쁘십니다. 먼저 회당에서 가르치시면서 더러운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시고,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시어, 그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시는 등, 하루 종일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그들을 무거운 죄에서 풀어 주시며 그들과 함께 지내십니다.
사람들은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질병은 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병든 이의 질병을 고쳐 주신다는 것은 그를 죄의 고통에서 해방시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에게 질병이 생기는 이유를 속 시원하게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인간의 질병을 신비에 속한다고까지 말합니다. 질병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 가운데 하나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주님께서는 병자들을 찾아다니시며 고쳐 주십니다. 아픈 이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기쁜 소식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그분을 따르는 우리 또한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아파하고 신음하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고, 또 매일을 기쁜 소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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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의학 지식을 앞세워 질병과 믿음을 무관한 것으로 여깁니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질병도 주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개입하시면 ‘못 고칠 병’은 없는 것이지요. 다만 그러한 청을 ‘감히’ 못 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낫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작심하시고 병자들을 대하신 것입니다. 이유는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시려는 데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질병도 주님께는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의 치유는 ‘그분의 다스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다스림’을 인정하면, 주님께서는 어떤 형태로든 개입하십니다. 그리하여 질병을 그분의 손길로 보게 합니다. 병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병이 사람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병을 이기게’ 되는 것이지요.
병을 친구라 생각하면 인생의 또 ‘다른 불가사의’와 우정을 맺는 것이 됩니다. 그 우정을 주님께서 주관하신다고 여기면 마음은 달라집니다. 질병을 은총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이미 ‘주님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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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치유의 기적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신 겁니다. 그리하여 무서운 질병도 주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고 따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질병은 신비에 속합니다. 병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조금씩은 병들어 있습니다. 질병도 ‘인간 본질’의 한 부분입니다.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의 건강만을 회복시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상처받은 마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병 때문에 부정적으로 바뀐 시각을 바로잡아 주신 것입니다. 치유 받은 사람 중에는 좌절이나 포기를 체험한 사람들도 많았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육체의 아픔만이 치유의 대상은 아닙니다. 몸은 멀쩡해도 마음과 정신이 황폐해진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의 개입이 절실합니다. 그분께서 치유해 주셔야 새로운 방향으로 삶이 전개될 수 있습니다. 병자들을 낫게 하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우리 곁에 살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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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우리는 의견이 엇갈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견이 맞는 사람들끼리 한패가 되어 파벌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의견은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평화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병자를 돌보아 주고 악의 세력을 쫓아내며, 바로 그 공동체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서로 취향이나 의견이 달라도, 한 분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세우는 사명 안에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양승국신부-
<사랑과 소유>
참으로 많은 사랑이 ‘깨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랑이 비극으로 끝납니다. 사랑이 향기로움으로, 아름다움으로, 풍성한 결실로 열매 맺지 못하고 참담하게 끝나고 마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사랑과 소유를 혼동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소유를 혼동합니다. 사랑에 대해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참 사랑은 상대방을 소유하기보다는 해방시켜주는 사랑입니다. 참 사랑은 상대방을 억압하기보다는 성장시켜주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기보다는 편하게 해주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을 속박하기보다는 해방시켜주는 사랑입니다.
사람은 본성상 얽매이기 싫어하는 존재입니다. 속박되고 싶지 않고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이렇게 근원적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인데,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마치 수족관에 들어있는 열대어처럼 생각합니다. 아니면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애완견처럼 여깁니다. 그러다보니 상대방은 마치 감옥에 갇혀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 결과는 깊은 상처요, 괴로움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군중의 태도도 비슷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기보다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바람 같으신 하느님, 좁디좁은 인간 세상에 묶어두기에는 너무나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오지 중의 오지 갈릴래아 지방에만 머물기에는 너무나 아까우신 인류 전체의 하느님이셨기에, 이런 말씀을 내려놓고 또 다른 길을 떠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죽음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율법으로 좁혀진 세계를 뛰어넘는 그분의 크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작디작은 사랑, 사랑도 아닌 사랑에 목숨 거는 바리사이들의 그릇된 신앙에 던진 도전장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따라 점점 성장해나가길 바랍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에 대해 가졌던 사랑에 대한 허상과 환영들을 깨트리길 요청합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것을 요청합니다. 상대방의 약함과 쓸쓸한 뒷모습, 실수와 허물 등등.
사랑이 쉽게 깨지는 또 다른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지나친 기대입니다. 그토록 목숨 걸고 예수님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 사람들, 목숨 걸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맹세했던 사람들이 소리 소문 없이 다들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잘 나가는 예수님의 모습만 보였습니다. 죽어가던 사람들도 순식간에 치유시키시는 ‘명의’ 예수님만 눈에 보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모든 것 내려놓고 십자가 길을 걸어야만 하는 순명의 예수님은 죽어도 보기가 싫었습니다. 마침내 원수들의 손에 넘어가 치욕의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고통의 예수님은 절대로 원치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이 무너질 때 우리는 또 다른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며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보다 한 차원 높은 사랑, 보다 영속적인 사랑을 추구하길 바랍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정
-정희완 신부-
예수님께서 당신 공생애 전체에 걸쳐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복음 선포 중심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에서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것으로 그 무게 중심이 옮겨 갔기 때문에,
또한 부활하신 주님과 하느님 나라의 동일시라는 신학적 논리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가 오랫동안 잊혀져 온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에 힘주어 선포하신 것은 분명 당신 자신에
대한 것도 아니며, 하느님 그 자체에 대한 것도 아니고, 오직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설교의 대부분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였고,
병자들을 고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신 그분의 행위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일종의 징표였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 나라를 향한 예수님의 모습은 열정
그 자체였습니다.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라는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조금은 허망한 이 세상에 구원이 있다면, 아마 그 구원의 모습은
신나는 열정의 모습일 거라는 상상을 가끔 합니다.
우리의 생은 때론 고요하고 정적인 모습으로 속 깊은 신비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무엇보다
환하고 밝은 그리고 기쁘고 열정적인 움직임들 안에서 보다 근원적인 속내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생을 보다 의미 있게 살아내기 위해서,
신앙의 열정이 더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는 아침부터 무척 바쁜 하루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묵상과 새벽 방송을 한 뒤에, 아침 운동을 했지요. 그리고 곧바로 신학교로 갔습니다. 신학교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눈 뒤, 신학생 면담을 했습니다. 점심 식사 후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그곳에 사시는 형제님과 대화를 나눠야만 했습니다. 한낮이 되어서야 강화도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교구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저의 일정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5시에는 30년 동안 교구에서 근무하셨던 형제님의 퇴임 미사가 있었거든요.
저녁 식사 후 저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매일 바쁘다면 정말로 못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떠올려졌습니다. 제가 바쁘다 바쁘다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의 바쁨보다 더 바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잠시도 쉬지 않고 우리 인간들을 지켜주시는 주님. 그런 주님이심을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하루 일상이 나옵니다. 먼저 회당에서 가르치시면서 힘이 되는 좋은 말씀들을 건네주시지요.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더러운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시며, 베드로의 장모처럼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 역시 치유해주십니다. 이렇게 하루 종일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시지요. 그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날이 어두워졌다고 “이제 영업 끝났으니 모두 돌아가십시오.”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날이 샐 때까지도 그들의 아픔을 함께 하면서 상처를 치유해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이렇게 말하지요.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날이 샐 때까지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기에 이제는 푹 쉬셔도 그 누구도 아무 말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른 회당으로 이동하셔서 그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바쁨을 생각하니 저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쁜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또한 쉬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저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면 우리 역시 어렵고 힘들어하는 이웃과 함께 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바쁜 삶을 보내야 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 세상에 파견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일을 이어 받아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내 안에서 완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한 가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어떤 분께서 제가 있는 성소국으로 간편하게 뜨거운 물만 부어 먹을 수 있는 ‘쌀국수’ 1박스를 보내주셨습니다. 사실 어제 강화에 다녀온 뒤, 너무나 배고팠기에 쌀국수가 너무나 예뻐 보였습니다. 정말로 맛있게 먹었습니다. 직접 감사의 인사를 전화로 드려야 하는데, 전화번호가 적혀 있지 않아서 이 지면을 통해 인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무리 하잘것없는 인생이라도 거기에는 우리가 모르는 이유와 가치가 있는 법이다(미치 앨봄).
본격 행보
-김찬선신부 –
본격 행보.
어제와 오늘의 루카복음은
주님께서 이제 본격적으로 행보를 시작하심을 소개하며
소위 말하는 “가파르나움의 하루”를 소개합니다.
가르치심,
병자치유,
악령퇴치.
이것이 주님이 하루에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공생활 내내 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루카복음은 이런 일을 하실 때 주님의 모습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모습은 권위를 가지고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부인에게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예수께서는 꾸짖으시며 악령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인자하심이 드러나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께는 단호하고 엄한 아버지의 모습과
부드럽고 따듯한 어머니의 모습이 같이 있습니다.
악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엄하시지만
고통에 대해서는 부드럽고 따듯하신 것이고
두 모습이지만 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 사랑의 두 모습입니다.
사람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없이 단호하시지만
그로 인한 사람의 고통에는 더 할 수 없이 인자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런 두 가지 태도를 자유로이 취하실 수 있는 주님이 부럽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틀림없이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사심이 없는 사랑과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사랑이 이렇게 하게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엄함과 인자함에서 자유로운 주님은
이제 머묾과 떠남에서도 자유로움을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시몬의 장모를 비롯해서 병자들에게 가까이 가시고
옆에 계셔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엄마 손은 약손”처럼 손을 얹어 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인자하심이 넘치시기에 그렇게 엄하심에도
사람들은 주님을 떠나지 말라고 붙잡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기 스스로 있을 곳을 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기가 좋으면 더 있고 싫으면 떠나고,
누가 붙잡으며 더 있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는,
그런 자기중심적이고 인간 정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입니다.
파견되는 대로 가시는 분이십니다.
저도 이런 것을 흉내는 내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어디에 있겠다,
이제 그만 하고 떠나겠다고 제 의견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늘 관구장님이 가라는 대로 가고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면 군소리 없이 가고 가는 곳마다 열심히 했지만
속으로 보면 떠남의 미련 같은 것이 늘 있었습니다.
새로 가는 곳의 싫음은 없었지만 떠남의 미련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그래도 따듯해졌지만
전에는 떠나고 나면 아주 매정하게 딱 끊어버렸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붙잡는 손길을 뿌리치실 때 주님은 어떠하셨을지 궁금합니다.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펜실베이니아로 가는 중앙 보도에 층계가 있다고 합니다. 이 층계는 실력과 성실성이 널리 알려진 ‘옴스테드’라는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한 것이라는데, 글쎄 이상하게도 그 층계에서 넘어지는 사람이 유난히 많은 것입니다.
한번은 그 층계에서 넘어져 부상한 한 시민이 그를 찾아가 강력히 항의했지요. 그러자 옴스테드가 말합니다.
“나는 그 층계를 건축하기 위하여 내 집에 나무층계를 만들어놓고 오르내리며 오랫동안 실험한 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하자가 있을 리 없습니다. 좀 조심해 걸으시지, 제 책임이 아니라니까요.”
옴스테드의 말에 부상당한 사람은 화가 치밀었으나 할 말이 없었지요. 수십 차례를 실험한 끝에 내린 결론이라니까요. 그런데 그 시민이 걸어가는 옴스테이를 살펴보니 조금 이상한 것입니다. 그는 다리에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즉, 옴스테이는 한쪽 다리가 다른쪽 다리보다 짧은 것입니다.
스스로 실험을 했지만, 모든 사람이 이러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따라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맞는 이 층계가 정상인 사람에게 맞을 리가 없을테고, 사람들이 계속 넘어져 부상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나의 판단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참으로 많이 만납니다. 물론 저 역시도 제 판단이 맞다고 박박 우길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되돌아보면 내 판단이 꼭 맞는 것은 아니구나 싶어요.
제가 신학생 때 좀 못살게 했던 후배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후배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들이 하는 유행을 다 따라하는 이 후배의 모습이 신학생으로써 맞지 않다고 생각을 했고, 많이 혼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후배의 따른 유행을 훗날에는 저도 똑같이 따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삐삐라고 불리던 호출기가 그랬고, 휴대전화가 그랬으며, 머리에 무쓰나 젤을 바르던 모습 역시 나중에는 저의 모습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내 판단이 옳다는 것. 그것처럼 어리석은 모습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도 이 어리석은 모습을 오늘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고을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십니다. 그러자 군중들은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군중들만의 판단이지요. 주님의 뜻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 전하는 것인데, 주님의 뜻을 자신의 뜻 아래에 놓으려는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고자 할 때 그래서 주님을 소유하려고 할 때, 주님의 뜻을 이 세상에 드러낼 수가 없게 됩니다. 나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보다 더 겸손한 모습으로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함께 일을 합시다.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께서는 많은 병자를
치유하시면서도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신앙생활이 기쁨 자체여야 합니다.
내가 기쁠 때 다른 이에게도 기쁨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은 먼저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 올바로 깨닫고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간혹 사람들은 어떤 신자가 잘못했을 경우 그 개인에게 잘못을
돌리기보다 종교 자체를 비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르지 못한
태도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내가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보아야 합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 뜻에 부합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올바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도인
것입니다. 주님께 기도합시다.
“우리의 나약함을 알고 계시는 주님, 부족한 저에게 당신을 전하기 전에
제가 먼저 올바로 당신만을 믿고 당신만을 바라보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를 허락하소서. 아멘.”
-이종진 신부-
필자는 주로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늘 이런저런 새로운 지식을 접하게 된다. 위대한 성현들의 지혜나 통찰을 배울 때마다 신선한 기쁨을 체험하는 것은 연구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갖는 특권일 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르는 대가도 있다. 지식이 쌓일수록 마음 한구석에서 어떤 부담감과 괴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은 곧 ‘아는 것’과 ‘실천적 삶’ 사이의 간극을 의식할 때 일어난다.
특히 신앙에 관한 지식을 접할 때는 더욱 그렇다. 아무리 하느님의 신비를 벗겨내는 심오한 지식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마음과 의지’로 그것이 가르치는 바를 ‘원하고 행하는’ 단계까지 나가지 못한다면 그 거룩한 지식은 결국 공허한 느낌으로 귀결될 뿐이다. 누구보다도 이 점을 깊이 통감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몸을 일으켜서 천국을 잡아채는데 우리는 마음이 없는 학문으로 살과 피의 진흙탕 안에서 뒹굴고 있구나.” 하고 말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앎은 가장 거룩한 지식에 속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귀들도 이런 지식을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한테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원하는 것을 함께 ‘원할’ 의사가 없다. 아니 그런 일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마치 어둠과 빛이 함께 섞일 수 없는 것처럼. 그러므로 마귀들의 고백은 ‘신앙고백’이 아니다. 신앙은 그 진리를 ‘아는’ 차원을 넘어 그것을 원하고 행하겠다는 ‘결단’까지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나의 신앙이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신앙이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결단을 유보하고 그저 아는 차원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리고 어둠의 세력 역시 빛과 자신을 구분할 줄 아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면, 양자 사이의 거리는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매우 위태로운 상태가 아닌가!
심고 물을 주는 일꾼들
-김찬선신부-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은
갈라티아 교회와 마찬가지로 많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들 중의 하나가 바로 공동체 안의 파벌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1년 6개월 간
코린토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시리아로 떠난 뒤
아폴로가 바오로 사도의 뒤를 이어
코린토 교회에서 복음을 선포하였는데
그만 바오로와 상관없이 파벌이 생긴 것입니다.
종종 본당이나 공동체에서 그런 일이 생깁니다.
본당 신부님이 갈리거나 회장이 바뀔 때
전임자와 친했던 사람과 후임자와 친한 사람들 사이에
전임자 때와 달라진 것 때문에 갈리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하느님은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을 믿었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고
적어도 공동체를 생각한다면 이럴 수 없는데
하느님도 공동체도 안중에 없고
오로지 내편이냐 아니냐만 중요합니다.
이런 코린토 신자들을 바오로 사도는
육적이고 속된 사람(Unspiritual person)이라고 강하게 질책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아폴로도 다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자신은 교회를 세웠으니 하느님께서 심는 일꾼으로 쓰신 것이고
아폴로는 다음에 와 교회를 돌봤으니
물주는 일꾼으로 쓰신 거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코린토를 당신의 텃밭과 건물로 삼으시고
하느님께서 자기와 아폴로를 일꾼으로 삼으셨는데
하느님이 아니 계시면 믿음도 교회도 다 헛것이고
하느님이 아니 쓰시면 자기들도 다 헛것이라고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하느님을 믿는다면서도
하느님이 완전히 빠져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을 경계합니다.
<독서> :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을 향하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
고린토의 교우들 가운데에는 복음의 씨앗을 뿌린 바울로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있었고, 그들의 신앙을 길러주며 교회를 부흥시킨 아폴로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각기 바울로나 아폴로를 추켜세우며 교회 내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살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고 교회 밖의 인간적인 사고방식에 얽매여 살았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서로 파벌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바울로 사도는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며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께 충실한 신앙인이 되기를 권고한다. 바울로와 아폴로는 서로 다른 과업을 맡았다. 바울로는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교회의 기초를 세웠고 아폴로는 교회를 이끌어 갔다. 두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달란트에 알맞은 방법으로 각기 하느님의 일을 했다. 이러한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업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사람이 어떠한 과업을 맡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성취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느님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주야를 단식하시면서 자신을 죽이셨고, 자신 안에 오직 하느님께서 계시기를 기도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고, 하느님의 일을 하셨다. 인간이 하느님과 하나 되는 길, 주님을 따르는 길은 자신을 버리는 것임을 강조하셨다.
그런데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 자신의 자존심, 꿈,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것을 버리면 죽는 것처럼 생각되어 버리지 못하고 꼭 움켜쥐고 산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가운데 맹인의 이야기가 있다.
어떤 맹인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미끄러졌는데 겨우 외나무다리를 붙잡았다. 그는 살기 위해 다리를 꼭 붙잡고 사람들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다 다리를 붙잡은 손을 놓으라고 말한다. 손을 놓으면 강물에 빠져 죽을 것 같은데도 손을 놓으라고 한다. 맹인은 사람들의 말을 믿고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힘이 빠져서 결국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는데, 떨어진 곳은 백사장이었다는 이야기다.
다리를 놓으면 죽는다는 생각과 믿음이 그로 하여금 힘이 빠질 때까지 다리를 붙들게 했던 것이다. 사람들의 말을 믿고 손을 놓았으면 훨씬 더 빨리 살 수 있었는데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붙잡고 있었기에 힘이 빠질 때까지 손을 놓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은 그처럼 자신을 놓지 못한다. 심지어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기보다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을 이용하고자 한다. 교회 안에 살면서 주님의 가르침을 받지만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한다. 자신을 버린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꼭 움켜쥐고 산다.
고린토 교회의 교우들은 바울로 파, 아폴로 파라고 하면서 각자가 바울로와 아폴로를 추켜세웠지만, 그 안에는 자기가 들어 있었다. 그들은 자기를 고집하고 내세웠던 것이다. 바울로와 아폴로가 전한 분이 주님이었지만, 그들은 주님을 바라보기보다 자신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그러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오직 하느님만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신앙인, 그는 달을 가리키는 사람의 손가락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달을 보는 사람이다. 사람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다. 자신을 내세우고 고집하고 움켜쥐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을 드러내고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예수님처럼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오늘 우리 모두 참된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하자. 이 것 아니면 죽는다고 움켜쥔 그 손을 펴고, 하느님께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하자.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하자..................◆
우리도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는 주님의 자녀가 됩시다.
-김성남 신부-
우리도 하느님 말씀에 탄복하고 경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는데, 마침 심한 열병을 앓고 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줍니다. 열이 내린 부인은 사람들의 시중을 듭니다. 예수님께서 방문하시기 전에도 시몬의 장모는 앓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명령 하시자 즉시 사라진 열병은 도대체 어떤 병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즉시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베드로의 이런 행위에는 베드로의 결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아픔과 고통도 동반해야 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사위 시몬 베드로의 행동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몬의 장모는 시몬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회피, 외면하고 가족을 돌보지 않는 미친 사람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시몬을 생각하면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을 것입니다.
이런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시몬 베드로는 의도적으로 스승이신 예수를 장모의 집에 초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께서 친히 장모에게 모든 사정을 설명해 주고 기쁜 소식을 가르쳐주면 가정불화가 없어지겠지, 그렇게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장모를 고쳐주는 치유 장면은 이례적으로 극히 짧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시몬의 장인도 그론 되지 않고, 시몬의 아내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환자와의 대화도 없고, 환자의 믿음을 확인 하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부인 곁에 서서 열이 떨어지라고 명령하시자 열이 내립니다. 부인은 열이 내리자 곧 예수의 일행을 위해 시중을 들고 봉사를 합니다. 여러 가지 세상일 집안일로 마음의 열병을 앓고 있던 장모는 치유를 받습니다.
그리고 아파 누워 있던 사람이 낫자마자 즉시 사람들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 받은 시몬의 장모는 혼자만을 위한 삶의 방식에서 타인을 위한 삶의 방식으로 삶의 방향을 바꿉니다. 그 전에는 자신만을 위해 존재 하는 삶의 방식을 살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난 후에는 타인을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제로 각자 자신들의 삶 안에 누리고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기만 하며 감탄만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말씀을 누리는 사람들은 아픔과 고통을 딛고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어려움에 동참하고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진정 예수님 말씀의 기쁨과 구원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일어나,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는 주님의 자녀가 됩시다. 아멘................◆
얼마 전, 아주 재미있는 영화 한 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래요.
여자 친구는 반드시 쭉쭉 빵빵 절세미녀야 한다는 생활신조를 가지고 살고 있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우연히 유명한 심리 상담사와 고장 난 승강기에 갇히게 되지요. 그리고 그 안에서 심리 상담사에 의해서 외모만 최고라고 생각을 바꾸는 특별한 최면요법을 받게 됩니다.
이 최면요법을 받은 뒤, 주인공의 앞에 늘씬한 몸매에 환상적인 금발 그리고 성격까지 천사와 같은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 여인도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그녀와의 데이트 시간은 항상 행복했지요. 하지만 이상한 일이 그녀에게 자주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녀가 엉덩이만 살짝 걸쳐도 앉은 의자가 다 박살나고, 아름다운 그녀의 속옷은 낙하산처럼 너무 큰 것이에요. 왜 그럴까요?
바로 최면요법을 받은 뒤, 외모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즉,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 역시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요즘 시대의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영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이 고아야지’라는 옛날 노래에서도 이런 가사가 나오지요.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점점 심해지는 외모지상주의 속에 빠져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자신의 몸에 칼을 대는 성형수술도 과감하게 행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한 번 해봅니다. 앞서 말씀드린 영화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외모를 바라보지 않고 사람의 내면을 바라보고서 아름다움을 평가한다면 그때에도 지금처럼 성형수술이 판을 칠까요?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성서에서 혹시 이런 내용을 보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너무나 멋지고 예쁜 여성만을 가까이 하셨다는 내용을 또는 너무나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서 뿅 갔다는 내용을……. 아마 한 번도 보신 적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셨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외적으로 너무나 힘들게 사는 사람들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질병으로 앓고 있는 사람이 외적으로 아름다워 보일까요? 그렇다면 마귀 들린 사람은 어떨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모를 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향한 마음을 보셨고, 그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제 내 마음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세요. 내 마음을 주님께 드러내기에 떳떳하십니까? 과연 주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서 “네 마음이 참 예쁘구나.”하면서 칭찬하실까요?
겉으로만 예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속마음도 예쁘고 아름답게 치장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쁜 짓 좀 합시다.
빠다킹신부
치유를 통한 은총
-최혜영 수녀-
오늘날 질병의 고통만큼 인간을 위협하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의기충천하다가도 덜컥 큰 병에 걸리고 나면 어깨가 축 쳐지고 한없이 무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에 안 걸리려고 온갖 좋다는 약은 어떻게든 구해서 먹으려 하고, 신약(新藥)을 개발하는 데 엄청난 돈이 투자되곤 합니다. 현대 의학이 과거의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 감기 바이러스도 퇴치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과거 불치병을 고칠 수 있는 신약이 많이 발명되었다고는 하지만, 예전에는 없던 병도 많이 생겨 인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를 비롯하여 많은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생명의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생명을 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질병의 치유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일뿐 하느님 자체는 아닙니다. 병을 통해 하느님이 우리의 전부이시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며 해방입니다. 우리가 치유의 은혜를 청해야겠지만,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넘어 하느님의 다스림을 맛볼 수 있는 은혜를 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앙은 순례의 여정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한만옥 신부-
◆예수께서는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낫게 해주셨다.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고쳐주시기를 청한다. 예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당신의 따스한 사랑의 손을 얹어 고쳐주셨다.
날이 새자 예수께서는 외딴 곳으로 가셨다. 아마 기도하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분은 자주 외딴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셨으니까.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시는 바로 그 기도 안에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소외된 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실 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병자를 낫게 하는 기적을 본 군중은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찾아가 자기들을 떠나지 말고 함께 계시기를 청한다. 그분이 함께 계시면 모든 병도 낫게 되고 여러 가지 기적을 통하여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청을 거절하신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복음서에서는 어느 한 곳에 안주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없다. 그분은 늘 떠나신다.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예루살렘 골고타 언덕에까지.
신앙은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순례하는 여정이다. 그래서 사제들도 이 본당에서 저 본당으로, 이 소임에서 저 소임으로 계속 이동하는 것이 아닐까?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양승국신부-
<하느님의 은총이 소낙비처럼>
여러분들께서 꿈꾸고 계시는 교회의 모습 어떤 것인지요? 아마도 신명나는 교회의 모습이겠지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밝아오고 기쁨에 젖어드는 교회의 모습, 언제든지 마음 놓고 찾아가 비빌 수 있는 든든한 언덕 같은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요?
공동체 구성원들 상호간의 일치와 친교, 가족적 만남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지는 모습, 약자와 병자들에 대한 배려와 치유가 활발히 전개되는 모습, 사목자들의 헌신적이고 겸손한 봉사에 신자들 모두가 행복해하는 모습, 지금 이 순간이 우리 교회가 너무나 만족스러워서, 이 순간이 영원이었으면 할 정도로 신명나는 교회의 모습...
오늘 복음에 제시되고 있는 장면이 그랬습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천상생활의 한 단면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풍성한 자비와 충만한 사랑에 힘입어 예수님께서는 활발한 치유활동을 전개하십니다. 관대하신 하느님의 은총이 소낙비처럼 죄인들 머리위로 쏟아져 내립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얼마나 관대한지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습니다. 다들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갖가지 질병에서 치유된 사람들은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행복에 겨운 백성들은 그 순간이 너무나 은혜로워, ‘지금 이 상태에서 세상이 멈췄으면’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행복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 다른 마을로 떠나시자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제발 자신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세상 끝날 까지 자신들 곁에 머물러주시라고.
오늘 설정된 복음 장면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 한번만 주어진 이 소중한 우리의 생애, 사실 이렇게 살아야 되는데, 아쉽고도 아까운 우리의 나날들, 그렇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 신명나게 살아가야 하는데...
그러나 발밑을 내려다보니 씁쓸하기 그지없습니다.
삶은 어찌 그리도 혹독한지, 우리의 인생은 어찌 그리도 팍팍한지...
부족하기에, 아쉽기에, 허탈하기에, 다시금 청해봅니다.
신명나는 공동체 건설을 위해, 살맛나고 재미있는 공동체 건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봅니다.
- 임성환 신부-
오늘 복음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소문이 나돌았을까요?
‘예수라는 사람이 있는데 참으로 신통방통한 기술을 가지고 있더라. 그 사람이 손만 얹으면 어떤 환자들도 다 낫더라. 그러고도 돈을 요구하지 않더라. 와~’
이런 소문이 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갖가지 질병을 앓는 사람들은 온통 예수님께로 모이게 되었고 예수님은 소문 대로 손을 얹으시고 사람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신통방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마을에서 함께 살자고 붙들었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시고 다른 마을로 떠나십니다.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병을 낫게하는 굉장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을뿐 예수님 그분의 참 모습을 알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받았던 세례의 그 때를 기억하게 해줍니다.
세례 예식의 첫부분은 사제의 3가지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교회에 무엇을 청합니까?”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이렇게 2가지의 질문이 끝나고 나면 사제는 세 번째의 질문을 하게 되는데, 이 질문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설명과 함께 세례받을 사람들의 결심을 묻는 내용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참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원천이 되게 하셨습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이 세례성사를 청하면서도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그분의 제자가 되겠다는 결의를 가지지 못했다면 영원한 생명을 청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미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형제 자매들과 함께 친교를 나누며 기도에 참여하고 착실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약속합니까?” “예,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곧 아버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계속해서 알아가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하는 동안 세례를 받을 예비신자들은 굉장히 가슴이 벅차 올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버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도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예수님이,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계속해서 알아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일치의 중심
-이수철신부-
십인십색(十人十色)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저마다 달라 가지각색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어쩌다 외출하다보면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새삼 확인하는 진리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공동체 일치의 어려움을 나타내는 극명한 상징입니다.
마음, 생각, 나이, 취향, 기질, 체력, 재능, 지방
무엇 하나 똑같은 것 없는 유일한 개인들입니다.
이래서 다양성 안의 일치를 주장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다르다는 사실 안에 이미 분열의 씨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가장 어려운 게 분열일 것입니다.
내적으로 마음 갈릴 때,
공동체가 분열로 조각 날 때 그 소진되는 에너지는 참으로 막대합니다.
그래서 분열을 조장하는 것을 큰 죄로 취급합니다.
일치의 중심인 하느님을 잊어
육적인 사람들이, 속된 사람들이 될 때 분열은 자연스런 과정입니다.
시기와 싸움으로 갈라진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 대한 바오로의 질책에서
이런 진리가 잘 드러납니다.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농사짓는 누구에게 수긍이 가는 진리입니다.
바오로처럼 하느님 중심의 통합적 시야의 안목을 지닐 때
비로소 다양성 안의 일치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작은 한 부분을 책임 맡은
평등한 동료이자 형제요, 하느님의 협력자라는 겸손의 자각이 있어
공동체의 일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분주한 치유활동과 구마활동도
바로 내적일치의 중심인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 된 삶이였기에 가능했음을 봅니다.
아니 예수님의 전 활동이 하느님과의 내적일치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 되어 갈림 없는 마음일 때
바로 그 사람은 하느님 능력의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붙잡아 두려는 군중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적일치의 중심인 하느님 나라가 잘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바로 예수님의 정체성의 핵(核)이자
예수님의 삶의 통합을 이룬 내적 중심임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모두가 바라보는 하나의 비전이자 일치의 중심인 하느님이 계실 때
비로소 내적일치요 공동체의 일치입니다.
이래서 공동미사와 공동기도가 절대적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새삼 분도회의 모토가 빛을 발합니다.
영원한 삶의 진리입니다.
기도 없이 일만 하다가는 개인이든 공동체든 곧 내적 분열로 망합니다.
하느님의 성전 안에서 하느님을 상징하는 제대를 중심으로 모여
끊임없이 회개하고 서로 용서하며
하느님 중심을 확인할 때 비로소 공동체의 일치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성격이, 취향이 같아서 일치가 아니라
바라보는 하느님 방향이 같아야 일치입니다.
하느님께 찬미 기도를 바치기 위해 모이지만,
나도 살고 공동체도 살기위해 모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루 일곱 번 공동기도를 바친다는 그자체가
공동체의 일치가 얼마나 중요하고도 어려운지를 나타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공동체 일치의 비전이자 중심인 주님을 바라보고 확인하면서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시므로
자신의 내적일치와 공동체의 일치를 굳건히 하는 시간입니다.
아멘.
고통과 시련이 전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단 한 명도 고통과 시련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는 어린 꼬마들도 힘들다고 이야기를 하고, 그 조그마한 입에서 ‘힘들어 죽겠다!’고 한탄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 제가 기억하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 현재까지의 삶 가운데에는 좋은 일만 있지 않았습니다.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힘든 일도 있었고, 이 시간이 제발 휙 지나가게 해달라고 눈물 흘리며 주님께 매달리면서 이렇게 기도했지요.
“주님, 이 고통과 시련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당신의 뜻에 맞게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바치고, 나쁜 짓 하지 않고 착하게 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런 일이 생각납니다. 신학생 때 한 가지 잘못을 했고, 이 일을 교수 신부님께 지적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당시 신학교에서는 그 문제가 민감한 문제였고 성소를 잃을 위험도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신부가 되고 싶었던 저는 매일 성체조배실에 들어가서 열심히 기도했지요.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딱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정말로 열심히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멋진 사제가 되어서 당신의 일꾼이 되겠습니다.”
그때 쫓겨나지도 않고 이렇게 신부가 된 것을 보면 분명히 주님께서는 저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일꾼으로 열심히 살지 못하는 제 자신을 보기 때문이지요. 저는 제가 필요할 때만 주님을 불렀고, 그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에는 주님과 멀리하면서 제 일 하기에만 바빴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에 진심으로 감사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내가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았다면 당연히 주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시몬 베드로의 장모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몬의 장모는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지요. 사람들은 예수님께 청해서 장모가 낫게 됩니다. 그리고 장모는 열이 가시자마자 즉시 일어나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지요.
자기가 받은 은혜에 대해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순간의 위기만 극복되면 나 몰라라 사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주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시몬의 장모는 자신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청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내 기도의 응답을 받았어도 곧바로 주님을 외면했던 우리들은 아니었을까요?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어떤 고통과 시련도 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자유인이라고 볼 수 없다.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에픽테투스)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 김석인 신부-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는 예수님의 행적은 특별한 상황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어릴적에 하루를 마무리를 할 때쯤이면 동네 비석거리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이런저런 소식을 전하고, 길흉사가 있을 때면 모두들 그리로 모여들어 이야기꽃을 피우던 동네 어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서 열병을 앓는 장모를 고쳐주셨으니 아픔을 안고 있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는 예수님을 보고 아무도 그가 떠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침 일찍 외딴곳으로 가서 아버지와 친교를 이루신다. 예수님의 모든 능력이 아버지한테서 나오고 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항상 하셨으니 아버지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참으로 중요했을 것이다. 이 시간에 와서 그 동네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하며, 그 일을 위해서 오셨다고 말이다.
복잡하고 바쁜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이 복음은 과연 무엇을 전하려 하는 것일까? 난 예수님이 아니기에 그러한 기적을 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분명 성령의 역사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 곁을 지나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그의 얘기를 귀담아들어 줄 수 있다. 아니면 말없이 그와 함께 있어 줄 수 있다. 이것을 내 일상 안에서 시도해 볼 수 있다. 함께 사는 가족에게, 직장 동료에게, 학교의 모든 동료에게, 길을 가다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던지는 등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순간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순간마다 “예수님, 당신을 위해서입니다!”라고 하면서 항상, 즉시, 기쁘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복음 선포이며 하늘나라를 전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간다는 것은,
-김찬선신부-
공생활 초기 예수님은 인기가 좋습니다.
초창기에는 예수님도 Populism을 잘 활용하셨던 것일까요?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시고
사람들에게서 악령들을 몰아내주시니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도 치유 은사와 구마의 은사를 받은 사람 주변에
사람이 얼마나 많이 몰립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요즘의 은사 받은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설교나 강의를 잘 하여 인기를 끌면
그 인기를 누리고 유지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떠나십니다.
이것은 박수칠 때 떠난다는 그런 뜻도 아니고
떠나면 사람들이 더 열렬하고 극성스럽게 따르게 된다는
그런 전술적인 이유도 아닙니다.
한 마디로 인기 관리 차원에서 떠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과거의 인연이나 사랑에 머물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훨씬 추상과 같이 떠났습니다.
예를 들어 짧은 본당 사목이었지만
떠난 다음에는 다시 찾아가지 않고
연락이 오기 전에는 제가 아무 연락을 취하지 않는 그런 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은 추억을 버리고 떠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분들의 호의와 사랑을 매정히 끊는 것도 죄송하고
어떤 때는 마음 아프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저의 경우에는 그 사랑에 안주할까봐
그래서 순례자와 나그네의 삶을 살지 못할까봐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왜 떠나셨을까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악령을 쫓아내신 다음 날
외딴 곳으로 가시자 사람들은 그곳까지 찾아 와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붙잡을 때
예수님도 뿌리치기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떠나십니다.
그러시면서 앞으로 당신의 삶이 어떤 삶일지 천명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파견되어 가는 삶임을 천명하십니다.
그런데 간다는 것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떠나가는 것입니다.
떠나지 않고는 갈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떠나는 것은 또 어떤 식으로든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인기와 인정에 머물지 않을 뿐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는 인간의 사랑을 포기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다는 것은 떠나가는 것 뿐 아니라
그 자체로 향해 감, 즉 목적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목적지가 없다면 방황이겠지요.
방황이 아닌 이상 목적지는 반드시 있는데
예수님의 목적지는 궁극적으로는 아버지가 계신 하느님 나라요,
우선은 옆 고을입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
이것이 당신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처럼
하느님 사랑과 더 많은 사랑을 위해 떠나는 삶이길 기도합니다.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상지종신부-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가지 마세요...
매달리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환한 웃음 지어주며
고마웠습니다...
당신의 사랑 잊지 않을께요...
다른 이들에게도 주님 사랑 나누어야지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기쁘게 내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꾸 자꾸 뒤를 돌아보는 떠나는 이에게
당신 발걸음마다 주님 축복 가득하시기를...
지치고 외로울 때 나와 함께 했던 시간 기억하시면서 힘을 내세요...
힘과 용기를 주며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속 따뜻한 자리
언제나 그 안에 머물고픈 마음 간절하지만
주님께서 머무셔야 할 자리 주님께 내어드리고
주님 손길 필요한 누군가 마음의 자리를 찾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픈 마음 간절하지만
부르심 받아 떠나는 길에 행여 마음 무거울까
안녕히 가시라고 웃음 머금은 인사 나누며 떠나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를 애뜻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아름다움이
주님을 향한 서로의 눈빛안에 언제나 가득할 것이기에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에게 주어질 새로운 사랑의 만남을 축하하며
환한 낯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헤어짐은 또 다른 작은 만남으로 이어지고
헤어짐과 만남이 모이고 모여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를 이어주며 모두가 우리가 될 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울려퍼질테니까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맨홀 속 아이들>
-양승국신부-
오늘은 제가 무척 존경하는 선배 신부님, 보다 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한국에서의 안정된 기반, 소중한 인연들을 뒤로하고 훌훌 몽골로 떠나신 선교사 신부님으로부터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심신은 비록 고달프지만 가장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해 손수 집도 지으시고, 가끔씩 아이들을 위해 팝콘도 튀기시는 신부님, 이 세상 어딜 가도 마땅히 머리 눕힐 곳조차 없어 맨홀 안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을 찾아다니시는 신부님의 행복해하는 모습이 편지를 통해서 손에 잡힐 듯 했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계시는 선배님의 삶이 오늘 따라 더욱 부럽습니다.
"양신부님, 오는 10월 6일 대림동 수도원에서 있을 축제-바자회를 저희 몽골을 돕기 위해 개최한다니 감사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래저래 저를 움직이시고 작용하시는 듯 싶습니다.
제가 이곳 길거리 아이들을 위해 몽골에 도착한지 어언 1년, 이제야 하느님께서 저를 이곳에 보내신 뜻을 깨달아 갑니다.
짙은 어둠과 습기로 가득 찬 지하에서도 이곳 몽골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촛불을 밝힙니다.
저는 지금 당장 맨홀에 사는 아이들을 위한 게르(몽골집)를 뜯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할 판입니다. 내년 4월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은가 봅니다.
밤잠도 못 이루고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좋은 소식을 보내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래저래 하느님께서는 몽골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아이들과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몽골의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제 어린 시절 친구들의 얼굴을 보는 듯 합니다. 어찌 그리도 꼭 60년대 우리들 모습과 비슷한지 모릅니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때묻지 않고 살아가는 이곳 몽골의 <맨홀 속 아이들>을 지상으로 끌어 올려 주고 싶습니다. 맨홀에서 건져낸 아이들과 함께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호기심으로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몽골 아이들에 둘러싸여 진지한 모습으로 설탕을 녹여 소다를 살짝 쳐 젓는 모습, 조심스레 철판 위에 붇고 별 모양의 틀을 찍는 선배 신부님의 모습이 얼마나 기뻐 보이던지...
진정한 복음은 우리 마음속에 고이 간직된 복음, 우리끼리만 열심히 읽고 공부하는 복음, 우리 민족만의 복음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복음은 점점 보다 큰 동심원을 그리며 세상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는 복음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도 지구 반대편, 세상 끝 오지에서 비록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결과가 뚜렷하지 않지만 꾸준히 복음선포에 매진하는 모든 선교사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강영구신부-
+악마들도 여러 사람에게서 떠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외쳤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시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대에게
태양은 ‘나는 태양이다!’하고 소리치지 않습니다.
대지(大地) 위에 묵묵히 밝고 따뜻한 햇볕을 비추어주기만 합니다.
동녘에 태양이 솟아오르면 어둠이 물러가고 새벽의 여명(黎明)이 찾아옵니다.
깊은 잠에 빠졌던 만물이 기지개를 켜고 새 삶을 시작합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는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건강한 것과 병든 것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길이 있어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솟아오르고 어둠이 물러가면 모든 것은 드러나게 됩니다.
때 묻고 더러운 것, 병들고 상처 난 것,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있는 그대로 모습이 드러나고, 가야 할 길도 보입니다.
태양의 밝음과 따뜻함으로 만물은 생명을 누리고 제 갈 길을 찾아갑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는 태양입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뇌에 쌓인 중생(衆生)들은 예수를 만나서 새 삶을 얻습니다.
태양이 솟아오르면 어둠이 물러가듯 예수의 발길이 닿는 곳에 어둠의 세력인 악마도 물러갑니다.
만물이 따가운 가을 햇살을 즐기듯,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
-박상대 신부 -
세례와 광야유혹 이후, 어느 안식일에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자기 공생활(公生活)의 목적과 방향을 논리적으로 선포하신 예수께서는 또 다시 안식일에 가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첫 공생활의 행적으로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셨다. 회당을 나선 예수께서 오늘은 (아직 제자로 불림을 받지 않은) 시몬의 집으로 가셔서 열병을 앓고 있던 시몬의 장모뿐 아니라, 해질녘에 사람들이 데려온 수많은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신다.
오늘 복음을 어제 복음에 연결시켜 살펴보면 구마기적과 병자치유는 모두 같은 날, 바로 안식일에 이루어진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4,31-41) 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다. 아직은 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분명히 이 ‘일’을 두고 트집을 잡을 것이다.(6,2.7)
앞으로도 자주 접하게 될 예수님의 구마기적사화나 병자치유사화는 그 서술상 일관된 구조를 보이고 있는 바, ① 마귀와 병자의 고백 및 상황묘사, ② 예수님의 기적적 구마 및 치유, ③ 구마 및 치유 실증(實證), ④ 당사자와 목격자의 증언과 반응 등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우리는 마귀 들린 사람과 질병으로 앓는 사람을 분명히 구별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갖가지 질병은 물론 천재지변까지도 마귀(악)의 다양한 작업이라 보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향하여 마치 ‘구마예식’을 행하시듯이 ‘열이 떨어져라.’(39절)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치유의 은혜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곧 이웃에 대한 ‘봉사’로 이어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는 마지막 날까지 연일 계속될 그분의 일상을 보여준다.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구마와 병자치유가 예수님 일상의 스케줄인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는 어디론가 따로 가셨다고 한다. 바로 ‘한적한 곳’으로 가신 것이다.(42절) 왜 그곳으로 가셨을까? 이 부분에 대하여 오늘 복음의 언급은 없지만 그분은 기도를 하시기 위하여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신 것이다.(6,16 참조)
기도(祈禱)는 루가가 특별히 선호하는 복음의 테마이다. 루가는 공관복음 작가 가운데 기도에 관한 말씀과 이야기를 가장 많이 수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친히 기도하셨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셨고, 끊임없이 기도하기를 권장하셨다. 많은 부분이 루가의 고유사료이다. 그러나 루가는 신자들의 믿음을 보존하고(22,32), 유혹을 이기며(22,40.46), 장차 재림하실 인자를 맞이하는(21,36) 방법으로 늘 기도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가르침을 받고 치유와 구마기적의 은혜를 입은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늘 그들 곁에 두려고 붙잡았다.(42절) 그러나 예수님은 마냥 그들 곁에 머무를 수 없으시다. 세상의 만백성을 위한 자신의 길을 가셔야 한다. 이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원하시는 길이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속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께만 속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입은 은혜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람이신 것이다. 오늘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를 묵상하면서 나의 하루는 과연 어떤지 생각해 본다......◆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루가 4,38-44)
-유광수 신부-
시몬의 장모가 앓고 있는 열병이 무슨 병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감기 몸살이나 말라리아 등으로 인한 육체적인 열병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열병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병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앓고 있는 열병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배반당했을 때, 부부 싸움을 하였을 때,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했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화가 났을 때, 또는 질투심이나 이기심 등 여러 가지 이유로도 열병을 앓을 수가 있다.
아마도 우리는 육체적인 병 때문이 아니라 정신적인 이유로 열병을 앓을 때가 더 많은 지도 모른다. 복음을 보면 제자들도 심하게 열병을 앓고 있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를 하신 후 제자들이 길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툰 일이 있다(마르 9, 33).
제자들이 높은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는 것은 자기들 안에 부글 부글 끓고 있는 열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고 하시면서 그들이 앓고 있는 열병에서 치료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시몬의 장모는 자기 집에 온 손님이 왔는 데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열병 때문에 누워 있어야 했다.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는 사랑해야할 인간이 사랑하지 못하고, 봉사해야할 인간이 봉사를 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 가정과 사회, 공동체, 교회가 앓고 있는 열병은 무엇인가? 내가 앓고 있는 열병은 무엇인가? 어떤 열병이든 열병을 앓고 있는 이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한다.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만사가 귀찮아진다. 그래서 자리에 눕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악이다. 악은 사람을 점점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만든다.
열병은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 즉 나로 하여금 아니면 공동체가 아니면 가정이 열병을 앓고 있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어렸을 때 받았던 상처 때문에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열병을 앓을 수도 있다.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열병을 앓을 수도 있다.
공동체적으로 앓고 있는 열병이란 공동체가 서로 뜻이 맞지 않을 때 또는 공동체가 본래의 정신에서 벗어났을 때, 열병을 앓을 수가 있다. 개인적인 열병 때문에 공동체가 열병을 앓을 수도 있고 또 공동체가 앓고 있는 열병 때문에 개인적으로 열병을 앓을 수도 있다.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가족간에 사랑이 없을 때 가족 모두가 열병을 앓는다.
부모의 잘못 때문에 자녀들이 열병을 앓을 수도 있고, 자녀들의 열병 때문에 부모가 열병을 앓고 누울 때도 있다. 가족간에 한 사람이라도 열병을 앓고 있으면 그 열병은 모든 가족에게 번지고 영향을 끼친다. 결국 내가 앓고 있는 열병은 나만 혼자 앓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열병을 앓게 하는 원인 제공을 할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열병은 절대로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 주위 사람들에게 전염시키고 그래서 공동체가 또는 사회가 더 나아가 나라 전체가 열병을 앓게 만든다. 이런 모든 악(열병)은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또는 주위 환경의 잘못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말고 우리의 잘못으로 일어나는 그 열병에서 치유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사람들이 시몬의 열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청했듯이 우리도 내가 앓고 있는 열병 또는 공동체가 앓고 있는 열병 가족이 앓고 있는 열병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고 예수님께 도와 달라고 청하자. 오늘 우리는 우리 각자가 앓고 있는 열병이 언제,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를 조용히 성찰해보고 그 내용을 적어서 예수님게 봉헌하도록 하자. 아마 오늘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셨듯이 또 마귀 들린 사람에게 "조용히 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꾸짖으시자 마귀가 나갔듯이, 우리가 앓고 있는 열병의 악을 몰아내시어 치유시켜 주실 지도 모른다. 우리도 열병에서 일어나 시중을 들도록 하자.
복음은 열병을 앓고 있던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시중을 들었다"고 전해 주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손이 부인에게 봉사했던 것처럼 부인의 손도 "봉사하는 손이 되었다."는 뜻이다. "시중들다."는 말은 희랍어로 "디아꼬니아" (Diaconia) 라고 하고 라틴어로는 "세르비레"(Servire)라고 하고 영어로는 "써비스"(Service)라 한다. 이 동사의 뜻은 " 노예가 되다. 종 노릇하다. 종살이 하다. 섬기다. 봉사하다. 비위를 맞추다. 순종하다. 몰두하다. 힘쓰다"라는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즉 봉사한다는 것은 "타인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요, 타인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요, 타인에게 순종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가 봉사를 할 때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 봉사하는 우리 자신이 상처를 받는 경우는 봉사자의 진정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봉사한다는 것이 아주 작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 변화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봉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봉사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모두가 봉사하려고 하지 않고 봉사를 받으려고만 하는 데에서 미움이 생기고, 상처를 받고, 불목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열병을 고쳐주시어 시중들게 해 주셨다는 것이 작은 기적이라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되찾아주신 위대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열병을 치유시켜 주셨다는 것 그 이상의 위대한 일을 하신 것이다. 즉 잃어버렸던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아주신 것이다.
인간이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봉사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기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적은 이기주의로 가득 차 있고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먼저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모습, 남을 섬기는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 기적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남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능력과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복음이 우리 안에서 이루고자 하는 기적이요, 선물인 것이다. 그것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열병으로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는 바로 우리 자신이고 또 열이 가셔서 일어나 시중을 들었다는 모습 또한 열병을 앓고 있는 우리가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열병으로 계속해서 누워 있을 것인가? 아니면 치유 받고 일어나서 시중드는 아름다운 인간이 되고 싶은가? 오늘 복음을 잘 묵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