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이때까지 주님 주신 건강으로 신나게 살았는데
이제는 관리하고 신경을 써야 하는 시기에 이릅니다.
영적으로 관리하듯이 육적으로도 잘 관리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그것에 마음이 묶이지 않게 하시고,
언제나 하늘의 기쁨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허락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29.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30.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31.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32.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33.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34.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35.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에 살며 소유를 삼으리로다
36. 그의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살리로다
(본문 주해)
29~33절 : “나는 비천하고 아프니, 하나님, 주님의 구원의 은혜로 나를 지켜 주십시오.
그 때에, 나는 노래를 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련다. 감사의 노래로 그의 위대하심을 알리련다.
이것이 소를 바치는 것보다, 뿔 달리고 굽 달린 황소를 바치는 것보다, 주님을 더 기쁘게 할 것이다.
온유한 사람들이 보고서 기뻐할 것이니,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아, 그대들의 심장에 생명이 고동칠 것이다.
주님은 가난한 사람의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므로, 갇혀 있는 사람들을 모르는 체하지 않으신다.”
시인은 마음이 괴롭고 아프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한다.
그 찬양과 감사가 수소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바치는 것보다 여호와를 더욱 흐뭇하게 해 드리는 일이라고 고백한다.
그가 드리는 감사와 찬송은 곤고한 자들의 영혼을 소생시킨다.
깊은 고통 속에서 맛본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은 여전히 환난 중에 있는 이들의 영혼을 소생시킨다.
모든 시대 겸손한 자, 궁핍한 자, 갇힌 자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증언하는 자들로 세움을 받는다.
34~36절 : “하늘아, 땅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바다와 그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나님께서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의 성읍들을 다시 세우실 것이니,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면서, 그 곳을 그들의 소유로 삼을 것이다.
주님의 종들의 자손이 그 땅을 물려받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에서 살게 될 것이다.”(새번역)
모든 피조세계도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찬양한다.
하나님께서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의 마을들을 다시 세우셔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그곳을 소유로 주시고 거기에 살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즉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 구원은 하나님의 성읍에서 시작된다.
하늘의 도성에서 시작되는 구원은 대대로 믿는 자들에게 기업이 되며, 하나님은 대대로 찬양을 받으신다.
(나의 묵상)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은 응답의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응답의 확신은, 상황이나 문제 해결의 확신이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의 은혜를 알기 때문이요, 또 찬송과 감사가 곤고한 자들의 영혼을 소생시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32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곤고한 자, 온유한 자,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의 찬송과 감사는 그들의 마음을 소생시킨다.
이것을 새번역에서는 ‘그대들의 심장에 생명이 고동친다’고 표현한다.
“온유한 사람들이 보고서 기뻐할 것이니,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아, 그대들의 심장에 생명이 고동칠 것이다.”(32절, 새번역)
이 표현을 발견하니 너무 기쁘다.
‘그대들의 심장에 생명이 고동친다’는 표현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현재 주님을 알아가는 내 마음의 기쁨이 바로 심장에 생명이 고동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깨닫는다. 내 육체의 심장이 멈추지 않기에 살아있는 것이 맞지만, 그 심장 안에 아들의 생명이 고동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므로 내 삶은 그 고동치는 생명의 역사로 가득하고 또 그로 인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만물과 함께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증언하는 존재로 이 땅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다.
36절은 영원하신 기업인 예수님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니 문득 떠오르는 찬송이 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복음을 몰랐을 때, 내 육체의 생명보다 귀한 ‘나의 영원하신 기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무감각하게 찬송을 했었다. 아, 그러고보니 ‘찬송’한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이제는 나의 영원하신 기업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으니, 나는 진짜 찬송하는 자가 되었다.
아들의 생명으로 고동치는 내 심장을 주님께 드리면서 말이다.
(묵상 기도)
주님,
시편 69편을 시인과 함께 찬송과 감사로 마무리합니다.
숨이 꼴딱 넘어가는 환란과 원수에 대한 깊은 저주로 캄캄한 내용이지만
결국 생명으로 고동치는 심장을 주님께 드리며
영혼이 소생되는 기쁨을 함께 고백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한 기업,
이 기업은 아들의 생명을 가진 자들에게 이어질 것입니다.
오, 주님!
저의 육체의 자손에게도 이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