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3일(수)
* 시작 기도
(히 8: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주님...
율법을 따라 세워진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이 드린 제사는 진짜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진짜의 모형과 그림자였습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입니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예배는 단순히 형식과 의미만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예배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끝이 바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요 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나 또한 오늘 이 예배자로 서게 하옵소서.
하지만 내 안에서는 거짓과 속임수가 흘러나옵니다.
나는 죽은 흙이요 썩은 시체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 됨을 주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이실직고 하오니 나를 주의 긍휼의 옷으로 덮어 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사는 이 하루가 되게 하소서.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게 하소서.
오늘도 새 언약의 자녀로 주의 품에서 안식을 누리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시 70:1-5
제목 :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속히 내게 임하소서.
(다윗의 시로 기념식에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
3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
4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5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 나의 묵상
다윗은 시편 40:13-17절에서 이 시를 기록하였다.
그런데 시의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한 편으로 여기에 기록한 것은 아마도 후대에 편집하는 과정에서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시의 표제어에 보면 기념식에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하는 것처럼 어떤 행사나 기념식에서 자주 부르기 위하여 이 부분만 발췌한 것 같다.
다윗은 자신이 처해 있는 위경에서 건져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것도 속히 도와달라고 강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기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창피를 당하게 하시고 자신을 해치고 상하게 하는 자들이 그 행위를 포기하고 절망에 빠지게 해달라고 한다.
다윗이 당한 고난을 바라보면서 ‘아하 정말 꼴좋다’고 비웃는 자들이 자기들의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인하여 도망가게 하소서.
그러나 주님을 찾는 모든 자들이 주님을 인하여 기뻐하게 하시고 주의 구원을 감사하는 자들은 항상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라고 노래하게 하소서
다윗 자신은 너무나 괴롭고 가난하기에 주께서 자신에게 속히 오기를 간절히 구한다.
다윗은 주님이 그의 에쩨르(도움) 되시고 그를 건지시는 구원자임을 확신한다.
그렇기에 이런 위경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지체하지 말고 속히 오실 것을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
다윗의 인생은 왕이 되기 전부터 왕이 되고 난 이후까지 전 인생이 고난의 연속이었다.
왕이 되기 전에는 사울로부터 쫓겨 다니면서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왕이 되고난 이후에는 자식들의 반란과 가까운 친족이나 친구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움과 구원을 요청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이민족의 침략을 수도 없이 받았다.
그렇기에 그들도 위경에서 구원 받기 위하여 다윗과 같은 마음으로 도우심과 구원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공동체적인 어떤 행사가 있으면 모든 이들이 모여 이 시를 낭송하였다.
그런데 이 시의 위대함은 원수의 공격이 무력화 되고 뒤로 물러가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 곧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4)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사람은 누구나 고난의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 빠지게 되면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자기 힘으로 되지 않을 때는 또한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이 자체는 결코 손가락질 하거나 나무랄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주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오늘 피었다가 지는 들풀도 주님께서 입히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너희들을 버려두시겠느냐고 하신다.
이런 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요 하늘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땅의 것을 구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일천 마리의 양을 희생으로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기쁘게 받으시고 솔로몬에게 무엇을 줄 것인지 물으신다
이 때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구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칭찬하신다.
(왕상 3:10-13)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3가지를 구한다.
그것은 곧 무병장수 부귀영화 관계문제이다.
이것만 해결되면 인생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런 지혜만 아니라 부귀와 영광도 함께 주셨다.
이는 마 6:33절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원수들이 자기를 해치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날 것을 간구한다.
동시에 주를 찾는 자들이 주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주의 구원에 감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노래하라고 하는 것은 곧 자신의 신앙고백인 것이다.
사실 이런 위경에서 주를 노래하고 주의 위대함을 찬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이런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평소에 주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의지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그를 해하는 원수들에 대하여 전혀 반응하지 않으셨다.
일반적으로 누구나 그런 원수들을 얼마나 미워하고 질시하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도 악한 사탄의 노리개로 쓰임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하는 기도를 드릴 뿐 그들을 저주하는 기도를 하지 않으신다.
무엇보다 그들을 사주하고 있는 사탄이 주님의 원수요 주적이기 때문에 주님의 싸움은 바로 사탄과의 싸움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현상적으로 볼 때는 사탄의 승리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사탄은 아마도 승리의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상만 보는 것일 뿐 진리 안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진정한 승리를 선포하신다.
그것은 예수님의 영이 옥에 가셔서 선포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벧전 3:18-19)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써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영으로 지옥에 가셔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탄과 죽음의 세력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나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였다.
기도를 하면 눈에 보이는 땅의 것을 구하는데 그쳤다.
물론 지식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였기에 그것을 구할 수도 없었고 구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그런 나는 기도에 목숨을 걸면서도 땅에 속한 것에만 치심하여 나의 소원성취와 가정행복을 위하여 구하는 것에 매진하였다.
거기에 조금 영적으로 나아가면 교회부흥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교회부흥까지도 이 땅에 속한 것이요 육신에 속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그것이 모두 나의 욕심에 속한 것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육신으로 살아가는 이 땅에서부터 누리는 영생이다.
인간은 원래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과 분리된 자로써 이를 불의라고 한다.
이처럼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공의가 세워지면 그것이 바로 義이다.
의란, 선하고 착하게 행동하는 그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죽기에만 합당했던 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무덤에 연합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 안에서 주님과 말씀으로 교제할 때 주님께서 성소를 지어주시고 동시에 생명으로 나아오게 된다.
그 생명은 나의 생명이 아니라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이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이처럼 나의 생명 곧 아담의 생명에서 아들의 생명으로 바뀌는 것이 진정한 義다.
이런 의의 관계를 통하여 날마다 주님과 말씀으로 교제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늘 새벽에 일어나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다.
아니 일어나기가 싫었다.
새벽 공기는 차가운데 이불 속은 따뜻하니까 나오는 것이 정말 싫었다.
오늘 하루 말씀묵상을 쉴까? 하는 생각이 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묵상을 하지 않으면 내 영혼이 주님과 멀어지는 것을 어떻게 하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말씀 앞으로 나아간다.
육신의 소욕은 조금만 더 누워 있자. 좀 더 자자고 외치지만 그 소욕을 뿌리치고 일어나 말씀 앞으로 나아간다.
유혹을 이기고 말씀 앞에 앉았지만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깜깜하고 절벽 앞에 선 것 같은 느낌이다.
처음에는 본문이 짧아서 좋아했는데, 이 짧은 본문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 것이다.
그저 잠잠히 기다리다가 조금씩 조금씩 써내려가는 중에 은혜의 빛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오늘도 말씀의 빛이 나를 감싸 안는다.
그 빛 가운데서 오늘 하루도 말씀으로 시작하는 내게 주의 은혜가 사로잡는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식적 관념적으로만 알았음을 고백합니다.
기도는 하지만 땅의 것에 매여 그것만을 구했던 내가 바로 원수요 멸망받을 자임을 인정합니다.
죄의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헤매던 자는 죽기에만 합당합니다.
하오나 이런 죄인을 위하여 단번에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대속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은혜 안에 내가 들어갈 수 있다니 이게 도대체 웬 은혜요 웬 사랑인지요?
이제는 아담의 생명이 아니라 아들의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날마다 주님과 말씀으로 교제하는 이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영생의 자리임을 깨닫습니다.
주의 나라와 그 의가 오늘도 나를 이끌고 살리오니 내 심령이 주의 나라임을 믿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