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좋은 계절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숲을 찾지 않아도 깊어가는 가을을 누립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오염된 영혼을 덮어 주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
3.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
4.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5.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본문 주해)
시편 70편의 표제어는 ‘다윗의 시로 기념식에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이다.
1~2절 : “주님, 너그럽게 보시고 나를 건져 주십시오. 주님,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내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수치를 당하게 해주십시오. 내 재난을 기뻐하는 자들이 모두 물러나서 수모를 당하게 해주십시오.”(새번역)
시편 기자가 곤경에 처해 있다.
그것은 자신을 상하게 하고 죽이려고 하는 자들 가운데 있으니 거기서 건져달라는 간구이다. 대적들이 하나님의 택한 자를 조롱하기에 오히려 그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여 달라고 하는 것이다.
3~4절 : “깔깔대며 나를 조소하는 자들이 창피를 당하고 물러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주님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승리를 즐거워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고 늘 찬양하게 해주십시오.”(새번역)
주의 택함 받은 자가 영육 간에 고통을 받을 때, 사람들이 조롱하는 웃음이 ‘아하, 아하’이다.그것은 비웃음이며, 혀를 끌끌 차는 모습, 또 그들끼리 낄낄거리며 웃는 웃음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이 망할 때 주변 나라가 ‘아하’하며 조롱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찾는 자들, 주님의 승리를 아는 자들은 기뻐하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게 해 달라고 한다.
5절 : “그러나 불쌍하고 가난한 이 몸, 하나님, 나에게로 빨리 와 주십시오. 주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나를 건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 지체하지 마십시오.”(새번역)
시인은 구원을 열망하지만 그런 구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여전히 가난하고 궁핍하기에 속히 구원하여 달라고 하는 것이다.
‘가난하고 궁핍하다’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가 없으니 오직 주께서 구원하여 달라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슬픈 자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제물이나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로 인하여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황소를 드릴 수 있지만, 그것보다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이다.
(나의 묵상)
다윗이 자신을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한다.
물론 왕이 되기 전에 사울에게 10여 년을 쫓기는 신세가 되어 엄청난 고생을 했어도 그를 따르는 자들이 많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보살피심이 있었다.
또 왕이 되어 아들 압살롬에게 왕위를 위협받기도 했지만, 그때도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따랐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왕위를 지켜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따르는 자로서, 또 한 나라의 왕으로서, 그가 가난하고 궁핍할 리가 없다.
그런데도 다윗이 자신을 가난하고 궁핍한 자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의가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사울의 위협과 아들의 반란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 역시 매일 이 고백을 주님께 드려야 함을 생각한다.
복음을 알기 전 나는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나 자신이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당시 누리던 물질적, 영적 상태에서 더 많은 것을 달라고 간구하는 자였다.
늘 만족하지 않고 욕심을 내기에 때때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합니다’라는 표현을 의지해서 하나님께 보챘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것이 비록 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나의 탐심이 발동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제 복음을 알게 되니, 나의 가난함과 궁핍함을 알게 된다.
나 자신이 가난하고 궁핍하고 슬픈 자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던 자였는데, 주님께서 십자가로 단번에 구원하여 주시니 그제야 나 자신을 제대로 보게 된다.
물질적인 것도 하나님의 입김 한 번에 날아가 버릴 수 있는 것이니 ‘나는 이런 안정감 속에 사네’ 하는 생각이 얼토당토않는 것이다.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매일 죄인의 괴수이니 다른 말이 필요 없다.
그러니 ‘가난함과 궁핍함’ 정도가 아니라, 그저 ‘Nothing’일 뿐인 것이다.
그런 ‘Nothing’인 자에게 집도 주시고, 먹을 것도 주시고, 무엇보다 영생의 은혜를 누리게 하시니 매일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눈을 뜨고 일어나면 이 하루에 이 모든 것을 주님께로부터 새로 받은 것이라 생각하면 참으로 어마어마한 선물이다.
그러니 더욱 나의 가난하고 궁핍함을 매일 주님께 아뢰며 주님을 찾는 자가 되는 것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움켜쥐기 위해서 주님을 찾는 자가 아니라, 나의 의가 없음을 고백하고 날마다 주님의 구원하심이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음을 고백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나의 궁핍함을 채워주시는 주님, 십자가로 단번에 다 이루신 주님을 찬양하며 오늘 하루를 연다.
‘내 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 계시고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 주시네(찬370장, 3절)’
(묵상 기도)
주님,
과거에도 주님을 찾는 자였지만
쓰레기를 더 받기 위해 아우성치는 자였습니다.
이제도 주님을 찾습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십자가로 단번에 이루신 주님의 구원을 믿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땅에서의 탄식이 남습니다.
그것이 신세 한탄이나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의 기다리는 자의 탄식, 소망의 탄식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