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땅끝 마을에 있다는 미황사(美黃寺) 전경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랑도 나를 가득하게 하지 못하여
고통과 결핍으로 충만하던 때
나는 쫓기듯 땅끝 작은 절에 짐을 부렸습니다
세심당 마루 끝 방문을 열면
그 안에 가득하던 나무기둥 냄새
창호지 냄새, 다 타버린 향 냄새
흙벽에 기댄 몸은 살붙이처럼
아랫배 깊숙이 그 냄새들을 보듬었습니다
열 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리며 나는
아물지 못한 상실감으로 한 시절을
오래, 휘청였습니다
.... 색즉시고옹공즉시새액수사앙행식역부우여시이사리자아아시이제법공상불생불얼....
불생불멸.... 불생불멸.... 불생불멸.....
꽃살문 너머
반야심경이 물결처럼 출렁이면
나는 언제나 이 대목에서 목이 메곤 하였는데
그리운 이의 한 생애
잠시 내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
새처럼 날아간 거라고
땅끝 바다 시린 파도가 잠시
가슴을 철썩이다 가버린 거라고.....
스님의 목소리는 어쩐지
발밑에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자꾸만
자꾸만 서걱이는 것이었는데
차마 다 터뜨리지 못한 울음처럼
늙은 달이 온몸을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필생의 호흡이 빛이 되어
대웅전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
오리, 다람쥐가 돌 속에서 합장하고
게와 물고기가 땅끝 파도를 부르는
생의 한때가 잠시 슬픈 듯 즐거웠습니다
열반을 기다리는 달이여
그의 필생의 울음이 빛이 되어
미황사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했습니다
김태정, 미 황사(美黃寺)
살아 생전의 김태정 님의모습
시인 "김사인"이 태정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쓴 시....
1
울 밑의 봄동이나 겨울 갓들에게도 이제 그만 자라라고 전해주세요
기둥이며 서까래들도 그렇게 너무 뻣뻣하게 서 있지 않아도 돼요, 좀 구부정하세요
쪽마루도 그래요, 잠시 내려놓고 쉬세요
천장의 쥐들도 대거리하는 사람 이제 없다고 너무 외로워 마세요
자라는 이빨이 성가시겠지만 어쩌겠어요
살 구부러진 검정 우산에게도 이제 걱정 말고 편히 쉬라고
귀 어두운 옆집 할머니와 잘 지내라고 전해주세요
더는 널어 말릴 양말도 속옷 빨래도 없으니 늦여름 햇살들은 고추 말리는 데나 거들어드리세요
해남군 송지면 해원리 서정리 미황사 앞.
2
죽는다는 일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그래서 어쩌란 일인가요
버뮤다 삼각지대 같은 안 보이는 깔때기가 있어
그리로 내 영혼은 빨려나가는 걸까요. 아니면
미닫이를 탁 닫듯이 몸을 털썩 벗고 영혼은
건넌방으로 드는 걸까요
아이들에게 말해주세요
마당에서 굴렁쇠도 그만 좀 돌리라고
어지럽다고.
3
슬픔 너머로 다시 쓸쓸한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닌
한없이 처량한 그림자 덮어쓰고 사람 드문 뒷길로만 피하듯 다니던
소설공부 다니는 구로동 노동자 아무개네 젖먹이를 맡아 봐주던
순한 서울 여자 서울 가난뱅이
나지막한 언덕 강아지풀 꽃다지의 순한 풀밭.
응 나도 남자하고 자봤어, 하던
그 말 너무 선선하고 환해서
자는 게 뭔지 알고나 하는 소린지 되레 못 미덥던
눈길 피하며 모자란 사람처럼 웃기나 잘하던
살림솜씨도 음식솜씨도 별로 없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
4
할머니 할아버지들 곁에서 겁많은 귀뚜라미처럼 살았을 것이다
길고 느린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을 마루 끝에 앉아 지켜보았을 것이다
한 달에 오만원도 안 쓰고 지냈을 것이다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이,
시를 써 장에 내는 일도 부질없어
그저 조금만 먹고 거북이처럼 조금만 숨 쉬었을 것이다
얼찐거리다 가는 동네 개들을 무심히 내다보며
그 바닥의 초본 식물처럼 엎드려 살다 갔을 것이다
이제 더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그 집 헐어진 장독간과 경첩 망가진 부엌문에게 고장난 기름보일러에게
이제라도 가만히 조문해야 한다
새삼 슬픈 시늉을 하지는 않겠다
#
서울 토박이 태정님이 도대체 어떤 인연이 닿아 홀로 땅끝 마을인 해남의 달마산 그늘에 있는
미황사 근처로 내려가 살면서 항상 부처님과 함께 했나봅니다
48세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요절했는데 미황사의 스님들이 무척 슬퍼하며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뤘다네요
그가 한 달에 오만원도 안 썼을 거라는 말과 생전에 부끄러워 하며 한마디 한 말이
"응 나도 남자와 자봤어!" 라고 했다니 나는 웬지 짚히는 것이 있어 가슴이 뭉클하네요
저 한마디가 왜 이렇게 가슴에 밟히는지 원.....
그가 남긴 시집은 단 한권.. 겨우 45편이 실린 것이 전부였다니...
그래도 문단에서는 모두가 인정하고 알아주는 시인이었으니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미황사에는 김남주, 고정희, 김태정... 이렇게 대단한 시인들이 적(的)을 두었다 하니
비록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절에 아프고 슬픈 전설이 참 많은가 봅니다
구도적인 삶, 어떻게 살아가도 한 세상인데 때로는 참진한 영혼으로 무언가에 의탁하며
기원도 해보고 영육의 아프고 고달픔을 맑게 행구는 "산돌림" 같은 깨달음도 있어야 하는데...
어떻거나,
살아가는 과정의 애닲음과 죽음이라는 마지막의 끝이 왜 그리 애절한지요
그래요,
내가 느끼고 내 시선에 잡히는 모든 것들이...
세상도, 물욕도, 욕망도 심지어는 여인까지도 무색무언(無色無言)이면 좋으련만...
어느 때든 기회가 닿으면 꼭 미황사를 가봐야겠습니다.
언젠가 해남 땅끝 마을에 두번이나 다녀왔으면서도 미황사는 가보지 못했습니다.
이정표를 보고서도 그냥 무심히 지나쳤지요
미황사에 가면 동백나무가 왜 하혈 같은 피를 쏟아내는지 들여다봐야겠습니다.
'김사인' 님의 말씀처럼 "새삼 슬픈 표정을 하지는 않으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부디 저 세상에서는 편안하시라 합장을 한 채 태정 님의 명복을 빌어드려야겠습니다.
하수가....
# 아주 오랬만에 인사드립니다 꾸벅~
첫댓글 한 줄 한 줄
아껴가며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읽어주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지요
자주 뵙도록 하겠습니다
미황사
살아생전의 김태정님의 해맑은 모습
미황사 어딘가에
그모습이 물들어 있을거 같아
모든것을 다 내려놓게 하는
이 겨울에 한번 가봐야 겠습니다
그러게요
너무 아까운 나이에 요절을 했으니 그저 안타까울 수밖에요
순수하고 맑았던 여인..
그러나,
이제 먼 하늘나라에서 좋은 세상을 살라며 합장할 수밖에요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꾸벅
~반갑습니다
올 간만에 뵙는거 같습니다
화솔방에 좋은글 많이 올려주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님에 대한 사과는 님의 글, 댓글에 적어놓았으니 참고하시길 바라고..
이젠 새로운 모습으로 서로를 대하면 참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젠장 .....
왜 이뤟게 가슴이 아픈지
옛같으면 살만큼 살았다해도 아쉬운 마흔여덣.
사리 알갱이같은 그깢 시 몇편 남기려고 그리 아팠나 보다 .....
해남 땅끝
미황사
온듯이 만듯이
찾아가 보려네 .....
하수형님 .
감사하옵니다 ☘
유달리 님의 댓글 한 줄이 눈에 들어옵니다
"사리 알갱이 같은 詩 ".
그리고 온듯이 만듯이
찿아가 보겠다는 님의 글에 그저 감탄입니다
글을 쓰시는 분 같군요
자조 뵙도록 하겠습니다
오랫만에 뵙습니다
동안ᆢ
건강하셨죠?
궁금했던
님의 소식을
글로 접합니다
건필 하십시요
오랬만에 오니 정들었던 분들은 보이지 않는군요
유일하게 누엘 님과 정도령 님 뿐...
암튼
다시 님을 대할 수 있느니 그저 반갑고 좋습니다
자주 올께요
와..강하수님 ...반갑습니다!!!!.
클릭해봤는데.. 님의 글을 읽게되네요.
그동안 눈팅만 하다가 덕분에 댓글도 써봅니다.
시간날때 다시한번 읽어볼게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
단아한,,,
기억이 납니다
참으로 오랬만에 님의 댓글을 대하는군요
지금도 공부를 하고 계시는군요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공부하신다는 것,
그 열정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자주 뵙기를 희망합니다
시에 대해 문외한에 가깝지만
김태정시인과 김사인시인을 접하게
되었네요.
태정시인을 그리는 시가
가슴뭉클하게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