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칼빈,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장 칼뱅(프랑스어: Jean Calvin,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 존 칼빈. 또는, 요한 칼빈은; 종교 개혁을 이끈, 프랑스의 기독교 신학자이다.
출생과, 학창시절:(1509년-1564년) 칼뱅이 처음으로 다녔던, 학교는; 누와용의 로마 가톨릭 참사회가 운영하던 소년학교 까뻬뜨였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칼뱅은 11살이 되던 해인 1521년 5월부터 대성당으로부터 성직록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 그의 아버지는 칼뱅이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사제)가 되기를 원했으나,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갈등. 그리고, 전반적인 신조주의의 대기가 바뀌면서, 아들에게 진로를 바꾸길 권했다.
마르슈 1523년 8월에 칼뱅과 몽모르 가문의 소년 몇이 공부를 더하기 위해 파리로 이주했다. 칼뱅이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삼촌인 리샤르의 집에 머물렀으나, 두 달 후에 마르슈 학교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마뚜랭 꼬르디에르가; 라틴어 문법을 가르쳤다. 꼬르디에르는; 근대식 교수법으로 유명한데, 그는 아이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를 사랑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칼뱅은; 이 학교에 몇 달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꼬르디에르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1562년 꼬르디에르는 칼뱅의 요청으로 제네바로 옮겨와, 가르쳤다.
몽테귀 컬리지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칼뱅은; 자신의 이름을 요아니스 칼비누스(라틴어: Ioanis Calvinus)로 개명했는데, 이로 인해; 이후, 장 칼뱅(프랑스어: Jean Calvin)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523년 말 즈음에, 그는 파리 대학교의 몽테귀 컬리지에서 수학했으며, 인문학자이자, 종교개혁에 많은 영향을 준 에라스무스와 라블레 등에게 배울 수 있었다. 칼뱅이 재학하였던 1514년부터, 1528년까지, 몽떼귀 컬리지의 교장은 삐에르 땅뻬뜨(Pierre Temp?te)였다. 그는; 보수적인 학자 노엘 베다의 계승자였다. 칼뱅은; 여기서, 수사학 등을; 배웠다. 당시 프랑스는; 공동생활형제단의 근대적 경건 운동과, 유명론 등이 신학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칼뱅은; 콥(Cop) 가문의 몇 사람과 친분을 가졌다. 프랑수와 1세의 왕실 의사였던 기욤 콥(Guillaume Cop)은; 당대의, 다양한 인문주의와, 종교 개혁 사상을 가진 그룹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의 아들 4형제는 칼뱅의 친구였다. 칼뱅은; 콥 가문을 드나들면서 이러한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 칼뱅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는, 그의 사촌인 삐에르 로베르 올리베땅(Pierre Olivetan) 등이; 있다. [출처 필요] 1528년 파리에서 학업을 시작한 로욜라도 역시 장 칼뱅과 비슷한 시기에 이 몽떼귀 학교에 다녔는데, 그 두 사람이; 만났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법학 공부 젊은 시절의 장 칼뱅 1527년 9월 27일 장 칼뱅은; 두 번째 성직록 장학금을 받았다. 이것은 누와용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인 마르뜨비여(Martheville)의 쌩 마르뗑(Saint Martin) 사제직에서 생기는 수입이었다.
1527년 칼뱅의 아버지는; 누와용의 교회 참사회와 직무 상의 일로 인해 마찰을 빚게 되었다. 그는 교회와의 마찰로 장학금이 취소될 지 모른다는 우려와, 아들의 출세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칼뱅에게, 신학보다는, 법학을; 공부하라고, 권유했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칼뱅은; 1528년 초 무렵 유명한 법학자 피에르 드 레스뚜왈이 강의하는 오를레앙 대학교로 옮겼다. 레스뚜왈의 유식함은; 칼뱅에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오를레앙에서, 칼뱅은; 멜키오르 볼마르로부터, 그리스어를; 배웠다. 이 기간에 사귄 다른 친구들로는, 프랑수와 다니엘, 프랑수와 드 꼬낭, 니꼴라 뒤쉐맹 등이 있다. 1529년 여름에 칼뱅은; 친구 프랑수와 다니엘, 니꼴라 뒤쉐맹과 함께, 부르쥬 대학교로 옮겨 갔다. 그곳에서는, 역사학파의 설립자이며, 법학자이자, 인문주의자인 이탈리아 사람 안드레아 알키아티의 강의를 들었다.
칼뱅은; 1531년 3월 니꼴라 뒤쉐맹의 <반박문>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갔다. 그는; 1531년 3월 6일에 이 책의 서문을 썼다. 이것이 칼뱅의 첫 출판물이 되었다. 칼뱅은; 파리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가 매우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누와용으로 달려갔다. 그의 아버지는; 1531년 5월 26일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는 사망하기 2년 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되었기 때문에, 칼빈의 형 샤를르는; 아버지를 교회 묘지에 매장하기 위해, 교회의 참사회와 협상하여야 했다.
1530년 파리로 돌아간 칼뱅은; 포르떼 대학에 정착하여, 히브리어를; 공부하였다. 1532년 4월 4일 칼뱅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관용에 관하여>를 주석하여 출판했다. 1532년 그는; 다시, 오를레앙으로 돌아와, 법률 공부를; 마쳤다.
기독교 강요 만성절(모든 성인의 날)인, 1533년 11월 1일. 새 학기를 시작하는 공식 석상에서, 니꼴라 콥은; 교수들과, 고위 성직자들 앞에 두고, 기독교적 철학. 그리고, 법과 복음의 관계 등에 관해, 비판적인 연설을; 하게 되었다. 파리 국회는; 연설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며, 해명을 위해 소환 당하기 전에, 니꼴라 콥은; 도시를 빠져나갔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저주받은 루터 이단”을 박해하기로 결심했다.
칼뱅도; 자신의 도서들과 편지들을 남겨 둔 채, 당국에 체포되기 전에, 도시를; 몰래, 빠져나갔다. 그는 파리 근교에 머물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그리고, 1533년 말. 혹은, 1534년 초 즈음에, 파리 남부의 생통쥬 지방으로, 갔다. 칼뱅은; 샤를르 데스뻬비여(Charles d'Espeville)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상당 기간 클레교구 목사이자, 앙굴렘에 있는, 개신교 교회의 참사회원이었던, 루이 뒤 띠예(Louis du Tillet)의 집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칼뱅은; 《기독교 강요》 초판을; 구상하였다.
1534년 4월 칼뱅은; 80세가 된, 르페브르(Jacuques Lef?vre d’Etaples, 1536년 사망)를 방문하기 위해, 네락(N?rac)으로, 갔다. 르페브르는; 마지막 시간을 네락에 있는 앙굴렘의 마르거리뜨 소유의 성에서 보내고 있었다. 칼뱅은; 또한 클레락(Clairac)의 수도원에 살고 있었던 궁정 설교자 제라르 루셀도 방문하였다. 1534년에 칼뱅은 여러 가지 성직록에서 비롯된 수입을 포기했다.
그 당시에는, 25세가 되어 공식적으로 교회 봉사에 입문하지 않으면 성직록을 포기하는 것이 관례였다.
칼빈은; 파리 근교에 머무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에띠엔느 들 라 포르쥬 그룹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아마도, 플람스의 설교자이자, 유명한 재세례파교회의 지도자인, 깡뗑 티프리를; 만났을 것이다. 파리에서, 약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칼뱅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그가 칼뱅과 만나기로 한 약속은 성사되지 못했다. 세르베투스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뱅은; 뒤 띠예와 함께, 끌레를 경유하여, 푸와티에르(Poitiers)에 있는 지지자들에게 갔다.그리고 칼뱅은; 그 곳 도시 외곽 생-브누와(Saint-Beno?t)에서 설교를 하기도 했다. 칼뱅은 푸와티에르를 떠나 뒤 띠예와 함께, 오를레앙으로 여행 했으며, <영혼불멸>을; 집필했다.
1534년 10월 17일-18일 밤 성만찬때, 면병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변화 교리에 반대하는 과격한 벽보가; 파리 전체(심지어는, 왕의 침실 문에도)와 전국 각지에 나붙었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플래카드 사건. 즉, 벽보 사건이다. 이 문서의 기안자는; 앙뚜완느 마르꾸르였다. 그는; 리용에서 추방된 후, 뇌샤뗄의 주교가; 되었다.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는; 인문주의자 기욤 뷔데의 권고 등으로 인해, 일단의 조치를; 취했으며, 파리에서의 상황은; 점점, 더 험악해져 갔다. 11월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몇 달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칼뱅의 후원자요, 절친한 친구인, 에띠엔느 들 라 포르쥬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뱅과, 뒤 띠예는; 개신교에 대한 탄압을 피해,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바젤로; 갔다. 칼뱅은; 바젤에서, 마르티아누스 루카누스(Martianus Lucanus)라는 가명으로, 지냈다.
당시. 그의 동료로는, 바젤의 개혁가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의 후계자 오스발트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와, 스트라스부르크의 목사인, 볼프강 카피토 등이; 있다. 칼뱅은; 이 외에도 학자 세바스티안 뮌스터, 변호사 보니파키우스 아메르바흐, 미래의 제네바 동지인 피에르 비레 등과, 친분을; 쌓았다. 1536년 2월에는, 하인리히 불링거와도, 사귀게; 되었다.
1535년 6월 바젤에 정착하여, 1536년에 7월 12일에 사망한 에라스무스를 칼뱅이 만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535년 6월 4일에는, 올리베땅에 의해, 불어 성서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라틴어로 된 추천 서문은; 칼뱅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으며, 신약성경 앞에 나오는, 두 번째 추천 서문은; 익명이지만, 1545년 이후부터는, 칼뱅의 것으로; 간주된다.
칼뱅은; 이 번역본의 개정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에, 칼뱅은; 고대 교회의 교부 중, 한 명인, 크리소스톰 주교의 설교집에 추천 서문을; 썼으며, 《기독교 강요》의 초판 작업도; 계속해, 나갔다.
《기독교 강요》는; 1535년에, 완성되었다.
칼뱅은; 이 책을;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하였다.
《기독교 강요》의 라틴어 초판은; 1536년 3월 바젤에서, 출판되었으며,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이 작품으로, 칼뱅은; 종교개혁의 주도적인, 신학자가; 되었다.
<기독교 강요>가; 출간되기 바로 직전인 1536년 2월. 칼뱅은 이전에 사용했던 샤를르 데스뻬비여(Charles d'Espeville)라는 가명으로, 루이 뒤 띠예와;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그는; 개혁정신을 가진, 국왕 루이 12세의 딸이며,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의 친척인 레나타(Renata, Ren?e) 공작 부인의 페라라 궁정에서,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수 주간 머물렀다.
페라라에서, 칼뱅은; 프랑스로부터 피신해 온 개신교도들과; 만났는데, 그 중에는, 프랑스의 시인 클레망 마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빈과, 뒤 띠예는; 아오스타를 거쳐서, 바젤로; 돌아왔다.
프랑스에서 망명객의 귀환을 허용하는 임시 특별 사면과 6개월 안에 공개적으로 이단과 관계를 단절해야만 한다는 내용의 특별 사면이; 포고되자, 칼뱅은; 프랑스로, 곧장 떠났다. 그는; 파리에 있는 친구들을 방문하였고, 프랑스를 영원히 떠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자신의 일을; 정리했다.
동생 앙뚜완느와, 마리가; 그와 동행했다. 그는; 슈트라스부르크로 가서 조용히 공부를; 마칠 계획이었지만, 프랑스 왕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군대의 이동을 피해, 우회하여 갈 수밖에 없었다. 칼빈은; 하룻밤을 묵어가기 위해, 우회로인 제네바에, 들렀다.
첫 번째 제네바 체류 시절(1536년-1538년)
칼뱅을; 제네바에 머울도록 한 기욤 파렐. 1536년 당시의 제네바는; 약 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1526년 사부와 공작령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으며, 베른과 프라이부르크의 주들과 시민연대라 불리는 상호 방위 동맹을 맺고 있었다.
제네바의 로마 가톨릭 주교 피에르 들 라 봄은; 주로 사부와의 원조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네바에서 사부와 공작의 세력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1532년 이후 개신교 주가 된 베른을 계기로 삼아 기욤 파렐과 그를 돕던 사람들은 1532년 10월 이래 줄곧 제네바에 종교개혁운동을 도입하려고 노력하였다. 베른의 도움에 힘입어 제네바는 이 시기에 사부와의 공작과 로마 가톨릭 교회 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데 성공했다. 1536년 5월 21일에 제네바의 모든 시민은; 파렐의 지휘 아래, 종교개혁을; 수용하기로, 맹세했다.
1534년 공식적으로 제네바의 목사가 된 파렐은; 칼뱅이 제네바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칼뱅에게 찾아가 제네바에 남아서 이 도시의 종교개혁을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거절하던 칼뱅은 결국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에 그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썼다. “ 기욤 파렐은; 조언과 간곡한 경고로서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저주로서 나를 제네바에 붙들어 두었다. 이는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나에게 얹어 잡으시려는 것 같았다. ” 10월에 파렐과 삐에르 비레는 칼뱅과 함께 로잔에서 열린 공개 종교 토론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칼뱅은; 교부들에 대한 지식으로, 매우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일설에 의하면, 칼뱅은; 북아프리카 히포 교회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책 페이지와 줄 수까지 정확하게 인용할 정도로, 대단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제네바로 돌아가기 전에 베른에서 열린 또 다른 종교회의에 참석했다. 칼뱅은; 1558년~1559년의 겨울 동안, 심하게; 앓았다. 1564년 5월 27일에, 그는; 사망하였다. 교리에 대한 평가 칼뱅은; 장로교의 뿌리다. 그는; 목사·교사·장로·집사로 구성된 교회직제의 기초를; 세웠다.
칼뱅은;“하나님이; 구원과, 멸망을; 이미. 예정해; 놓았다. 그걸, 바꿀 수는; 없다.
사람은; 단지,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는, 예정설을; 주창했다.
그의 예정설을 놓고 개신교 내부에서도 격한 논쟁이; 일었다.
제네바 소재 종교개혁박물관의 이사벨 그래슬레 소장은; “칼뱅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신화와 폭군’ 사이에서, 아직도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역사적 진실은; 이 둘 사이에, 놓여; 있다.”고, 말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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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log.daum.net 원문보기 글쓴이: 한라산
첫댓글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