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7일 민주노총 중집에서 위원장 책임 하에 만장일치로 노사정 교섭을 추진한 이후 사회적 담합에 대한 대응 전선이 급격히 이완되고 있다. 그 사이에 비정규개악입법 폐지 투쟁은 국회 안에 갇힌 채 노사정 거간꾼들의 놀음에 처절하게 유린당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4월 14일 발표된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안이 최대 쟁점으로 등장하면서 4월 21일 민주노총 지도부는 중집에서 또다시 반노동자적인 결정을 내렸다.
‘“인권위안 중심 입법”을 중심기조로 … “4월 국회 인권위 입법”의 현실화를 최대목표로, 당면하게는 전향적인 안을 끌어내어 이후 입법논의 과정에서 가이드라인이 상향될 수 있도록 하는 전술목표’ (4/21 제11차 중집 자료 中)
비정규직노동자들을 비롯한 전체 노동자계급의 생존권이 달린 중요한 투쟁이 몇몇 상층 기회주의 세력에 의해 또다시 왜곡되고 짓밟히고 있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안은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인권위원회는 자본주의 국가기관 중 일부일 뿐이기 때문에 결코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온전히 대변할 수 없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 계급의 이해에 거스르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인권’이 제한적으로 보장되는 것과 같은 이유다. 울산건설플랜트노조에 대한 공안탄압과 현대차 집회에서의 폭력사태를 보라. 어디 그 뿐인가? 청주 하이닉스에서는 백주대낮에 공장 안에서 전경들이 물대포까지 동원하여 모의진압훈련을 했다. 어디에도 투쟁하는 노동자의 ‘인권’은 없다. 자본가계급을 위한 ‘계급적 인권’이 국가기관의 본질(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억압, 착취하기 위한 도구)을 교묘히 은폐하기 위하여 그럴듯하게 ‘전체를 위한 인권’으로 포장되어졌을 뿐이다.
이번 비정규개악입법 관련한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안도 마찬가지다.
인권위 권고안이 나온 뒤 자본가 언론과 정부, 경총은 벌떼같이 들고 일어섰다.
‘현실 눈감은 인권위의 비정규직 의견’(중앙일보), ‘인권만으론 노동시장 재단 못한다’(세계일보), ‘딴 나라 사람 같은 인권위의 비정규직 해법’(조선일보)
“황당무계하다 … 국가인권위의 의견 표명과 관계없이 우리당은 우리당에게 주어진 길을, 국회는 국회의 길을 가겠다”(4/14 열린우리당 대변인)
“노동시장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며 인권위가 주장하는 비정규직 해법은 오히려 실업자를 양산하고 고통만을 가중시킬 것”(4/19 경총)
그렇다면 과연 국가인권위의 권고안이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심각히 침해할 만큼 무시무시한 안인가?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내용을 보자.
▲기간제 관련 - 합리적 사유 없는 기간제 사용 제한 / 사용기간(일정기간) 제한 / 기간경과 및 사유 외 정규직 간주(고용의제), ▲차별폐지 관련 - 불합리한 차별금지원칙 규정 /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명문화, ▲파견제 관련 - 파견업종 포지티브 유지 / 파견기간 2년 유지 / 휴지기 확장 / 불법파견시 직접고용 간주 / 사용업체 사용자 책임(또는 노사협의회 참여).
자본가 언론과 정부, 경총에서 떠드는 것과는 달리, 실상 인권위원회의 권고안은 ‘현실 수준의 유지’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갖고 있는 안이다!
먼저 기간제 관련해서 합리적 사유의 구체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현재와 같이 무차별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많고, 사용기간에 관해서도 ‘일정기간’이라는 애매모호한 문구로 되어있다.
다음으로 파견법은 방식에 있어서나 기간에 있어서 한마디로 ‘현행유지’다. 파견법이 ‘유지’되는 한 그것이 비록 ‘포지티브’ 방식이라 할지라도 비정규직은 교묘한 양식으로 끊임없이 양산될 것이다. 또한 불법파견 시비가 가려지는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간접부서로 ‘전환배치되고, 계약해지 등 각종 이유로 ‘해고’의 위협에 놓이게 되며, 더 열악한 수준의 ‘합법도급노동자’로 전락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과 같은 상황에서 ‘파견법 유지’와 나란히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문구가 삽입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추상적인 선언으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 파견법은 수정, 보완된 형태로 ‘유지’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폐지’되어져야 하는 것이며 그것만이 궁극적으로 ‘비정규직 철폐’로 가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원칙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자성 인정과 노동3권 보장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다.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 한, 전국의 수많은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기본적인 노조활동 조차 모두 불법행위로 규정되어 탄압받는 현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인권위의 안은 현재 수준에서 자본의 이윤을 조금도 침해하지 않는 안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전혀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담보할 수 없는 안이다!
굴종과 타협으로 점철되어진 민주노총의 비정규개악입법 저지 투쟁
위와 같이 국가기구로서의 본질적 한계를 안고 있는 인권위원회의 권고안을 민주노총은 막판 노사정 대타협 카드로 던졌다.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21일 중집 결정으로 인권위 안을 가이드라인으로 상정한 것이다. 그러나 말이 가이드라인이지, 실상은 민주노총의 안으로 상정한 것과 다름없다. 이미 이석행 사무총장이 중집이 있기 하루 전인 20일 노사정대표자 운영위원회에서 “‘기간제 사유제한’, ‘동일노동 동일임금’, ‘차별시정위원회’ 등 세 가지 주요 쟁점과 관련하여 다른 것은 양보할테니 인권위안으로 4월에 처리하자”고 던진 바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양보한다는 말인가? 예전에 임금은 양보하고 고용을 보장받겠다는 ‘양보교섭’이 총연맹 차원에서 재현되어지고 있다. 그것도 전체 노동자계급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를 현장의 의견수렴도 전혀 하지 않은 채 대대에서 강행처리 하고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앙 관료들이 멋대로 양보, 수정하고 있다.
사회적 교섭에 복귀하면서부터 우려되어졌던 양상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3월 17일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 후 이수호 집행부의 행보는 ‘사회적 담합’이 의미하는 ‘굴종’과 ‘타협’ 그 자체였다. 지난 4월 1일 4시간 부분파업을 하루 앞두고 이경재 환노위원장이 국회(환노위)와 노사정대표자회의 연석회의를 제안했을 때에는 “들러리로 서지 않겠다”며 거부하더니 4월 1일 당일 기자회견에서는 비정규직법 ‘폐기’가 아닌 ‘수정’으로 입장 선회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 4월 3일 5일 연속으로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참석하고, 4월 8일에 ‘노사정대표자-국회 회의’에 합의, 참석하였다. 그리고는 “실질적인 대화 자리를 마련했다”며 그 의의(?)를 부여하였다. 불과 며칠 사이에 바뀐 것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들러리’에서 ‘실질적인 대화 파트너’로 격상됐다며 자화자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까지 민주노총의 현실적 목표는 4월 처리 ‘연기’였으며, 정부와 경총은 어떠한 수정안도 내오지 않았다. 그러나 일주일 후 인권위 권고안이 발표되고 나자, 인권위 안을 실질적인 수정안(양보안)으로 채택하면서 이제는 ‘4월 내 조속한 입법 처리’를 요구하고 있다.
애초에 전체 노동자계급의 생존권이 걸린 ‘비정규개악입법 폐기’투쟁을 사회적 교섭(담합)을 통해서 풀겠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갈팡질팡 상황은 어느 정도 예정되어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인권위 권고안의 본질과 함께 ‘시기’의 문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기부터 지금까지 정부와 경총은 정부안대로 4월내 처리를 주장하였다.
겉으로는 ‘이미 두 번이나 미뤘기 때문에 더 이상 연기할 수 없다’이지만 그 속내는 지금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비정규직 투쟁을 조기에 법적, 제도적으로 제압하겠다는 것, 5,6월부터 본격화될 임단투와 연계를 차단하겠다는 것, 현재 노사정위원회 핵심 안건인 노사관계로드맵 대응 투쟁과 분리시키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이었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4월 조기 입법화’를 주장하는 민주노총의 속내는 무엇인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비정규직 투쟁과 선언만 되어진 무기한 총파업의 부담을 덜겠다는 것, 어떻게든 노사정대표자회의의 성과물을 만들어서(그것이 실질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담보하는 것이든 아니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노사정위원회에 복귀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상이몽이 아니라 표현만 다를 뿐, 실질적으로 자본과 같은 지점을 바라보고 서로 약간 다른 길만 가고 있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저들이 주창하는 ‘사회적 교섭’의 본질이다.
사회적 교섭 분쇄! 인권위안 즉각 폐기! 파견법 폐지! 비정규 철폐! 투쟁을 조직하자!
민주노총을 노사정 담합 테이블로 끌어들인 자본과 정권은 노사정 협조주의 체계 구축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3월 25일 노사정위원회는 보도자료를 통해 ‘지역노사정협의회 시범사업’에 나선다고 발표하였다. ‘지역차원의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 현안에 관한 노사정간 사회적 대화, 협의를 촉진하고 내실화’하기 위하여 약 15억원이라는 거액의 예산을 투입하여 지역에서부터 노사정위원회 구축에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이미 현재 광역 16개, 기초 32개 등 총 48개의 지역 노사정협의체가 꾸려진 현실을 감안할 때, 민주노총의 ‘투항’을 계기로 이를 더욱 확산시키겠다는 것이다. 또 한나라당은 현재 개편문제가 상정되어있는 노사정위원회를 감안하여 이를 대신할 ‘범국민 사회협약체’ 구성 제안을 적극 검토 중이다. 그 명칭이 어떠하던간에 현재의 ‘노사정대표자회의’가 ‘노사정위원회’를 대신하고 있듯이 ‘노사정 담합, 협조주의’라는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노사정협조주의 체계 구축, 확산이 비단 정부와 자본에 의해서만 주도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04년 관료적 산별교섭 안으로 많은 노동자들의 항의와 지탄을 받은 보건의료노조가 의료노사정위 구성을 추진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이러한 상황을 빌미로 더욱 노골적으로 ‘노사정위원회(또는 다른 명칭의 노사정 담합 구조) 복귀’를 추진할 것이다. 또 현재의 ‘노사정대표자회의’는 어떠한 권한도 없기 때문에 이정도 밖에 못했다면서 현재의 ‘투항’을 합리화하고 ‘노사정위원회 위상 강화’를 주장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경로로 복귀를 타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노동자계급의 생존권이 또다시 소위 노사정 대표자들만의 회의에서 유린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난 대대이후 유실되어진 ‘사회적 교섭’ 대응 투쟁 전선을 다시 복구시켜야만 한다!
현장에서부터 노사정대표자회의의 실체를 폭로하는 투쟁을 전개하자!
노사정대표자회의와 민주노총에 대한 즉각적인 항의투쟁을 조직하자!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난 민주노총 대대 대응은 물론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었지만, 현장 조직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면서 끝까지 힘 있는 투쟁을 전개하지 못했다.
따라서 각 현장의 선진노동자들은 ‘사회적 교섭 분쇄’ 투쟁과 ‘비정규개악입법 분쇄’투쟁을 분리해서 조직할 것이 아니라, 현장의 비정규직 투쟁을 조직해서 그 힘을 바탕으로 ‘사회적 교섭 분쇄’와 ‘비정규개악입법 분쇄’ 투쟁에 대한 공동 대응을 조직해야 한다.
‘비정규개악입법 분쇄’, ‘파견법 폐지’ 투쟁이 더 이상 몇몇 노사정대표자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해서는 안된다.
현재 자본과 정부, 민주노총이 비정규개악입법 시기를 놓고 장난질할 가능성이 농후해지고있다. 4월 30일 43개 선거구의 재보선이 걸려있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는 상당한 부담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일부 기간제 사용사유 제한에 대해서 양보하면서 24일 최종 수정안을 던지고 대타협을 시도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다음 회기인 6월 국회로 넘길 가능성도 있다. 민주노총도 지금은 ‘4월 내 처리’를 주장하지만 작년 말에 그러했듯이 이것 자체를 성과로 가지고 가면서 또다시 현재의 비정규직 투쟁과 분리시켜 처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현재의 객관적인 상황을 봤을 때 ‘4월 내 처리’가 됐든 ‘6월 처리’가 됐든 인권위 안 수준 이상의 합의안을 내오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인권위안의 즉각적인 폐기!를 조직해야 한다!
노동계의 안으로 포장되어 있는 인권위 안이 실질적으로는 ‘현행유지 ->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담보’하는 안이라는 본질을 폭로하는 작업을 수행하자!
이것이 되지 않는 한, 민주노총이 형식적으로 잡아놓은 무기한 총파업은 결국 ‘인권위 권고안을 관철시키기 위한, 즉, 국가기관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할 때만이 그 투쟁은 위력적일 수 있다.
인권위 권고안 즉각폐기! 비정규개악입법 분쇄! 파견법 철폐!투쟁을 조직하자!
이러한 투쟁은 어디서부터 가능한가?
바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비정규투쟁의 확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현대차, 기아차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은 현재 확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립되어지고 있다.
이번 비정규 개악입법 다음에 자본과 정권은 당당히도 노사관계로드맵을 들이밀고 있다. 또한 연말까지 구체적인 하위법령까지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언제까지 적들의 분열공세에 선언적인 연대투쟁으로 답할 것인가?
그것의 한계가 지금 여실히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지금 당장, 비정규 투쟁을 지지, 엄호하는 투쟁을 조직하자!
적들이 정규직과의 연대고리를 끊으려 한다면, 우리는 아주 작은 현안투쟁에서부터 공동투쟁의 기풍을 정립해나가자!
정규직 노동자들의 눈과 귀가 쏠려있는 임단협 투쟁에서부터 비정규 요구안을 핵심요구안으로 상정하고 공동대응해 나가면서 그러한 연대투쟁의 흐름을 확산시켜 이후 하반기 노사관계로드맵 분쇄 투쟁에까지 이어나가자!
그럴 때만이 05년 투쟁이 적들에 대한 반격의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