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된 석불과 석탑을 간직한 개화산의 상징적인 명소
약사사(藥師寺)
▲ 약사사를 알리는 표석 |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을 둘러보고 북쪽으로 가면 약사사를 알리는 커다란 표석이 마중을 나
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왼쪽으로 가면 봉화정과 개화산전망대로, 오른쪽은 약사사, 개
화산전망대로 이어진다. 봉화정과 강서둘레길 1코스 서쪽 구간이 목적이라면 왼쪽 길로 가면
되고 약사사를 거치고 싶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된다. |
▲ 속세를 향해 활짝 문을 연 약사사 정문 |
약사사 표석에서 2분 정도 가면 개화산의 상징,
약사사가 모습을 비춘다. 개화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이 절은 창건시기가 정확치 않으나 앞서 언급했던 주룡선생과 관련된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온다.
신라 때 개화산을 주름잡던 주룡이 세상을 떠나자 매년 9월 9일마다 그가 술을 마셨던 곳에서
이상한 꽃이 피었는데,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그것이 개화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설화와
1827년에 송숙옥(宋淑玉)이 작성한 '개화산약사암 중건기'와 '양천읍지(陽川邑誌)'를
통해 신
라 때 창건된 것으로 우기고 있으나 신빙성이 있는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다. 개화산약사암중
건기와 양천읍지도 약사사가 알려준 내용을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대신
경내에 고려 때 석탑
과 석불이 있어 적어도 고려 중/후기부터 법등(法燈)을 킨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이후 18세기까지는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초기에 제작된 동국여지
승람(東國輿地勝覽)에 개화사로 나와 예전 이름이 개화사였음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임진왜
란 시절 격전지인 행주산성(幸州山城)과 양천(陽川) 고을의 중심지인 가양동이 근방이고, 개
화산은 이들을 이어주는 요충지라 그때 절이 파괴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절의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래를 펴는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1737년 좌의정(左議政) 송인명(
宋寅明, 1689~1746)이 절을 크게 중수하면서 송씨 가문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그는 어린 시
절 매우 가난했는데, 개화사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며 공부에 열중해 과거에 붙었다.
이후 재상에 오르자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개화사의 덕이라며 절을 중수하고 절 밑에 불량답
(佛糧畓)을
보시했다. 또한 영조(英祖) 시절 그와 가깝게 지내던 이병연(李秉淵)이 개화사와
송인명과의 끈끈한 사이를 '사천시초(槎川詩抄)'란 시로 표현했다.
봄이 오면 행연(杏淵) 배에 오르지 마오
손님이 오면 어찌 꼭 소악루(小嶽樓, 가양동에 있었음)만 오르려 하나
책을 서너 번 다 읽은 곳이 있다면
개화사(開花寺)에서 등유(燈油)를 써야지.
또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조선 미술의 한 획을 그었던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이병연
의
시를 보고 개화사를 찾아가 그림을 남겼는데, 그는 1740년부터 5년 동안 양천현감으로 있
으면서
개화사와 소악루를 비롯한 양천의 명승지를 아낌없이 화폭에 담아 당시의 정취를 아련
히 알려준다.
1799년 송인명의 후손인 송백옥(宋伯玉)이
절을 중수하고 중수기를 남겼으며 1827년 절이 퇴
락하자 처사 창선(昌善)과 청신녀(淸信女) 경자(京子)가 돈을 모아 기존 절터에서 몇 걸음 떨
어진 곳에 새롭게 자리를 파 절을 옮겼고 석불입상을 약사불로 삼으면서 절 이름을 약사암(藥
師庵)으로 갈았다. <이후 약수사(藥水寺), 약사사 등으로 변경됨>
1911년 봉은사(奉恩寺)의 말사(末寺)의 되었고, 1928년 주지 박원표(朴元杓)가 약사전을 새로
지었다. 허나 6.25 때 개화산이 치열한 격전지가 되면서 그나마 세운 건물이 모두 무너졌으며
가건물로 간신히 자리를 유지하다가 1984년 이후 대웅전과 감로당, 삼성각을 지어 지금에 이
른다.
그리 넓지 않은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위시하여 감로당과 삼성각, 범종각, 공양간
등
5~6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크게 지어진 감로당은 요사와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과 3층석탑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
해주며, 석불은 영험이 있다고 전해져 기도 수요가 제법 많다. 허나 경내에서 이들 외에는 고
색의
향기는 전혀 없다.
또한 경내 밑에는 개화산의 오랜 명물로 꼽히던 약수터가 있었는데 이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
다고 하여 중생의 인기가 대단했다. 이 약수터 때문에 절의 이름이 한때
약수사가 된 적도 있
을 정도.. 허나 1990년대 이후 계속되는 부적합 판정으로 수요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끝내 부
적합을 극복하지 못하고 2013년 봄에 완전 폐쇄되고 말았다. 석불과 더불어 절의 든든한 양대
밥줄이자 아주 착했던 약수터의 퇴장은 개화산과 절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졌고, 이제는 추억
이나
사진에서나 끄집어 봐야 되는 흐릿한 전설이 되어버렸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약사사는 숲에 둘러싸여 있어 산사의 향기도 그런데로 진하며, 절이 아담
하여 두 눈에 넣고 살피기에도 별 부담이 없다. 또한 방화역에서 절까지 길이 잘 닦여있고 도
보
20분 정도로 접근성도 괜찮으며, 차량으로 경내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절을 둘러보고 개화
산 봉화정과 강서구의 야심작인 강서둘레길 개화산숲길(개화산둘레길)을 겯드린다면 아주 영
양가
만점의 나들이가 될
것이다.
※ 개화산 약사사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① 지하철 5호선 방화역 3번 출구를 나와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방화5단지로터리이다. 여기
서 오른쪽(서쪽)으로 가면 방원중교 옆으로 약사사로 이어지는 길(금낭화로17길)이 나온다.
방화역에서 도보 20분
② 방화역 4번 출구를 나와서 북쪽으로 쭉 가면 방화역교차로 서쪽이다. 여기서 왼쪽(서쪽)으
로 가면 느티공원이 나오는데, 공원을 가로질러 직진하면 개화산이며, 여기서 직진을 하거
나 오른쪽으로 가서 심정묘 직전에서 왼쪽으로 오르면 약사사로 이어진다. 1번 코스보다는
5분 정도 빠르다.
* 약사사 공양밥이 꽤 맛이 좋다고 한다. 매일 12~13시에 점심 공양을 제공하며, 일반인도 공
양이 가능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332-2 (금낭화로 17길 261 ☎ 02-2662-2551)
* 약사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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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에서 바라본 범종각과 삼성각 |
절 정문을 들어서면 약사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바로 정면에는 3층석탑과 대웅전이 시
선을 주고 있으며, 왼쪽에 약사사 안내문과 매점, 범종각이, 오른쪽에는 주차장과 해우소, 감
로당이 자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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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점과 범종각(梵鍾閣)
범종각에는 1976년에 조성된 범종이 걸려있다. |
▲ 가건물로 이루어진 공양간 |
▲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전(佛殿)이긴 하
지만 겉모습은 거의 요사(寮舍)나 여염집 같은 분위기로 가운데 칸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구
조이다. 내부에는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중 칠성탱과 산신탱은 1960
년에 조성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삼성각 바로 옆에 공양간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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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팡이를 들고 앉아있는 독성상(獨聖像)
산신, 칠성과 달리 그림은 없다. |
▲ 전륜(轉輪)을 쥐어든 칠성상과 다소
빛이
바랜 칠성탱(七星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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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랑이를 거느린 산신상과
산신탱(山神幀) |
▲ 감로당(甘露堂) |
3층석탑을 사이에 두고 삼성각을 바라보고 선 감로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
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집으로 요사와 종무소(宗務所)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甘露堂','開
花山 藥師寺' 현판은 승려 석정(石鼎)의 필체이다.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
기에
좋으며, 벽면에는 십우도(十牛圖)와 혜능(慧能) 이야기, 백락천과 도림선사 이야기 등이
그려져
있다. |
▲ 약사사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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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뜨락 한복판에 3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로 약사사가 적어
도 고려 중/후기에 창건되었음을 가늠케 해주는 소중한 보물이다. 탑 높이는 4m로 땅에 바닥
돌을 깔고 1층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머리 장식은 어느 세월이 잡아
갔는지 없어진 것을 근래에 새로 붙여 고색의 때가 만연한 아랫 부분과 전혀 다른 피부색을
보인다.
탑은 길쭉하고 홀쭉한 모습으로 기단이 1층으로 간략화 되었고, 옥개석(屋蓋石)의 밑면 받침
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어 고려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중기 이후 탑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서울에는 오래된 석탑이 많이 있지만 정
작 토박이 옛 탑은 몇 되지 않는다. 토박이 고려 탑은 낙성대(落星垈) 3층석탑과 홍제동(弘濟
洞) 5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에 있음), 그리고 이곳 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왜정(倭政) 이후에
강제로 제자리를 떠나 상경한 것들이다. |
▲ 약사사 대웅전(大雄殿) |
동쪽을 바라보고 앉은 대웅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1988년에 중건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을 청기와로 수를 놓아 웅장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뽐내며 절의 왜소함을
능히 커버한다. |
▲ 대웅전 앞부분
정면 양쪽 모서리 기둥에는 힘차게 날아오르는 용을 그려놓아 대웅전의 화려함을
더욱 돋군다, 약사사가 더욱 발전하기를 바라는 뜻에게 용을 새겼을 것이다.
허나 중요한 것은 겉면이 아닌 내실이다. 너무 겉치례만 차리지 말고
속세와 중생을 위해 더욱 헌신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 대웅전의 붉은 닫집과 불단을 장식하는 여러 불상과 보살상들 |
장엄하기 그지 없는 대웅전 불단에는 1기의 석불과 7기의 불상/보살상이 있다. 그 뒤에는 조
그만
금동불이 거대한 병풍을 이루고 있는데, 거의 3천불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다 금동(金
銅) 일색인 곳에 홀로 빛바랜 돌로 이루어진 수수한 모습의 큰 불상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그가 3층석탑 다음으로 경내에서 오래된
존재로 이곳을 먹여살리는 든든한 밥줄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석불, 나머지 금동불은 그를
위한 조연이 된다.
비록 겉은 초라해 보일 지 몰라도 그의 가치는 그들보다 한참이나 높다. 다른 불상은 제쳐두
더라도 3층석탑과 그는 꼭 봐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석불 앞에는 조그만 금동석가불이 그를 후광(後光)으로 삼아 앉아있고, 좌우에는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그 옆에는 큼직한 약사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좌상이 중생을 굽어본다. 금동불은
모두 1995년 이후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것들이다. |
▲ 약사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0호 |
불단의 많은 불상을 거느리고 있는 대웅전의 주인장, 석불입상은 머리에 쓴 돌갓 밑에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를 통하여 고려 후기, 아무리 늦어도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약사사의 든든한 밥줄로 '개화산약사암 중건기'에 일장미륵(一丈彌勒)으로 등장한다. 불상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많으나 가슴 앞에 댄 두 손에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관음보살로 여
겨지기도 하며, 불상의 투박한 모습을 통해 고려와 조선 때 온갖 모습으로 재현된 미륵불(彌
勒佛)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그를 약사불(藥師佛)로 삼으면서 절
이름
을
약사암으로 갈았으며, 현재도 영험한 약사불로 삼아 애지중지한다.
이 석불은 현재 위치 바로 옆에 있었던 건물에 있었는데, 밑도리는 땅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
다가 1974년 그 건물을 부시고 대웅전을 조성하면서 불상 밑에 기단석을 만들어 편의를 제공
했다.
불상의 얼굴은 길고 넓적한데, 표정은 썩 별로이다. 경직된 인상에 두 눈은 너무 크기 때문이
다.
코는 세모로 오똑하나, 코 끝은 크게 닳아진 상태이고, 입은 그 모양만 확인이 가능하다.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어 중생의 고충을 듣기에는 별 지장은 없어 보이며, 머리에는
둥근 돌갓을 쓰고 있는데, 지방에 있는 미륵불에서 많이 보이는 모습이다.
어깨가 얼굴에 비해 너무 작고, 옷도 옷주름 몇 가닥이 표현된 것이 전부이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꽃을 든 불상의 이미지를 주며, 밑도리는 앞에 있는 금동석
가불과 불단에 가려져 확인이 어렵다. 그렇다고 실례를 무릅쓰고 확인하기에도 좀 그렇다.
썩 괜찮은 작품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끌리는 존재로 소망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자자해 많
은 이들이 찾아와 소망과 고충을 털어놓는다. 약사사가 지금에 이른 것도 거의 그의 공이다. |
▲ 후배 금동불을 압도하는 석불입상의 위엄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이 범하는 흔한 오류 중의
하나가 바로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겉모습으로 평가하지 마라.
생긴 건 저래도 꽤나 알찬 불상이다.
▲ 약사사 돌담길 - 약사사에서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 개화산 숲길 |
정말 오랜만에 발걸음을 한 약사사를 둘러보고 범종각 옆 매점 아줌마에게 이곳의 명물인 약
수터의 위치를 문의했다. (이때는 약수가 없어진 것을 몰랐음) 예전에도 와봤지만 그 약수터
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경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그 약수는 2013년 봄에 폐쇄되었다는 답변을 듣고 기운이
싹 빠지는 듯 했다. 안그래도 개발의 칼질에 많은 것을 잃어버린 서울인데 유명한 약수터 하
나가 허무하게 져버리니 천박한 개발의 칼질과 그 칼질을 개념 없이 조정하는 행정관청 밥버
러지들, 개발업자들이 심히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매점 아줌마가 목이 마르면 생수 1병에 500원이니 사먹으라고 그런다. 그래서 가난한 중생이
라 돈이 없다고 둘러대니 물 1컵 먹고 가라며 정수기 물을 제공했다. 약수터가 없으니
절도
천상 정수기 물에 의존하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다.
물을 싹 비우니 아줌마가 더 마시겠냐고 그런다. 그래서 더 달라고 하니 역시 한가득 담아 제
공한다. 그래도 이곳은 물을 주는 인심이 있구나 싶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절을 나와 개화
산숲길을
거쳐 개화산으로 올라갔다.
이후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