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상춘일(溪上春日)
성혼(成渾, 1535~1598)
오십 동안 푸른 산속에 살았는데
인간 세상 시비는 내 알 바 아니지
허름한 집이지만 봄바람 그치지 않아
꽃은 웃고 버들은 잠들어 한가하다네
五十年來臥碧山(오십년래와벽산)
是非何事到人間(시비하사도인간)
小堂無限春風地(소당무한춘풍지)
花笑柳眠閒又閒(화소우면한우한)
조선시대 성리학은 퇴계의 주리론(主理論)과 율곡의 주기론(主氣論)으로 큰
줄기가 나뉘었다. 이 두 이론을 절충한 이가 성혼이다. 만년에 잠깐 한양에
머물며 벼슬을 했으나 평생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을 사양했다. 파주에서 학문
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며 청빈하게 살았다. 그는 서인의 영수였으나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중재하려는 노력을 했다. 그러나 동인들로부터 정려립 모반 사건(1589)의
배후라는 의심을 지우지는 못했다. 성혼은 동인과 서인의 권력 다툼에 거리를
두며 자신의 학문적 이상에 맞는 실천적 삶을 추구했으나 세상이 그를 그냥 놔
두지 않았던 것이다. 쉬운 한자를 써서 물 흐르듯이 담담하게 펼쳐지는 이 시는
그의 희망사항이자 세상을 향한 항의였다.
[작가소개]
성혼(成渾)
자 : 호원(浩原)
호 : 우계(牛溪), 묵암(默庵)
시호 : 문간(文簡)
본관 : 창녕 성씨
출생 : 1535년(중종 30) 6월 25일
조선 한성부 순화방
사망 : 1598년(선조 31) 6월 6일 (향년 62세)
조선 경기도 파주목 파산서실
1. 개요
조선의 대표적인 문신.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또는 묵암(默庵),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보통은 우계로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
아버지 성수침은 조광조에게 학문을 배웠고, 기묘사화 이후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성혼은 이런 아버지 밑에서 학문을 배우다가 역시 조광조의 제자인 백인걸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이 때 이이를 만나게 되어 평생의 친구로 지내게 된다. 친구 이이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나갔으며 이이의 절친한 친구이자 서인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었으나 정작 이이와 학문적인 면에서는 다른 면을 보였다. 특히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한 왕복 서신에서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였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하였다. 이이가 죽자 낙향했지만 정여립의 난으로 인해 기축옥사가 일어나고 이후 서인이 집권하자 이조판서로 복귀했고 서인의 영수로서 정철과 함께 정계를 이끌었다. 하지만 1590년 곧바로 은퇴했으며 1591년 ≪율곡집(栗谷集)≫을 저술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동인 강경파로부터 끊임없이 공격당했다. 1594년 은퇴하고 1598년 병으로 사망한다.
3. 기타
1602년 기축옥사에 연루되었던 연유로 북인들에 의해 삭탈관직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후 1633년 복권되었다. 경신환국 이후 이이와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으나 남인이 집권한 기사환국 때 출향당했고 서인이 재집권한 갑술환국 때 다시 문묘에 배향되었다. 훗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질 때 소론에 속하는 사대부들은 대부분 성혼의 이론을 지지했기 때문에 소론의 시조 격으로 본다. 그럴 것이 그의 사위 윤황은 윤선거의 아버지이고 소론의 중추인 윤증이 성혼의 외증손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에 있으며 2011년에는 가까운 거리에 기념관도 생겼는데 인근 도로의 이름도 우계로.
딸의 12대손(외손자 윤문거의 11대손)이 윤석열 대통령이다.
첫댓글 은둔의 삶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밀려오는 쓰터레스
말끔히 넘겨버리시고
오늘도 화평하신 가운데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