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답하라, 고양 1989~1990 ② 89년의 시대상
오래 이어온 농촌사회 보수성과 안보 긴장감
소수 종교계, 진보 운동의 비빌 언덕 되어줘
제각각 다른 배경·열망 지닌 다양한 단체 출범
창간 3개월이 지난 1989년 9월, 주간고양(고양신문 전신)은 토당동 허스프라자를 떠나 주교동 세원빌딩으로 사무실을 옮긴다. 사진은 세원빌딩(교외선 고가철로 옆)의 현재 모습.
자유수호, 좌익척결… 접경도시 고양
35년 전 고양신문을 읽다 보면 접경도시 특유의 군사·안보적 긴장감이 고양군 주민들의 일상에 늘 가까이 존재했었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고양의 서쪽 끝 구산동에서 한강 하구 군사분계선까지 불과 10㎞, 종전 후 채 40년이 흐르지 않은 시점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분위기는 호국보훈의 달인 6월에 더욱 두드러졌다. 1989년 6월 한 달 동안 신문 지면에 소개된 호국·현충·반공 관련 소식만 꼽아봐도 10건이 넘는다.
한승수 상공부장관과 이한동 내무부장관이 각각 동산용사촌과 신도자활의용촌을 방문해 주민들을 격려했고, 한국자유총연맹 고양군지부(지부장 문기수)는 ‘북한사회 개방 촉구 군민대회’를 개최했다. 일산불교연합회와 고양군사암연합회는 백마부대 법당에서 ‘전몰장병 위령대제’를 올렸고, 고양군기독교연합회(회장 천상준)는 ‘북한선교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벽제읍에서는 ‘무공수훈국가유공자 묘비’가 제막됐고, 주민들이 각급 부대를 방문해 교류를 나누는 행사도 곳곳에서 열렸다.
행사에 참여하는 주민 규모도 놀랍다. ‘북한사회 개방 촉구 군민대회’에는 400여 명, ‘태극단 순국단원 합동위령제’에는 2000여 명, 고양군민회와 보수단체들이 개최한 ‘자유수호 결의대회’에는 무려 1만여 명의 군민이 참석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주최 측의 과장을 고려하더라도 꽤나 큰 규모로 치러졌음이 짐작된다. 행사장에서는 “북한의 위장 평화공세 경계! 준동하는 좌익세력 척결!” 등의 날선 안보 이데올로기 구호가 울려퍼졌지만, 일부에서는 동구권의 개혁·개방에 따른 기대심리도 표출됐던 것으로 보인다.
농활, 농계계, 농가부업… 농촌도시 고양
고양의 농촌사회적 성격을 보여주는 기사들은 주로 짧은 단신기사에 숨어있다. △1989년 5월에는 고양군대학향우회(회장 길대석) 학생들이 일산읍 장항1리에서 8일간 ‘농활’을 했고 △6월에는 말레이시아 공무원들이 벽제읍 관산3리 모범마을을 방문해 새마을운동의 발자취와 성과를 견학했다. △7월부터 9월까지 고양군의 중요한 업무는 가을 추수를 앞두고 관내 양곡상과 양곡보관창고의 상황을 점검하는 일이었고 △10월에는 관내 기관단체장, 기업체, 지역유지, 독지가, 출향인사들의 성금을 모아 ‘농촌 농기계 보내기 운동’을 활발해 전개했다. 그런가 하면 고양시 다수의 농가에서 ‘꿩사육’이 유망한 농가부업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도 등장한다.
서서히 싹튼 진보·시민운동
앞서 살펴보았듯 고양군의 주류 정서는 보수 강세였음이 분명하지만, 한쪽에서는 시민·학생의 힘으로 제도적 민주주의를 쟁취해 낸 ‘87항쟁’의 여파로 진보적 시민운동의 흐름이 서울과 고양의 경계를 조금씩 넘어오던 시기이기도 했다.
고양군에서의 초기 진보·인권운동이 기대었던 언덕은 종교계였다. 천주교 은평·고양지구청년연합회(회장 최태오)는 ‘오월에서 통일로’라는 주제로 광주추모제를 열고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과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패공연을 펼쳤다. 그런가 하면 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산하 경기북부인권위원회(위원장 유창열) 주최로 ‘고 이철규 군 사인 진상규명 촉구대회’가 일산제일교회에서 열리기도 했다. 신문기사는 “이날 참석한 대학생과 주민들이 일산제일교회에서 일산버스터미널까지 평화로운 가두행진을 벌인 후 자진 해산했다”고 적고 있다.
물론 당시 진보적 사회활동에 동참했던 종교계 인사는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은 민주·인권·교육·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민사회운동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 이를 방증하듯 20여 명에 불과한 ‘주간고양 후원회 발기인’ 명단에도 다수의 종교계 인사들의 이름이 확인된다.
앞서 소개한 행사들이 기독교계 지역조직이 주도한 성격이었다면, 지역의 자발적 시민운동 역량은 1988년 7월에 출범한 ‘고양군민주실천주민회(공동회장 유재덕·김재훈, 사무국장 김현식)’로 모아졌다. 주민회는 주교동에 작은 주민도서실을 열고 회원을 모집하기도 했고, 독서회와 풍물반, 노래반 등 주민들과 함께 하는 활동을 펼쳤다. 1989년 9월 기사에는 주민회가 처음 주최한 바자회가 성황리에 열려 기금확보와 교류 확대라는 목적을 달성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고양군민주실천주민회는 1992년 고양시 승격에 발맞춰 ‘고양시민회’로 이름을 바꾸고 오늘날까지 고양 시민운동의 중심축으로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고양시민회'의 전신인 '고양군민주실천주민회'는 1988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뜨겁게 타오른 전교조의 불꽃
1989년을 뜨겁게 달군 사회적 화두 중 하나는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깃발을 올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었다. 5월 출범한 전교조의 열기는 빠르게 확산돼 6월 말에는 전교조 고양·파주지회(준비위원장 이곤)가 원당읍 식사리 동광교회에서 결성됐다. 기사는 전교조 고양·파주지회에 가입한 교사 숫자를 20여 명으로 밝히고 있다. 하지만 전교조는 출범과 동시에 뜨거운 파장을 불러왔다. 고양에서도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고양군민주실천주민회 주최로 교사-학부모 간담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처럼 학부모와 시민사회에서는 전교조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교육 당사자인 학생들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행정당국의 조치는 가차 없었다. 한 달 만에 전교조 가입 교사 다수가 업무중지, 직위해제, 파면 등의 징계조치를 맞았다. 이에 교사들은 ‘전교조 사수, 가입교사 징계 철회’ 등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였고, 지역의 시민사회는 ‘전교조 탄압저지를 위한 고양·파주 공동대책위원회’(공동위원장 유창열·이재수)를 결성해 전교조 지지활동을 펼쳤다. 공대위에는 고양군민주실천주민회를 비롯해 NCC경기북부인권위원회, 경기북부민족민주운동연합, 경기북부정의평화실천목회자협의회, 고양군대학향우회, 항공대총학생회, 파주민우회 등이 이름을 올렸다.
전교조로 인한 갈등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된 곳은 일산종고였다. 전교조 해임교사 징계철회 요구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수업거부 사태가 장기화됐고, 급기야 모 학생이 교사와 물리적 충돌을 일으켜 퇴학당하고,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수갑에 채워져 연행되는 일이 발생한다. 기사는 “교사가 학생의 연고지를 빗대어 그 지역 출신들이 으레 폭력성이 있다는 말을 해” 학생을 자극했다고 밝히면서도 “교사는 체통이, 학생은 예의가 부족했다”는 양비론으로 마무리한다. 하지만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교사는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언행을 한 셈이고, 학생에게는 인권을 무시한 체벌이 가해진 셈이다.
앞서 언급한 공대위는 10월에 전교조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한 공청회 자리를 만들지만, 교육전문가와 관계공무원들이 불참하며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다. 전교조 고양·파주지회는 12월 고양군민주실천주민회가 새로 마련한 새 사무실에 함께 입주해 미래를 설계하며 파란만장했던 출범 첫 해를 마무리했다. 당시 고양파주 전교조 운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이끌다가 해직된 인물이 바로 (사)행복한미래교육포럼 최창의 대표다.
곳곳에서 성장하는 민간조직
보수-진보라는 구분과 상관없는 분야별 민간 조직들도 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신문에 실린 기사들을 모아보면 △‘재경고양군민회’(회장 허석)가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현판식을 가졌고 △슈퍼마켓 운영자들의 모임인 ‘상업협동조합 고양지부 발기인대회’가 25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새마을금고 고양군협의회’(회장 유순원)는 16개 지역금고 규모로 성장했고 △원당 프라자슈퍼 이은길 대표가 새로 창립된 ‘경기북부수퍼마켓협동조합’ 이사장에 취임했다. △‘새마을유아원 고양군협의회’(회장 정종득)는 새로 문을 연 문예회관 공연장에서 ‘제2회 우리들의 재롱잔치’를 열며 한해를 마무리했다.
또한 창립 10주년을 맞는 고양청년회의소(JC, 회장 이영태)는 훗날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김덕배 전임회장이 중앙조직에서 승승장구하며 전성기를 열었고, 고양로타리클럽(회장 임효순)과 와이즈멘 통일로클럽(회장 유재덕) 등 국제적 친교·봉사단체의 지회들도 조직을 안정되게 성장시켰다.
문화적 갈증… 스스로 샘 찾아나서
문화적 측면에서 1980년대 말 고양군 상황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23만이 넘는 인구를 가지고 있고, 서울과도 경계를 맞대고 있었지만 공연장이나 전시장 등은 물론, 군민을 위한 공공도서관조차 하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착공 3년 만인 1989년 9월에 개관한 고양군민회관(현 고양시청 문예회관과 체육관)은 공연장과 체육관, 도서관 등 다채로운 기능을 한곳에 아우른 문화요람으로서 주민들의 커다란 기대를 모았다. 개관과 함께 당시 최고 인기 MC였던 이상용의 사회로 군민 노래자랑이 흥겹게 열렸고, 체육관에서는 읍·면 대항 배구시합이 뜨거운 열기 속에 진행됐다. 군민회관 로비에서도 서예전, 미술전, 도예전이 열려 새로운 문화체험을 안겨줬다.
1989년 개관한 문예회관의 과거와 현재 모습.
오늘날의 눈높이로 보면 겨우 공연장 500석, 체육관 300석, 도서관 열람식 230석의 소박한 규모에 불과하지만, 당시로서는 처음으로 가져보는 공공의 문화 인프라였기에 자부심으로 내세우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척박한 토양에 문화의 씨앗을 뿌리려는 노력은 민간에서도 활기찼다. △삼십대 초반의 피아노조율사 김근배씨는 “문화적 갈증을 해소하고자” 자비를 들여 행주호텔에서 <이화 피아노트리오 초청 제1회 정기음악회>를 열어 화제가 됐다. △박기준 대표는 “군민정서를 함양하고 타지역과의 유대관계를 견고히 하는 견인차”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향토문화 촉매지 「고양문화」를 창간했다. △‘고양지역문화발전연구소’는 허스예식장을 빌려 <제1회 주부교양강좌>를 시작했다. △또한 12월에는 한국문인협회의 58번째 지부로 고양지부(고양문협, 지부장 강범우)가 창립됐다.
고양의 전통문화를 발굴·계승하는 작업은 고양문화원(원장 이은만)이 담당했다. 문화원은 행주문화제를 비롯해 다양한 행사를 주관하며 송포호미걸이·성석농악 등 고양의 전통문화를 소개했고, 새로 문을 연 문예회관 공연장과 전시공간을 활용해 연극·전시 등을 활발히 기획했다.
산아제한, 대청소… 연말엔 합동결혼식
지금과는 많이 다른, 당시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재미난 기사들을 좀 더 찾아보자.
1989년은 여전히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등의 구호로 기억되는 산아제한 인구정책이 유효하던 시기였다. 고양군보건소가 고양군 8개 가족계획시술 지정 병·의원을 방문해 의약품 현황과 시술자 사후관리를 지도·점검했다는 단신은 이를 잘 보여준다.
가족계획뿐만 아니라, 당시의 캠페인성 기사들에서는 주민들을 계도와 동원의 대상으로 여겼던 행정당국의 관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고양경찰서는 ‘명랑사회캠페인’이라는 공익광고를 시리즈로 게재하며 도난예방, 신고의식 제고, 지역봉사 참여 등을 독려했고 △고양군은 추석 명절을 앞두고는 열흘이라는 긴 기간을 ‘범군민 대청소 기간’으로 선포하고 주민들의 참여를 기반으로 하는 대대적인 환경미화사업을 추진했다.
또한 11월에는 연말을 앞두고 건전한 국민소비생활 정착방안의 일환으로 학생·공무원·군부대·기관단체를 동원해 ‘과소비 배격 편지보내기’ 운동을 한 달 동안 전개했다. 운동은 서울 동대문구와의 결연을 통해 참가자들이 편지를 맞교환하는 형식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얼마나 재미가 없었을까,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그런가 하면 장기근속공무원들에게는 부부동반 포상 여행이 주어졌는데, 행선지를 보니 구미공단과 창원공단, 현대중공업을 순례하는 산업시찰이다.
12월에는 고양군여성단체협의회와 고양군미용지부 후원으로 ‘동거부부 합동결혼식’이 원당예식장에서 열렸다. 기사는 각계각층에서 답지한 축의금이 16쌍의 부부에게 전달됐고, 합동결혼식을 마친 부부들은 주최 측이 대절한 택시를 타고 임진각에서 행주산성까지 드라이브를 했다고 전한다. 당시는 자유로가 없던 시절이니, 아마도 택시가 통일로와 호국로를 달렸을 것 같다.
일상에 관여했던 국가와 행정
앞선 내용에서 확인되듯 1989년의 고양은 정체된 농촌지역과 인구가 급증한 구도심들이 공존했고, 분단 이후 지속된 접경도시로서의 보수성과 새로운 시민사회를 열고자 하는 주체적 열망이 교차하던 시기였다.
또한 다양한 방식의 계도와 운동을 통해 행정이 주민들의 일상에 관여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일상감각을 당시와 비교해보자면 국가·행정의 관여는 거의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기업과 자본의 직·간접적 관여가 대체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렇고, 고양군민들이 처음으로 국가의 정책과 뜨겁게 맞짱을 뜬 ‘일산신도시 반대운동’은 그해 연말까지 어떻게 전개됐을까? 다음 연재에서 이어가 보자.
※ 참고자료 : 주간고양 1호(89.06.01)~14호(89.12.21)
1989년 제70회 전국체전 기념 고양군민 달리기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