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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의 기계화 - 자유
서기 2540년, 포드사의 T형 자동차가 자동화 라인에서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1908년으로부터 632년이 지난 시점이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여 모든 인간은 설정된 계급에 따른 인공 수정으로 태어나 습성훈련과 최면교육에 의해 즉시적인 쾌락을 한껏 즐기고 있으며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또 그들을 지배하는 최고통치자는 공동체 (Community), 동일성 (Identity), 안정성 (Stability)의 모토아래 인간의 개별성과 감정을 제거하는 대신 가난도 전쟁도 없는 모두가 행복한 세계를 추구한다.
이러한 세상에서 가족이나 예술, 종교는 무의미하며, 사랑, 증오, 연민, 고독, 절제 등의 감정은 거추장스럽기만 한 행복의 적일 뿐이다. 가끔씩 기분이 울적해질 때는 수시로 배급되는 소마(Soma)를 몇알 복용하면 된다.
사람들은 주구장창 흥겨운 놀이를 잔뜩 즐긴다. 합성음악, 냄새풍금, 촉감영화, 그리고 프리섹스 등등...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의 소유이다. 얼마나 많은 훌륭한 인간들이 이곳에 존재하는가! 오, 멋진 신세계여...."
하지만, 야만인 구역에서 데려온 존 이라는 모체(母體) 태생의 남자는 이러한 문명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내뱉고는 결국 죽음을 택한다.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神)을 원하고 시(詩)를 원하고 참된 위험(危險)을 원하고 자유(自由)를 원하고 그리고 선(善)을 원합니다. 그리고 나는 죄악(罪惡)을 원합니다"
"그래요,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합니다"
포드님(하느님) 맙소사!
이상이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1894~ 1963)가 쓴 미래풍자 소설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1932)에 대한 줄거리이다.
이 소설을 통해서 무엇이 인간의 참된 이상향일까? 과학문명은 인간의 자유, 도덕성과 어떤 함수관계를 갖는가? 인간이 공장에서 제품처럼 생산되는 세계, 모든 행동과 생각, 죽음까지도 통제되는 세계에서 인간은 어느 만큼이나 인간일까? 등 날카로운 철학적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그래, 진정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소설에 나오는 촉감영화 한편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2 기계의 인간화 - 책임
필립 K 딕 (1928~1982)의 소설 '안드로이드 (유사인간)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를 영화화한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1982)'는 SF영화의 고전으로 불리운다. 환경오염과 인간성 상실의 그늘을 짙게 드리우는 2019년 LA를 배경으로 인간과 복제인간의 정체성을 탐색한 이 영화는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과학문명이 어떻게 인류에 위협이 되는지를 복제인간의 시선에서 평가한 걸작이다.
인간과 복제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인간이 정해놓은 규칙이나 질서가 합리적이고 공정한가? 나아가 인간다움을 지닌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등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본질적인 화두를 던지고 있다.
21세기초 지구가 오염되고 인구가 폭증하자 인간들은 다른 행성에 이주하기 위하여 인간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복제인간(리플리컨트)을 이 행성의 개척에 투입하는데, 그 중 넥서스6로 불리는 6명의 복제인간들이 4년인 자신들의 생명을 연장받기 위하여 행성을 탈출하여 지구로 잠입한다. 지구에서의 삶이 금지된 복제인간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경찰은 이들을 색출해 제거할 능력이 있는 블레이드 러너, 릭 데커드를 호출한다.
데커드는 이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복제인간의 창조자 타이렐박사가 그의 조카를 이식해 만든 레이첼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한편 탈출한 복제인간중 일부가 마침내 타이렐 박사를 만나 수명연장을 요청하나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자 타이렐박사를 죽이고 자신도 고통스럽게 죽음에 임한다.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한 데커드는 극적으로 구해 주면서~
인간과 복제인간은 사물에 대한 감정이입(感情移入)과 기억력(記憶力) 에 다소 차이가 있을 뿐, 인간과 똑같이 피를 흘리고 눈물을 쏟는 등 외견상 구별이 거의 되지 않는다. 물론 복제인간들 역시 인간들과 똑같이 오랫동안 편하게 살고 싶을 것이고, 나아가 애완용으로 양이나 염소도 키우고 싶을 것이다. 어쩌면 복제인간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라기 보다는, 인종이나 민족, 성별, 빈부에 따라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를 상징할런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간이 편의를 위하여 만들어낸 복제인간이 반항이나 오류에 의해 도리어 인류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그 역시 인간이 뿌린 씨앗이 아니겠는가? 과학의 힘으로 완벽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고뇌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3 디지털 알고리즘(Digital Algorithm) - 위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 스마트폰부터 찾게 된다. 별다른 목적없이 수시로 메시지를 확인하고 알람이나 좋아요에 반응하거나 게시글을 클릭하는 습관에 물들어 있다. 과거에는 신문이나 잡지보는 모습이 흔했던 지하철 풍속도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는 장면으로 바뀐 지 오래 됐다.
이제 SNS, 검색, 쇼핑, 동영상 시청을 넘어 조만간 모든 스마트폰에 전자지갑이나 신분증, 신체 건강정보까지 탑재될 것이고, 생성된 빅데이터를 흡수한 알고리즘 (Algorithm)은 점점 정교해지질 것이다.
20여 년전에 개봉됐던 영화 '트루먼쇼 (1998)' 는 평범한 직장인 트루먼의 삶을 30년 동안 몰래 카메라로 생중계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다룬 코메디 영화이다. 5,000개의 카메라로 주인공의 일상을 24시간 감시하고 세계 200여 국가의 17억명이 이를 실시간으로 시청한다. 그의 주변 친구나 동료, 행인, 심지어 아내까지 이 트루먼쇼를 위해 고용된 배우들이다. 우연한 계기로 진상을 알게 된 주인공은 자유를 찾아 그 거대한 세트장을 탈출하기로 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오늘날 우리 모두가 자발적으로 트루먼쇼를 연기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게시물을 올리며 댓글을 달고 조회수를 체크하는 등 스마트폰의 편리한 온라인 서비스를 이용하는 대가로 개인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정보를 자신도 모르게 제공함으로써 영국의 지성 J.S 밀 (1806 ~ 1873)이 언급한 배부른 돼지로 대변되는 '행복한 무지 (Blissful Ignorance) '의 경지에 이르는 셈이다.
하지만, 그들 인공지능이 기반한 디지털 알고리즘은 우리가 어떤 콘텐츠에 반응하는 양태를 필터링하여 보고 싶은 것만 보도록 확증 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의 세계로 유혹, 고립 시킨다. 마치 주인이 던져주는 먹이에 반응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유도된 콘텐츠에 중독되고 사고 능력이 저하 된다면, 인간의 본향인 자유(自由) 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고, 오히려 과학기술이 이룩한 문명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혹시 누가 아는가? 머지 않은 미래에 알고리즘의 늪에 빠진 인간들이 합성 밀가루빵이나 인조 쇠고기를 씹으며 촉감 영화를 즐기게 될런지~
4 시민(市民)이 되는 길 - 과제
오늘날 우리는 중산층의 붕괴, 사회 양극화, 정치적 갈등, 리더십 부재 등 많은 난제속에서도 온라인 세계에서는 자유롭다는 착각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알고리즘이 허락한 만큼만 자유스럽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가장 완벽한 지배는 피지배자가 자유를 잃지 않았다고 착각한 상태에서 실현된다. 지옥으로 가는 길도 선의로 포장될 수 있듯이, 최근 대두되고 있는 메타버스, 스마트시티 역시 자칫하면 메트릭스 속의 거대한 감옥으로 변할 수도 있다.
'방안에 코끼리가 있다'는 말이 있다. 큰 문제나 위험을 알면서도 모두가 거론하지 않는 상황을 표현한 말이다. 이제 자유의 근원을 위협하는 전체주의(全體主義, Totalitarianism)의 위험에 서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전체주의는 극단적 형태의 정치 부정 이다. 이와 관련하여 알렉시스 토크빌 (1805~1859)의 민주적 독재론 (Democratic Despotism)이 먼저 떠오른다.
우리 사회의 근본적 문제는 민주주의의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다양성과 개별성이 무시된 단조로운 평범함 (mediocrity)을 갈수록 선호하는 성향이다. 특히 만연하는 물질주의는 고독한 대중의 의식을 장악해서 보편단순화, 정부의존성, 익명성을 강화시켰다. 게다가 디지털 시대 대중의 정치 무관심까지 더하면 알렉산더가 고르디우스 매듭을 풀었던 해법은 기대하기 어렵고, 보다 건전하고 보편적인 가치체계가 뿌리내리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계 유대인이었던 한나 아렌트(1906 ~ 1975)는 그녀의 역작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인권을 보호받기 어려운 것은 인권이 법앞에 평등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한 어떤 법(法)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공동체에 속할수 있는 권리'를 구현한 '국가(國家)'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역사에서 보았듯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지켜주어야 할 국가 역시 종종 전체주의의 도구로 전락한 아픈 기억이 있다.
그런 맥락에서 국민 스스로가 인간의 지성을 마비시키는 어떠한 프레임에서도 벗어나, 정치권력의 주체로서 바람직한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고 그 탈선을 감시하는 시민(市民, Citizen)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디지털 알고리즘 이라는 날개를 단 전체주의의 위험에 대비하여 가족이나 커뮤니티, 종교 등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는 시민이 되는 길은 더욱 험난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찍이 중국의 사상가 고염무(顧炎武, 1613~1682)도 "세상의 흥망은 필부도 책임이 있다 (天下興亡 匹夫有責)" 고 하지 않았는가?
시민(市民, Citizen)! 얼마나 가슴 뛰는 단어인가! 이번 미래(未來)로의 시간여행 (時間旅行)을 계기로 오랜만에 묘한 흥분을 불러 일으킨다. 아울러 그 시간 (時間)이 어떻게 흘러갈지도 여전히 궁금하다. 필연이건 우연이건 아니면 또 다른 차원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새삼 신은 죽었다던 짜라투스트라의 말씀들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태양과 달, 하늘과 대지, 낮과 밤, 그림자와 무덤, 독수리와 뱀, 곡예사와 광대, 여자와 아이... 그리고 아모르 파티(Amor Fati)!
하지만 아직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문명의 저편에 공동체(共同體)의 전통(傳統)과 인성 (人性)이 살아 숨쉬는 라다크의 '오래된 미래' 에 대한 미련이다.
*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는 니체의 초인(超人, 위버멘쉬)과 영원회귀(永遠回歸) 사상을 바탕으로 인류 진화 (人類 進化)의 여정을 표현한 세기적 명작이다. 동물의 뼈를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태초의 인간이 숱한 필연과 우연을 거쳐 우주궤도에 오르기까지의 과학문명을 창조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너머 기다리고 있을 세계를 숙제로 남기며~
니체의 철학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는 독일의 음악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의하여 동명의 교향시로 작곡되어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등장한다.
https://youtu.be/OM7rMCnb39k?si=sXEGk1OXt37YEdiy
첫댓글 근하신년, 새해 첫 글을 올립니다.
이 글은 주제와 내용이 광범위하여 제한된 지면에 축약 표현되다 보니, 다소 난해할 수도 있습니다. 혜량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