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의 여류시인 3
내가 세 번째 만난 진주의 여류시인은 김여정 시인이다. 서울의 김여정 선배님은 60년대 신석정 시인 추천으로 등단한 한국 대표 여류 중 한 분이다. 노년에 하남에 살면서 <김여정문학관>이란 사이트를 운영하고 계셨는데, 대구 김혜숙 수필가가 그분의 조카다. 그가 남강문학에 <김여정문학관>을 소개하길래 거사가 반갑다 싶어 거길 들락거리며 수필도 싣곤 했는데, 훗날 그 사이트에서 <김현거사 응접실> 이란 방을 하나 만들어주겠다는 제의가 왔다. 나로서야 불감청이로되 고소원이다. 그래 인연을 맺었고, 그 뒤 선배님이 8 순 기념 시 전집을 보내주었는데, 그 시전집이란 것이 보통 시인이 아무나 만들 수 없는 것이다. 1968년부터 2012년까지 발행한 열몇 권 시집에 실린 시를 모두 등재한 1천5백 페이지 방대한 전집이다. 화보를 펼쳐보니, 저자와 함께 포즈를 취한 박종화, 김남조. 김소운, 전숙희, 조경희, 신석초, 박목월, 구상, 조병화, 모윤숙, 이영도, 김후란, 허영자, 추영수, 유안진 등 문단의 별이란 별은 다 보인다. 송지영, 김구영 선생이 보낸 휘호도 있다. 그래 나는 작심하고 그 책에 실린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보기로 했다. 그중에서
이렇게 청초하고 수줍은 여인이 있었나
저녁 어스름 조심조심 밟아 내려오는
운악산 산자락
울울한 나무 그늘에 없는 듯 조용히
해맑은 미소 머금고 있는 은난초꽃
수줍디 수줍은 생면부지의 젊은 여인이
나도 몰래
내 마음을 빼앗아 가고 말았네
<은난초꽃>이란 시를 읽고는 맘에 들어 소감을 적어 보낸 적도 있다. 나는 그분을 진주성 섬돌 밑에 피어난 은난초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인연으로 언젠가 문인협회서 열린 김여정 문학특강에 가본 적 있다. 그런데 이 분이 자기 문학 이력을 소개하면서, 서두에서 진주 남강의 하얀 모래밭과 소싸움 이야기, 그리고 심훈의 상록수에 감명받아 진주에 야학 '한빛학원'을 세웠던 일, 진주의 이명길 이경순 설창수 시인 이야기를 풀어내다가 끝에서 느닺없이 거사를 지칭했다. '이 분은 수필을 너무나 잘 쓰는 분아라 나도 배울 정도'라는 말을 해주셨다. 그 바람에 거기 참석한 문인협회 회장단 등 다수의 작가들이 놀랬다. 강연 끝나고 우르르 몰려와 악수 청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나야 원래 기자와 기업체 임원 출신으로 문단엔 아는 사람도 없다. 문인들과 별로 사귀려고 한 적도 없다. 그런데 문단 원로가 갑자기 이런 말 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유명인 되었다. 그래 강연 끝난 후, 뭔가 인사를 해야겠다 싶어서 내가 닦아가서 그분에게 한 것이 데이트 신청이다. '단풍이 절정일 때 제가 선배님을 북한강 드라이브 코스로 한번 모시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가을의 북한강변 단풍이야말로 얼마나 붉고 아름다운가. 거기에 시의 연륜이 한국에서 알아줄만한 미모의 여류를 초청한다는 건 구색이 딱 맞는 일이 아니던가.
이렇게 날을 잡아 그 뒤 나는 아내와 함께 하남에서 선배님 모시고, 옥천에 가서 냉면 먹고, 유명산 넘어 비췻빛 하늘 아래 노란 은행잎이 물에 비치는 북한강 구경하고, 청평 가평 거쳐 남이섬 돌아왔다. 도중에 <백만 송이 장미> 영화 찍은 카페에 들러서 박종화, 신석초, 박목월, 구상, 조병화 등 유명한 문인 이야기 듣고, 친구인 모윤숙, 이영도, 전숙희, 조경희, 김남조 , 김후란, 허영자 시인 이야기도 들었다. 김여정 시인은 성균관대를 나와 기자 생활 한 분이다. 월탄 박종화 선생이 따님처럼 사랑해서 집에 불러 겸상까지 한 분이다. 성격이 화끈하고 거침이 없어 문단 험담도 많이 들려주었다. 이영도 시인과 청마의 부적절한 관계, 서영은과 김동리 선생과 손소희 선생 세 분의 삼각관계. 초정 김상옥 선생 이야기. 신봉승. 황순원. 젊은 시절 박경리 선생 이야기 등이다. 그렇게 생생한 문단 내력 아는 분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이화 여고 시절 학원에 시도 싣고 표지 모델 한 아내에겐 시 작법에 대한 조언도 들려주었다.
그런데 한때 한양의 시인묵객 가슴을 설레게 한 신문기자 출신의 지성적인 그 분과 데이트를 일회로만 끝낼 수는 없다. 그래 두 번째도 어느 비 오는 여름날 아내와 같이 미인과 양수리 세미원(洗美苑 )에 가서 백련 홍련 만개한 연꽃 구경했다. 그 후 강 건너 음식집에서 초계탕 맛보고, 바다처럼 넓은 팔당호 보이는 찻집에서 문단 히든 스토리 들었다. 원래 비 오는 날은 집 텃밭에서 방아와 깻잎 뜯어와 오징어와 고추 넣고 전 부쳐먹는 것이 제격이지만, 미인에게 이렇게 호숫가에서 옛이야기 듣는 것도 운치 있다. 또 한 번은 남강문학회 후배인 구자운 박사를 데리고 가서 선배님의 사진을 찍어드렸다. 후배란 선배 생전의 좋은 사진 만들어드릴 의무가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대시인인 그분이 나에겐 많은 시간을 허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오직 고향 후배라는 그 이유 하나 때문일 것이다.
나는 통영 박경리 선생 묘소에 가 본 적 있다. 통영은 작가 사후에 묘소를 마치 왕릉같이 만들어 모셔놓고 있다. 부러운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진주는 어떤가? 박경리 선생도 진주여고 출신이다. 그래 나는 진주 노시인들 면모를 짧으나마 글로 엮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