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13】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함께 일본으로 대표되는 아시아가 유럽과 나란히 세계사의 시스템에 가담하게 된 이상 유럽은 더 이상 보편적인 세계사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그러므로 이제는 새로운 세계사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 이것인 바로 유럽 중심주의의 세계사에 대응하는 제국 일본의 ‘세계사적 입장’이었다.
1945년 8월 베이징에서 일본의 패전을 듣게 된 최승희는 일본군을 대신하여 베이징의 치안을 맡게 된 장제스 군대가 친일파를 소탕한다는 소문을 듣고 외출을 금하고 있었다.
그 무렵 누군가 건네중 잡지 ‘漢奸’에 실린 ‘리샹란과 최승히는 일본 스파이’라는 기사를 본 최승희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최승희는 1946년 2월 장제스 군대에 연행됐다.
그후 1946년 5월 29일 인천항을 통해 귀국했지만 과거 친일행적 등이 문제가 되자 남쪽에 정착하지 못한 채 같은 해 7월 20일 밤 먼저 간 남편 안막의 뒤를 따라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그녀의 나이 35세일 때였다.
월북 이후 김일성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비교적 안정적으로 무용연구소를 운영해갈 수 있었던 최승희는 본격적으로 후진 양성을 위한 무용 교육을 실천하면서 동시에 북한 동맹국인 중국과 소련, 그리고 동유럽 국가로 순회공연을 이어갔다.
월북한 지 약 2개월 후인 1946년 9월 7일 김일성의 후원으로 평양 대동강변 연광정에 기숙사까지 갖춘 조선식 2층 건물의 ‘최승희 무용연구소’가 설립되었다.
당시 서울의 문화단체들이 사무실 한 칸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과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최상급의 호화로운 무용연구소였다.
더욱이 인근 사회주의 국가의 젊은 무용수들이 평양으로 무용 유학을 올 정도로 최승희의 명성도 최고조에 달했다.
1946년에 설립된 ‘최승희 무용연구소’는 1952년에 ‘국립 최승희 무용극장’ 산하의 ‘최승희 무용학교’로 바뀌었다가, 1953년 12월에 ‘국립 예술극장 부속 예술학교’와 통합하여 ‘평양종합예술학교’가 되었고, 1956년에 ‘국립 최승희 무용학교’로 변경되었다가 다시 1962년에 ‘평양예술대학’으로 승급되었다.
이후 1972년 ‘평양음악대학’과 통합하여 ‘평양음악무용대학’으로 바뀐 이후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월북 이후 최승희가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무용 기본의 정리와 체계화, 신인 무용가 양성, 무용 예술의 군무화, 민족무용극의 창조 등을 하는 일이었다.
최승희는 1950년 3월 ‘무용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발탁되면서 북한 무용계의 중심인물로 급부상했다.
더욱이 안막이 중앙당 문화선동부 부부장직에서 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으로 승급, 이어서 1949년 평양에 설립된 ‘국립음악학원’의 초대 학장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점차 북한 문화계를 장악해갔다.
글의 출처
제국의 아이돌
이혜진 지음, 책과 함께 출간
현재 대동강변 옥류관 자리에 있었던 최승희 무용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