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퍼 / 이재무
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슬리퍼처럼
편하고 만만했던 얼굴이 떠오른다
슬리퍼는 슬픈 신발이다
막 신고 다니다 아무렇게나 이곳저곳에
벗어놓는 신발이다 언감생심 어디
먼 곳은커녕 크고 빛나는 자리에는
갈 수 없는 신발이다
기껏해야 집 안팎이나 돌아댕기다
너덜너덜해지면 함부로 버려지는 신발이다
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안개꽃같이
누군가의 배경으로 살았던
오래된 우물 속처럼 눈 속 가득
수심이 고여 있던 얼굴이 떠오른다
https://naver.me/G0DXcwGt
슬리퍼가 있길래 / 황정희
편하게 나 너에게
슬그머니 끼워 넣어
뒤꿈치 질질 끌고
온 동네 헤집다가
구두로
갈아신으면
또각또각 걷는 걸음
편한 만큼 아내에게 막말하고 막 대하고
집 나서면 예의 바른 남의 편이 되어 있는
그러다
훌렁 벗겨져
맨발 될 수 있으니
(시조집 ‘그 사랑을 내가 쓴다’, 상상인, 2023)
욕실 슬리퍼 / 김영주
바르게 신어도 짝짝이로 보이고
고쳐서 신어도 짝짝이로 보인다
고것 참 희한하게도
벗어놓으면 맞다
슬리퍼 / 김륭
현관문 앞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슬리퍼
가끔씩 개에게 물어뜯기기도 하는 슬리퍼
밤새 총총 한 짝이 사라지기도 하는 슬리퍼
분명 슬리퍼도 무슨 생각이 있는 것 같다
슬리퍼 한 짝 / 박서영
꿈을 꾸려고 잠을 잔다
호박넝쿨 속에 아무렇게나
엎드려 잠든 슬리퍼 한 짝
질식하지 않으려고 벌린 저 아가리
끊임없이 벌레의 말을 먹고
벌레의 말을 낳는 슬리퍼 한 짝
나비가 신어보려고 끙끙대다가 훌쩍 날아갔다
제 몸보다 스무 배나 큰 날개를 달아보려고
허우적대는 꼴이라니!
나비는 낡은 옛집 지붕 위에 살며시 앉는다
그가 떠난 뒤 머리칼 같은 잡초들이 돋아난 지붕
점점 깊어지는 방안의 어둠
완강한 기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에도 기억의 문은 자주 열린다
오늘도 나는 깨진 창문으로 방안을 엿본다
누군가 두드렸던 북 하나 잠들어 있다
우는 것을 잊어버린 북이 운다
슬리퍼는 악기처럼 입을 벌린 채
나비들을 뱉고 있다
노란 환각이 진동하는 빈집 마당에
젖가슴 한 짝이 납작 엎드려
끝없이 호박꽃을 밀어올리고 있다
박서영 시집 『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슬리퍼 / 이문숙
지압 슬리퍼를 팔러 온 남자를 보고 생각났다
작년에 신다 책상 아래 팽개쳐 뒀던 슬리퍼
먼지를 폭삭 뒤집어쓰고 까마득 버려져서도 슬리퍼는
여전히 슬리퍼다
기억이란 다 그런 것이다
기억 속에는 맨홀 뚜껑 같은 확실한 장치가 없어서
그 아래 무언가를 고치러 들어간 사람을 두고도
꽉 뚜껑을 닫아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 남자가 질식하건 말건
그러다 숨을 놓기 직전
고철 덩어리 같은 기억을 붙들고서야
아차, 뚜껑을 열어보는 것이다
어쨌든 물건이라는 건 마지막이라는 게 없어서
먼지만 활활 털어버리면 또 슬리퍼가 된다
망각의 먼 땅을 털벅거리며 돌아다니고서도
금방 뒤축이 닳아빠진 슬리퍼로 돌아온다
작년 이맘때 어디서 무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발을 충실히 꿰차고
슬리퍼는 또 열심히 끌려다닐 것이다 저러다가도
슬리퍼는 또 책상 아래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처박힌다
기억이 그렇게 시킨다면
케케한 먼지와 어둠을 거느리고
누군가 슬리퍼를 사납게 끌며 또 어두운
복도 저쪽으로 사라진다
-천둥을 쪼개고 씨앗을 심다, 창비, 2005
슬리퍼 한 짝 / 강영란
옆으로 뉘여진 슬리퍼 한 짝. 나갈 때 놓여있던 모습 그대로다
단단하게 굳어진 화석 같다
평생을 단 한번도 움직여 보지 않았던 것처럼
타닥 타닥 그대 찾아다녀 보지 않은 것처럼
캄캄했던 그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채인 발에
같이 피 흘려 울어보지 않은 것처럼
완강한 모습으로 뉘여 져 있다
모든 돌아누운 어깨들은 저리 완강해서 온몸으로 발톱을 세운다
슬리퍼 한 짝 손에 들고 보니
무슨 생각의 길로 힘을 집중 시켰는지 중심이 골똘히 파여 있다
그 옆으로 실핏줄 같은 길들이 지도를 새기며 중심을 향해 있다
내 마음의 중심도 저렇게 파여 있었구나
옆으로 뉘여 져 쓰러져 있었구나
슬리퍼 바닥으로 스며드는 물소리
지꺽지꺽 녹스는 소리
한 짝을 들어 다른 한 짝 옆에 놓고 보니
몸의 결을 이룬 물결무늬 신발 바닥
둥글게 솟아난 눈물방울들이 패총으로 단단하다
2010년 《열린시학》봄호 신인상 당선시
강영란 시인
1998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 2010년 《열린시학》 봄호 신인상 등단. 저서로는 시집 『소가 혀로 풀을 감아 올릴 때』, 『염소가 반 뜯어 먹고 내가 반 뜯어 먹고』와 시,산문집 『귤밭을 건너 온 사계』이 있음. 제 5회 서귀포문학상, 제 1회
https://naver.me/GfCssjvR
슬리퍼 / 고나PLM
슬리퍼는
손이 안가는 신발이다
발만 가는 신발이다
신거나 벗을 때
손가는 일 거의 없다
손이 안가니 발 마음대로 한다
하는가보다
질질 끈다든지 혹은, 끌고 다닌다든지
마치 발이 아쉬워 슬리퍼가 들러붙은 것처럼
귀찮다는 듯 벗는다든지
느닷없이 신는다든지
마음만 먹으면 날려 버릴 수 있다든지
언제든 함부로 할 수 있는
신발에 손이 가면
손이 가는 신발은
쉽사리 발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없게 돼있다
운동화처럼
구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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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밤은 슬리퍼를 끌고 / 김미연
밤의 발자국이 찍히고 있다
골목을 빠져나간 빛의 그림자도 어둠에 덮이고
구겨진 말들이 도시의 골목에 뿌려진다
칠흑 속으로 하루의 꼬리가 기울고
둥지가 없는 비둘기 떼는
고가다리 아래 부리를 묻고 허기진 밤을 보낸다
막차는 긴 노선을 끌고 사라지고
길을 놓친 자정이 우두커니 정거장에 서 있다
역을 붙잡고 살아가는 불빛들
포장마차 백열등이 푸념 섞인 반쪽의 귀가를 붙잡아 앉힌다
이 도시는 잠들지 못한다
야식을 싣고 질주하는 오토바이는 밤의 맥박
24시 편의점 골목
슬리퍼를 끌고 온 불면이
충혈된 시간을 달래줄 술병 하나를 들고 나간다
절룩거리는 새벽이 그 뒤를 따라간다
거리를 방황하는 저 많은 외박과 가출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담뱃불에 밤의 심장이 타들어간다
시집 『지금도 그 이름은 저녁』 2022. 미네르바
슬리퍼, 쓰레빠 / 정익진
슬리퍼, 왠지 쫄딱 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저것 봐,껌 짝짝 씹으며, 두 손 청바지 앞주머니에
팍, 찔러 넣고 삐딱하게, ‘에이 제기랄’ 하는 표정으로
쓰레빠 질질 끌고, 기산비치상가 앞을 지나는군,
저 자식이 앞으로 커서 뭐가 되려나?
너 도대체, 어딜 그렇게 쏘다니냐?
중학교 다닐 적, 수학 선생님에게 숙제 안 해왔다고
쓰레빠로 뺨도 맞아봤어. 에이, 재수 없는 그놈의 쓰레빠
퉤, 퉤,
쓰레빠, 확실히 방정맞고 불량스러워.
슬리퍼라고 말을 바꾸어 봐도, 본질적으로 재수 없군.
근데 말이다. 일요일 새벽까지, 술 마시고,
조금만 자다, 목욕탕 가려고 겨우겨우 일어나,
어질어질, 운동화조차 제대로 신을 수 없을 때,
그때, 그놈의 쓰레빠가 그리 반가울 수가
해수탕을 나와 바닷바람 한 번 쐬고
송도초등학교 근처 오뎅집, ‘아! 그집’을 향해
슬리퍼 끌고 올 때의 아! 그 상쾌함이란
펑키젤리 슈즈다, 아쿠아 샌들이다 뭐다
유행이라지만, 역시 슬리퍼 신고 소똥에 미끄러진
표정을 지으며 ‘쓰레빠를 질질 끌고’가야
그게 제 맛이야.
시집 <윗몸일으키기> 2008. 북인
스무 살 슬리퍼의 퇴임사 / 서범석
너는 떠나고 나 홀로다,를
햇살 밝은 방바닥에 펼친다
질긴 20년이 나를 허물지 않았느냐,를
닳고 해진 뒤꿈치에 새긴다
당신의 온몸을 온몸으로 떠받치고 살았다,를
비스듬히 파인 뒤축에 숨긴다
너와 더 살더라도 너는 날 버렸을 거다,를
낡고 병든 몸으로 가슴 벅차게 말한다
우리 둘을 엮어 준 등줄기는 아직 멀쩡하다,를
벌레 먹은 낙엽같이 추억으로 남긴다
앞코가 지금도 용기 있게 나갈 수 있도록 사랑이 가벼웠다,를
너의 사랑이었다고 입속으로 읽는다
네가 방 안에 들어올 때마다 우리는 한 몸이 되었다,를
기꺼이 고백한다
네가 떠난 이 방을 나도 지킬 수 없다,를
내 사랑에게 분명하게 밝힌다
너의 퇴임이 나의 정년이었다,를
질질 끌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쓰레기통으로 간다
짧지 않았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며 하늘로 갈 것이다
「딩하돌하」2015 ,봄호
슬리퍼 / 이현승
꿈에 신발을 잃어버렸다.
익숙한 식당에 우르르 가서 먹은 점심이었는데,
꿈이란 이상도 하지. 익숙한 식당인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고
우르르 가서 먹었는데, 정확하게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고
내 신발만 없었다. 두세 번 신발장을 뒤져도 나오지 않자
곧바로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너무 식상한 꿈이잖아.
그래도 우르르 몰려나가는 사람들의 뒤꽁무니만 보다가
남겨지는 기분은 별로여서 진짜 신발을 잃어버린 것처럼 언짢았다.
도대체 어떤 원만한 분이 남의 신발을 신고 간 것일까.
도대체 어떤 사람의 말 못할 이유가 내 발을 묶어놓은 것일까.
훔쳐간 것이 아니라면 결국 한 켤레의 구두는 남겨질 테지.
식당 주인이 내민 욕실용 슬리퍼를 신고 서서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꿈속에 붙들려 있어야만 하는 걸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찾아서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벌써부터 꿈 밖에선 언제까지 잠만 잘 거냐고 야단인데
남겨진 구두의 주인들의 식사는 끝없이 이어지고
앉아서 기다리시라는 주인의 말을 한사코 밀쳐두고서
나는 왜 이렇게 붙들려 신발장을 지키고 있는지
나는 왜 신발 지키는 사람의 자세로 누워 있는지
나는 언제부터 머리는 꿈에 두고 발은 이렇게 한데 두고 있는지
낡은 슬리퍼의 오후 / 윤경희
신호를 기다리는 슬리퍼 한 짝을 본다
차들이 지나가자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중력의
지느러미들이
네 손을 끌었듯이
직립을 잃어버린 비스듬한 저 오후
굴레 벗은 그림자 비늘처럼 가볍다
보폭이
제멋대로다
흐늘흐늘한 네 유영 游泳
*개작(56호는 <죽순>지 발표)
https://naver.me/5uIYY0kB
슬리퍼처럼 편한 것도 없습니다.
질질 끌고 다니는 것이
영 내가 살고 있는 삶 같아서
날 떠받치다 말 운명을 알고 있기나 한 듯
다리를 꼬고 앉을 때는
꼭 뒤꿈치에 틈을 내버립니다.
발목을 까딱거리며
그 간격만큼 방정을 떨어보지만
어디 만만한 것이 슬리퍼뿐이겠습니까?
왜 나는 화장실에 앉아 생각없이
문에다 대고 세마치 장단을 두드려 보는지,
이를 닦다가도 왜 거울 속 사내를 노려보는지,
왜 가끔씩 귀신 꿈 대신 UFO꿈만 꾸는지,
한때 슬리퍼가 하루종일 나를 데리고 다녔던 시절에도
나에게는 천국이 없었습니다.
"오빠 운동화는 더럽고 냄새난단 말야!"
"미안해..꼭 3등해서 운동화상품탈께..그때까지만 이거 같이 신자"
알리. 그 녀석의 착한 눈빛.
아, 슬리퍼는 슬리퍼일 뿐인데
왜 질질 끌고 다녀야만 내 것일 것 같은.
하루종일 무언가에 끌려
사무실 일을 마치다보면 문득,
해진 슬리퍼 하나 벗어 놓은 일이
어쩌면 내 삶의 화두가 아닐까.
신기도 편하여
벗기도 편한 이승의 삶이 아닐까.
나는 내내 슬리퍼처럼
퍼지고 슬퍼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