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진리보다 사람의 행위를 더 중요시하고
진리보다 사람이 만든 교단을 더 중시하는 굳어진 마음이 너무 답답합니다.
그것을 나무라듯 진리에 반응하는 뜻밖의 영혼을 주셔서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하고, 또 상황을 정리시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남겨진 마음들에 성령께서 역사하시옵소서.
새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금요일이니 역시 공원 연주갑니다.
아마 오늘이 올해 마지막 공원 연주가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뭇 영혼을 만나 주님께로 인도하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4.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15.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16.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공의만 전하겠나이다
17.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18.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19.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큰 일을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20.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21.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2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23.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24.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본문 주해)
14~18절 : 시인은 모태에서부터 어릴 때와 젊었을 때도 주를 의지한 삶을 살아왔다.
평생 주를 의지하며 살아왔으니 얼마나 많은 비난과 조롱을 받았을까?
주를 의지한다는 자가 여러 가지의 어려움을 겪을 때 사람들은 조롱하게 되어 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과정을 지나고 이제 늙어가지만 더욱더 주님을 찬송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는 늙고 쇠약하였으나, 다음 세대를 위하여 이 일을 계속하기를 원한다.
그때까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지 말아주시기를 간구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금까지 그러한 것처럼 백발이 되었어도 주의 의로 이루신 놀라운 구원을 전하기 원한다.
그저 건강하게 살다가 죽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주의 힘과 능력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19~21절 : “하나님, 주님의 의로우심이 저 하늘 높은 곳까지 미칩니다. 하나님, 주님께서 위대한 일을 하셨으니, 그 어느 누구를 주님과 견주어 보겠습니까?
주님께서 비록 많은 재난과 불행을 나에게 내리셨으나, 주님께서는 나를 다시 살려 주시며, 땅 깊은 곳에서, 나를 다시 이끌어내어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전보다 더 잘되게 해주시며, 나를 다시 위로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새번역)
주님의 의의 길이란 평탄한 길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겪는다. 그런 고난 가운데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신다고 한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장사 된 우리를 일으키시고 하늘에 앉히심을 말한다.(엡2:6)
그러므로 늙었지만 지금도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위로하여 달라고 하는 것이다.
21절의 ‘창대’는 ‘더 잘 된다’(새번역)은 의미로서, 땅에서의 자아확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늙어서도 주의 일을 더 잘 전할 수 있는 ‘창대함’을 가리킨다.
22~24절 : “내가 거문고를 타며, 주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르렵니다. 나의 하나님, 주님의 성실하심을 찬양하렵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님, 내가 수금을 타면서 주님께 노래를 불러 올리렵니다.
내가 주님을 찬양할 때에, 내 입술은 흥겨운 노래로 가득 차고, 주님께서 속량하여 주신 나의 영혼이 흥겨워할 것입니다.
내 혀도 온종일, 주님의 의로우심을 말할 것입니다. 나를 음해하려던 자들은,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하고, 오히려 수치를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새번역)
시인은 모태에서부터 백발이 되기까지 여러 고난을 겪었지만, 그 고난도 주의 성실하심이라고 찬양한다.(22절)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시119:75)
이런 고백은 신앙으로 살어온 자, 백발이 되어야 나오는 찬양이다.
그리고 그의 찬양 이유는 주님께서 영혼을 속량해 주셨기 때문이다. 영혼이 속량 된 자들은 종일토록 주의 의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아들을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행적은 대적들에게 수치와 치욕을 안겨준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2:15)
시인은 그가 늙고 쇠약하여도 다음 세대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의 행적을 증거한다.
그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께서 세상 끝날까지 그와 함께 하신다.
(나의 묵상)
시인의 소망은 한 가지이다.
늙어서 죽을 때까지 주님을 전하는 일이다.
주님을 찬송하고(14절), 주의 공의와 구원을 전하고(15, 16절),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고(17절), 주의 힘과 능력을 후대에 전하는(18절)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현재 늙어버린 자가 된 것이다.
늙었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쇠약해짐을 의미하며 어린아이처럼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될 때 더욱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을 전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모태로부터 백발이 되기까지 주님을 찬송하고 주님을 전했던 시인이 이제 비록 늙어 한계에 부딪치며 또 대적들의 조롱을 받는 상황이 되었을지라도 후대의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하는 이 일을, 영혼이 춤추는 듯한 기쁨으로 하게 해 달라는 간구이다.
주님께서 창세전에 나를 택해 주셔서 오늘날 나도 주님을 의지하며 주의 일을 증거 하는 자가 되게 해 주셨다.
내 인생이 말씀 안에서 해석이 되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죄인인 나를 구원해 주셔서 이 복음과 생명을 전하는 자로 창세전부터 계획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을 가리킨다.
나는 평소에 두 가지 경우에 내 영혼이 기뻐 춤추는 것을 느낀다.
하나는 새벽에 일어나 말씀 앞에 나아가 주님과 교제의 시간을 가질 때이고, 또 하나는 그때 받은 은혜를 다른 영혼에게 전하거나 나눌 때이다.
어제는 안면이 있는 목사님께 이 은혜를 전했다.
목사님은 우리가 행하는 일들-영지 교회의 사역 등-에는 칭찬하고 부러워했지만, 복음과 생명의 은혜에 대한 반응은 몇 가지 의심스러운 질문을 하는 등 다소 냉소적이었다. 그리고 교단과 교파의 원칙 등을 핑계로 거리를 두려고 하셨다.
나는 ‘인간이 만든 교단과 교파가 어찌 창세전부터 계신 말씀보다 앞설 수 있을까요? 라고 말했다. 목사님은 잠시 더듬거렸지만, 이내 자신의 태도를 고수했다.
마음에 답답함과 실망이 몰려왔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의 만남을 그것으로 끝이 나는가.... 했다.
그때 너무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남편과 내가 열렬하게 말하고 있는 동안 옆자리에 앉은 어떤 여자분이 슬그머니 우리 얼굴이 마주 보이는 비껴 맞은 편 자리로 옮겨 앉았다.
나는 그것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목사님께 말하는데만 열중하였는데, 나중에 남편이 말하기를 그 여자분이 내내 우리 대화에 귀를 기울이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대화가 그렇게 머쓱하게 끝나고 일어서는데, 그 여자분이 내게 와서 자기가 너무 은혜가 되어 눈물을 흘렸다고,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일행 넷은 모두 너무 놀랐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렇게 냉랭한 목사님께, 주님께서 사람을 보내어 깨우쳐 주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런 상황이 되니 목사님도 후속 생각이 있을 것이란 마음이 들고, 성령께서 그 마음을 주장하여 주실 것을 마음으로 기도했다.
주님께서 너무 특이한 경험을 하게 하시니 결과는 미미해도, 마음에는 기쁨이 넘친다.
복음이신 주님을 전하고, 만물 위의 주님과의 사귐과 교제를 전하는 나를 기뻐하시고 응원해 주시는 주님의 숨결을 어깨너머로 경험한 것이다.
늙어 죽을 때까지 자신을 버리지 마셔서 주님의 의를 전하는 일이 더욱 창대해지기를 원하는 시인의 마음에 나도 ’아멘!‘을 수없이 외치며, 오늘 하루를 열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묵상 기도)
주님,
주님 행하신 모든 일을 찬양합니다.
죄범벅이 저를 구원하여 주신 것과
그에 그치지 않고 주님과 교제하게 하신 것과
또 그것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시인처럼 이제 확연히 늙어가는 육체를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힘있게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예수님을 믿고 전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저의 결심으로 되지 않는 것을 아오니
매일 말씀 앞으로 달려가 아버지 품속에 안길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오늘 '묵상여행'님의 글을 대하며 이전에 묵상했던 유사신앙의 권력을 다시 떠올립니다.
"타자의 시선이 권력으로서 다가올 때, 타인(타자의 시선)은 감옥이다(사르트르). 인간은 타자의 시선으로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은 본래적 자기로 살지 못하며,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평균적 일상성에 맞추어 살아간다.
시선의 권력이 종교의 영역으로 옮겨오면 무서운 힘으로 작동한다. 교회에서 전통과 교리는 거스를 수 없는 권력으로 작용한다. 타자가 믿는 대로 믿어야 하도록 강제한다. 시대성을 반영한 교리나 전통이 영구한 것으로 고착되면, 그것은 권력이 되어 신앙의 자유를 빼앗고 참 신앙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어떤 교리나 전통이나 권위로 제한할 수 없는 자유자, 곧 스스로 있는 자이다."
미국의 구약학자 ‘월트 브루그만’의 기도문은 전통이나 교리나 특정한 경건이 권력화되는 위험을 지적하였다.
“우리는 교리라는 망치와 경건이라는 못을 들고 당신이 우리가 정한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당신의 손과 발에 하나씩 망치질하려 합니다. 못 박으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곳에 있는 당신을 발견합니다. 우리와 늘 함께 있지만,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당신을 보고 계속 놀랍니다.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시다가도 뿌리째 뽑아 없애시는 주님,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리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는 주님, 우리에게 선택과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고 하면 우리는 분명 당신을 고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자유 안에서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주님, 당신의 자유를 우리에게 주십시오. 우리가 자유롭게 당신과 동행하게 하소서. 당신의 자유를 우리 삶에 허락하셔서 우리 또한 당신을 따라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모두를 위해 당신의 자유를 이 땅에서 보여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