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 아메리카나인가 ‘겸손한 미국’인가
버락 오바마가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기뻐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나라마다 다르겠지만, 으뜸 가는 이유로 조지 부시 2세 행정부에서 절정에 이른 패권주의와 일방주의가 사라지거나 크게 약화되리라고 기대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세계 평화를 파괴하면서도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는 미신에 사로잡혀 제 나라를 ‘절대적 선’으로 단정하고, 필요할 때마다 어떤 나라들을 ‘악’으로 규정해서 무력으로 공격하거나 경제적으로 억압하는 미국의 행태를 보고 양심적인 사람들은 진저리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팍스 아메리카나는 2차 대전 뒤 미국 주도하는 세계의 평화 의미
팍스 아메리카나는 라틴어로 ‘미국의 평화’라는 뜻이다. 풀어서 말하면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의 평화를 의미한다. 이 말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에서 따온 것이다. 기원전 1세기 말에 제정(帝政)을 세운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부터 이른바 ‘5현제’ 시대까지 약 200여 년 동안 로마가 그 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화롭고 무력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일도 최소한으로 줄었던 시기를 가리킨다.
팍스 아메리카나는 1945년에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뒤 미국이 지배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자랑하는 가운데 서방세계에 상대적인 평화가 찾아온 기간을 말한다. 이 시기에 미국과 동맹국들은 국지전쟁(한국, 베트남, 페르시아만, 유고슬라비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 개입했지만 주요 서방 국가들 자체에서는 무력 충돌이 없었고 핵무기도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라면 팍스 아메리카나는 어디까지나 미국과 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평화’를 규정한 일방적인 용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미국이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기라고 말하는 1945년부터 21세기 초의 10년 가까운 때까지 65년 동안 한국과 베트남의 전쟁에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최근에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참혹한 살육 행위가 벌어지고 있다. 그 모든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은 언제나 미국이 맡았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도 권력의 정치· 경제· 군사적 목적에 떠밀려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팍스 아메리카나는 ‘지배자들의 평화’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이 베트남전 이라크전 등 개입해 수백만명 희생당한 팍스아메리카나, 지배자들의 평화일뿐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말이 번지던 무렵인 1960년대 초에 특이하게도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그런 용어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소비에트 진영도 미국인들과 똑같은 개인적 목표를 가진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다면서, ‘미국의 전쟁 무기들’에 바탕을 둔 평화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81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이 팍스 아메리카나를 크게 외치기 시작한 이래 30년 가까이 이 말은 ‘세계의 경찰 또는 헌병’을 상징하는 대명사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글의 앞 부분에서 간략히 언급했듯이, 레이건은 국제사회의 무법자이자 폭군이었다.
그는 결국 레바논에서 (미국의) 해병대를 철수시키기는 했지만, 1981년에 리비아 해안에서 ‘위협적인’ 리비아 전투기들을 격추하라고 명령하고, 1983년에는 좌파정권으로부터 그레나다를 ‘해방’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 그는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에 석유 유통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페르시아만에 해군 호위함들을 보내고, ‘전략방어 선도정책’을 도입함으로써 무기 경쟁의 열기를 높였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소련의 귀에 거슬리는 말들을 더 많이 썼다.
1984년에 쉽사리 재선된 그는 두 번째 임기 중인 1986년에 리비아 폭격을 승인하고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는가 하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표현했다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 2009년 1월 22일자 ‘특집기사’에서).
레이건은 재임 8년 동안에 국방예산을 35%나 늘리면서 ‘힘을 통한 평화’를 추구했다. 이것은 팍스 아메리카나가 ‘미국만을 위한 평화’였음을 알려준다. 반면에 그는 메디케이드처럼 비군사적인 프로젝트에 대한 지출을 줄이고, 장애인들을 위한 사회보장에 관한 시행령들을 까다롭게 만들면서 저소득층의 국민 수백만 명이 누리던 감면제도를 폐지해버렸다. 레이건은 또 리처드 닉슨이 1971년에 시작한 ‘마약과의 전쟁’에 수십억 달러를 쏟아 붓고도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팍스 아메리카나에 관해서 오래 남을 ‘명언’을 남겼다.
“미국의 국방 정책은 단순한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미국은 전투를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침략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CIA 국장 출신 첫 대통령 기록한 조지 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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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H. W. 부시는 1837년의 마틴 밴 뷰런 이래 현직 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레이건 밑에서 두 번이나 부통령으로 일한 그는 중앙정보국(CIA) 국장 출신으로는 첫 대통령이라는 기록도 남겼다. 미국의 정보 행정을 총괄하면서 세계 온갖 지역에서 벌어지는, 미국의 이해관계가 걸린 일들에서 ‘007식 작전’을 지휘하던 기관의 책임자가 국가원수가 된 것이다.
1924년 매서추세츠주에서 태어난 그는 금융가이자 연방 상원의원인 프레스콧 부시의 아들로서, 특권을 누리며 안락하게 청소년 시절을 보낸다. 예일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1948년에 졸업한 그는 석유업으로 돈을 벌려고 텍사스주로 한다. 조지 부시 1세와 2세가 석유와 인연을 맺은 것은 그것이 시초이다 (석유는 이 아버지와 아들이 중동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되고, 9· 11 테러 뒤 부시 부자가 오사마 빈 라덴과의 수상한 관계 때문에 언론의 추적을 받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석유업으로 백만장자가 된 조지 부시 1세는 연방 하원의원, 유엔 주재 미국대사,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 주중 미국대사를 거쳐 제럴드 행정부에서 중앙정보국장으로 임명된다. 그야말로 ‘화려한’경력이다. 그러나 이런 화려함이 언제나 가진 자와 힘센 자의 편을 들게 하는 동인이 되는 것은 이들 부자가 대통령으로서 여실히 입증한 바 있다.
그는 레이건의 높은 인기 덕분에 당선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제 여건이 상당히 좋았기 때문이다(‘레이거노믹스’[레이건식 경제정책]가 큰 재정적자를 낳고, 결국 아들 부시 임기 중 미국 경제를 파탄 직전으로 몰고 가는 씨앗이 되었음은 나중에 드러났지만). 부시 1세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미국을 ‘더 친절하고 더 신사다운 나라’로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석유시장의 동향에 늘 민감한 부시 1세는 (이 글의 앞 부분에서 간단히 다루었듯이) 1990년 8월,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이라크군대가 세계 최대의 산유국인 사우디 아라비아로 밀고 들어갈 것을 걱정했는지, 유엔의 지원을 받아 연합군을 구성해서 이라크를 상대로 대규모 전쟁을 시작한다. 미군 42만5000여 명, 연합군 11만8000여 명은 ‘사막의 폭풍’이라는 작전으로 100 시간도 안 걸려서 이라크군 100만여 명을 패퇴시킨다.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이 빌미를 주었다 하더라도 부시 1세의 대응은 무자비하게 파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패전 뒤에도 사담 후세인은 계속 권좌에 앉아서 분풀이 식으로 쿠르드족을 살육했다.
석유시장 동향 민감한 부시1세 1차 이라크전 일으켜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부시 1세는 미국에서 인기가 하늘을 찔렀으나 국내 경기가 침체에 빠지자 선거 공약을 깨뜨리고 세금을 올린다. 이 때문에 보수적 공화당원들이 이탈함으로써 그는 1992년 선거에서 빌 클린턴에게 패배한다.
조지 부시 1세도 레이건처럼 ‘명언’을 많이 남겼다.
“내 을 읽어 보라. 새로운 세금은 없다.”
“링컨의 이 펜실베이니아 대로 1600 번지(백악관)에서 마침내 결실을 맺어서 흑인 남자 또는 여자가 오벌 오피스(대통령의 집무실)에 앉는 날이 올 것이다(그날은 멀지 않았다) .그날이 오면, 가장 주목할 것은 얼마나 자연스럽게 그 일이 일어나는가이다.”(이 말은 그로부터 20년도 채 안 되어서 버락 오바마를 통해 실현되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예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