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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빛과 흑암의 역사 (성경연구,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원문보기 글쓴이: 우림과둠밈
[주일설교(12.08.05)]
/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이장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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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 여호수아 11장
에베소서 1:19~23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 2012. 8. 5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지난주에 하나님의 강력한 위력으로 역사하신 능력이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그 능력이란 평소에 우리가 생각하는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능력은 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입니다. 대선에서 대권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것들을 능력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자기의 이름이 높아집니다. 세상에서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교회에서조차 능력으로 통하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미련하고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여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여 알게 되는 하나님의 능력의 강력한 역사를 통하여 무엇을 알리시고자 하시는지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강력한 역사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의 보좌에 앉히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일에 예수님 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 앉히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성령으로 함께 묶어주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임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내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무엇인지 보려고 합니다.
본문 21절과 22절 중간까지를 보겠습니다.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신 분이시며 모든 만물이 그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는 주가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 아들에게 주시는데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까지도 다 포함합니다. 세상의 권세와 능력과 주권만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까지 다 포함합니다. 또한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세상이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입니다. 이 세상, 이 세대에도 예수님은 주와 그리스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시작되는 오는 세상에서도 예수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십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자기 이름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하나님의 원수임에도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더 문제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도 오직 자기의 이름만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자기의 이름이 무시를 당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자기의 이름을 알아줄만한 다른 곳을 찾아 나섭니다. 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면서도 늘 자기들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는 모습이 우리 안에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5~27절입니다.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가장 큰 권능을 행하신 마을에서 회개하지 아니하는 모습을 보시고 책망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27절을 보시면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자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서도 믿지 못하는 그들을 향하여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자들이란 자신들의 능력이 있는 자들이지만 어린 아이는 자신의 능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없는 어린 아이들이 알아들었다는 것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만 알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모릅니다. 그 이유는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신이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아담 이후의 어떤 인간도 스스로 빛을 찾아나아 올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1~13절을 봅니다. “봉독” 새 신자 성경공부 시간에 요한복음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이 말씀이 사람들의 생명과 빛입니다. 그러나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둠을 사랑하였기에 빛을 싫어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합니다.
이름에 대하여 조금 더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름을 부여 받았다는 것은 피조물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일 마지막에 사람을 만드시고 이름을 주십니다. 그 이름이 아담과 하와입니다. 이렇게 이름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물과 새들의 이름을 붙이게 하십니다.
창세기 2:19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드신 들짐승과 각종 새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담이 창조주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붙여주는 사람이 권세 자가 됩니다. 이런 권세를 부여 받았지만 금지한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정녕 죽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전에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셨기에 아담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약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하여 심판을 받아 마땅한 상황에서 구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구원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한 구원은 구약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 중에 몇 곳만 찾아봅니다.
시편 23:3절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106:7~8절입니다. “7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8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이사야 48:9~11절입니다. “9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10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11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행하실 새 일을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하여 28절에서 모태로부터 배약한 자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구하여 내십니다.
에스겔 20:42~44절입니다. “42 내가 내 손을 들어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고 43 거기에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미워하리라 44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함으로 각 나라에 흩어졌습니다. 그러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구원하실 때에 자기들의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스스로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죄를 알고 미워하게 되는 것은 구원받은 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자신의 어느 정도 악한 자인지 알게 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한 구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구약에서 계시하셨지만 구약의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이라는 수건이 가려져서 여호와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일하시는 그 구원의 뜻을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미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구원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분명하게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자기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 드러내셨습니다.
요한복음 5:39~40절입니다.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함에도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자기 영광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일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자기들의 영광을 챙길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홀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1~13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세상에 나타내었습니다. 이제는 아들을 영화롭게 함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루어내신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결론입니다. 자신을 비워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이 아버지의 이름을 온전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맡겨진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시고 다 구원하여 내신 이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이름을 가장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창세전의 영화이지만 그 인자됨으로 인하여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권세를 다 주셨기에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본문 21~22절을 다시 봅니다. 오는 세상만 아니라 장차 나타날 세상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은 가장 뛰어난 이름입니다.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권세들도 다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입으로 주라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이루어지는 자들은 구원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자기의 이름만을 위하여 살면서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지 않는 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2:5~11절입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입니다. 현 세상과 장차 오는 세상에서도!
[주일오후설교]
/ 여호수아 11장
여호수아 11장 2012. 8. 15
11:1~5.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한 남부동맹이 진멸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북부 동맹이 형성됩니다. 북부 동맹의 주동은 하솔 왕 야빈입니다. 이들의 동맹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 군대가 해변의 수많은 모래와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한 대도 없는 병거입니다. 이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메롬 물가에 진을 쳤습니다.
6~15.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북쪽 연합군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얼마나 두려워하였는지 1장에서도 보았습니다만 대군을 마주한 여호수아가 두려웠기에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붙여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내일 이맘때에 그들을 몰살시키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으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적들을 진멸하고 말의 뒷발의 힘줄을 끊고 병거를 불살랐습니다. 이 모든 것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모세는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말과 병거가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데 이것을 무용지물로 만들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여호와의 전쟁은 말과 병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달린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은 병마와 아내와 은금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이 많은 것이 세상의 힘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왕은 이런 것으로 힘을 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신17:15~17). 이 말씀대로 다윗은 노획한 말의 힘줄을 끊었습니다(삼하8:4). 그러나 솔로몬은 이 모든 말씀을 다 거역하였습니다. 그 결과 나라가 나누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우리의 힘으로 삼고 살아갑니까? 여호와의 구원은 말과 병거에 달린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에 달린 것입니다(시20:7). 그 이름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요12:13).
16~20. 가나안의 다른 지역들까지 점령하는 기간은 오랜 기간이 걸렸습니다. 이제 거의 온 땅이 이스라엘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기브온 족속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이유를 20절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대적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들을 진멸하여 바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연합하여 대적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로 왕을 강퍅하게 하신 것처럼 그들이 대적한 것은 그들을 멸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 수많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집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러실 수가 있느냐고 합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하여 집단적으로 반발하며 나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이런 말씀을 보면서 자기 자신이 진멸을 당해 마땅하다고 여기는 사람이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자들은 기브온 족속처럼 종의 종이 되어도 감사할 따름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아직도 우리는 자기의 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기 죄를 모르기에 범사에 원망과 불평과 짜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입지 못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모습입니다(살후 2:9~12.참고).
21~23.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들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들의 성읍들을 진멸하여 바쳤으므로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고 합니다. 그러나 전쟁이 그쳤다는 것은 제일 강한 요새를 정복하고 깃발을 꼽았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헤브론을 정복한 갈렙의 승리로 전쟁이 그쳤다는 것을 앞에서 마무리하면서 말한 것입니다. 갈렙이 여호와를 온전히 쫓았기에 아낙 자손(거인 족)이 사는 헤브론을 정복하게 됩니다. 이것으로 전쟁이 그쳤다고 합니다(수14:13~15).
그러나 11:22절에 아낙 자손이 사는 세 곳은 점령하지 못하였습니다.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인데 이 세 곳이 이스라엘의 옆구리의 가시가 되어 괴롭힙니다. 사사시대에 이 세 곳의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얼마가 괴롭혔는지 나옵니다. 우리 안에 끊어져야할 것들이 아직 끊어지지 아니한 것들이 무엇입니까?
첫댓글 말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