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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밖에 불성이 따로 없다(心外無佛性)>
삼계(三界)가 뒤섞여 일어나지만, 함께 한 마음으로 돌아간다.
앞 부처와 뒷 부처가 마음을 가지고, 마음에 전하고, 문자(文字)를 세우지 않는다.
“만약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마음을 삼습니까?“
그대가 나에게 묻는 것이 곧 그대의 마음이고, 내가 그대에게 답하는 것이 곧 나의 마음이다.
나에게 만약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그대에게 답할 수 있겠으며, 그대에게 만약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나에게 물을 수 있겠는가?
나에게 묻는 것이 곧 그대의 마음이니, 시작 없는 아득한 과거로부터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이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모두가 그대의 본래 마음이고, 모두가 그대의 본래 부처이다.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말 역시 그와 같다.
이 마음을 제외하고 얻을 수 있는 다른 부처는 결코 없으며,
이 마음을 떠나 밖에서 깨달음과 열반을 찾을 수는 절대로 없다.
스스로의 본성(本性)은 진실하여,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다.
법(法)은 곧 마음이라는 뜻이다.
스스로의 마음이 바로 깨달음이며, 스스로의 마음이 바로 열반이니,
마음 밖에서 부처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처와 깨달음이 모두 어디에 있는가?
비유하자면 사람이 손으로 허공을 붙잡으려는 것과 같으니, 붙잡을 수가 있겠는가?
허공은 다만 이름일 뿐이고, 모양은 없어서,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허공을 붙잡을 수 없는 것처럼, 이 마음을 없애고 밖에서 부처를 찾을 수는 결코 없다.
부처란 스스로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인데, 어떻게 이 마음을 떠나 따로 부처를 찾을 것인가?
앞 부처와 뒷 부처가 다만 그 마음을 말할 뿐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마음이다.
마음 밖에 부처 없고, 부처 밖에 마음 없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마음 밖에 이미 부처가 없는데, 왜 부처라는 견해를 일으켜서 서로 속이고 속는가?
본래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저 무정물(無情物, 불상)에게 사로 잡혀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만약 믿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속일 뿐 이익이 없다.
부처에게는 허물이나 근심이 없는데, 중생이 거꾸로 되어 있다.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해도,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만약 자기의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안다면,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않을 것이니,
부처가 부처를 헤아리지는 않는다.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찾는다면, 부처를 알지 못한다.
밖에서 부처를 찾기만 하면, 모두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부처를 가지고 부처에게 절할 수는 없으며,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생각할 수는 없다.
부처는 경(經)을 외우지도 않고, 부처는 계(戒)를 지키지도 않고, 부처는 계를 범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지키고 범함이 없으며, 선(善)도 악(惡)도 짓지 않는다.
만약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본성을 보아야 하니, 본성이 곧 부처이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염불(念佛)하고 경을 외우고, 재(齋)를 지내고, 계(戒)를 지킨다고 하여도 이익될 것이 없다.
염불하면 인과(因果)를 얻고, 경을 외우면 총명(聰明)을 얻고, 계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날 수 있고,
보시(布施)하면 복된 과보(果報)를 얻지만, 끝내 부처를 찾지는 못한다.
만약 스스로 밝게 깨닫지 못하면,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서 생사(生死)의 근본을 밝혀내어야 한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 한다면, 선지식이라고 할 수가 없다.
만약 이와 같지 못하면, 비록 12부경을 설명할 수 있더라도, 역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면하지 못할 것이고,
삼계(三界)에서 받는 고통을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이다.
옛날 선성(善星) 비구는 12부경을 외울 줄 알았지만, 도리어 스스로는 윤회를 면하지 못했으니,
본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성(善星)이 이미 그와 같았는데,
오늘날 사람들이 서너권의 경론(經論)을 강의할 수 있는 것으로 불법(佛法)이라고 여긴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만약 자기의 마음은 알지 못하면서 쓸데없는 글들만 외운다면,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바로 본성을 보아야만 한다.
본성이 곧 부처이고, 부처는 곧 자재(自在)한 사람이며, 할 일이 없는 사람이고, 조작함이 없는 사람이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하면, 종일 아득하고 어두워서 밖으로 쫓아 다니며 찾겠지만,
부처를 찾아 보아야 원래 부처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얻을 수 있는 한 물건도 없지만, 아직 깨닫지를 못했다면,
역시 선지식 (善知識, 일체 이치를 요달한 불조<佛祖>의 혜명을 상속받은 분)을 찾아가
반드시 끈기 있게 공부해서 마음이 알아차리도록 해야 한다.
살고 죽는 일이 크니, 헛되이 시간을 보내서는 아니된다.
스스로를 속여 보아야 이로울 것이 없다.
비록 값진 보배가 산처럼 쌓여 있고, 일가 권속이 강의 모래알처럼 많더라도,
눈을 뜨면 보이지만, 눈을 감아도 보이는가 ?
그러므로 유위(有爲)의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급히 스승을 찾지 않는다면, 헛되이 일생을 보낼 것이다.
그러므로 불성(佛性)은 자신에게 있지만, 스승을 말미암지 않는다면, 끝내 밝혀낼 수가 없다.
스승을 말미암지 않고 깨닫는 자는 매우 희귀하다.
만약 자기 스스로 인연을 깨달아 성인(聖人)의 뜻을 얻는다면, 선지식을 찾을 필요가 없으니,
이런 사람은 곧 태어날 때부터 자질이 남다른 뛰어난 공부꾼이다.
만약 아직 깨달아 알지 못했다면, 반드시 부지런히 끈기 있게 선지식을 찾아 배워야 하니,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깨달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스스로 밝게 깨닫는다면, 배우지 않아도 될 것이니, 어리석은 사람과는 같지가 않다.
흑백을 분별하지도 못하면서 망령된 말로써 불교를알린다면, 부처를 비방하고, 법을 헛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리는 법을 말하는 것이 내리는 빗물처럼 유창하더라도 모두가 마구니의 말일 뿐, 부처의 말은 아니다.
스승은 마구니의 왕이고, 제자는 마구니의 백성이니,
어리석은 사람이 저 백성을 떠맡아 이끌어 모르는 사이에 생사(生死)의 바다에 떨어진다.
그저 본성을 보지 못한 사람이면서 망령되이 부처라고 자칭한다면, 이러한 중생은 죄가 큰 사람이니,
저 일체 중생을 속여서 마구니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하고서도 12부 경전의 가르침을 말한다면,
이것은 모두 마구니의 말이며, 마구니 집안의 권속이지, 불법의 제자는 아니다.
이미 흑백을 구분히 못하는데, 무엇에 의지하여 생사를 면할 것인가?
만약 본성을 본다면 곧 부처이고, 본성을 보지 못하면 곧 중생이다.
만약 중생의 본성을 떠나서 따로 얻을 불성(佛性)이 있다면, 부처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중생의 본성이 곧 불성이다. 본성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가 곧 본성이다.
본성을 제외하고는 얻을 부처가 없고, 부처를 제외하고는 얻을 본성이 없다.
<미혹한 마음으로 만행을 해도 윤회는 면치 못한다( 迷心萬行 未免輪回)>
“만약 본성을 보지 않더라도, 염불하고, 경을 외우고, 보시하고, 계를 지키고, 정진(精進)하고,
널리 복되고 이로운 일을 한다면, 성불(成佛)할 수 있습니까?“
“성불할 수 없다.“
“어찌하여 성불할 수 없습니까?“
“얻을 수 있는 조그마한 법이라도 있다면, 이것은 유위법(有爲法)이고,
인과법(因果法)으로서, 과보(果報)를 받는 것이니, 곧 윤회(輪廻)하는 법이다.
생사(生死)를 벗어나지 못하고서, 어느 때에 불도(佛道)를 이룰 수 있겠는가?
성불이란 모름지기 본성을 보는 것이다.
만약 본성을 보지 않으면, 인과(因果) 등의 말들은 외도(外道)의 법이다.
만약 부처라면, 외도법(外道法)을 익히지 않는다.
부처는 업을 짓는 사람이 아니니, 부처에게는 인과(因果)가 없다.
다만 얻을 수 있는 조그만 법이라도 있기만 하면, 모두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니, 어떻게 성불하겠는가?
하나의 마음(一心)에든, 하나의 능력(一能)에든, 하나의 이해(一解)에든, 하나의 견해(一見)에든,
머물기만 하면, 부처는 전혀 용납하지 않는다.
부처에게는 지키거나 범할 것이 없다.
마음의 본성은 본래 공(空)이니, 역시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
모든 법은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고,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다.
부처는 계율을 지키지도 않고, 선(善)을 닦지도 않고, 악(惡)을 짓지도 않고, 정진(精進)하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다.
부처는 만드는 일이 없는 사람이니, 마음에 머물러 부처를 본다면, 용납되지 않는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니, 부처라는 견해를 만들지 말라.
만약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한다면, 어느 때든 어느 곳에서든 결코 본래 마음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만약 자성을 보지 못하고서, 언제나 ‘만드는 일이 없다’라는 생각을 만들려 한다면, 이것은 큰 죄인이고,
어리석은 사람이고, 무분별의 허공 속에 떨어져서 어둡기가 술취한 것과 같은 사람이어서 좋고 나쁨을 판별하지 못한다.
만약 만드는 일이 없는 법을 닦으려 한다면, 먼저 반드시 자기성품을 본 연후에야 반연하는 생각이 쉬어지는 것이다.
자성을 보지 못하고도 불도(佛道)를 이룰 수 있는 경우는 절대 없다.
어떤 사람은 인과(因果)를 무시하고 마구 악업(惡業)을 짓고는, 망녕되이 말하기를,
‘본래 공(空)이니 악한 일을 해도 허물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사람은 무간흑암지옥(無間黑暗地獄)에 떨어져 영원토록 벗어날 기약이 없다.
만약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견해를 지어서는 안된다.
“이미 움직이고 동작함이 언제나 모두 본래 마음이라면, 육체가 무상(無常)할 때에 어떻게 본래 마음을 보지 못합니까?“
“본래 마음이 늘 앞에 드러나 있지만, 그대 스스로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이 이미 드러나 있는데, 무슨 까닭에 보지 못합니까?“
“그대는 꿈을 꾼 적이 없는가?“
“꿈 꾼 적이 있습니다.“
“그대가 꿈을 꿀 때에, 그대의 본래 몸인가?“
“본래 몸입니다.“
“그대의 말과 움직임과 동작은 그대와 따로 있는가, 따로 있지 않는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이미 따로 있지 않다면, 곧 이 몸이 그대의 본래 법신(法身)이고, 이 법신이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이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과 다르지 않아서, 생기거나 사라진 적이 없다.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고,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고, 옳고 그름도 없고, 남녀의 모습도 없고,
승속(僧俗)과 노소(老少)도 없고, 성인(聖人)도 없고, 범부도 없고,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고,
닦아서 깨달음도 없고, 원인도 결과도 없고, 근력(筋力)도 없고, 용모(容貌)도 없다.
마치 허공과 같아서,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고, 산이나 강이나 석벽(石壁)이 가로 막을 수도 없다.
나타나고 사라지고 가고 옴에, 자재(自在)하고 신령스러이 통한다.
오온(五蘊)의 산을 통과하고, 생사(生死)의 강을 건너니, 어떤 업(業)이라도 이 법신(法身)을 구속할 수 없다.
이 마음은 미묘(微妙)하여 보기가 어려우니, 이 마음은 색심(色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니, 사람들은 모두 볼 수 있기를 바라지만, 이 광명(光明) 속에서 손을 움직이고,
발을 움직이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물어 보면 전혀 말하지 못하는 것이 마치 나무로 만든 사람과 같다.
모두가 스스로 받아서 사용하는데, 무슨 까닭에 알지 못하는가?
부처가 말하기를 ‘모든 중생은 전부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 까닭에 업을 지어서
생사(生死)의 강에 떨어져 나오고자 하지만 도리어 잠겨 버리니, 단지 본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중생이 만약 어리석지 않다면, 무슨 까닭으로 물어 보면 그 가운데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으며,
스스로 손을 움직이고 발을 움직이면서도 무슨 까닭에 알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성인의 말은 잘못됨이 없는데, 어리석은 사람이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밝히기가 어려워서 오직 부처 한 사람만이 이 마음을 잘 알아차릴 뿐,
나머지 사람들과 하늘사람과 중생들은 전혀 밝게 깨닫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만약 지혜가 이 마음을 밝게 깨달으면, 바야흐로 법성(法性)이라 이름하고, 또 해탈이라 이름 하니,
생사에 구속받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 그를 구속할 수 없으니, 일컬어 크게 자유로운 으뜸가는 여래[大自在王如來]라 하고,
또 생각과 말로 하지 못한다[不思議, 부사의]고 하고, 또 성스러운 바탕[聖體, 성체]이라고 하고,
또 영원히 살아서 죽지 않는다[長生不死]고 하고, 또 큰 신선[大仙]이라 한다.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바탕은 곧 하나이니, 성인(聖人)이 여러 가지로 분명한 것이 모두 자기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마음의 크기는 광대하고, 응대하여 작용함은 끝이 없다. 눈에 응해서는 색을 보고, 귀에 응해서는 소리를 듣고,
코에 응해서는 냄새를 맡고, 혀에 응해서는 맛을 알고, 나아가 움직이고 동작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이다.
언제나 말길이 끊어지기만 하면, 곧 자기 마음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여래의 색(色)은 다함이 없고, 지혜 역시 그러하다.’라고 하였다.
색에 다함 없음이 곧 자기 마음이고, 마음인 의식이 모든 것을 잘 분별함과 나아가 움직이고 동작함이 모두 지혜이다.
마음은 모습이 없고, 지혜 역시 다함이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여래의 색은 다함이 없고, 지혜 역시 그러하다.’고 한 것이다.
사대색신(四大色身)이 곧 번뇌이니, 색신에는 생멸(生滅)이 있기 때문이다.
법신은 언제나 머물러 있으니, 다시 머물 것은 없다.
여래의 법신은 한결같아서 다르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經)에서 말하기를, ‘중생은 불성이 본래 스스로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라고 하였다.
가섭(迦葉)은 다만 본성(本性)을 깨달았을 뿐이다.
본성이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본성이다. 바로 이것이 모든 부처의 마음과 같다.
앞 부처와 뒷 부처가 다만 이 마음을 전하였을 뿐이다. 이 마음을 제외하고는 얻을 부처가 없다.
뒤집힌 중생은 자기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밖으로 치달려 찾아서 하루 종일 바쁘다.
염불(念佛)하고 예불(禮佛)하지만, 부처가 어디에 있는가?
이와 같은 견해를 지어서는 안된다. 단지 자기 마음만 알면, 마음 밖에 다시 다른 부처가 없다.
경(經)에서 말하기를 ‘무릇 모습 있는 것은 모두 허망(虛妄)하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있는 그곳에 곧 부처가 있다.’ 고 하였다.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이니 부처를 가지고 부처에게 절해서는 안된다.
부처와 보살의 모습이 문득 앞에 나타나더라도, 결코 절하고 공경할 필요가 없다.
나의 마음은 텅 비고 고요하니, 본래 그런 모습은 없다.
만약 모습을 취한다면 곧 마구니에게 포섭되니, 모두 사도(邪道)에 떨어진다.
만약 (불상과 보살상이라는) 환상(幻想)이 마음에서 생긴다면, 절할 필요가 없다.
절하는 자는 (진실을) 알지 못하고, (진실을) 아는 자는 절하지 않는다.
절 하는 것은 마구니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학인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할까봐 염려되어, 그 때문에 이렇게 판별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와 여래와 본성(本性)의 바탕 위에는 전혀 이러한 (부처와 보살의) 모습이 없다는 것을 반드시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다른 경계가 있더라도, 결코 붙잡아 취할 필요가 없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의심할 필요도 없다.
나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니, 어느 곳에 이와 같은 모습이 있겠는가?
나아가 천룡(天龍), 야차(夜叉), 귀신(鬼神), 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 등의 모습에 대해서도,
또한 마음을 써서 공경하거나 귀중하게 여기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나의 마음은 본래 텅 비고 고요하니, 모든 모습은 전부 허망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결코 모습을 붙잡지는 말라.
만약 부처라는 견해, 법이라는 견해를 내고, 부처라는 모습, 보살이라는 모습을 내어서,
공경하고 귀중하게 여긴다면, 스스로 중생의 처지 속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만약 진실로 알아차리고자 한다면, 다만 어떤 모습도 취하지 않으면 될 뿐, 달리 할 말은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길 ‘무릇 있는 모습들은 모두 허망하다.'고 하였으니, 전혀 정해진 진실은 없는 것이다.
환상(幻相)에는 정해진 모습이 없으니, 이것이 곧 무상(無常)한 법이다.
단지 모습을 취하지 않기만 하면, 저 성인의 뜻과 합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모든 모습을 떠난 것을 모든 부처라고 일컫는다.’라 한 것이다.
각(覺)이란 신령스럽게 깨어 있는 것이다.
기연(機緣)에 응하고, 사물을 대하며,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깜빡이며,
손을 움직이고, 발을 움직이는 이 모든 것이, 자기의 신령스럽게 깨어 있는 본성이다.
본성이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도(道)이고, 도가 곧 선(禪)이다.
선(禪)이라는 한 글자는 범부도 성인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본성을 보는 것이 선(禪)이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하면, 선이 아니다.
설사 천 권의 경전과 만 권의 논서를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다만 범부일 뿐, 불법(佛法)은 아니다.
지극한 도는 그윽하고 깊어서 말로써는 알아차릴 수가 없으니,
경전의 가르침이 어떻게 미치겠는가?
단지 본성을 보기만 하면, 한 글자도 몰라도 된다.
자기 본성을 보는 것이 바로 부처이다.
성스런 본바탕은 본래 청정하여 잡스런 때가 없다.
있는 말들은 모두가 성인(聖人)이 마음에서 일으켜 사용하는 것이다.
작용이니 본체니 하는 것은 본래 헛된 이름이다.
말로 미치지도 못하는데, 12부 경전으로 어떻게 미칠 수 있겠는가?
도(道)는 본래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어서, 닦아서 증득(證得)할 필요가 없다.
도는 소리와 색이 아니니, 미묘하여 보기가 어렵다.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서 차갑고 따듯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아서, 남에게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여래(如來)만이 알 수 있을 뿐, 나머지 사람이나 하늘사람 등의 부류는 전혀 깨달아 알지 못한다.
범부의 지혜로는 미치지 못하니, 모습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마음이 본래 텅 비고 고요한 줄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모습을 붙잡고, 일체법을 붙잡으면,
바로 외도(外道)에 떨어진다.
만약 모든 법이 마음으로부터 생겨남을 안다면, 붙잡지 말아야 하니, 붙잡으면 알지 못한다.
만약 본성을 본다면, 12부 경전은 모두 부질없는 문자이다.
천 가지 경전과 만 가지 논서가 다만 마음을 밝히는 것이니,
말끝에 계합(契合)하여 알아차리면,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극한 도리는 말을 벗어났지만, 가르침은 말이니, 사실은 도(道)가 아니다.
도는 본래 말이 없고, 말은 허망한 것이다.
만약 밤에 꿈속에서 누각, 궁전, 코끼리, 말 등을 보거나, 나무, 수풀, 연못, 정자 등과 같은
모습들을 보더라도, 이러한 모습들에는 좋아하여 집착하는 한 생각도 낼 수가 없으니,
모두가 의탁하여 생기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에 모습을 붙잡지 않을 수 있다면, 의심을 제거할 수 있다.
마음이 잠깐이라도 일어나면, 곧 마구니에게 사로잡힌다.
법신(法身)은 본래 청정하여 받을 것이 없다.
다만 인연을 따라서 헤매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알 지 못하는 것이고, 이 때문에 망령되이 과보를 받는다.
그러므로 좋아하여 집착하게 되면, 자재할 수가 없다.
지금 만약 깨닫는다면, 본래의 몸과 마음은 습기(習氣)에 물들지 않는다.
만약 성인을 벗어나 범부로 들어가서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을 드러내 보인다면, 스스로 중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거스르는 경계에서든 순탄한 경계에서든 모두 자재할 수 있으니,
어떤 업도 그를 구속할 수 없어서 성스러움이 영원하다.
큰 위덕(威德)이 있는 모든 종류의 업(業)을 저 성인이 부리니, 천당과 지옥도 그를 어찌할 수가 없다.
범부는 정신과 의식이 어두우니, 성인이 안팎이 밝게 통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만일 의심이 있으면 행하지 않지만, 행하게 되면 생사의 바다 위에서 떠다니게 되어, 뒤에 후회하더라도 구해 줄 수가 없다.
가난과 고생이 모두 망상으로 말미암아 생기니,
만약 이 마음을 깨닫는다면, 서로서로 권고하여 다만 행함 없이 행한다면, 곧 여래의 지견으로 들어간다.
처음 발심한 사람은 정신과 의식이 전혀 안정되어 있지 않다.
만약 꿈속에서 흔히 이상한 경계를 보더라도, 바로 의심할 필요는 없으니,
모두 자기의 마음이 일으킨 것이고, 밖에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꿈에서 만약 밝음이 나타남을 보았는데, 태양보다도 더 밝다면,
곧 남은 습이 문득 없어지고, 법계(法界)의 본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일이 있다면, 바로 도를 이루는 원인이지만, 오직 스스로가 알 뿐, 남에게는 말할 수 없다.
혹시 고요한 숲 속에서,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사이에 눈에서 밝음을 보는데,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하다면, 남에게 말하지도 말고, 취하지도 말지니, 역시 자성(自性)의 밝음이다.
혹은 밤중에 조용한 어둠 속에서 가고 머물고 앉고 누움에, 눈에서 밝음을 보아 낮과 다름이 없다면,
괴이하게 여기지 말 것이니, 모두가 자기 마음이 밝게 드러나고자 하는 것이다.
혹은 밤에 꿈속에서, 별이나 달을 또렷이 보더라도, 자기 마음이 여러 인연을 쉬고자 하는 것이니,
역시 남에게 말해서는 안된다.
꿈이 만약 어둡고 어두워서 마치 어두운 그늘 속을 가는 것과 같다면,
자기 마음에 번뇌의 장애가 두꺼운 것이니, 역시 스스로 알 수 있다.
만약 본성을 본다면, 독경하고 염불할 필요가 없다.
널리 배우고 많이 알아보아야 이익될 것이 없고, 정신과 의식이 더욱 혼미하게 될 뿐이다.
가르침을 베푸는 것은 다만 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만약 마음을 안다면, 가르침을 살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만약 범부를 빠져나와 성인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곧 업(業)을 쉬고 정신을 수양하면서 분수따라 시간을 보내야 한다.
만약 자주 성을 내거나 기뻐한다면, 본성을 돌려서 도와 서로 어긋나게 만들 것이다.
스스로 이익을 보려 한다면, 이로울 것이 없다.
성인은 생사 속에서 자재하여, 나타나고 사라지고 숨고 드러남에 정해진 것이 없다.
모든 업이 그를 구속할 수가 없으니, 성인은 삿된 마구니를 부순다.
모든 중생이 본성을 보기만 하면, 남은 습이 문득 소멸하고, 정신과 의식이 어둡지 않아서, 바로 그 자리에서 즉각 알아차린다.
다만 지금 진실로 도를 알아차리고자 한다면, 어떠한 법에도 집착하지 말라.
업을 쉬고 정신을 수양하면, 남은 습도 역시 사라져서, 저절로 명백할 것이니, 힘써 공부할 필요가 없다.
외도(外道)는 부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힘써 공부하는 것을 최고로 삼으니, 성인의 뜻과는 어긋난다.
하루 종일 바쁘게 염불하고, 경전을 뒤져 보아야, 정신의 본성에는 어두워 윤회를 면하지 못한다.
부처는 한가한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바삐 두루 명성과 이익을 찾겠는가? 나중에 어디에다 쓰겠는가?
본성을 보지 못한 사람은, 경을 읽고, 염불하고, 늘 배움에 열심히 공부하고, 하루 종일 도를 행하고,
늘 배움에 앉아서 눕지 않고, 두루 배우고 많이 듣는 것을 불법으로 삼는다.
이러한 중생들은 모두가 불법을 비방하는 사람들이다.
앞 부처와 뒷 부처가 다만 견성(見性)을 말할 뿐이다.
제행(諸行)은 무상(無常)이니,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하고서
망령되이 ‘나는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얻었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큰 죄인이다.
10인의 큰 제자 가운데, 아난(阿難)은 다문(多聞) 가운데 첫째였지만, 부처를 알지는 못하고, 다만 배워서 많이 알 뿐이었다.
이승(二乘)과 외도(外道)는 모두 부처를 알지 못하고, 하나하나 닦아서 깨닫는다고 알고 있으니,
인과에 떨어져 중생의 업보를 받고 생사를 면하지 못한다.
부처의 뜻에 위배되면 곧 부처를 비방하는 중생이니, 죽여도 도리어 죄나 허물이 없다.
경에서 말하기를 ‘천제인(闡提人)은 믿는 마음을 내지 않으니, 죽여도 도리어 죄나 허물이 없다.’라고 하였다.
만약 믿는 마음이 있다면, 이 사람은 부처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순서대로 나아가도 소용없다.
저 선량한 성인을 비방하고 스스로 이익을 보려 해도 이로울 것이 없으니, 선과 악이 또렷하고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다.
천당과 지옥이 다만 눈앞에 있는데도, 어리석은 사람은 믿지 않고,
지금 깜깜한 지옥 속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만 업이 무겁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다.
마치 눈 없는 사람이 빛이 밝다는 말을 믿지 않는 것과 같으니, 비록 그에게 말해 주어도 믿지 못하는 것은,
다만 맹인(盲人)이기 때문이니, 어떻게 햇빛을 알 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도 이와 같아서,
지금 축생의 잡류에 떨어져 있고, 빈궁하고, 하천(下賤)하게 태어나 있어서,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
비록 이러한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바로 물으면 또한 말하기를
‘나는 지금 즐거워서 천당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은 살아 있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면서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겠다.
이와 같이 악(惡)한 사람은 다만 업장이 무겁기 때문에, 신심(信心)을 낼 수가 없는 것이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다.
만약 자기 마음이 곧 부처임을 보면, 머리를 깎을 필요가 없으니, 세속인 또한 부처이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하면, 머리를 깎아도 역시 외도이다.”
도는 승과 속인을 분별하지 않는다(道不在山野)
“세속인은 처자가 있고, 음욕도 없애지 않는데, 어떻게 성불할 수 있습니까?”
“다만 견성(見性)을 말할 뿐, 음욕을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음욕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견성하기만 하면 음욕은 본래 공적(空寂)하니, 끊어 없앨 필요도 없고, 즐겨 집착하지도 않는다.
비록 남은 습기가 있더라도 해가 되지 않는다.
무엇 때문인가? 본성이 본래 깨끗하기 때문이다.
비록 오온(五蘊)의 색신(色身) 속에 있지만, 그 본성은 본래 깨끗하여 오염될 수가 없다.
법신(法身)은 본래 감각을 받아들임이 없어서, 배고픔도 없고, 목마름도 없고, 추움도 없고, 더움도 없고,
병도 없고, 사랑도 없고, 딸린 권속도 없고, 고통과 즐거움도 없고, 좋아함과 싫어함도 없고,
장점과 단점도 없고, 강함과 약함도 없다.
본래 얻을 수 있는 한 물건도 없다.
다만 이 색신(色身)이라는 원인에 집착하기 때문에, 배고픔, 갈증, 추움, 더움, 질병 등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만약 집착하지 않는다면, 마음대로 자재하게 행위하여라.
만약 생사 속에서 자재(自在)를 얻어 일체법을 굴린다면,
성인과 같이 신령스러이 통하고 자재하고 막힘이 없어서 불안한 곳이 없을 것이다.
만약 마음에 의심이 있다면, 결코 어떤 경계도 뛰어넘지 못한다. 조작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조작하면 생사의 윤회를 면하지 못한다.
만약 본성을 본다면, 찬드라(candala; 도살업 등에 종사하는 최하층의 천민)도 역시 성불할 수 있다.“
백정도 도를 이룰 수 있다(屠漢亦得成道)
“찬드라는 살생을 업으로 삼고 있는데 어떻게 성불할 수가 있습니까?”
“단지 견성을 말할 뿐, 업 짓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비록 업 짓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과 같지 않아도, 어떤 업도 그를 구속할 수가 없다.
애초부터 다만 본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 속에 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업을 지어 생사에 윤회한다. 본성을 깨닫게 되면, 끝내 업을 짓지 않는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하면, 염불해도 과보를 면하지 못하니, 생명을 살해하는 것까지 말할 것도 없다.
만약 본성을 보면, 의심이 문득 사라지니, 생명을 죽인 것도 그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인도의 27 조사가 다만 차례차례 심인(心印)을 전했을 뿐이며,
나는 이제 이 땅에 와서 오직 돈교대승(頓敎大乘)의 즉심시불(卽心是佛)만을 전할 뿐,
지계(持戒)나 보시(布施)나 정진(精進)이나 고행(苦行)을 말하지는 않는다.
나아가 물과 불 속에 들어가고, 칼을 꽂은 바퀴 위에 올라가고,
한 끼 밥만 먹고, 늘 앉아서 눕지 않는 것 등은 모두 외도의 유위법(有爲法)이다.
만약 행위와 동작의 신령스런 깨달음의 본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그대가 곧 모든 부처의 마음이다.
앞 부처와 뒷 부처가 단지 마음을 전한다고만 하였으니, 다시 다른 법은 없다.
만약 이 법을 알아차리게 되면, 범부가 한 글자도 알지 못해도 역시 부처이지만,
만약 자기의 신령스런 깨달음의 본성을 알지 못하면, 설사
몸이 부서져서 가루가 되더라도 부처 찾는 일은 끝내 이룰 수 없다.
부처는 또 법신(法身)이라고도 하고, 본심(本心)이라고도 한다.
이 마음에는 모습도 없고, 인과(因果)도 없고, 근육과 골격도 없고,
마치 허공과 같아서 붙잡을 수도 없고,물질과 같지 않고, 외도와 같지가 않다.
이 마음은 여래(如來) 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 그 나머지 중생인 어리석은 사람들은 밝게 알 수가 없다.
이 마음은 사대색신(四大色身, 흙 물 불 바람) 속을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이 마음을 벗어난다면, 움직일 수가 없다.
이 몸에는 지각(知覺)이 없으니 마치 초목(草木)이나 기와조각 같고,
이 몸에는 정식(情識)이 없으니 무엇으로 말미암아 움직이겠는가?
만약 자기 마음이 움직이면, 말하고 행동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들이, 모두 움직이는 마음이 움직여 작용함이다.
움직이는 것은 마음의 움직임이니, 움직임이 바로 그 작용이다.
움직여 작용함 밖에 마음이 없고, 마음 밖에 움직임이 없다.
움직임은 마음이 아니고, 마음은 움직임이 아니다.
움직임에는 본래 마음이 없고, 마음에는 본래 움직임이 없다.
움직임은 마음을 떠나지 않고, 마음은 움직임을 떠나지 않는다.
움직임에는 마음이 떠나지 않고, 마음에는 움직임이 떠나지 않는다.
움직임은 마음의 작용이고, 작용은 마음의 움직임이다.
움직이면 마음이 작용하고, 작용하면 마음이 움직이니, 움직이지 않으면 작용하지도 않는다.
작용의 바탕은 본래 공(空)인데, 공은 본래 움직임이 없다. 움직임과 작용은 마음과 같지만, 마음에는 본래 움직임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길 ‘움직이니 또 움직일 것은 없다’고 한 것이다.
이 까닭에 종일 왔다갔다하지만 한 번도 왔다갔다한 적이 없으며, 종일 보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종일 웃지만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으며, 종일 듣지만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으며, 종일 알지만 한 번도 안 적이 없으며,
종일 기뻐하지만 한 번도 기뻤던 적이 없으며, 종일 다니지만 한 번도 다닌 적이 없으며,
종일 머물지만 한 번도 머문 적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길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가는 곳이 사라졌다’고 한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본래 두루 고요하다.
나아가 성내고 기쁘고 아픈 것이 나무 인형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만 아픔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길 ‘악업(惡業)은 고통스런 과보를 가져오고, 선업(善業)에는 좋은 과보가 있다.
성을 내면 지옥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기뻐하면 하늘에 태어난다’고 한 것이다.
만약 성냄과 기쁨의 본성이 공(空)임을 알아서 집착하지 않기만 하면, 모든 업(業)에서 해탈한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하고 경전을 읽는다면, 결정코 의지할 것이 없다.
말을 하려면 끝이 없으니, 간략히 삿됨과 바름을 드러낸 것이 이와 같지만, 한 두 가지에도 미치지 못한다.
<게송>
마음 마음 하지만 마음은 찾기가 어려우니,
넓을 때에는 법계(法界)에 두루하고,
좁을 때에는 바늘도 들어갈 틈이 없다.
나는 본래 마음을 찾고 부처를 찾지 않으니,
삼계(三界)가 비어서 물건이 없음을 밝게 안다.
만약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다만 마음을 찾을지니,
단지 이 마음, 마음 하는 마음이, 곧 부처이다.
나는 본래 마음을 찾았으나, 마음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
마음을 찾아도 마음을 기다릴 수는 없음을 안다.
불성은 마음 밖에서 얻을 수 없으니,
마음이 생기면 곧 죄가 생기는 때이다.
https://youtu.be/9aunrSPwowQ?si=Id7v9LB7VUQxxa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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