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부: 내 삶의 여정.
(장로는 해도 목사는 절대로 안 한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내가 하나님을 믿고 목사까지 된
나의 삶의 여정을 보면 대체로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처음 하나님을 믿는 단계(거듭남)!
나는 철저한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된 후 나는 이른바 ‘신의 직장’이라 일컬어지는
공기업에 입사하여
나름대로는 멋지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한 순간 예측하지 못한 고난이 집중적으로 닥쳐 왔다.
아내가 부동산 복부인을 하다가
일순간 빚더미 위에 앉게 되었다.
그 후유증으로 아내는 급성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나는 연수원 건설공사 문제로
이사장과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이러한 환난들로 인해 나는 마인드 콘트롤을 한답시고
정안수를 떠놓고 어두운 방안에 혼자 앉아 있곤 했다.
(이것은 처음 내가 말하든 ‘ 더 시커릿’ 과 같은 수법이다)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요3:1-2)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시 의원이며 율법학자!
그는 왜 밤중에 주님을 찾아 왔는가?
넥타이를 매고 하루 하루를 잘 뭉게고
한달이 지나면 봉급이 나온다.
사무실 안은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고
본인은 어디를 가도 으젖하다!?
매우 양심적이며 신사적이고 도덕적이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밤중에 아무도 몰래 주님을 만나러 갔다!
니고데모! 이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
걱정과 불안!
숨막히는 답답함을 피해 창문을 여는 순간!
어디선가 찬송가 소리가 들린다.
아! 세상에 이렇게 귀하고 아름다운 음악이 있었던가?
나도 모르게 발길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은 상가 안에 있는 작은 교회였다.
교회 안! 성탄 가족 찬양 경연대회인가 보다!
무대에만 조명이 비치고 교회 안은 으스름하다.
나는 구석진 곳을 찾아 어정쩡하게 앉았다.
찬양! 가족들이 나와서 찬양을 부른다!
아! 참 멋지구나! 그런데!?
그 순간 뜬금없게도 이유를 알 수 없이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아무리 참으려 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와! 이젠 옆 사람이 볼까봐 도저히 앉아있을 수가 없다.
누가 볼 새라! 나는 얼른 일어나 집으로 왔다.
그리고 문간방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통곡! 족히 30분은 넘게 울고 있었나 보다
나는 내가 왜 우는지를 모른 채 그냥 울고만 있었다.
그런대 한참 울고 난 후,
와! 내 마음은 시원함과 평안함으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당면한 모든 일이 아주 사소하게,
그리고 조만간 다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문제들은 그 이후로 하나씩 해결되고 있었고
나는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진리는 인과응보, 만유인력 등
법칙! 그 자체가 곧 진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나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법칙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을 만든 창조주가 계시며
그분은 우리와 같은 인격을 가지고 있으며
육체를 입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놀라운 진리!
이 진리를 알았을 때의
그 충격은 나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때부터 나는 새벽기도를 나가기 시작했고
성경을 읽던 어느날 방언을 받기도 했다.
이 당시 나의 비젼은 멋진 장로가 되는 것이었다.
내가 열심히 믿으면 돈도, 명예도 능력도 많이 주시고 축복 받아서
남이 보아도 멋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원했다.
과연!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 응답도 되고 놀라운 은혜도 맛보았다.
나는 이것이 훌륭한 나의 믿음을 보시고 축복하시는 것으로 알았다.
그것은 과연 사실이었으며 지금 생각해도 그렇다.
한번은 5백명을 수용하는 회의실 공사중
천장이 통째로 무너져 내려앉았다.
와! 그 엄청난 굉음, 먼지,
그러나 다행히도 강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건은 참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고 기민하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어쩌면 그때 아무도 없었을까?
마침 점심시간이었나 보다!
하필 바로 그때 무너졌단 말인가?
그리고 그 무서운 사건은 정말 신속하게 마무리 되고 있었고
나는 그냥 그 사건 한 가운데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만약 누군가 신고를 해서 신문에라도 나는 날이면?
그 뿐 아니라 공단에서 시행한 수 많은 건축 공사들!
그 위험한 건설공사에 어쩌면 단 한건의 안전 사고나 재해가 없었는지!?
그 당시 나는 공단에서 시행하는 수 많은 건설공사에 최고 책임자 였다!
절대로 목사는 안 한다!!!
어느날 나는 그 좋은 공직생활을 내려 놓고 목사가 되었다.
나는 절대로 목사 같은 것(죄송! )은 안 하리라!
굳세게 다짐한 터였다.
정말이지 이것은 전혀 나의 뜻이 아니며 그분의 일방적인 인도하심 이었다.
(아! 이 과정을 적으려면 또 한 권의 책이 될 것이다.)
2. 목사가 되고 난 후부터!
목사안수를 받을 때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여기까지 왔으니 승복합니다.
기왕 목사를 시키시려면 저 멋진 목사가 되게 해 주세요!”
빨리 부흥해서 남 보라는 듯 선교사도 배출하고,
구제 사업도 많이 하고, 설교도 잘 하고,
누가 봐도 멋진 목사?
그래야 주님도 영광 받으실 것 아닙니까?
알 엠 밷트 킴멜!! 늦은 나이에 야간 신학교를 다니면서
화장실 벽에 히브리 알파벳을 붙여 놓고 열심히 외웠다.
그러나 목사가 되고 난 후부터 지독한 고난(훈련)이 시작되었다.
개척을 하면 곧바로 부흥할 줄 알았고
웬만한 강의와 프로그램이 있는 곳은 부지런히 뛰어 다녔고,
온 힘을 다해 모든 열심과 헌신으로 교회를 섬겼다.
그러나 나의 생각이나 기대감과는 달리 상황은 정반대로 가고 있었다.
나의 모든 기도는 허공을 치고 있었고
교회는 전혀 부흥의 징조가 없이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3. 율법과 은혜
교회 개척 후부터 나의 믿음과 열심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 했다.
2005-04-05 새벽!
나는 교회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갑자기 왼쪽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
혹시 심근 경색? 아, 이러다 큰일 나겠구나!?
누가 볼까봐 눈치채지 못하게
옆에 있는 찬호 전도사의 손을 끌어당겨
내 심장에 대고 기도를 부탁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렇게 외쳤다.
‘하나님! 나에게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혹! 예수 믿으면서 나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은 없는가?
혼신의 노력을 했는데 부흥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때 내가 늘 중얼거리던 말,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였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스런 질문!
‘이것이 전부란 말인가?’
그토록 노력하고 애쓰며,
그렇게 열심히 주님을 섬겼는데!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좌절하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이 일 전후로 내가 깨달은 영적 진리는 다음과 같다.
(이것은 예외 없는 하나님의 법칙이다.)
첫째, 처음 믿을 때는 내가 기도하고 생각 했던 대로 된다.
둘째, 그러나 어느 단계에 이르면 생각한 대로 되지 않는다.
오히려 믿지 않을 때보다 더 막히고 어렵다.
여기가 바로 광야의 입구로 들어 서는 길이요,
고난과 핍박이 닥치고 ‘믿음과 의구심’ 의 눈 터지는 싸움이 전개된다.
바로 이 순간이 지나야 참으로 영적인 눈이 열린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여기가 바로 나의 자아와 성령님의 생각이 충돌하며
주도권을 다투는 과정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처음 믿을 때, 그때의 믿음은 그 주체가 나 자신이요
내가 열심히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노력으로 열심히 믿으면 되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사실은 이렇다
처음 믿을 때 그 믿음도 역시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구원이 내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삶도 내 노력이 아닌 은혜로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영적인 삶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승리를 경험하는 것,
단언컨대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히려 내 힘으로 믿는 것을 다 집어 던지신다.
내가 경험한 필연적인 믿음의 과정은
믿음 조차도 하나님이 주신 것을
우리가 인정 할 때까지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결국 하나님께 내 모든 주도권을 올려 드릴 때!
내 안에서 율법적, 인과응보적 사고가 아니라
‘은혜’ 가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가 분기점이다!
이때가 지나면 내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은혜로 해석되며,
참 은혜와 축복이 어떤 것인지 깨닫고 맛보게 되는 것이다.
아! 이것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향한 사랑의 본질이며
복음의 전부다!
“당신은 일 중독이에요!”
아내의 말이다.
오! 하나님! 이것이 목회라면 난 그만 두겠습니다.
그 날은 식목일, 공휴일이었다! 모처럼 밝고 따뜻한 봄기운!
그러나 나는 어두운 교회 안에서 엎드려 울고 있었다.
한참 울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그래! 역시 뭔가 내게 부족한 것이 있어!
아직도 내가 하나님 앞에 다루어져야 할 무엇이 있음에 툴임 없어!
나의 게으름, 교회를 위해 내가 할 일을 다시 점검한다.
전도계획! 알파 프로그램, 떠나간 사람들을 위한 기도,
나는 또 외친다.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보다 나를 주목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
그래! 이젠 뒤돌아 갈 수도 없다. 오직 부흥!
내 기도가 부족해!
더 열심히 하는 나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보여줘야 해!
십자가! 보혈의 능력!
나를 지치게 하는 어둠의 세력들아!
떠나가라!!!
그런데!? 이상하게도 열심히 하면 할수록,
교회는 더 썰렁해지고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다.
왜 이럴까?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은 머하시노? 기도하나 마나 아이가?’
휴우! 이래 가지고 무슨 전도를 할 수 있는가?
탈진 가운데 내 안에서 작고 조용한 음성이 들렸다,
“얘야! 이제 좀 쉬어라.”
내 영이 나도 모르게 답변한다. 그래, 맞아! 난 쉬어야 해!
순간 내 눈에는 또 눈물이 핑 어렸다.
지성이면 감천!?
열심히 노력한 보람이 있었나 보다!
과연 노력한 대로 마치 물이 꿇기 직전의 모습처럼,
교회는 사람들이 모이고 서서히 부흥의 모습을 띄기 시작했다.
눈사람은 처음 만들 때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이제 조금만 더 열심을 내면 되리라!
나는 전심전력으로 교회 부흥을 위해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아!!! 그러던 어느날
화재사건으로 교회가 다 타 버렸다.
그 놀람과 휴유증으로,
나는 가슴이 눌리고 내려 앉는 병에 걸렸고 우울증 증세까지 보이며
거의 죽음에 이르는 상태에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완전히 내가 죽었다고 생각한 후
그리고 난 후 오랫동안 나는 교회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래도 내가 놓지 않았던 유일한 것은 십자가 였다.
하긴 나에게는 오직 그것 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참 묘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 안에 어떤 힘이 무너지는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안에서 불쑥 어떤 생각이 떠 오르면
그 분이 주시는 생각임을 확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성경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눈이 열렸다.
4. 성령님께서 내 안에 오심
그 때 이후!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있으며
그 힘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를 다루고 있고
나는 그 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논리가 나를 설득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지금 내가 경험하는 이 모든 것이 바로 복음의 비밀이고
나는 그 중심부를 지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세상은 인간의 힘과 의지로 다스릴 수 있다는 것과
그 모든 현상의 이면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의 섭리가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과의 싸움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려는 주도권 싸움이다.
나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고향으로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때부터 내 삶은 내가 아니라
그 어떤 힘에 이끌리는 것을 알기 시작 한 것이다.
부활하신 바로 그분이 나를 찾아 온 것이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 24:45)
그 후로부터
영적인 눈이 열리고 성경이 전혀 새롭게 보여졌으며
마치 퍼즐을 짜 맞추듯이 나의 모든 것이 해석되어졌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의 가치관, 삶의 기본적 자세에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그분 이라는 진리!
나는 자존적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 존재며
목회도, 새벽기도도, 전도나 선교도 그 모든 삶의 작은 부분들까지도
심지어 믿음도 내가 열심으로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은혜로 믿게 되었고
지금 하는 사역도 주님이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
영적인 눈이 열려서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내 안에는 참으로 감사하며 자유하는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오! 놀라운 진리의 발견이여!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내 삶은 주님의 것이며
주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
결국 이 믿음이 나의 모든 환경을 뚫고 승리할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와 같은 나의 믿음 위에 이루어진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전도 가시면서
길 가에 앉아서 배드로에게 물으신다.
베드로야!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주님은 배드로의 믿음을 칭찬하지 않으시고 복이 있다고 말씀 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이 엄청난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인간적 생각이 전혀 아닌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래서 그가 복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공부를 많이 해서 온 것도 아니며
그의 의지적인 노력으로 된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이 모든 믿음은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다.
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바로 이 신앙고백을 보시고 지금까지 감추어 두신 비밀의 카드를 꺼 내신다.
내 믿음의 고백 위에 ‘나의 교회’ 를 세우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고백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셨다!
명심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 것도, 목회 사역을 하는 것도 사람의 일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택한 자) 안에서 이 일을 하실 뿐이다.
결론은 이렇다!
내 안에 그분이 계신다.
모든 나눔과 관계의 중심에 성령님이 계신다.
그분이 내 안에서 나의 주권자 되셨다.
그래서 나는 내 삶의 주도권을 그분께 드리면 된다. 할렐루야!
5.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삼상6:12)
밷세메스로 가는 암소!
하나님이 사용하시려는 이 암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멍에를 메어본 경험이 없다.
젖이 뚝뚝 흐르는 방금 새끼를 낳은 암소며,
그 새끼는 떼어 집으로 돌려 보냈다.
하나님은 이 암소를 부르셨다.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나타내시려고!
놀라웁게도 이 암소는
울거나 좌우로 치우치거나 뒤돌아 보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똑 바로 목적지를 향해 나아 갔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해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진다.(14절)
피이! 아무리 암소지만 너무 억울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설명은 간단하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하신 것이다.
벧세메스의 암소처럼!
내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또한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으며 언젠가 제물로 드려져야 한다.
다른 것은 없다. 이것이 전부다!
반면에 우리 인간은 어떤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인과응보적 대가를 바란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뜻대로 사용하시려고 광야 생활을 맛보게 하신다.
가는 동안!
광야길의 철저한 법칙(현실의 삶도 같은 이치다)이 적용 된다
인도하심!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다(성령)
보호하심! 먹는 것과 입는 것에 책임지신다.(만나와 반석)
건강과 쉼도 지켜주신다.(출15:26-27: 꼭 읽어 보셔야 함).
이 모든 고난과 훈련을 지나면
마지막 단계: 가나안 입성(요단과 여리고)단계에 온다.
여기까지 오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건너게 하실 분도 하나님 이시다.
바로 이 지점! 여기가 바로 내가 변화되는 지점이다.
비로서 확신과 믿음이 온다. 이것은 처음 때와 전혀 다른 믿음
이때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이루어 질 것이라는 확신이 온다.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이다!!!
아! 여기가 내가 경험한 신비다!
개척이후, 화재, 리모델링에서 지금까지!
목회를 할수록! 고난을 받을수록 하나님이 믿어진다.
사실 믿으면 되도록 주님은 십자가위에서 다 이루셨다.
그러나 이 믿음은 현실과의 치열한 싸움과 훈련을 통해
믿어지는 것이다
나의 삶! 처음에는 내가 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분이 하시고 계셨다.
참 놀라운 것은 나도 모르게 주님은 이 길을 걷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모든 것이 내 안에서 믿어지고 정리되어진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아! 부르신 분이 다 하신다! 다만 자아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고난이라는 광야길을 가게 하신다. 그러나 그 또한 함께 하신다.
밷세메스의 암소!
이 어두운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 자체가 은혜다!
그 우직한 암소의 등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고,
부르심을 받은 암소는 목적지에 가서는 하나님께 올려지는 제물이 된다.
감자나 고구마, 각종 열매들과 씨앗, 그리고 동식물들을 눈 여겨 보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체는 하나같이 이와 같은 공통점이 있다.
어느날 나는 T.V에서 카나다 연어의 ‘삶의 여정’을 보았다.
바다에서 태어난 곳까지 8천킬로!
알을 품고 불룩한 배를 움켜잡고
묵묵히 그러나 악착스럽게 거센 물결을 거슬러
상류로 차고 올라간다.
목적지에 와서는 꼬리지느러미를 세차게 흔들어
강바닥(자갈무더기)을 헤치고
우묵한 구덩이를 파서 알을 낳는다!
그리고 연어는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곰이 기다리고 있다가 잡아먹는다).
그렇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는가?
천만에! 그렇지 않다!
연어는 그 자체로 부르심의 몫을 다한 것이다.
연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상류로 거슬러 가는 힘, 열정, 알을 낳는 보람감!
다 하나님이 주신 것! 오직 감사할 뿐이다.
세상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약한 인간! 흙으로 지음! 그러나 그 안에 초월적인 그 무엇이 있다.
생명의 힘!
죽은 시체를 보라! 같은 몸 이지만 생명이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생명은 이렇게 귀중한 것이다.
생명을 주신 것! 그 자체가 은혜요
게다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영생을 얻는다.
그래서 몸은 죽지만 영혼은 하나님 앞에 살아난다!!!
믿음도 순교도 헌신도 하나님이 주신 것,
성경도 십자가가 보임도 은혜,
멛세배스의 암소! 부르심 자체가 은혜다.
그렇다면!? 부르신 그분이 세상을 이기신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너희는 담대하기만 하라(요16:33)!!!
아! 세상을 이기신 분은 주님이시지 내가 아니다!!!
따라서 세상을 이기는 것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 가능한 것이다.
다윗은 삶의 마지막 부문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 평생에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함께 하였다고!”(시23편)
그렇다! 전부 은혜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눅1:28)라고 말을 건넸으며,
홍수의 심판을 면한 노아는 “은혜를 받았더라” 라고 적혀 있고.(창6:8)
천사는 다니엘에게 “크게 은총을 입은 사람아”(단10:19) 라고 하셨다
벧세메스의 암소나
카나다의 연어처럼 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가 마지막 부분이다.
하나님이 하심을 보려면 나를 죽여야 한다.
자아는 하나님을 누르는 사단의 최고의 방법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부르심에 반응하는 최고의 방법은 내가 죽는 것이다.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인내하는 것이 아닌 죽는 것이다.
고개를 쳐드는 나!
자존심, 우월감, 오랜 세월동안 쌓인 잘못된 가치관!
똑 같은 기준도 내게 적용하면 그럴듯하고
남에게 적용할 때는 얼마나 매정하고 날카로운가?
그렇게 하면 할수록 사단은 나를 똑똑하다고 칭찬한다.
내가 믿고 나의 것을 드리고?
이것은 ‘나’ 라는 탈을 쓴 사단이다.
본래 내 것은 없다. 사실 다 주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다.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나 같으면 십자가를 지는 이유를 거품을 물고 역설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묵묵히 십자가를 지시기만 하셨다.
이것이 옳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 몫이며,
하나님은 이것을 부활로 보이셨다.
주도권!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실 것을 내가 믿는 것이다.
저 유명한 바울의 고백!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시퍼렇게 고개를 쳐드는 ‘나의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내 안에서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즉,
죄성을 가진 본래의 나는 죽고 이제 내 안에는 그리스도가 사신다.
또 하나의 내가 있는데 이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거듭난 나” 이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십자가와 부활의 비밀!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참는 것은 인간이 하는 것이요
참 복음의 비밀은 내가 죽은 것이다.
죄된 나! 못된 자아! 독선과 고집! 이악한 내가 죽어야
내 안에 성령이 다시 살아난(거듭난 나)와 함께 동행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내가 죽을 수 있는가?
사실은 시퍼렇게 살아 있지 않는가?
단 한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죽었다고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믿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그 사실을 믿으면
성령께서 내안에 숨어 있는 옛 자아를 실제로 죽여 버리기 때문이다.(롬6:1-11)
가을에 맛보는 탐 스러운 밤!
그 열매 안에는 당초부터 벌레가 숨어 있다!
그대로 두면 썩는다! 방법은 삶아서 보관하는 것이 최고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래서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성령이 내 삶의 주도권을 가진다.
그러면 나의 의지적인 노력이나 행위가 아니라 은혜가 나를 이끌어 간다.
그렇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다!!!
와! 나는 이 놀라운 능력을 이제야 경험한다!
이 글을 쓰다가 잠시 휴식 겸 뒷 뜰에 나 갔다.
쏴아! 가을바람이 분다! 저 멀리 나무들이 춤을 춘다.
낙엽들이 떨어지고 있다! 아! 내년 봄에 다시 새파랗게 살아 날 것이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
아들아! 이 세상 모든 것은 내가 주관한단다!
너의 삶까지도! 나에게 맡겨라!
아! 알았습니다! 주님!
6.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얼마 전 장남이 공부하고 있는 미국에 갔다.
둘째 아들의 비행기 마일리지를 이용해 공짜 비행기 표를 얻어서!^^
그곳에 다녀오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6:28-29)
미국에 있는 동안 손녀 하원이와 숨바꼭질을
한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우리 둘만의 숨바꼭질!
여기에는 둘 만의 보이지 않는 원칙이 있다.
그것은 하원이가 술래를 할 때, 내가 숨은 방법이다.
‘여기에 숨으면 찾을 수 있겠지?’
나는 하원이가 찾을 수 있도록 숨는다!
할아버지! 여기 있지?
까꿍! 우리는 반갑게 서로 끌어 안는다.
말하자면 들키기 위해 숨는 것이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렘 29:13)
찾고 찾으면 만나 지리라!!!
하원이와 나, 그리고 하나님과 나! 이 기가 막히는 진리!
그러나 이 개임은 그 나름대로 심각하고 힘들다.
암튼! 내일이면 미국을 떠난다.
나는 하나님 앞에 주목하고 섰다.
하나님! 그 동안 당신의 은혜로 너무너무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오늘이 미국에서의 마지막 날입니다.
떠나기 전! 큰아들에게 아버지로서 보람된 것을 보이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은 의외로 간단했다.
네가 무엇을 하려 하지 말고 그냥 나를 믿기만 하렴!
너는 평소의 모습대로 그대로 걸어가면 된다.
나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6:6)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골 1:10)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내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분의 그 사랑을 내가 아는 것!
이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일이다.
그렇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나의 모든 것은 다 은혜다.
나는 그분을 위해 할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내가 깨달은 기가 막히는 진리!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잘 알고 계신다는 것!
그래서 자신을 바라보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 다는 것!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시103:13-14)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나무라지 않고 오직 자신을 바라보는 자,
자신에게 매달리는 자를 축복하시고 지키신다는 것!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살아 계심과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자! 임을 믿어야 한다.(히11장)
공항을 떠날 때!
큰 아들부부는 우리를 위해 이렇게 기도해 주었다.
하나님! 우리 부모님을 보내주셔서 참 감사 합니다.
아버님이 함께 계시는 동안 우리는 말 할수 없는 행복을 누렸습니다.
특히 하원이에게는 최고의 할아버지 임을 보여주셔서 참 감사 합니다.
이제 귀국하시면 목회에만 전념하시도록 축복해 주세요!!!
그렇다! 난 그냥 매일의 삶을 살았고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믿었을 뿐이다.
기독교와 타 종교와의 상이점은
‘계시냐 혹은 종교적 열심이냐?’ 하는 것이다.
신앙은 그 자체가 긴 마라톤이다. 잘못될 수 있다.
실패하는 것 조차도 하나님 안에서는 은혜로 작용한다!
이것은 ‘위대한 좌절’ 이다.
인간의 희생, 열심, 드림!
내가 해야한다는 것은 종교적 열심이 될 뿐이다
나의 열심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
부르심을 받고 난 후, 나의 삶의 모든 과정을 뒤 돌아 보면
내 의지나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을 작살내시는
하나님의 손길만 생각날 뿐이다.
여기까지!!!
나는 어느날 마태복음 24장을 읽다가
교회가 불이 난 결정적 이유를 찾아냈다.
그것은 내 힘과 내 노력으로 마치 나의 교회인 것처럼,
내가 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24:1-2)
유대인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던 예루살램 성전!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오직 성전만은 여호와가 지키실 것을 굳게 믿었던 곳!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24:1-2)
왜 주님은 이런 무지막지한 예언을 하시는 것인가?
그 답은 스테판의 설교를 통해 말씀 하시고 계신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행7:48)
무슨 뜻이 있는가? 무슨 말씀인가?
유대인들이 온 정성을 다해 만든 성전!
하나님은 율법(내 힘)으로 만든 저 웅장한 성전을 헐어 버리셨다.
아! 교회화재사건 뿐이겠는가?
심지어 저 유명한 예루살램 성전까지도…!
예수님은
우리안에 하나님이 싫어 하시는 모든 것을 십자가로 대속하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셨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성전이요, 우리가 교회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내 안에 그분이 계심을 믿으면,
내 삶의 주도권이 내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 이관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 힘으로 예수를 믿는 것은 율법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엄격히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계 없는 것이다.
내 안에 그분이 계신다.
그래서 내 안에서 자신의 성전을 완성해 나간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모든 믿음의 행위!
교회를 향한 나의 태도, 모든 삶의 자세까지,
내 안에서 성령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만약 예수 잘 믿는 방법을 공부 한다면 그것은 기술이며,
내 힘으로 하는 것이라면 율법이며 우상이다.
그것은 구약의 예루살램 성전처럼 결국은 다 부서질 것이다.
당신이 정말 놀라운 믿음의 행위를 하였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 안에 계시는 분이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뿐 아니라, 생각과 자세에 이르기까지
진정 이런 고백이 나오기를 원하시고 기다리시는 것이다.
기억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자아를 부수기 위해
우리 심령 깊숙한 곳에 좌절이라는 못을 박기도 하신다.
아! 선악과 이후로 우리는 절대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예수를 믿을 수 없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도 없다.
오직 우리를 통해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뿐이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고백하고 그분을 높여 드리면 된다
아! 이 기막힌 진리를 이 세상 누가 이해하겠는가?
이 진리가 우리 안에 인식되고 삶 속에 녹아들 때까지
하나님은 쉬지 않으시리라!!!
7. 모든 사건에 대한 해석도 성령이 내 안에서 해 주신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 24:32)
지금까지 기술한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도 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 가운데 있다.
다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를 은혜 가운데 선으로 인도하고 계심을 내가 믿는 것이다.
지난해 양평 기도원에서 금식 할 때 주신 말씀,
‘네가 아브라함이다’ 라고 하신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복! 복의 근원!
그것은 생명의 근원에서 오는 힘, 에너지를 말한다.
생명, 영생!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
초월적인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복!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다!
이때부터 하나님은 엉성한 아브라함을 통해
죽음의 땅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고 계셨다!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이제 내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려 하신다.
아! 그렇다! 내가 그분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내 안에 그분이 계신다! 이것이 비밀이요 은혜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 1:27)
미국에서 마지막 아침!
아내가 내 옆에서 고단한 새우잠을 자고
내 사랑하는 손녀 하원이가 이불을 차 던지고
방안 저 구석에서 새근거린다.
아! 참 감사하구나!
이것 저것 모두! 장남 상곤이와 차남 상우,
이 모든 고난 속에서도 굳세게 나오는 우리 교회성도님들!
아내와 나! 그리고 어머니의 건강, 노모를 모시는 내 착한 동생!
이 모든 것이 다 은혜다
돈, 출세를 뛰어넘어 감사한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해석되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양면성이 있다.
조금 잘못 생각하면 이상하게 해석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내 안에 성령이 해석해 주시면 절대적이다.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아! 성령께서 해석해 주시는 구나!
이 또한 감사요, 기쁨이요 행복이다.
어느날 내가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이 다 긍정적으로 해석되어지는 경우!
십자가가 믿어지고 하나님이 보이는 것!
이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 안에서 그렇게 해석해 주시는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16:13-14)
목회를 한지 12년!
나도 모르게 가치관 안목이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사건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보려는 안목.
사건을 새롭게 해석해 주시는 성령님에 대한 기대.
하나님 말씀을 실제로 적용하려는 자세.
죄에 대한 예민한 반응!
성경의 이야기가 나에게 현실적 가능성으로 적용되어 진다는 생각!
나는 이제 나의 삶에 대해 이렇게 선포할 수 있다
나의 현 상황을 주관하시는 분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기도하면 그 분이 해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
성령이 해석해 주시면 믿어지고 결국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다.
성경이 일관되게 말씀하시는 것은 3가지다.
기도(회개로 시작),
믿음(말씀과 십자가를 묵상),
마지막으로 행함(성령님이 하심)!
우리가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행함’ 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그분이 하심을 믿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예수 전도단의 표어는
“그를 알고 그를 알리자” 이다.
그분을 알면 그분이 우리의 삶을 해석해 주신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을 아는 것이다.
그분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끊어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십자가로 연결하셔서 생명의 복을 주시고
결국은 내 안에까지 들어오셔서 자신을 나타내려 하신다.
이것을 믿어라!
이 기회에 젊은이들에게 담대하게 권할 것이 있다!
만약 결혼을 잘못하면? 두려워 하지 말라!!
그것을 통해서도 역시 복을 주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부르심을 입은 자는 반드시 그렇게 하신다
그렇게 믿으면 그렇게 된다. 할랠루야!!!
그렇다! 이해하지 못할 사건이 생기면 내가 해석하려 말고
언제나 내 안에서 설득하시기 원하시는 그분께 나아가자!
복, 생명을 가진 자! 그리고 내 안에 그 분이 계심을 믿는 자가 되자.
그래서 이 험한 세상에서 승리하는 자가 되자!
8. 자유의지!!?
이제 우리들의 가장 본질적인 질문에 대해 말하려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라면?
우리는 그야 말로 로봇과 같은 것? 아닌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 를 주셨지 않는가?
우리가 아는 바 대로
사람의 근육은 ‘제대로 힘살’ 과 ‘마음대로 힘살’ 이 있다.
사실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심장 근육 같은 제대로 힘살이며,
마음대로 힘살은 이것을 지키려고 하는 인간의 의지를 표현하는 수단이다.
따라서, 마음대로 힘살은 제대로 힘살에 ‘종속된 것’ 이다.
사실 주도권과 자유의지는 동전의 양 닢이며,
어느 한 편만이 진리라고 말하기 보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예를 들면,
국민학생이 부모에게 묻는다!
아빠! 나 천원 가지고 빵과 아이스크림중 어느것 사 먹을까?
네가 알아서 하렴!
그럼 아빠! 나 칼을 살꺼야! 천원만 더줘!!!
얘야! 그건 안된다. 그건 절대로 안된단다!
그렇다!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 조차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
이 부문! 바로 그 자유의지를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
이것이야 말로 진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심근 경색!? 이것은 심장을 움직이고 있는 힘살이며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99%를 다 하나님이 하시고 1%를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우리로 하여금 신나게 하나님의 일을 함께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있을 다름이다.
율법적인 생각, 인과응보적 보상논리, 자아에서 출발한 모든 믿음의 행위!?
아! 나는 이 모든 것이 다 ‘우상!’ 이라고 단언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찌니라(눅17:10)
당신이 자랑하는 믿음의 근원이 어디서 왔는가?
당신의 생명은? 숨결은? 공기와 물은?
이 기적 같은 세상에 숨을 쉬고 물을 마실 수 있는 것은?
그렇다! 다 은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그 결과 인간은 선악과로 인해 하나님을 배반한다.
그러나 이것까지도 예측하시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부르심을 입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것과,
이 모든 것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 믿음 조차도 성령님이 감동을 주셔야 된다.
이 진리를 내 삶에 적용한 예를 나누려 한다.
나는 언제나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을 나도 모르게 하곤 한다.
그리고는 곧 바로 내가 한 행동에 대해 깊은 후회와 질책을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화살은 이미 내 손에서 떠나갔다.
이왕 잘못된 결정, 그 행동에 대해 예측되는 결과!
이것을 후회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머지 부분을 바르게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잘못했습니다.
이제 이 문제를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원하옵기는 주님!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
나의 잘못한 것조차도 주님이 침묵으로 허락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잘못된 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시고 축복하여 주옵소서!
아! 나는 그렇게 기도 할 때마다 그렇게 하시는 주님을 경험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
부르심을 입은 자’ 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부르심을 입은 자!
이 말을 주목하라!!
여기까지! 내가 감사하는 것은
나를 이러한 믿음으로 훈련시킨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나 자신은 51%만 그렇게 하려고 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세, 태도 마음가짐에 대해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는 다는 것이며,
이런 자세야 말로 진짜 이 시대 하나님을 경험하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아! 이것까지도 주님이 주신 믿음이다! 할랠루야!!!
9.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이왕 내친 김에 나의 소원을 말하려 한다!
나는 예수에 미쳤으면 참 좋겠다. 이것은 나의 진심이다.
아! 나는 진짜 예수에 미친 사람을 성경에서 발견했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행26:24, 28-29)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정신 차린 말이요!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얘야! 너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단다!
아! 그렇구나! 주님은 나의 지난날을 생각나게 하신다.
그때 이후! 거듭난 때 이후부터,
나를 만나는 많은 사람들은 나를 미쳤다고 했다.
직장동료들, 친구들, 수많은 동창들과 친척, 혈육들!!
나는 왕따가 되었다.
가장 인상 깊었든 것은 비오는 날! 와! 그때는 젊은 때 였다!
나는 부모님께 선언을 했다!
나와 내 아내는 예수를 믿겠다고!
‘나가라!’ 하시면 집을 나가겠다고!
부모님은 등을 돌려 돌아 앉으시며
차갑고 단호하게 “나가라” 고 말씀 하셨고, 그리고 우리는 집을 나왔다!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죽음의 심판관 앞에서
과연 바울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는가?
나는 이제 확신을 가지고 말 할 수 있다.
정말 정신이 나갔다! 미쳤다! 왜 이렇게 미쳤는가?
오! 이것은 하나님이 그 마음을 사로 잡았기 때문이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행20:22)
바울은 다매색에서 주님을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살아 갈수록 고난과 핍박을 받을수록 더욱 더 미쳐갔다!
지금 그는 결박된 손을 들어 올리며
당대의 석학들, 교수, 학자, 바리새인들앞에서,
참석한 모든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를 놓칠새라 외친다!
예수를 믿어라! 라고!!!!
바로 이때가 바울을 영원한 믿음의 영웅으로 만든 순간이었다.
아! 얼마나 복된 것인가? 얼마나 멋진 순간인가?
이제 나의 소원을 말하려고 한다!
살다 보면 온 갖 유혹과 핍박, 고난과 외로움이 얼마나 많은가?
특히 주님에 대한 의구심, 불평,
충동질 하는 사단의 속삭임!
기대에 못 미치는 기도응답!
그러나 바울처럼 나도 이런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
그리고 바울처럼 이렇게 외쳐 봤으면 참 좋겠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달려 가리라!
삶의 마지막 끝에서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온누리 요양원의 새벽기도!
나는 할머니들에게 이렇게 외쳤고
모두들 아멘! 하고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