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님을 그리워하며
부자유친은 오륜, 五倫의 으뜸으로 치지만, 조손유친, 祖孫有親이란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특히 아버지를 일찍 여윈 ―3세, 더 정확하게는 19개월― 저는 아버지 생각은 아예 떠올릴 수 없고, 할아버지와 지낸 시간만 오롯이 기억된다. 어린 오남매(위로는 열여섯, 막내는 19개월)를 두고 36세인 아버님은 하세 하셨는데,6형제 9남매 중 셋째이셨다.
옹은 급기야 우리 집으로 아예 거처를 옮겨 사랑방을 차지하시고 사령관이 되셔서 저희 5남매를 양육하셨다.
할아버님은 1888년 무자 생, 戊子 生이시고, 성주 가야산 형제봉 기슭 외딴집에서 지독히 가난하게 태어나셨다.
이즈음 세계정세는 영국 프랑스 등 열강이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식민지를 개척하기에 바빴고, 한반도는 일본 청나라 러시아 등이 서로 견제하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1895년 고작 8세에 6월에는 어머니를 11월에는 아버지를 여의는 천애고아가 되었고, 10살 연상의 누이는 이미 고령 운수 연봉의 선산 김 씨 댁으로 출가하셨다.
까까머리 소년이 가야산 외딴집에서 부모를 여의고, 배고픔에 무서움에 사무치는 그리움에 울고 있을 정경을 그려보니 오호 통재라!!
다행히 백부께서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시어 잘 건사하셨으니, 참으로 지난한 어린 시절이었다.
그 시절 대부분의 농촌은 춘궁기에 초근목피, 草根木皮로 근근이 이어갔으며 소작농이 많았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선생님한테 배울 형편은 아니 되어 오직 독학으로 사서, 四書를 익히셨고, 성장해서는 시문을 공부하여 여러 벗들과 운을 띄어 시작, 詩作을 하셨고, 한시경연대회도 참가하여 입상한 기록이 유고집에 남겨져 있다.
할아버지의 휘, 諱는 종화, 宗和이며, 자는 명서, 溟瑞, 호는 죽우당, 竹友堂이며, 늦게 스스로 벽산초부, 碧山樵夫라 하시고, 성은 이 씨이니 관향은 벽진, 碧珍으로 고려 벽진장군 휘, 諱, 총언, 忩言이 시조이시다.
나는 5남매 중 막내라서 할아버님과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하였는데, 새벽엔 뒷도랑에서 찬물로 세수하고, 소금으로 양치하고 하늘 천, 따지 하면서 글을 읽었다.
6세(?)부터 천자문 계몽편 동몽선습 소학 상·하권은 책거리를 하였고, 맹자 몇 줄 읽다가 5학년(?) 말부터 중학교 입시 준비 관계로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딱지치기·구슬치기·팽이치기·공기받기 등 소년들이 즐겨하는 놀이는 다른 사람보다 적게 하였어도, 그때의 배움이 훗날 한문을 가까이하고, 시문을 좋아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저희 집은 전통 유가의 법도를 소중히 여겨 출입 시 어른에게 꼭 절을 하고 겸상, 兼床을 할 때도 수저를 가지런히 해야 되고, 오륜을 잘 지키는 그런 분위기였다. 성격은 조금 급하셨는데 인내심이 아주 강하셨고 술은 안 드셨는지 금주 절주하셨는지 잘 모르겠고, 담배는 좋아하셔서 장죽, 長竹의 청소는 내가 많이 하였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셋째 아들 집에서 할 일을 모두 하셨다고 생각하셨는지, 큰댁이 있는 부산으로 가시기 전에 제가 다니는 중학교를 찾으셨는데, 그때 정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전통 한복에 의관을 갖추고 안경을 쓰시고 저 멀리서 내려다보니(학교 교사가 운동장에서 한창 높은 곳에 위치함.) 영락없이 나의 할아버지인지라 달려가서 넙죽 절한 기억이 있다.
옹은 제가 좀 잘해도 칭찬은 인색하셨고, 귀여워도(?) 숫제 사랑스럽고 예쁘다는 표현은 할 줄 모르셨다. 시골에 가설극장(활동사진)이 열리는 저녁이면 장롱 속에 깊숙이 보관해 둔 곶감 한 개가 나의 목구멍을 즐겁게 하였다.
앞마당에 나무를 심어 아침에 넘고 저녁에도 넘고 이튿날 아침에도 넘으면 “아침에 넘은 나무를 저녁에 못 넘을 수 없다.” 그래서 나무가 아주 커서도 넘을 수 있다는 교육적인 말씀도 해 주셨고, 중원에 태산, 화산....등 아주 큰 오악이 존재하며, 고개(峴)를 함께 넘을 땐 저 산 너머엔 더 큰 세상이 있어 뜻만 굳게 세운다면 크게 이룰 수 있다고 저로 하여금 느끼게 하셨다.
그리고 바둑도 할아버지로부터 배웠다. 처음엔 어깨너머로 보면서 익혔고 그 후엔 24점을 접고 배웠으며 점점 내 실력이 향상되어,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엔 외려 내가 4점을 접어 드리고 두었지만 나는 흑을 잡는 고수, 高手일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 큰댁은 할아버님이 하부, 下釜하시기 몇 해 전에 고향을 떠나 부산 영도구 청학동에 터를 잡았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저희 집안의 선조이야기를 하면, 서울(노원구 하계동?)에서 사셨는데, 학문적으로는 율곡을 중심으로 하는 기호학파에 속했고 색, 色은 노론이었다.
옹의 10대조이신 휘, 諱 민, 敏 선, 善은 몇 고을의 현령, 縣令을 지냈으나, 1616년 광해군의 폭정을 피하여 식솔들을 이끌고 구미 별남, 星南 처가, 妻家(일족이신 생육신의 한 분인 경은, 耕隱, 맹전, 孟專의 고향인) 곳으로 옮겨 자손들이 아주 번창하였다. 특히 옹의 둘째 아들인 휘 상일, 尙逸은 대과급제 삼도관찰사 8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셔서 아버지는 호조참판의 증직, 贈職을 받고 그 벼슬이 후손에게 이어졌다. 바로 직계로는 대대로 자손이 귀하여 그야말로 부절여루, 不絶如縷 그 자체였다.
옹의 조부, 증조부, 고조부, 5대 조부께서 연속적으로 저희 집에 양자 오셔서 4대가 연이어 양자로만 이었으니 끊일 듯 말 듯 근근이 이어온 기막힌 집안이었다.
할아버님의 조부께서 양자 오셔서 고성이씨 사이에 형제를 두어 형은 큰댁, 아우가 바로 할아버님의 아버지이시다.
옹의 아버님은 남매를 두셨는데, 누님은 10세 연상이고 앞에서 기술했듯이 이미 출가하셨고 8세에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혈혈단신 회갑 때 읊으신 시가 둘 있다.
⑴
此身罪厄積如山 차신죄액적여산 | 이 몸의 죄액이 태산같이 쌓여서 |
八歲重丁天地艱 팔세중정천지간 | 8세에 양친의 상을 당했네 |
長爾殘骸猶父手 장이잔해유부수 | 내 잔해는 숙부님 손에서 길러졌고 |
保渠窮命從兄顔 보거궁명종형안 | 내 궁한 목숨은 종형의 안면으로 보존했네 |
飢寒中道亡妻尹 기한중도망처윤 | 기한으로 중도에 아내 윤 씨를 잃었고 |
風雨何年葬婦安 풍우하년장부안 | 비바람 불던 어느 해에는 며느리 안 씨를 장사지냈네 |
但願崎嶇經過後 단원기구경과후 | 다만 원하노니 기구함이 지나간 뒤에 |
子孫前步坦平還 자손전보탄평환 | 자손들 앞길에 평탄함이 돌아오기를 |
⑵
淸晨起坐早春天 청신기좌조춘천 | 이른 봄 맑은 새벽에 일어나 앉으니 |
物物生生各自然 물물생생각자연 | 사물마다 생생하여 각각 자연인데 |
殘雪輕寒梅放笑 잔설경한매방소 | 잔설경한(殘雪輕寒)에 매화가 웃음을 터뜨리고 |
和風微動柳聖眠 화풍미동유성면 | 화풍이 조금 부니 버들이 잠을 깨네 |
樽前縱愛兒孫拜 준전종애아손배 | 술동이 앞에서 비록 사랑스런 아손들이 절을 하나 |
堂上全空怙恃筵 당상전공호시연 | 당상 내 부모님 자리 비어 있네 |
惟有一邊深感事 유유일변심감사 | 오직 일변의 깊이 느끼는 일은 |
斷鉉回甲亦同年 단현회갑역동년 | 죽은 아내의 회갑도 같은 해로다 |
옹의 중년 역시 1924년 갑자, 甲子년에 큰 며느리 안 씨를 잃고, 이듬해 1925년 을측, 乙丑년에 아내를 저 세상으로 보냈고 집안에는 살림할 여자 한 분 없었으니 기구한 운명이었다.
다시 되돌아가서 부산 청학동 큰댁으로 우거한 후에도 경로당 친구들과 아니면 글 잘하시는 분들과 시문으로 화답하시면서 1970. 1. 4 선화, 仙化 하실 때 까지 남겨놓은 시, 詩, 만, 輓, 편지, 書, 서, 序, 제문, 祭文, 명, 銘, 기행문, 記行文 등이 유고집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러나 유고집에 실린 글보다 훨씬 많은 양의 그것이 있을 텐데, 이것을 취합해서 모두 담지 못함을 자손들로서는 언제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조부님께서 하세하신 그 해에 백부께서 빈소를 지키는 애통 속에서도, 생전에 남기신 글 <<선군유고, 先君遺稿>>을 정성스럽게 정리하여 3권의 책으로 묶어 우리 집안에서 잘 간직하여야 할 보배 <<농가보장, 儂家寶藏>> 의 맨 앞에 두시었다. 선화, 仙化하신 이후로 이 귀중한 책은 깊은 잠을 자다가 약 30년 후인 2000년 초반 무렵 자손들의 눈에 띄어 국역을 시작하였다.
이 작업에 수고하신 분은 성주 강희대, 姜熙大 선생님이 번역을 하였고, 시 부분은 영천의 포은 후손이신 정동재, 鄭東在 선생님, 산문 부분은 한산, 翰山 후손인 정병호, 鄭炳浩 교수님이 교열, 校閱을 열심히 하셔서 약 6년만인 2009년에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다.
책 내용은 편지글이 많은데 80 - 90%는 백부님과의 편지로 진한 부자유친을 읽을 수 있고, 자손들이 많아 오고 가는 손자 손녀 증손들이 마치 벌, 蜂이 역사하는 것 같다 하셨고, 시는 그 수준이 매우 높고 화개사, 작천정, 중산리, 방초정, 벽산대 등 천하의 명승지를 때로는 혼자 아니면 문우, 文友들과 운을 띄어서 함께 즐기셨다.
이 밖에 제문 서문 발문 남의 대필 등 다수 있었으며, 특히 친구 두 분과 함께한 금강산 여행기와 혼자 여행하신 일본 기행문은 압권이었다.
유고집을 다시 한 번 천착해보니 자손들의 앞날을 걱정하시고 평탄함이 있기를 소원하시는 것이 회갑원운, 回甲 原韻 마지막 연, 聯에 보인다.
유고집 출판기념회를 자손들끼리 조촐히 치루고 자손록, 子孫錄을 만들어 보니, 내 외손, 內 外孫이 무려 삼백 명을 상회하며, 절손, 絶孫될 뻔 했던 집안이 이렇게 번창하다니 다행스런 마음 이루 형언하기 어렵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고 따뜻하신 우리 할아버님에 감읍, 感泣하면서, 저에게 보내신 엽서가 한 장 있어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昇基見
二十二日發 汝葉 二十四日 午後 接見 知汝今試合格
幸莫甚焉 所入太多汝兄之負擔 重且大矣
何以低當也, 祖老且病 此所謂 躄勇無用而已
某様誠心 誠意開拓 萬里前程
祖雖不見榮光 於汝母之前 以答山海之恩
可也 此屬不多及. 1966. 2. 25 할아비가.
승기 보아라.
스무이틀에 보낸 너의 엽서를 스무 나흘 오후에 보고, 네가 이번 시험에 합격한 것을 알았으니 다행이구나. 들어갈 것이 아주 많을 것이다. 네 형의 부담이 클 것이니 어찌 감당하리오. 할아비는 늙고 병이 들었으니 이른바 앉은뱅이 용맹으로 쓸모없을 따름이다.
네가 어떻게 해서든지 성심과 성의로 만 리 앞길을 개척하여, 이 할아비는 비록 영광을 보지 못하더라도 네 어미의 산 같고 바다 같은 은혜에 보답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을 부탁한다.
다른 것에는 미치지 않는다.
첫댓글 데단하신 할아버지님이시네!
어찌 글로써 표현을 다 하리요!
여일 !
자네의 오늘이 있음이
다 할아버지님의 은덕이로쎄!
오늘날 이 정도의 사람 노릇 하는 것이 모두 옹의 음덕이라 생각하네.
울쩍하면 가까운 산소에 들러 , 비록 세상은 다르지만 소통한다네.
답글 주어 고마우이!!!
역시 불휘 깊은 남간 바람에 아니 뮐세 곳됴코 여름 하나니!
공을 많이 들인 깊은 감동의 글일세.
난도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언제나 유학의 가르침일세.
유학의 가름침, 그 얼마나 내용이 쉽고 평범한가! 그런데도, 아니 그래서 그 얼마나 우주적 가르침인가...
천명지위성적 삶을 살도록 내 더욱 노력해야 겠다고 다시금 다짐한다네.
창씨명 다까야마인 우리 할배는 1869년생, 대동아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에 73세로 하세, 얼굴도 모르겠어라.
竹友堂 할배와의 아름다운 인연이 한편의 그림같네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