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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행 스님 염불 수행 간략한 전기(具行禪人修行略傳)
* 허운 스님과 구행 스님
저는 중도에 출가했고 일자무식입니다
다만 나무아미타불 염불만 압니다
중화민국(中華民國) 시기에, 비록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문맹이지만, 일심으로 염불하며 고행 정진 수행하여 최후에는 떠나갈 시간을 미리 알고[豫知時至] 자신을 불살라 원적한 승려가 있었다. 이 기이한 일은 운남(雲南)을 뒤흔들었고 당시 언론이 보도한 적이 있으며, 이를 증명하는 사진이 있었다.
이 고승이 바로 구행(具行) 스님(1886-1924)이며, 근대 선종의 태두 허운(虛雲) 대사(1840-1959) 문하의 제자였다. 구행 스님이 그렇게 분화(焚火)한 뒤에 허운 대사는 두 수의 시를 지어 기념했다. 당시에 또 어떤 분이 「구행대사행업자화기(具行大師行業自化記)」를 썼다. 이것은 『허운화상자술연보(虛雲和尙自述年譜)』에 수록되어 있으며, 지금까지 여전히 운남성의 계족산(鷄足山)에 남아있다. 다음 이야기는 이 비문 및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청(淸)나라 광서(光緒) 33년 (1907년), 남루한 시골 복장을 하고 외모가 수수하고 소박한 한 청년이 계족산(雞足山) 축성사(祝聖寺)에 찾아와 허운 노스님[老和尙](당시 68세)을 만나 뵙기를 요청하자, 주지 축성(祝聖) 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무슨 일로 허운 노스님을 만나러 왔는가요?”
시골 청년은 말하기를 “저는 올해 스무 살이며 운남 염원(鹽源)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외롭고 처량하며 의지할 데가 없었기에 씨족들이 저를 증(曾) 씨 집에 데릴사위로 호적에 올렸습니다. 그 이후로 증씨 성을 갖게 되었고 빈천현(賓川縣)으로 호적을 옮겼습니다. 지금 제 고향은 배고프고 수확이 적어서 농사일에 아무도 저를 고용하지 않습니다. 집이 가난한 데다 두 아들이 있는데, 처자식을 부양할 수 없고 아무 대책이 없습니다.
그런데 허운 노스님이 계족산에 축성사를 건설하는데 막노동자를 고용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갈 곳이 없어 여기 와서 허운 노스님께 간청하여 저를 받아들여 제가 여기서 일을 해 약간의 돈이나마 벌어 식솔을 부양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했다.
축성 스님은 가엽게 여기며 말했다, “당신이 만약 우리가 주는 품삯이 박해도 괜찮다면 우리 절에 머물면서 일하시오! 허운 노스님은 아주 자비로워서 이런 작은 일은 당신도 그 어른을 가서 만날 필요가 없소. 그분은 허락하지 않은 일도 없소.”라고 말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큰 스님!” 청년은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당신 이름이 무엇이오?”
“가족들은 저를 아변(阿便)이라고 부릅니다!”
“좋아요!” 노승은 말했다, “아변! 당신은 뒤에 있는 나뭇간[柴房]에서 지내시오!”
그리하여 아변은 땔감을 쌓아둔 나뭇간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대단히 근면했다.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누가 시킬 필요 없이 자기가 발심해서 땅을 일구고, 채소를 가꾸고, 비료와 물을 주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농업 소작인이었기 때문에 이 모든 농사일을 잘 해냈다. 그는 자발적으로 힘을 내어 흙짐을 지고 돌덩이를 들어서 절 건축일을 도왔다. 이른 아침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쉬지 않고 일하며 말을 한 적도 없었고, 남이 그에게 말을 해도 그는 모두 들리지 않았다.
“귀머거리!” 다른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이렇게 불렀지만, 아변도 이를 거슬린다고 여기지 않았고 지금까지 논쟁한 적도 없었다. 일한 지 한 달 정도 지난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아이를 안고 그를 찾아왔다. 처제도 함께 왔고 장모와 아들 조카 등 한 무리의 8명이 나뭇간에 꽉 차 있으면서 왁자지껄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고를 들은 성공(聖空) 스님은 아변에게 말했다, “아변! 내가 너를 일꾼으로 받아주었는데, 왜 처자식까지 데리고 와서 절에서 살게 하는가? 여기는 절이라 여자 가족은 살아서는 안 돼!". 아변이 말했다, “저는 그들이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집주인이 토지를 회수하고 그들을 전부 쫓아냈기 때문에 갈 곳이 없습니다.”
성공 스님이 말했다, “이 일을 정말 어떻게 하지? 절에서 여성 가족을 받아주는 도리가 어디 있어?” 아변과 말하고 있는데 뜻밖에 허운 노스님이 언제 오셨는지 모르게 이미 채소밭의 나뭇간 문 앞에 와 계셨다. “성공 법사!” 허운은 말했다, “그들 한 가족은 돌아갈 집이 없고, 고통스럽고 가난하기도 하니 그들 모두를 이 절에서 머물게 해 주시오!” 성공은 황망하게 말했다, “사부님! 어떻게 절에서 여자들을 수용할 수 있습니까?”
허운 노스님은 말했다, “이것은 난민을 수용하는 것이니 상황이 다릅니다! 그들에게 절 뒷산에 오두막집을 하나 따로 지어서 거주하게 하면 됩니다! 아변이 채소밭 오두막에서 살고 싶다 해도 좋습니다! 산 뒤편으로 돌아가서 살고 싶어도 괜찮습니다! 그들 온 가족이 이 절에서 일하게 해주세요!”
아변의 가족 여덟 명은 모두 더없이 감격해 연신 감사의 인사를 했다.
허운 노스님이 말했다, “여러분은 나에게 고맙다고 할 필요 없어요! 이것도 서로 돕는 것입니다. 우리도 일손이 부족하니 여러분이 여기 절의 생활이 힘들어도 괜찮다면 우리 출가자들과 함께 큰 솥 밥을 먹읍시다! 우리에게 있는 대로, 다들 함께 먹읍시다. 밥이 있으면 밥을 먹고 밥이 없으면 죽을 먹읍시다.
아변은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고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말했다, “노스님, 어르신이 우리 가족의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허운 노스님이 말했다, “아변, 어서 그런 말 하지 마라, 사람은 응당 서로 도와야 하고, 불제자는 더욱더 마땅히 남을 도와야 한다!”
아변의 가족 여덟 명은 그때부터 모두 축성사에서 잡일을 했다. 저마다 허운 노스님에게 감격했고, 저마다 근면하고 성실했다. 산 뒤쪽을 한 두둑 한 두둑씩 채소밭으로 개간하고 똥똥한 큰 배추와 갖가지 야채, 콩, 과일을 심어 절 전체에 공급했다. 또 절 전체를 티끌 하나 없이 깨끗이 청소했다. 아변은 초가집에서 혼자 지냈고, 아내와 가족과는 함께 지내지 않았다.
2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어느 날 허운 노스님이 산에 와 둘러볼 때를 이용하여 그는 무릎 꿇고 머리 조아려 절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허운 노스님이 물었다, “아변, 너는 뭘 바라느냐?”
아변이 말했다, “노스님! 제발 어르신이 저에게 염불을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어리석은 데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고, 염불할 줄 모릅니다!”
“너는 염불해서 뭐 하려고?”
아변이 말했다, “제가 금생에 이렇게 고생하고 이렇게 미련한 것은, 틀림없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은 데다 수행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생에 불법을 배우고 도를 닦아서 내생에는 다시 타락하고 싶지 않습니다!”
허운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가 불법을 배우고 도를 닦고 싶다고?
아변이 말했다, “저는 문맹이고 못생긴 데다 미련한 놈입니다! 제가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를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사부님이 저에게 간편하고 쉬운 방법을 가르쳐 주시길 간청합니다. 저는 사부님이 경전 강의하시는 것을 항상 듣지만, 강의가 심오하여 저는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부님이 말씀하시길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부지런히 부처님 명호만 외워도 서방 극락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사부님, 저에게 부처님 명호를 외우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허운 노스님이 말했다, “아변, 너는 이미 일심으로 정성을 다하고 있으니 정말로 기특하구나! 내가 너에게 아미타불과 관음보살을 외우도록 가르치겠다. 이제 너에게 정토 법문을 가르쳐 주겠다!”
아변은 머리 조아려 절하여 감사드렸다. 허운 노스님은 그에게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의 성스러운 명호를 부지런히 어떻게 외울지를 가르쳐주었다.
그리하여 아변은 그때부터 모든 인연을 쉬어버리고 일심으로 염불하며[屏息諸緣, 一心念佛] 밤낮을 멈추지 않았다. 설사 낮에 채소 가꾸고 김매더라도 마음속에서 염불하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선통(宣統) 원년(元年) (1909년), 허운 노스님(이때 연세는 70세이다―역주)이 용장 대장경[龍藏大經]을 운반하여 계족산(鷄足山)으로 돌아온 뒤에 전계(傳戒) 법회를 거행하였는데, 아변도 계율을 받고 출가하고 싶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1살이었다.
허운 노스님은 말했다, “네가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싶어 하는구나! 좋다. 나는 네가 지극히 경건하고 염불에 지극히 정진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너는 아직 가족이 있지 않느냐! 너는 가족을 어떻게 할 것이냐?”
아변이 말했다, “저의 일가 여덟 명은 노소(老少) 모두 약속하기를, 오늘 모두 와서 삭발하고 출가 수행하기로 하였으니, 사부님이 은혜롭게 꼭 허락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미타불! 기특한 일이다! 기특한 일이다!” 허운 노스님은 말했다, “매우 수승한[殊勝] 인연이다! 좋다! 좋아! 잘했다! 내가 너를 허락한다!”
허운 노스님은 좌석 아래에서 미친 듯이 기뻐하며 연신 머리 조아려 절하는 이 청년을 바라보았다. 아변은 멈추지 않고 조아려 절을 했다. 어디 삼궤구고(三跪九叩: 두 무릎을 땅에 세 차례 꿇고 머리를 세 번씩 모두 아홉 번 조아리는. 가장 공경 존중함을 표시하는 예절―역주)만 하겠는가? 백 번이나 조아려 절하지 못할까 걱정일 정도였다! 아변은 언변이 서툴러서 감격스러운 나머지 말을 하지 못했다. 감격한 나머지 눈물만 흘렸다! 그저 절만 했다!
“일어나거라!” 허운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많이 절할 필요 없다! 네가 나에게 절을 많이 하는 것은 부처님께 절을 많이 하는 것만 못하다!” 이 순박하고 진솔한 청년은 또 여러 번 절을 하고 나서야 일어나려고 했다.
“아변!” 허운 노스님이 말했다, “오늘부터 네 이름을 일변(日辯)으로 바꾸어라! ‘변’은 너의 원래 이름인 변(便) 자와 같은 발음이다. 네가 구족계(具足戒)를 받거든 다시 따로 너에게 법명(法名)을 지어주겠다.”
아변은 무한히 기뻐하며 말했다, “저는 일변입니다!”
“그건 그냥 달리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허운 노스님이 말했다, “너는 결코 일변도 아니요, 아변도 아니다!”
“스승님! 저는 못 알아듣겠습니다!” 일변이 망연히 허운 노스님을 바라보았다.
“나도 허운이 아니고, 허운도 나가 아니다!” 허운 노스님이 말했다, “너는 이해하느냐?”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허운 노스님은 말했다, “나는 너에게 염불을 가르쳤고, 정좌도 가르쳤다. 이제 나는 네가 알도록 가르치겠다. 너는 네가 아니다! 나는 네가 마음속에서 깨달음을 얻기를 바란다! 나는 나가 아니다. 마음속에는 나가 없다! 아집을 깨버려라! 그리고 구하는 것이 없다면 자연히 얻는다, 이해하느냐?”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너는 천천히 배우면 점차 체험하여 터득할 수 있다.”
허운 노스님이 말했다, “나는 네가 게을리하지 않고 부지런히 염불하면서 일심으로 주의력을 집중하고 있다[一心系念]는 것을 알고 있다! 많은 사람이 너에게 미치지 못한다! 이것도 네가 자질이 순박하고 고지식한 장점이다. 사람이 너무 총명하면 도리어 총명에 의해 잘못된다! 흔히 그들은 부지런히 일심으로 수행할 수 없다! 착한 애야, 네가 이런 게 좋다, 열등감을 가져서 물러나는 마음을 내지 말거라! 총명한 사람을 배우지도 말거라.”
“저는 원래 어리석어서 배워도 총명을 배우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것이야말로 좋다!” 허운 노스님 말했다, “그러면 총명에 의해 잘못되지 않을 것이다!”
일변이 구족계를 받은 뒤에 허운 노스님은 법명을 구행(具行)이라고 지어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구행 스님이 되었다! 구행은 머리를 깎고 승복으로 갈아입고 매일 발심해서 채소를 가꾸고, 비료를 주고, 분뇨를 나르고, 흙을 짊어지고, 청소하는 등, 온갖 노동일을 하면서, 계율을 받기 이전 때처럼 그는 오로지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외웠다. 어떤 사람과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귀가 먹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다들 그를 ‘귀머거리 스님’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고행하면서 중화민국 4년 (1915년)에 이르자 그는 갈수록 귀가 먹어지고 갈수록 침묵하였다. 채소를 가꾸거나 일을 하든 간에 마음속에서 염불하지 않은 때가 없었으며, 누가 큰 소리로 불러도 그는 들리지 않았다.
허운 노스님은 그날 그를 오라고 불러 말했다, “구행아! 너는 4년 동안 고행했고 경지도 이미 괜찮다. 그러나 식견(識見)이 너무 적다. 너는 이제 마땅히 하산하여 밖으로 나가서 대덕들을 참방하고 운수행각(雲水行脚)하면서 닦고 배워야[參學] 한다! 너는 천하의 명산과 사원을 참배해야 한다. 장래 네가 돌아오기를 원하면 돌아오거라. 만약 또 다른 좋은 기회 인연이 있으면 인연 따라 가거나 머물러도 좋다!”
구행은 흐느끼며 절했다, “사부님! 제자는 가지 않겠습니다!”
“왜 가지 않으려느냐?”
“제자는 평생 사부님 어르신을 시중들겠습니다!”
허운 노스님은 마음이 쓰렸지만, 일부러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꾸짖었다, “가거라! 내가 왜 너에게 무아(無我)를 가르쳤고 집착을 깨기를 가르쳤겠느냐? 너는 잊었느냐? 빨리 떠나거라! 나는 너의 시중이 필요하지 않다!”
구행은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해 울면서 행장을 챙겼다. 허운 노스님이 그를 산문 밖까지 전송했을 때 젊은 승려가 떠나기를 꺼려하는 것을 보고 그의 마음도 괴로웠다. 하지만 그는 제자가 어리석은 집착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결코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허운 노스님은 담담하게 그에게 말했다, “너는 가거라! 우리는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날 것이다!”
구행은 예전에 허운의 모습 꼭 그대로 삿갓 하나 지팡이 하나를 들고 여러 곳의 명산을 순례하기 위해 떠났다!
중화민국 9년 (1920년) 허운 노스님이 운서사(雲棲寺)를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구행이 갑자기 돌아와 허운 노스님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사부님! 저 돌아왔습니다!”
허운 노스님 몹시 놀라고도 기뻐했다, “네가 돌아왔다고? 아주 잘되었구나! 너는 참학하러 가서 어떤 명산을 유람했느냐? 그리고 왜 또 돌아왔느냐?”
구행이 말했다, “천하 각지의 명산은 거의 다 가봤지만 역시 거기서 거기입니다! 사부님이 여기에서 화정사(華亭寺)를 재건하신다는 말을 들었고, 사부님께 일손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돌아왔습니다.” 허운 노스님이 말했다, “네가 돌아와서 몹시 좋구나! 돌아왔으니 무슨 일을 할 작정이냐?”
구행이 말했다, “사부님, 저는 어리석은 데다 둔하고 글자도 잘 모르니 무슨 큰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사부님을 시중들면서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고 하기를 원하지 않는 고되고 낮은 일을 하는 잡부일 뿐입니다.”
허운 노스님이 말했다, “네가 이렇게 고행하기로 발심한 바에야, 좋다! 너는 운서사(雲棲寺)와 승인사(勝因寺) 두 곳을 오가며 지내거라!” 그리고 또 물었다, “이번에 돌아와서 계족산에 가서 너의 가족을 찾아가 보았느냐?”
구행이 말했다, “아니요! 안 가겠습니다!”
“왜?”
구행이 말했다, “모두 출가해서 수행하는데 무슨 미련이 있겠습니까?”
“만나보는 것도 괜찮다!”
구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갑니다! 안 갑니다!”
그때부터 구행은 두 절을 오가며 매일 부지런히 일했다. 땅을 파고, 돌을 나르고, 담을 쌓고, 집을 짓고, 채소를 가꾸고, 나무를 심고, 나무를 베고, 땔감을 나르고, 벼를 베고, 밭을 갈고, 잡초를 뽑고, 청소하고, 분뇨를 퍼 나르고, 비료를 주고, 요리하고, 땔감을 쪼개는 등… 열심히 일했다. 아무리 고된 일이라도 그는 발심하여 부지런히 하면서 1분의 한가함도 없었고, 또한 마음속으로는 염불하지 않는 시각이 없었다! 일하면서도 부처님의 이름을 외웠고, 때로는 스승이나 동료의 옷을 수선할 때도 한 땀 한 땀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며 수선했다.
저녁이 되면 『법화경』, 『약사여래경』, 『정토경』 들에 한 글자마다 한 번 절했다. 아침에는 새벽종이 울리면 항상 가장 먼저 절에 올라가서 예불에 참여했다. 그의 정진과 고행은 정말 절 전체에서 제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귀머거리였고 벙어리였으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허운 노스님은 구행을 관찰하면서 무척이나 흐뭇하게 느꼈다. 그는 이 젊은이의 수행 진보가 어떤 승려보다 열 배, 백 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해회탑(海會塔: 승려들의 납골탑―역주)을 건축하고 있을 당시, 구행은 돌덩이를 짊어져 날라 벽을 쌓고 있었는데, 허운 노스님이 보이자 그는 갑자기 입을 열어 마치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사부님! 장래에 해회탑이 완성되면 제가 와서 탑을 지켜도 될까요?”
허운 노스님은 구행을 바라보며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 말이 예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구행이 곧 세상을 떠날 것임을 알았다.
“그래도 될까요?” 구행은 계속해서 캐물었다, “사부님! 그래도 될까요?”
허운 노스님은 마음이 슬퍼져서 하마터면 눈물이 쏟아질 뻔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려므나!”
“감사합니다, 사부님!”
허운 노스님이 말했다, “모든 것을 인연에 따르고 억지로 구하면 안 된다!”
“알겠습니다!”
그런 뒤에 허운 노스님은 구행에게 그해의 춘계(春戒) 법회의 증명인[尊證]을 맡으라고 특별히 허락했다.
계율을 받은 제자들이 구행에게 법문을 해달라 청했다.
구행은 말했다, “저는 중도에 출가했고 글을 전혀 모릅니다. 다만 한마디 아미타불 염불만 압니다!”
허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하여 마음에서 말했다, “단지 한마디 아미타불을 외울 줄 알아서, 사람마다 모두 그처럼 이렇게 게을리하지 않고 정진하기만 한다면, 한마디로도 충분히 성취할 수 있다. 만약 스스로 총명만 믿고 심념(心念)이 한결같지 않다면, 설사 만 권의 경전을 읽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뜻밖에 이 아이의 수행 진보가 이렇게 빨라서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바른 과위를 증득했다!”
지나간 일들이 허운 노스님의 마음속에 다시 나타났다. 그는 구행이 이번에 대중에게 옷을 공양하는 것은 곧 왕생하겠다는 것임을 알았다.
육신이 재가 되었지만 흩어지지 않다
전계 법회를 마친 뒤 구행은 휴가를 신청하고 하원(下院)인 승인사로 돌아왔다. 중화민국 13년 (1924년) 3월 29일 오참(午參) 뒤에 구행은 승인사의 대웅전 후면의 겉곡식을 말리는 양지인 쇄평(曬坪)으로 걸어갔다. 그곳에 몇 단의 볏짚을 쌓아놓고 가사를 입은 채 가부좌를 하고 불을 붙였다. 왼손에는 인경(引磬)을, 오른손은 목탁(木魚)을 들고 얼굴은 서쪽으로 향하고 염불하면서 스스로 원적에 들었다.
당시에 절의 대중 수십 명의 스님들은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절 밖에서 어떤 사람(마을 사람들)이 절 안에서 큰 불빛이 있는 것을 보고 들어와 조사하게 되었다. 여기저기 찾아보았으나 구행 법사를 찾지 못했다. 얼른 대웅전 뒤에 가서 보니 구행 법사가 잿더미 속에 있었다. 용모는 변하지 않고 단정히 가부좌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의복은 아무런 손상이 없이 온전했다. 신발, 그리고 손안의 목탁과 인경(引磬)의 손잡이[柄]는 이미 타져버려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비록 육신이 재가 되었지만 흩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스님들이 이 상황을 보고 나서 서둘러 운서사(雲棲寺)에 계시는 허운 장로에게 보고했다. 허운 장로는 초 8일 보살계 법회 때문에 승인사로 내려올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운남성 재정청장 왕죽촌(王竹村)과 수리(水利)국장 장졸선(張拙仙)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에게 대신해서 구행 법사의 후사(後事)를 처리해 달라 맡겨 부탁했다.
왕 씨와 장 씨 두 사람이 가서 보고는 기이한 일이라고 놀라며 얼른 운남 독군(督軍) 당계요(唐繼堯)에게 알렸다. 당계요는 이를 듣고 전 가족과 수행 관원들을 이끌고 와서 보았다. 보니 구행 법사의 육신은 우뚝한 모습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당계요는 말했다, “볏 짚단으로 자신을 불태웠다면 어떻게 전신이 재가 되었는데도 쓰러지지 않을까? 또 어떻게 원래의 모습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을까? 가사는 또 왜 재가 되지 않았을까? 이것은 일반적인 불로 태워진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그래서 일설에는, 구행 법사는 마음속으로부터 삼매진화(三昧眞火)를 일으켜 자신을 불태웠기 때문에 이런 상서로운 현상의 기적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당계요가 그의 수중의 인경을 집어 들려고 가까이 걸어갔다. 막 집어 들자 구행 법사의 육신은 와르르 무너져 잿더미가 되었다. 대중들이 몹시 놀라고 감탄한 나머지 불법에 대해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며 큰 신심이 일어났다. 당계요는 정부에 제의하여 구행 법사를 위하여 3일 동안 추도회를 거행하기로 했다. 곤명일보(昆明日報)도 특집으로 일면 머릿 기사와 사진을 게재하여 운남성 전체를 뒤흔들었다.
소식을 듣고 온 가족들, 사회의 지도적 인사, 곤명의 출가 재가 불교도 등이 참배하러 왔다. 곤명 전 지역을 뒤흔들어서 수만 명이 산에 올라와 조의를 표하고, 사람마다 감동하고 기묘함을 칭찬했다. 사람들이 말했다, “누가 불법이 없다고 말하는가? 누가 수행하여 불보살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가? 구행 상인(上人)이 바로 가장 좋은 불법의 증거가 아닌가! 보세요! 구행 대사야말로 불법의 가장 좋은 증거가 아닌가요?”
구행 법사를 추도하며
허운 노화상
굶주려 죽겠는 청년은 호소했다 오 하늘이여 枯腸欲斷只呼天
애석해라 불법 수행자 젊은 나이에 떠나다니 痛惜禪人殞少年
수년 동안 전국 명산 두루 돌아 참배하고 數載名山參謁遍
돌아와 괭이 들고 일하면서 염불하며 歸來念佛荷鋤邊
범찰 재건 도와 갖은 고생 함께 했으니 助興梵刹同艱苦
밀행 공덕 원만함은 상품의 연화대요 密行功圓上品蓮
약왕보살 진정한 연비 공양이어라 燃臂藥王真供養
공자가 안회 죽음 슬퍼함 아직도 처연하네 孔悲顏歿尚淒然
지금까지 살면서 마음 더욱 아픈데 活到於今心更寒
오직 법사만이 초탈하여 관계가 없어 惟師超逸不相干
말법 시대 만난 사람 그 많은 얽매임 人當末劫多緣累
그대는 임종에 한 번 불살라 모두 끝냈네 君至臨終一火完
속념은 채소가 익어감을 잊기 어렵건만 世念難忘蔬菜熟
서방극락에 돌아감 또한 석양 쪽이니 西歸且尚夕陽邊
슬픈 마음에 노인의 눈물 끝없이 흐르고 傷心老淚揮無盡
인경 하나 소리 남겨 미묘한 인연 보였네 一磬留音示妙緣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