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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우리의 하느님은 모든 것을 뒤집는 분이십니다!
선구자 요한이 무대를 잘 꾸며놓고 구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일종의 바톤 터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이 집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4-15)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인류 구원 사업의 첫 협조자인 초기 사도단을 부르십니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네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제자단을 부르시는 광경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볼 때, 정말이지 전격적이고 뜻밖의 대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잘 배운 사람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 대사제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날도 열심히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그물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그물을 손질하여 내리고 있는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시고, 자신들을 눈여겨보시며, 이윽고 당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
제자들의 성소 출발점을 묵상하니, 어찌 그리 제 성소 여정과 판박이인지 놀랄 지경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 하루 온 종일 설계실에 앉아 도면을 바라보고, 도면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께서는 갑작스레 제 뒷덜미를 잡고 낚아채셨습니다. 정말이지 얼마나 난감하고 당혹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당시 저는 수도 생활에 대해서는 단1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많이 아플 때였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는데, 나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인데, 나같은 사람도 수도자가 되고 사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엄청났습니다.
사실 제 학창 시절 내내 생활 기록부에는 늘 이런 표현이 반복되었습니다. ‘지극히 내향적이고 소심한 성격임.’ ‘남앞에 나서기를 힘들어하니 발표력을 키울 필요가 있음.’
어딜 가면 늘 구석 자리를 찾았고, 주변 사람들과 교류도 잘 하지 않고, 하루 온 종일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제 안에 갇혀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런 저를 부르시고, 다양한 과정을 통해서 저를 단련시키셨습니다.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저를 집어 넣으셔서 재창조하시고 당신 말씀의 봉사자로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뒤집는 분이십니다. 당신 사업의 협조자로 완벽한 사람, 똑똑한 사람,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저처럼 한없이 부족하고 자격이 없는 사람,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 나약하고 소심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성탄 사건은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에 깊숙이 개입하신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구차스럽고 죄투성이인 우리 한명 한명의 인생 여정 안에도 분명히 육화강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이 깊은 상처 사이에 탄생하십니다. 때로 따분하고 한심한 우리 각자의 하루 하루 그 안에 탄생하십니다. 때로 너무 스치스러워 얼굴을 들기조차 힘든 죄스럽고 남루한 우리 삶 속에 탄생하시고 현존하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마르코 1,14-20
누가 내가 체험한 ‘복음’(기쁜 소식)이 무엇이냐 물으면?
오늘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
예수님은 ‘복음’, 곧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좀처럼 우리를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뜻이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람들인데 복음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때 대답할 수 있습니까?
각자가 설명할 수 있는 기쁜 소식의 개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이 말씀에 공통적인 해답이 이것일 것 같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예수님을 따르면 고기를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됩니다.
이 ‘존재의 상승’이 곧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을 각자가 체험했어야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행복입니다.
우리는 왜 행복하지 못할까요? 어렸을 때 저의 꿈은 행복이었습니다.
그래야 죽음이 두렵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좀처럼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돈이 있어야, 예쁜 여자 친구가 있어야, 남들보다 잘나야 행복할 수 있다고 여기겠지만, 그런다고 해도 행복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슈퍼맨을 꿈꿨습니다.
슈퍼맨은 이 지상의 어떤 고통도 겪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 지상의 모든 고통을 초월하는 존재입니다.
다른 별에서 와서 하늘을 날고 다치지도 않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슈퍼맨이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하늘 높이 날지를 못했습니다.
낮게 날다가 나무와 건물과 산에 부딪혔습니다. 그래서 나는 연습도 했습니다.
세 발짝 뛴 다음에 손을 쭉 폈습니다.
논에서 연습하다가 배가 다 까졌습니다.
‘나는 슈퍼맨이 아니구나!’
혼자서 슈퍼맨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더 돈과 여자와 명예에 집착하였습니다.
마치 그것이 복음인 것처럼.
그러한 세상에서 복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애벌레는 애벌레들이 서로 경쟁하며 올라가는 높은 탑이 있었습니다.
그 탑의 꼭대기가 세상 모든 사람이 복음이라 여기는 것이었고 저도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비’가 될 수 있다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나비는 꽃들에게 감히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됩니다.
그들이 꽃을 수정시켜 열매를 맺게 해 줍니다. 애벌레인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사제가 되라는 부르심에 응답하면 되었습니다.
사제는 애벌레로 사는 삶이 아니라 나비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김경일 교수는 이들이 분명히 착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그들의 일상을 찍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자신이 공부한 것을 더 많은 친구에게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저의 교수님도 “구체적으로 모든 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알려주지 못하면 그건 네가 모르는 거다”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남에게 가르쳐주면서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명확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디팩 쵸프라’도 자녀들을 그렇게 교육했습니다.
“너희는 남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만 생각해라.
나머지는 아버지가 다 책임질게.”
슈퍼맨은 경쟁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을 낚는 높은 수준의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다 하이에나처럼 삽니다.
서로 경쟁하여 먹이를 먹으려 하거나 사자 앞에서는 꼬리를 감춥니다.
하이에나는 다치면 버려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이에나를 치료해 줄 수 있는 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명에 응답하기만 하면 됩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 그 사명에 응답하였고 그래서 모든 것을 쉽게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한 번도 이 길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점점 더 행복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에겐 복음이었고 이 복음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하느님 자녀로 만들 수 있는 사명으로 초대받았고,
그 초대가 우리를 슈퍼맨으로 만들어줍니다.
이 복음을 체험하고 그 기쁨을 전합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1,14-20: 첫 제자들을 부르심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절) 하느님 나라는 주님께서 오신 다음에 활짝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시다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7절) 하신다. 그분은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이루시려 그들을 부르신다. 모든 민족에게 당신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서 가장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일꾼으로 쓰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셨다.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다음, 그분은 그들 안에 하느님의 능력을 불어넣으셨고, 힘과 용기를 채워주셨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당신이 가르치셨고, 그들을 이성적이고 분별력 있는 영혼을 쫓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다.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능력을 주시어 거룩한 일꾼이며 교사로 모든 민족에게 파견하셨고, 그들을 당신 가르침의 선포자라 선언하셨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18절)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에 맞지 않는 것 즉 방해되는 것은 곧바로 버려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님께 부름을 받은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배를 버렸고(19-20절), 주님께서 부르신 이들 가운데 어떤 핑계를 대는 사람은 없었다.
주님의 얼굴에는 거역하기 어려운 거룩한 그 무엇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따라나서는 비상식적인 결정을 사도들이 했을까? 사도들은 영의 아버지를 따르고자 육의 아버지를 떠났다. 그것은 아버지를 버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아버지를 참으로 되찾은 것이다. 그분의 얼굴에는 그분을 뵙고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는 거룩한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집착을 버려야 한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제배대오도 버리고 그들의 생계가 달린 배마저 버렸다(20절) 마태오와 바오로 사도를 보더라도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그 무엇에도 집착이나 애착을 버려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22년 정신과 입원 환자 중 22%가 1020세대라고 합니다. 1만 3,000여 명이었던 환자는 5년 만에 1만 7,000명으로 상승했고, 이는 전 연령대 중 가장 가파른 상승 폭이었습니다. 여기에 자살 시도 역시 5년 전에 비해 50% 증가했습니다.
이 기사의 말미에는 ‘경쟁’ 때문이라는 이유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소위 미친 경쟁이라고 하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에 돌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보았던 아이가 생각납니다. 성당 카페에서 학습지를 푸는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성당에 와서 책도 보고 공부도 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기에, 아주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아이가 너무 어려 보이는 것입니다. 물어보니, 아이의 나이는 만 3살. 이렇게 어린데 덧셈과 뺄셈을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빠른 것 아니냐고 물어보니, 다른 아이는 지금 구구단을 한다는 것입니다.
천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글도 떼지 못했는데, 한글을 잘하는 것은 물론이고 초등학교 2~3년에 했던 구구단까지 만 3살의 나이에 하고 있다니 천재가 분명합니다. 이런 천재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3살에 뺄셈, 구구단을 못 한다고 해서 수학 공부할 자격이 없는 것일까요? 앞서도 말했듯이, 늦게 한글을 익힌 저였지만, 남들보다 뒤처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제 또래보다 훨씬 앞서있다고 생각합니다. 책도 10권 출판했고, 현재 또 한 권의 책을 준비하고 있으며, 지금도 글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쟁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경쟁보다 함께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면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던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부르셨고,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도 부르십니다. 어부인 이 제자들의 능력이 그렇게 뛰어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들이 배운 것이라고는 고기 잡는 것뿐인데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면서 부르십니다.
복음 선포하는 일에 그물을 내려 고기 잡는 능력이 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부르셨을까요? 오히려 당시의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와 같이 하느님 말씀에 훨씬 가까운 사람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굳이 제자들을 선발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지요. 즉,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는 곧 우리도 이웃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쟁 사회라는 틀에서 벗어나,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 뜻입니다.
오늘의 명언: 어제 한 일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면, 오늘 당신은 아무것도 못할 것이다(루 홀츠).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들은 어부였다.”(마르 1,16)
우리는 모두
주님의 어부들이라네.
예수님께서
세상의 호숫가를 거니시다가
이름을 부르시면
사람들은
세상의 그물을 버리고
그분의 배에 올라
회개와 복음이라는
낚싯대를 들고
세상 한가운데로
고기를 잡으러 떠나는
그분의 어부가 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곧바로’라는 단어에 머물러 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곧바로 응답해야 합니다.
자칫 머뭇거리거나 지체하게 되면
그 부르심은 이내 잠잠해지고
내 마음 안에서 뜨거운 열정이 사라지게 됩니다.
‘다음에 하자’, ‘내일하지 뭐...’,
‘여건이 되면 하지...’
이런 말들은 우리 안에서
악마가 유혹하는 말들입니다.
게으름을 조장하는 말들입니다.
게으름은 예수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무디게 하는 악마의 간계입니다.
‘쇳불도 당김에 빼라’는 옛 속담이 있습니다.
불을 댕겼을 때 바로 붙여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의 성령의 불도
바로 당겨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하나 하나를 당신의 사랑으로 성장하도록 끊임없이 선물로 부르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한 채
미적거리는 동안
그 부르심에 담긴 소중한 선물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전례력상
성탄 시기가
끝나고
연중 시기가
시작되는
새로운
첫날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는
복음을 믿으며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사람을 올바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시몬과 안드레아는
점점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갑니다.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물을 버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더 많은 숫자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만이라도
하느님의 소중한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낚을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물을 버리듯
버릴 수 있는
결단이
중요합니다.
회개의 삶은
결단의
시작입니다.
복음은
분명한 길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우리들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는
공동체의 성장을
위해 사랑으로
기다리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공적인 활동은
사람들 안에서
더 구체적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안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설
용기와
확신입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축은
회개와
복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회개와 복음으로
성장합니다.
낚인 사람이
낚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하느님의 복음이
심장을
뛰게 합니다.
하느님의 복음으로
행복한 연중시기의
첫날 되십시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구원의 때!
오늘 복음(마르1,14-20)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시는 말씀'과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당신을 드러내시는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예수님의 첫 말씀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입니다.
이어서 당신과 함께 활동할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1,17)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과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들이 바로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와 그리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연중시기가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연중시기는 '예수님의 공생활(삶) 전체를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때가 찼으니, 얼른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때'는 무엇을 의미하는 때일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때'이고, '완성되어진 하느님 나라의 때인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때'라고 묵상이 되었습니다. 이 '구원의 때'를 '카이로스(Kairos)'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이들의 때'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지금은 서로 싸울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할 때입니다.
지금은 너의 잘못을 바라볼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나의 잘못을 바라보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자비와 용서를 청할 때입니다.
복음말씀
제1독서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시작입니다.1,1-6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2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3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시어,
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게 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 천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6 또 맏아드님을 저세상에 데리고 들어가실 때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