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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묵상글 ( 연중 제7주간 목요일. - 마음에 소금을 뿌려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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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연중 제7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마음에 소금을 뿌려라!
오늘 독서는 부자들의 죄에 대해 경고하고,
복음도 죄짓는 것에 대해 엄중히 경고합니다.
어느 정도로 엄중하냐 하면 죄짓게 하는 것이라면
그 손발은 잘라 버리고 눈은 빼 던져 버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고,
강하게 반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짓게 한다면 정말로 손발을 자르라는 말인가?
우리 인간은 다 살자고 밥 먹는 것이고,
살기 위해서 죄도 짓지 말자는 것인데 이 말씀은
살라는 얘기가 아니라 죽으라는 얘기밖에 되지 않지 않은가?
우리 지체 중에 죄짓지 않게 하는 지체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이러다가는 남아나는 지체가 하나도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로 이렇게 해서는 안 되고,
주님의 가르침도 정말로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며
지체를 다 잘라낼 정도로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말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죄는 다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지체를 다 잘라버릴 정도로 단단히 마음먹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말씀의 끝에 마음 얘기를 꺼내십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라?
마음이 물러지지 않고 썩지 않게 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조심(操心)이라는 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마음을 잡는 것입니다.
조(操) 자가 ‘잡다’, ‘쥐다’, ‘부리다’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방심(放心)하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방심은 마음이 풀어지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신체를 잘라서라도 마음을 잡으라는 말씀이고,
마음이 물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마음먹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욕심(慾心)과 연관이 있는 말씀일 것입니다.
마음이 물러서도 안 되지만
욕심의 마음이어도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재미있는 것이 오늘 야고보서의 끝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부자들의 죄에 대해 경고하면서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한 것인데
품삯을 주지 않는 것 때문에 원성을 사고,
곧 죽을 텐데도 이 세상에서 온갖 욕심을 부리는 것에 대한 경고이지요.
그러니 주님 말씀은 욕심에 소금을 뿌려,
마음이 청빈해지면 이웃과 평화롭게 되리라는 말씀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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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연중 제7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약성경에서 죄를 뜻하는 희랍어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입니다. 하마르티아는 화살 쏘는 이가 과녁을 빗맞히듯이 과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는 핵심에서 벗어난 인간의 존재 방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죄에 물들어 있으면 인간답지 못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고통을 겪고 고통을 또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녁은 당연히 주님입니다. 주님을 벗어나면 자연스럽게 죄 중에 빠지게 되면서 힘든 삶의 연속이 됩니다. 사기를 쳐서 부자가 되면 행복할까요? 이런 사람들은 언제 잡힐지 불안해서 공돈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을 순간적인 만족을 주는 유흥에 낭비하며 쓰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도 모으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당연히 행복할 수 없습니다. 뇌물을 줘서 높은 지위를 얻으면 어떨까요? 이 역시 자기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불안함의 연속이 됩니다.
세상의 풍요, 또 편하고 쉬운 것만을 쫓다 보면 주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어렸을 때, 복사도 서면서 열심히 성당에 다녔었다고 말씀하시는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세상일에 파묻혀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당을 멀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고, 그 순간 어렸을 때 성당 안에서 지냈던 행복한 기억들이 떠올려져서 다시 성당에 나오게 되었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나의 과녁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삶의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이전의 삶을 끊고 하느님께 돌아오도록 아주 강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거창한 일을 실천하는 데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일에서 시작됩니다. 이 아주 작은 일을 소홀히 하면 주님으로부터 벗어나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 점을 분명히 하시지요.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작은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됨을 충격받을 만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그래야 주님을 과녁으로 자기 삶의 방향을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작은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람에게 커다란 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맛을 낼 수 없음도 이야기하십니다. 우리 존재는 이웃과 함께하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이 드러나는 그 어떤 것도 주님의 관심을 끌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주님의 관심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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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바람직한 삶이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며, 목적이 아니라 방향이다(칼 로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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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목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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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3일 목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르 9,43)
글자 그대로 잘라 버릴 것인가?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도 주님께서 지체를 잘라 내라고 명하셨다고 여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분께서 잘라 내라고 하신 것은 지체가 아니라 욕망입니다. 죄를 부추기는 원인들을 잘라 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각(見覺)의 마차에 올라탄 우리 생각을 육체적 감각에 맞서는 하느님 사랑을 향하여 몰고 가야 합니다.
제멋대로 날뛰는 말처럼 육안의 고삐를 느슨하게 내버려 두지 말고, 달려가는 방향을 멸망의 길에서 돌리도록 애쓰십시오. 육적인 시선을 마음의 판단에 복종시키십시오. 당신 피조물을 지켜보고 증언하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눈이 나쁜 욕망의 뚜쟁이가 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마태 6,23 참조).
-클레멘티나-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사람은 새로운 성전이다.
“하느님은 이 힘, 곧 영원한 현재 속에 계십니다. 영이 매순간 이 힘 속에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절대로 늙지 않을 것입니다 ... 그들은 하느님의 빛 가운데 머무릅니다. 그러므로 그들 속에는 고통이라든가 시간의 순서라든가 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결같은 영원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리하여 엑카르트는 메시아의 때를, 모든 시간이 끝나는 때 나타나는 충만한 시간과 동일시한다. 그러한 새로운 시간은 이미 시작된 마지막 때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준비하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얻게 마련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현재요 지금입니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현존합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전에 일어난 사건과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항상 지금 볼 수 있습니다. … 모든 것이 현재입니다. 이것을 언제나 지금 봄으로써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합니다.”
모든 것을 소유함 - 바로 여기에 하느님을 닮은 인간의 장엄함이 있다. 실로 놀라운 창조, 곧 이 말씀은 밖으로 흐르되 안에 머무른다.(174)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5월 3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금주간 성서 읽기 에페 1-6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4장 오직 고통뿐
1년 후에는
바야흐로 포르투갈 전국민은 로사리요 성모님이 목동들에게 발현하신 파티마에 주목하고 저 태양이 뛰놀였던 파티마의 창공을 바라보게 되었다. 특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깊은 믿음과 신뢰하는 마음으로 우러러보는 것이었다.
냉담자와 신앙을 갖고 있지 않던 사람들의 회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고바 다 이리아의 성모님께서 이루어 주신 기적은 가는 곳마다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선조 대대로 물려받은 가톨릭 신앙으로 되돌아가는 대 민중 운동이 개시되었다. 또 정부 안에도 주목할 만한 큰 변동이 일어났고 드디어 과격당원의 세력도 약해져 갔다.
1918년 2월 마지막 발현이 있은 지 겨우 4개월이 될까 말까 하는데 포르투갈의 주교들은 리스본에 모여서 교황 베네딕도 15세에게 포르투갈의 교세가 조금 개선된 사실을 상서하였다. 교황은 여기 대해서 4월 29일부의 친서로 답하셨는데 그 속에는 파티마 사건에 대해 역사가들의 눈길을 끌 말씀과 말투를 담은 선언을 엿볼 수 있다.
교황은 포르투갈의 교회 정세가 과거에 얼마나 불안하고 좋지 못했던가를 말씀하신 다음 모든 국민에게 베풀어진 희망의 유래를 지시하였다.
“그 희망은 특히 여러분 국민들의 티없으신 동정 마리아께 대한 열렬한 신심으로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신심은 한 무리의 그리스도의 양떼를 비약적으로 높이 올려 당당한 선민 대열에 끼게 하였고 하느님 어머니의 이름으로 진정 특이한 도움을 받기에 합당한 자 되게 하였다"
이 말씀은 베네딕도 15세께서 고바 다 이리아의 발현을 암암리에 지시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전세계 가톨릭 출판물이 한결같이 이를 다룬 것으로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종전에 포르투갈에서 로마로 보도되는 사연은 맡아놓고 불길한 것뿐이었기에 그런 일에 아주 습관이 되어 었던 사람들은 이 불가사의한 발현 소식을 듣고는, 늘 불행이 계속되어 오던 착한 국민에게 성모님의 자비 깊은 중개를 거쳐 특이한 방법으로 오묘한 도움이 내린 것이라고 믿었다.
인류의 평화를 늘 바라며 기도하고 계셨던 교황은 파티마의 성모님 메시지에 있었던 전쟁이 끝나기 위한 목적으로 기도하라는 부탁은 바로 자신의 염원과 노력이며 평화 운동의 안내라고 생각하셨고 또 기도의 십자군을 조직하고자 발포한 5월 5일부 교서에 대한 성모님의 대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을까?(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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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연중 제7주간 목요일 (마르9,41-50) 반영억라파엘신부님의 복음 묵상
단호한 결단
“행동을 통해서 수확하는 것은 습관이고, 습관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성격이며 성격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운명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듭니다.” 그러니 좋은 습관을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습관은 덕이라 하고, 좋지 않은 습관은 그야말로 악습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악한 표양으로 남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9,4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작은 이들이란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제자들, 제자들과 제자들 사이에서 이간질하거나 추종의 길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또한 그릇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이 약한 사람을 죄짓게 하여 신앙을 저버리게 한다면 그 책임이 막중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네 발이 너를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마르9,45-47). 이렇게 섬뜩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의‘신앙에 걸림돌이 되는 악한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섬김의 자세로 살지 않고 오히려 잘못된 행동으로 다른 이들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되어서 버려질 뿐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절대로 죄의 유혹에 걸려 넘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혹은 자신의 욕심이나 욕망 때문에 생기는 유혹을 말합니다.
날이 갈수록 신앙이 여려지고 있다고 합니다. 참된 신앙인의 삶보다는 무늬만 신앙인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환경은 좋아졌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정도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환경과 여건, 처지가 어려웠지만 믿음의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상 안에서 나를 유혹하는 것이 너무도 많기에 마음이 흔들리고 심지어 신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늘어만 갑니다. 세상에 타협하면 주님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은 한순간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4,18). 그러므로 영원한 것을 잡기 위해서 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9,41-50). 서열 다툼이나 특권추구의 유혹을 극복하라는 촉구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더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소금의 맛을 내기 위해서는 그만한 수고와 땀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매 순간 단호한 결단이 요구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영원한 것을! 일상 안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시길”(에페5,10).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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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연중 제7주간 목요일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마르 9,43.45.47)
이 섬뜩한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적잖이 당황하곤 합니다. 너무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들지요. 솔직히 나약한 인간이 죄짓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닐 텐데, 그럴 때마다 몇 개 되지도 않는 주요 신체 부분들을 정말로 하나둘 잘라 버리라는 말씀이신지 묻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의도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전달하고자 하는 바(‘죄짓지 않아야 함’)를 과장되게 표현해서 듣는 이들에게 강렬한 효과를 주는 수사학적 방법을 택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손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던져 버려라.’와 같은 다소 충격적인 표현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보다는 죄와 관련한 우리의 내적 성찰을 더 강화해서 죄짓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체의 주요 부분 가운데 특히 손과 발, 그리고 눈이 언급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의 온갖 행위를 돕는 ‘손’은 악행을 저지를 때에도 가장 많이 사용되는 부분입니다. 인간의 공간적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발’은 우리를 악행의 현장으로 이끄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시각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눈’은 악행을 저지르고자 하는 다양한 유혹이 들어오는 창구가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을 위하여 쓰도록 이 모두를 손수 우리에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손과 발, 그리고 눈은 지금 자기 역할에 충실합니까? 아니면 악행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까?
주님 보시기에 선하고 좋은 역할만 하는 아름다운 손과 발, 그리고 사랑스러운 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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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연중 제7주간 목요일>(5.23)
마산교구 합천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마르9,43)
오늘 복음(마르9,41-50)의 핵심은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나의 구원에 필요한 사랑은 '물 한 잔으로 언급되는 작은 사랑'이고, '이 작은 사랑을 실천만 해도 구원에 이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두 손과 두 발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불구자와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고,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행한다면,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사람들, 손과 발이 잘려진 사람들과 외눈박이들과 같은 불구자들이 넘쳐날 것입니다.
참으로 지키기 힘든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과 죄의 유혹과 죄를 끊어버리는 단호함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기 때문에.
그리고 '믿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이요 희망'이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천국)인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요즘 독서로 듣고 있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 안에서 보면,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나 중심의 이기적 삶이 죄'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상태 개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살고, 또 어떤 이들은 지옥의 삶을 삽니다.
'완성된 천국의 모습인 영원한 생명'은 '잠시 지나가는 지금 여기에서 천국의 삶을 산 이들, 또 그렇게 살려고 애쓴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결정적 은총이요 선물'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주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 민수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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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연중 제7주간 목요일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앞 장면에서 보여주듯이,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서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가 하는 일을 막아 보려고 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마르 9,42)
우리가 자주 빠지는 일이기에 가슴이 섬짓합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죄짓게 하는 도구 세 가지, 곧 자신의 ‘손’과 ‘발’과 ‘눈’을 잘라버리고 빼버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옥 구더기와 지옥 불과 지옥 불 소금을 피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손’과 ‘발’과 ‘눈’을 잘라내라는 말씀이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그 단초가 되는 ‘죄의 뿌리’를 잘라내라는 말씀입니다.
곧 ‘죄를 불러들인 마음의 뿌리를 절단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마르 9,50)
곧 죄를 불러들이는 단초가 되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소금’으로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고 하십니다.
사실 ‘소금’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산상설교에서 보여주듯이, “세상의 소금”(마태 5,13) 입니다.
곧 ‘소금’은 다른 이 혹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녹아서 부패를 막고 맛을 내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하느님에게 참여하는 모든 것, 곧 세상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타인과 함께 타인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이루라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을 되새겨봅니다.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언제나 소금으로 맛을 낸 것과 같아야 합니다.”
(콜로 4,6)
아멘.
* <참고> : 소금은 곡물(레위 2,13)이나 향료(탈출 30,35)에 뿌려져 성별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제물(민수 18,19)에 뿌려져 하느님과의 계약 관계의 상징이 되기도 함.
<오늘의 말·샘 기도>
“나를 믿는 이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마르 9,42)
주님!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남들의 구원도 바라보게 하소서!
남들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말게 하소서!
남들을 죄짓게 하지 말게 하소서!
남들의 구원을 도울 때라야 비로소 자신이 구원됨을 알게 하소서.
마음을 제 자신에게 붙들어 매지 않고, 남들을 향하여 있는 당신께 꼭 붙들어 매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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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연중 제7주간 목요일 (복음: 마르 9,41-50: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조욱현 토마스 신부
복음: 마르 9,41-50: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41절) 자선을 베푸는 데는 부유하고 풍족한 사람들뿐 아니라,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다 그 몫이 있다. 인간은 누구도 남과 나눌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다. 나누는 것이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애정은 같을 수 있지 않겠는가? 목말라 하는 사람에게 냉수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것 자체가 자선이라고 하셨다. 자선은 못 하면서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42절) 하신다. 이 말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버려지는 모습이다. 땅에는 그가 묻힐 곳이 없어서 돌을 달아 바다에 수장시키는 것이다.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45절) 하셨다고 지체를 잘라 버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분이 잘라내라고 하신 것은 지체가 아니라, 욕망이다. 하느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데,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우리 육의 욕망을 끊어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달려가는 방향을 멸망의 길에서 돌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47절) 눈은 우리 마음의 창과 같고 온갖 더러운 욕망은 갈라진 틈새와 같은 눈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을 핑핑 돌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우리 눈을 가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결국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하느님의 뜻을 놓고 갈등하는 나!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지 않는 구더기나 꺼지지 않는 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지옥에 있는 구더기나 불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는 그러한 것들이 아니다. 구더기와 불은 고통을 의미하는데, 이 세상에서 겪는 어떠한 감각의 고통도 저승에서 죄인들이 받을 벌에 비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꺼지는 불과 꺼지지 않는 불은 차이가 크다. 구더기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죽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제할 길 없는 탄식과 후회가 있는 그곳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으며, 죽고 싶어도 죽음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미래의 삶에 대한 희망을 주고 자유의지로써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에 대한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해준다. 주님 안에 희망을 품고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50절) 소금은 말씀의 지혜를 뜻한다. 지혜롭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청중의 일치를 뒤흔들어 놓는 일이 없도록 매우 두려워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잘 선택하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데 나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지나 않을까 나 자신을 두려워하며 더욱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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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연중 제7주간 목요일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도』 송영진 모세 신부 (마르 9,41-50)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 9,41-50).”
1) 여기서 ‘손, 발, 눈’은,
‘내가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떤 것을 상징합니다.
그 어떤 것은, 일이나 물건이나 사람일 수도 있고,
내가 간절하게 바라는 무엇일 수도 있고,
그 간절한 바람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한다고
표현할 때도 있고, 부하 직원이나 제자를 ‘나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라고 표현할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이더라도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상황이라면, 또 신앙생활에 큰 지장이 생기는
상황이라면, 그 사람의 말을(권고나 충고를) 과감하고 단호하게
물리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 사이에 있었던 일이 좋은 예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는 것을
말리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엄하게
그를 꾸짖으셨고, 그의 말을 물리치셨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방금 전에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고,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주셨습니다(마태 16,18-19).
그만큼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였고,
중요한 제자였지만, 그가 사탄과 같은 유혹을 하자,
곧바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하고 꾸짖으셨습니다.
그 일은, 글자 그대로 오른팔을 잘라내는 것과 같은
‘아픈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려면, 또 베드로 사도를
사탄의 힘에서 지키려면,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 말씀 때문에 베드로 사도가 큰 상처를 입고
예수님을 떠나려고 했다면?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자와 함께하느라고 아버지께서 맡기신 임무수행을
실패하는 것보다, 제자 없이 임무를 성공하는 편이 낫다.”
그런데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말씀은 “내게서 떠나라.”가
아니라 “내 뒤로 가라.”, 즉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은, 베드로 사도를 잘라 내거나 쫓아내신
말씀이 아니라 그를 바로잡으신 말씀입니다.>
2)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이나 자녀가, 친구나
동료가 나를 죄짓게 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랑을 선택하면 죄를 짓고,
죄를 피하려면 사랑을 잃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곧 ‘선’이며,
언제나 항상 ‘선’을 지향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악한 쪽’으로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아니니까 과감하게 물리칠 수 있습니다.
3) 내가 지금 간절하게 바라는 그 일이 죄로 연결되는
일이라면 그 바람을 포기해야 하고, 그 일도 포기해야 합니다.
정말로 갖고 싶은 것이라고 해도,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라도,
포기해야 합니다.
원칙은 그렇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그 ‘포기’ 라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인데, 누구든지 ‘간절함’이 너무 크면,
그 간절함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영화나 소설에서 흔히 다루는 소재이지만,
현실 상황에서도 잘못된 간절함 때문에 모두가 불행해지고
고통을 겪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또 해야 하는 일은 ‘기도’뿐입니다.>
4) 우리는 ‘유혹’이 밖에서 나에게 오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내가 남을’ 유혹할 수도 있음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또는 나도 모르게,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죄를 짓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5) ‘남을 죄짓게 하는 죄’의 반대쪽에
‘물 한 잔의 선행’이(41절) 있습니다.
아주 작은 선행이라도 큰 죄를 막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그 힘은 가장 먼저 ‘나 자신’을 구원하는 힘이 되어 줍니다.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한 몸입니다.
모두가 함께 죄를 막아 주고, 모두가 함께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바로 서로가 서로에게 소금이 되어 주는 일입니다.
<‘서로’는 사실상 ‘내가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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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연중 제7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찬미 예수님!
예전에 감명 깊게 읽은 글이 있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배는 힘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선장은 결정을 합니다. 배 안에 있는 무거운 짐들을 배 밖으로 버립니다. 더러는 아깝기도 하고, 더러는 소중하기도 하지만, 배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배를 가볍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욕심을 내서 자신의 물건을 배 밖으로 버리지 못하면 배는 험한 폭풍우 앞에 가라앉을지도 모릅니다. 본당 사도회에서 ‘바자회’를 준비하였습니다. 주보에 본당교우들의 협조를 공지하였습니다. 바자회에 필요한 물건들을 기증해 주도록 공지하였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좋은 물건을 기증해 주었습니다. 어떤 것들은 아예 ‘포장’도 뜯지 않는 새것이었습니다. 사도회는 창고에 가득 쌓인 물건을 정리하였습니다. 기꺼이 좋은 물건을 기증해 주신 교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좋은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해 준 사도회 형제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군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부러워하지 마라.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 야고보 사도는 재물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고, 이웃을 착취해서 얻은 재물은 사람을 타락하게 하고,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찬미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재물을 사용한다면 그런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될 것이고 주님의 이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눈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이웃의 아픔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이 탐욕을 찾는 데 쓰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귀는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귀가 감언이설에 놀아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손은 어려운 이들의 손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그 손으로 이웃을 고통의 늪으로 밀어 넣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하느님을 찬미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나라를 볼 것입니다.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갖기 위해서 양심을 속이고, 이웃에게 큰 상처를 주고, 가족까지 멀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그런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하십니다. 그 어리석음을 경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그만큼 재물과 명예 그리고 권력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크기 때문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도, 종교인도, 성직자도 이런 유혹에 넘어지는 것을 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지만, 신앙은 결단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손님 중에는 몇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친절하고 예의 바른 손님, 손님들끼리 화목하고 친교를 나누는 손님, 손님들끼리 다투고 욕하는 손님, 직원을 하인처럼 대하는 손님, 말을 함부로 하는 손님’이 있습니다. 손님들 중에는 배움이 많고, 재산이 많고, 능력이 뛰어난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배움의 크기가, 재산의 많음이, 능력의 뛰어남이 손님의 친절과 예의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종교인들 중에도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 서로 다투는 사람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마치 제가 그런 것처럼 미안했습니다. 직원은 다행히 제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신부님처럼 친절하고 예의 바른 손님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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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연중 제7주간 목요일]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르코 9,41-50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1)좋은 곳에 투자하십시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답니다. 어느 날 왕이 한 사나이에게 사람을 보내어 즉시 자기에게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나이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첫 번째 친구를 가장 소중하고 다정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두 번째 친구는 사랑하고는 있지만 첫 번째 친구처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친구는 친구라고 생각은 하지만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왕의 부름을 받자 겁을 먹은 그는 소중히 여기는 친구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했습니다. 그 친구는 한 마디로 싫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두 번째 친구에게 부탁했습니다. “궁궐 문까지는 함께 가지만 그 이상은 갈 수 없네.” 그는 별수 없이 세 번째 친구에게 갔습니다. “암, 함께 가주지, 자네는 아무것도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니까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네. 내가 함께 가서 임금님께 그렇게 말씀드려 주겠네.”
왜 세 명이 친구들은 각각 그렇게 말했을까요? 첫 번째 친구란 곧 재산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돈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지라도 죽을 때에는 고스란히 남겨두고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친구란 곧 친인척입니다. 무덤까지는 따라가 주지만 그를 거기에 남겨두고 돌아가 버립니다. 세 번째 친구는 선행입니다. 착한 행실은 평소에는 별로 눈을 끌지 못하지만 죽은 뒤에는 영원히 그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늘나라에서도 그 선행에 따라 받는 상이 다를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선행을 많이 쌓은 사람은 많은 상을 받고 적게 쌓은 사람은 적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도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성경 도처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제가 되기로 한 것 중에서 하늘에 ‘투자’를 하자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투자는 더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투자를 하면 차후에 더 많은 이득이 옵니다. 더 많은 희생을 하면 하늘나라에서 더 큰 부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기술자로 전해집니다. 인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머물렀는데 그의 소문을 들은 왕은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웅장한 왕궁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토마스는 흔쾌히 승낙하였고 그것에 필요한 돈을 받았습니다.
몇 달 시간이 지나고 왕은 공사가 어떻게 진행되나 알고 싶어서 다시 토마스를 불렀습니다. 토마스는 당당히 모든 돈을 가난한 이를 위해 나누어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토마스를 가두고 내일 사형을 시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날 왕은 꿈을 꾸었고 하늘나라에 올라가 몇 년 전에 죽은 자신의 동생을 만났습니다. 동생은 형을 반가워하면서 하늘나라에 새로 생긴 멋진 궁궐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저 궁궐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천사가 그러더라고. 저건 네 형을 위해 토마스 사도가 지어놓은 것이니 너는 저기에 들어갈 수 없다.”
왕은 꿈에서 깨어나 토마스를 풀어주고 잘못을 사과하여 많은 재물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제 건물 짓는 법을 아셨으니, 임금님께서 직접 지으셔도 되겠습니다.” 하며 그곳을 떠났다고 합니다.
믿음이 있고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하늘나라에 투자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금세 지나가지만 이 세상에서 물 한 잔 준 선행은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제가 세례 주었던 한 할머니는 그저 제가 세례 주었다는 것만으로 해서 당신을 태어나게 해 주신 아버지로 여긴다고 하십니다. 그저 사제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 때문에도 이 세상에서 이렇게 감사를 받는다면 하늘나라에서는 어떨지 기대가 됩니다.
요즘 돈만 있으면 여기저기서 투자하라고 난리라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물 한 잔의 작은 돈도 영원한 수익이 창출될 하느님 나라에 투자하라고 권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지옥 이야기를 하시면서 소금불에 절여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소금은 이 세상에서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좋은 것을 사용할 줄 몰랐던 사람은 지옥에 가게 됩니다.
소금은 넣어야 짜지고 녹아야 간을 배게 하는 것처럼,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마치 달란트의 비유처럼, 이 세상에서 자신을 녹여서 세상을 유익하게 할 것을 지니고 있음에도 사용하지 않고 가지고 있다면, 그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란 뜻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줄 것이 반드시 있다고 합니다. 그 줄 수 있는 것이 소금입니다. 물론 녹아 사라지겠지만 그 희생의 상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고, 만약 그것을 사용하지 않아 맛을 잃으면 그것 때문에 혼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다 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를 올바른 곳에 투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다가 써 보지도 못한 채 낭패 보지 말고, 할 수 있을 때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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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2)좋은 곳에 투자하십시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답니다. 어느 날 왕이 한 사나이에게 사람을 보내어 즉시 자기에게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나이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첫 번째 친구를 가장 소중하고 다정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두 번째 친구는 사랑하고는 있지만 첫 번째 친구처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친구는 친구라고 생각은 하지만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왕의 부름을 받자 겁을 먹은 그는 소중히 여기는 친구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했습니다. 그 친구는 한 마디로 싫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두 번째 친구에게 부탁했습니다 “궁궐 문까지는 함께 가지만 그 이상은 갈 수 없네.” 그는 별수 없이 세 번째 친구에게 갔습니다. “암, 함께 가주지, 자네는 아무것도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니까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네. 내가 함께 가서 임금님께 그렇게 말씀드려 주겠네.”
왜 세 명이 친구들은 각각 그렇게 말했을까요? 첫 번째 친구란 곧 재산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돈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지라도 죽을 때에는 고스란히 남겨두고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친구란 곧 친인척입니다. 무덤까지는 따라가 주지만 그를 거기에 남겨두고 돌아가 버립니다. 세 번째 친구는 선행입니다. 착한 행실은 평소에는 별로 눈을 끌지 못하지만 죽은 뒤에는 영원히 그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늘나라에서도 그 선행에 따라 받는 상이 다를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선행을 많이 쌓은 사람은 많은 상을 받고 적게 쌓은 사람은 적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도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성경 도처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제가 되기로 한 것 중에서 하늘에 ‘투자’를 하자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투자는 더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투자를 하면 차후에 더 많은 이득이 옵니다. 더 많은 희생을 하면 하늘나라에서 더 큰 부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기술자로 전해집니다. 인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머물렀는데 그의 소문을 들은 왕은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웅장한 왕궁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토마스는 흔쾌히 승낙하였고 그것에 필요한 돈을 받았습니다.
몇 달 시간이 지나고 왕은 공사가 어떻게 진행되나 알고 싶어서 다시 토마스를 불렀습니다. 토마스는 당당히 모든 돈을 가난한 이를 위해 나누어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토마스를 가두고 내일 사형을 시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날 왕은 꿈을 꾸었고 하늘나라에 올라가 몇 년 전에 죽은 자신의 동생을 만났습니다. 동생은 형을 반가워하면서 하늘나라에 새로 생긴 멋진 궁궐에 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저 궁궐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천사가 그러더라고. 저건 네 형을 위해 토마스 사도가 지어놓은 것이니 너는 저기에 들어갈 수 없다.”
왕은 꿈에서 깨어나 토마스를 풀어주고 잘못을 사과하여 많은 재물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제 건물 짓는 법을 아셨으니, 임금님께서 직접 지으셔도 되겠습니다.” 하며 그곳을 떠났다고 합니다.
믿음이 있고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하늘나라에 투자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금세 지나가지만 이 세상에서 물 한 잔 준 선행은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제가 세례 주었던 한 할머니는 그저 제가 세례 주었다는 것만으로 해서 당신을 태어나게 해 주신 아버지로 여긴다고 하십니다. 그저 사제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 때문에도 이 세상에서 이렇게 감사를 받는다면 하늘나라에서는 어떨지 기대가 됩니다.
요즘 돈만 있으면 여기저기서 투자하라고 난리라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물 한 잔의 작은 돈도 영원한 수익이 창출될 하느님 나라에 투자하라고 권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지옥 이야기를 하시면서 소금불에 절여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소금은 이 세상에서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좋은 것을 사용할 줄 몰랐던 사람은 지옥에 가게 됩니다.
소금은 넣어야 짜지고 녹아야 간을 배게 하는 것처럼,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마치 달란트의 비유처럼, 이 세상에서 자신을 녹여서 세상을 유익하게 할 것을 지니고 있음에도 사용하지 않고 가지고 있다면, 그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란 뜻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줄 것이 반드시 있다고 합니다. 그 줄 수 있는 것이 소금입니다. 물론 녹아 사라지겠지만 그 희생의 상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고, 만약 그것을 사용하지 않아 맛을 잃으면 그것 때문에 혼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다 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를 올바른 곳에 투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다가 써 보지도 못한 채 낭패 보지 말고, 할 수 있을 때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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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연중 제7주간 목요일]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음: 마르 9,41-50
혹시라도 나는 존재 자체로 누군가를 죄짓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평소 사랑과 자비, 용서와 인내를 목청껏 외쳐왔던 예수님께서 오늘은 왠지 말씀에 날이 서 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 발언의 강도나 수위가 꽤 높습니다.
어떤 말씀은 너무나 섬뜩해서 듣기조차 거북스럽기까지 합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연자매란 돌로 만든 방아입니다.
크고 둥근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는 것이지요.
이것을 소나 말이 끌어 돌려서 곡식을 찧고 빻습니다.
따라서 연자매 사이즈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즉시 사망이었습니다.
강경한 예수님 말씀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마냥 오냐 오냐 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습니다.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러나 때로 자녀가 그릇된 길을 갈 때, 그 길이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 할 때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길에서 되돌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타일러보기도 하고, 눈물로 호소도 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강하게 외쳐보기도 하고 정신 번쩍 들게 혼도 낼 것입니다.
이런 극진한 자녀 사랑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는 손을 잘라버려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던져버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버리는 사형 방법이 없었지만, 로마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형과 함께 로마로부터 도입된 끔찍한 사형 방법 중에 하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사형 방법을 끔찍이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수장 후 시신을 되찾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차라리 연자매를 선택하라고 강조할 만큼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죄를 짓게 하는 죄를 중히 여기셨습니다.
일시적인 쾌락으로 지옥을 얻기보다는 불구가 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게 더 낫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다른 무엇에 앞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영혼의 구원,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토록 강조점을 두신 것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라는 권고 말씀인 동시에 죄 앞에서 목숨 걸고 맞서 싸우라는 격려 말씀이 연자매 관련 경고 말씀입니다.
오늘 저는 죄와 관련해서 이런 걱정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혹시라도 본의 아니게 누군가를 죄짓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미처 인지하지 못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악표양으로 인해, 우리를 보고 있는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욕을 하고 손가락질을 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를 죄짓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멀리 보지 않아도 그런 인물 중의 대표주자를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얼굴이 매일 여기 저기 수시로 등장하는데, 그분 얼굴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옵니다.
그분은 존재 자체로 우리에게 죄를 짓게 만드는 원흉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같은 사제 수도자들은 그럴 가능성이 참 많은 인생입니다.
많은 시선들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호시탐탐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매사에 모든 언행에 신중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교우들은 나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면,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교우들이 극심한 고통이 다가올 때마다 제일 먼저 우리 얼굴을 떠올리고 다시 살아갈 힘을 낸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반대로 우리 얼굴만 봐도 갑자기 뒷골이 당기고 혈압이 급상승한다면, 그보다 더 비참하고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가운데 누군가를 죄짓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살펴보고 성찰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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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연중 제7주간 목요일)
고운님들, 바로 여러분이 소금입니다….
“한 랍비에게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형제애를 강조하면서 격려하며 살 것을 당부하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 가족이 잠들 무렵, 한 아들이 랍비에게 와서는 ‘아버지. 다른 형제들은 잠만 자는데 저는 자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얘야, 그래서는 안 된다. 다른 형제의 흉을 보는 것보다 다른 형제와 같이 자는 편이 훨씬 나은 거란다.’
마태오 복음 5장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바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만 옳다.”라는 생각이나 아집으로 다른 사람을 절망하게 하거나, 상처를 준다면 당장 멈춰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그러니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하느님 나라’는 우리 몸의 사지를 모두 잃는 한이 있어도 꼭 들어가야만 하는 소중한 곳이지만, ‘지옥은 우리 몸의 사지를 다 잃은 한이 있어도 절대로 들어가지 말아야 할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은혜로운 것은 하느님 나라에서는 손과 발을 다 잘라버리고, 눈이 없더라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치유가 되어 채워지고 회복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치 희망이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듯이, 지금 저희 모두의 삶이 하느님 나라에서 사는 것처럼 아픈 것에 치유가 일어나고, 은총이 다시 돌아오는 회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과 하나 되는 길”을 위하여 오늘 복음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구약 성경에 레위기 2장 13절에 보면, 하느님께 곡식 제물을 바치는 규정이 있습니다.
“너희가 곡식 제물을 바치는 모든 예물에는 소금을 쳐야 한다. 너희가 곡식 제물에 너희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소금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너희의 모든 예물과 함께 소금을 바쳐야 한다.”
바로 “소금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소금은 시퍼렇게 살아있는 식물을 부드럽게 숨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레위기 말씀 중에 “소금을 쳐야 한다.”라는 말씀이 저와 고운님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들립니다.
“이제 네가 숨 좀 죽어야 하겠다.”
“어깨에 들어간 힘을 좀 빼야 하겠다.”
“네가 좀 낮추어야겠다.”
만일 하느님께서 친히 “소금을 쳐라.”라고 하시는데, 고운님들이 소금을 치지 않으면 그다음에는 하느님 친히 소금을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숨 좀 죽이고, 힘 좀 빼고, 낮추고 겸손하게 살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나만 옳다.’라는 성질을 죽일 때까지, ‘남보다 내가 더 나아야지’라는 욕심을 내려놓을 때까지 그리고 고운님들이 먼저 내려갈 때까지 소금을 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 씨앗은 곡식의 많은 열매로 나타나는 것 같이 소금의 역할도 그렇습니다.
“고운님들, 바로 여러분이 소금입니다. 고운님들이 힘을 빼고 숨을 죽이면 평화가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약속으로 고운님들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멘.
저 두레박 사제도 ‘저도 소금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몸과 마음이 아픈 고운님들과 아픈 이들을 돌보는 고운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주님의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지금 고운님들 자신이 하시는 일 안에서 기도로서, 그리고 믿음으로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서로 화해하고 평화로운 삶의 자리에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고운님들에게 강복하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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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부산교구 원정학 바오로 신부님]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이오. 다 당신이 어리석어서 빚어진 일 아니오?” 한 TV프로에서 서로의 논쟁에 대한 법적 판결을 다루는 과정에서 주로 표현되는 말입니다.
그 중에 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 점원이 계산을 잘못해서 수십만 원의 옷을 몇 만 원으로 카드결제를 받았습니다. 손님은 그 잘못된 금액을 보고서도 모른 채하고 유유히 그 매장을 떠났습니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점원과 손님과 싸움은 법정 문제로까지 확대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내용을 보면서 과연 어떤 판결이 나올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왜 그렇게 까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내내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 부터는 분명 자신의 실수나 부끄러운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엇이 그들을 화나게 하고 고집스럽게 만들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이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당신께서 그들의 삶을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반면 내 제자들에게 죄를 짓게 하거나 자신들 스스로 죄를 짓는다면 ‘꺼지지 않는 불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법률적 문제가 아니라 미움, 시기, 질투, 증오에 따른 도덕적 행위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설령 꿈이라 하더라도 누군가를 미워했거나, 잘못을 저질렀다면 다음날 직접 그에게 가서 정중히 사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법적인 문제만 피할 수 있다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떳떳하다는 식의 태도를 보일 때, 결국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 채 ‘미움’과 ‘복수’만이 남는 삭막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들고 마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죄를 짓거든 눈을 빼어버리고, 손목을 자르고’라는 끔찍한 모습을 연상하는 표현을 썼지만, 자신의 잘못된 양심을 덮어둔 채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가지고 옳으냐, 그르냐 하고 따지는 세상이더 끔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누군가가 판결에 따라 그 결과에 승복하라고 한다면 과연 그것이 정의로울까요? 때로는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울지 모릅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담아둔 것을 사실대로 표현하고 잘못이 있다면 용서를 청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너무나 잘못 없이 완벽하게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 때로는 자신을 힘들게 하고, 또 허물을 감추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그 때문에 서로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싸움을 일삼는 것이 안타깝습니다.왜 예수님이 그렇게 강한 어조로 마음의 죄를 중요하게 말씀하셨는지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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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대구대교구 이병훈 세례자 요한 신부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소금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고기를 구워먹을 때도, 장을 담글 때도, 국을 끓일 때도, 생선을 보관할 때도 소금은 쓰입니다.
소금을 뿌려서 맛을 맞추는 것을 간이라고 합니다. 국 같은 곳에는 간이 금방 들지만 젓갈류나 생선 또는 배추 김치 등은 오래 둘수록 간이 깊이 배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국 같은 것에는 “간이 들었다”라고 하고, 오래 두어야 하는 것은 “간이 배였다”라고 하는가 봅니다.
오래 되어 묵은 맛이 배여 나올수록 맛있습니다. 간장, 된장, 고추장, 홍어, 막걸리 등이 그렇습니다. 오래 되어 묵은 맛이 배여 나올수록 좋은 것 중에서 최고는 좋은 친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래된 친구와 이어주는 우정은 아무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옛날 서양 사람들에게도 소금은 음식에 맛을 들이는 것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변치 않는 우정, 성실, 맹세의 상징으로도 나옵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도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는 다윗과 소금으로 계약을 맺으시고”(역하 13, 5)라고 합니다. 그리고 불에 태워 바치는 “번제물 위에 소금을 뿌려 야훼께 바쳐야 한다”(에제 43,24)고 하니, 하느님도 싱거운 음식은 별로 입에 맞지 않으셨나 봅니다.
하여튼 제물 위에 뿌리는 소금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는 계약의 의미를 가지면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변함없는 우정과 성실을 나타냅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제물 위에 소금을 뿌려 계약을 맺은 역사가 수천 년이 되니, 간이 배여도 아주 깊이 배여 있고, 묵은 맛도 그 많큼이나 좋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을 한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 대한 깊은 우정을 표현하십니다. 친구에게 좋은 것은 나에게도 좋은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라고 하시면서 친구 사이를 갈라놓는 이들에게 제자들에 대한 깊은 우정을 과시하십니다. 친구에게 나쁜 것은 나에게도 나쁜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이렇게 오래된 좋은 친구 사이에 배여 나는 깊은 우정을 나타내는 소금은 매우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금이 짠맛을 잃으며, 다시 말하면 그 우정이 한쪽의 탓으로 깨어지면 어떻게 그 묵은 맛을 다시 낼 수 있겠습니까?
오래 묵은 것일수록 상하게 되면 그 맛은 아주 않좋은 것입니다. 우정을 깨어버린 쪽도 우정이 깨어진 쪽도 서로 간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고 당부하시는 것이겠지요.
소금에 대해서 집회서에서는 이렇게도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사는 데 제일 필요한 것은 물과 불과 쇠와 소금이며, 밀가루와 우유와 꿀, 그리고, 포도즙과 기름과 의복이다. 이 모든 것이 착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것이 되고 악인들에게는 악한 물건이 된다.”(집회 39,26)
아무리 좋은 것도 좋은 사람이 사용하면 좋은 것이지만, 악인이 사용하면 악한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좋은 사람들 간의 우정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지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간에 이야기하는 의리라는 것은 보복을 연상케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들은 다른 이들과 나누어 쓸 때는 축복이 될 것이지만, 다른 이들의 아우성을 외면할 때는 녹이 슬어, 우리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젓가락으로 맛을 한번 보시고는 젓가락을 놓고 한마디 하겠지요? “사랑이 식은 게지”
예수님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우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깊은 우정의 묵은 맛을 지켜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 맛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마지막날에 예수님께서 젓가락으로 맛을 한 번 보시고는 숟가락까지 드시면서 한마디 하시겠지요? “그래! 이 맛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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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대구대교구 김상조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어, 너냐?>
한 중년 여인이 심장마비로 병원에 실려 갔다. 수술대 위에서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여인은 신을 만났다. 이제 끝이냐고 물었더니 신은 아니라고 하면서 앞으로 30∼40년은 더 살 것이라고 말했다.
수술이 성공하고 차차 낫게 되자 이왕 병원에 온 김에 얼굴을 고치고 몸도 다듬었다. 얼굴 주름살을 팽팽하게 하고 지방도 제거하고 가슴도 키우고 아랫배도 집어넣었다. 머리도 염색했다. 앞으로 30∼40년은 더 살 것이니 이왕이면 젊고 예쁘게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마지막 수술이 끝나고 병원에서 나오다가 달려오는 앰뷸런스에 치여 사망했다. 신 앞에 서게 되자 이렇게 물었다. “제가 30∼40년은 더 살 거라고 했잖아요?” 신이 대답했다. “어, 너냐? 미안하다! 너무 많이 뜯어고쳐서 못 알아봤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버려라” 끔찍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원한 불구덩이에 던져질 것이다. 손을 잘라내고 안 잘라내고는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죄를 짓고 안 짓는 것도 누가 그렇게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
오늘이 즐겁고 안 즐거운 것은 누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를 탓하기 전에 나 스스로 내 운명을 개척하고 나의 삶, 나의 하루를 보다 더 가치가있고 행복하게 만들려는 의지가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런 의지가 있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오늘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그나저나 소개된 유머에 나오는 여인의 운명을 바꾼 쪽은 누굴까요? 신일까요? 그 여인 당사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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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9,41)
삶을 살다 보면 우리는 자연의 이치처럼, 행복의 법칙을 깨닫게 됩니다. 핵심은 언제 어디서든 타인을 행복하게 하고 베풀면 반드시 좋은 것이 다시 내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베풂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이것은 바로 자연의 리듬이고, 그 리듬에 발맞춰 오르고 내리며, 차고 비우며, 밀려가고 밀려오듯이, 주면 받고, 받으며 주게 되는 이 모든 게 자연의 이치이고 행복의 비결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베푸는 것은 꼭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따뜻한 말 한마디, 눈빛 한 번, 미소나 웃음 같은 작은 친절일지라도 그 모든 것이 우리의 행복을 도와주는 좋은 에너지가 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주의 본성은 충만한 풍요이고 완전한 비움입니다. 비움과 채움, 채움과 비움이 우주의 본성입니다. 본디 우리 안에도 그런 우주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감사는 무한한 풍요를 받아들이는 마음이며 베풂은 무한 풍요를 주는(=나누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받은 것에 감사하며 베푸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우주의 리듬에 맞춰 사는 사람이여, 우주의 마음을 얻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 복음 말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9,40)하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오늘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9,41) 하고 말씀하십니다. 베풂의 내용이나 형식엔 일정한 틀이 없습니다. 적절하고 좋은 베풂이란 상황에 따라 다른 법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 좋아하는 것을 선물 받으면 더 기분이 좋듯이, 상대방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나, 상대가 간절히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베푸는 것이 좋겠지요. 외로운 사람에겐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뭔가를 해주는 게 좋고, 당장 끼니도 채우기 힘든 사람에겐 밥 한 끼 먹을 쌀을 주는 게 좋을 것이고, 마음이 우울한 사람에겐 밝은 위로와 함께 기쁨을 심어주는 것이 좋은 베풂이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무엇을 주고받느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 당대 그리고 사후에 당신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격려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13,20) 하고 또한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10, 40.42)라고 늘 하신 말씀을 통해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가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빠 하느님과 예수님은 당신의 자녀이고 당신의 제자들에게 베푼 이를 기억하시고 그에 따른 상급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베풂이 바로 행복의 비결임에도 불구하고, 베풂보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이와 같은 제자들에게, 선이 아닌 악으로, 베풂이 아닌 죄짓게 하는 악행을 베푸는 이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표명하십니다. 다음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겐 지지를 그리고 제자들을 거부하고 배척하며 죄짓는 이들에겐 불행을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9,42)하고 경고하십니다. 그릇된 말과 행동으로 약하고 작은 이들을 죄짓게 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에 비추어 옳지 않으며 그로 인한 모든 불행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발이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또 네 눈이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9,43. 44. 46)라고 차마 듣기 섬뜩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렇게 섬뜩하게 말씀하신 것은 비록 베풀지 못할지언정, 자신보다 약하고 작은 이들의 걸림돌이 되는 악한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를 깨닫게 될 때야 비로소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9, 50)하고 하신 말씀을 알아듣고 실행할 것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소금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기보다 자신을 버리고 내어놓을 때, 비로소 소금은 소금이 됩니다. 그때 소금이 소금다워집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고 베풀 때, 음식이 맛을 내고 그로 인해 그것을 상하지 않고 보존하도록 합니다. 한 마디로 소금은 베풀 때 자신의 베풂을 통해 보상받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네 삶도, 신앙생활도 평화를 누리게 되고 다른 이들과 함께 공생하고 공존할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은 바로 자신이 받은 것을, 기꺼이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삶입니다. 베풂과 나눔은 서로를 하나가 되게 만듭니다. 베풂의 마음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가장 필요한 삶의 태도이며 실행입니다. 베풂의 마음이 모이고 모이면 다름과 차이에서 기인하는 모든 갈등의 벽을 허물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맞아들이게 할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만남이 사실 이를 성취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화답송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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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하여 벗>
마르코 9,41-5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지지하는 사람이다,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라, 소금)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그리하여 벗>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1)
목마른 이에게
물 한 잔
그리하여 벗
배고픈 벗에게
밥 한 그릇
그리하여 벗
자그마한 이에게
마음 한 줌
그리하여 벗
외로운 이에게
품 한 켠
그리하여 벗
쓰러진 이에게
손길 한 뼘
그리하여 벗
뒤쳐진 이에게
발길 한 걸음
그리하여 벗
보잘것없는 이에게
눈길 한 가닥
그리하여 벗
슬퍼하는 이에게
눈물 한 방울
그리하여 벗
지친 이에게
웃음 한 자락
그리하여 벗
버림받은 이에게
꽃 한 송이
그리하여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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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추억의 향기>
“죄를 짓지 마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요즘 새삼 추억의 힘을 실감합니다. 현재 모든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지녔어도 과거 어렸을 때 상처와 어둡고 아팠던 추억으로, 특히 어머니로 인한 아픈 추억으로 힘들고 불행하게 지내는 이들을 의외로 많이 만납니다. 반면 어렵고 가난했어도 반듯하고 모성애 풍부했던 어머니를 지녔던 이들은 그 추억의 힘으로 평생을 행복하게 삽니다.
어렸을 때 특히 어머니의 사랑을, 사랑의 추억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본의 아닌 사랑 결핍의 원인을 제공한 어머니들이 후에 자녀로 인해 겪는 고통은 끝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 특히 어머니의 사랑에 이어 평생 친구와의 우정 또한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성서에서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의 본보기를 아실 것입니다. 저는 조선시대 학자들중 감동적인 평생 우정의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우정이요, 다산 정약용과 자산어보의 정약전 형제간의 우정이 정말 감동적이자 대표적입니다. 이 네분 천재학자들의 평전을 보면 평생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친 우정인지 깨닫게 됩니다. 좋은 추억에도 결정적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우정입니다. 여기서 참으로 추천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영원한 스승, 예수님과의 평생 사랑의 우정입니다. 오늘 옛 어른 다산의 말씀이 가슴을 칩니다.
“외로운 천지 가운데 나의 형 정약전을 잃고 말았다. 이제부터는 얻는 바가 있어도 장차 어디에 말하겠는가?”
자산어보의 저자이자 평생 학문을 나눴던 정약전 형님이 흑산도 유배중 죽었을 때 다산의 탄식입니다. 과거는, 과거의 추억은 죽지 않습니다. 좋은 추억이든 나쁜 추억이든 죽기는커녕 살아서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이를 일컬어 추억의 힘, 추억의 기쁨, 추억의 향기라 칭하고 싶고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부제로 둘을 더했습니다.
“죄를 짓지 마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이래야 나쁜 추억은 치유되고 오늘부터 나쁜 추억을 만들지 않을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참 특이한 것이 나이 먹을수록 추억의 힘, 추억의 기쁨, 추억의 향기가 강렬해짐을 느낍니다. 좋은 추억이 현재와 미래의 행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을 봅니다. 며칠전의 강렬한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과거를 살며시 열어봤을 때 은은하고 그윽한 추억의 향기를 강하게 느낀 체험입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 사랑과 마을 친구들과의 우정, 학교 다닐 때, 군대 시절, 교편시절, 수도생활, 산티아고 순례 여정, 그리고 거기서 만났던 정답고 그리웠던 이들등 모두가 살아 있는 고유의 추억의 향기를 발하는 듯 했고 순간 기뻤고 행복했습니다. 추억의 향기요 추억의 힘이요 추억의 기쁨이요 추억의 행복입니다. 추억을 사랑으로 바꿔도 무방하겠으니 사랑의 향기, 사랑의 힘, 사랑의 기쁨, 사랑의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며칠전 교황님의 미국 시카고 로욜라 예수회 대학 교수진을 만났을 때 말씀도 잊지 못합니다.
“부지런한 꿈꾸는 자들이 되십시오(Be ‘diligent dreamers’). 꿈꾸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은 창조력이, 시심이 결핍되고, 시가 없는 삶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삶의 순례여정중 여러분 안에 이런 갈망으로, 꿈으로 언제나 깨어 살도록 하십시오.
앞으로 계속 나가기 위해서, 여러분은 언제나 여러분의 뿌리들로 돌아가야 합니다. 역동적인 뿌리들(dynamic roots)입니다. 여러분은 뿌리들 없이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거가 뿌리들로부터 힘을 끌어내기 때문입니다. 추억의 힘!
여러분은 영롱한 정신만 연마할뿐 아니라, 관대한 마음과 모든 사람의 위엄을 존중하는 양심을 연마하십시오. 교육은 세 차원에서 일어납니다. 머리, 마음, 손입니다. 느끼고 행하는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행하는 것을 느끼며, 생각하고 느낀 것을 행하십시오.
정신(mind), 마음(heart), 손(hands)은 분리됨이 없이 함께 성장합니다. 오직 셋이 함께 시대의 현실과 요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희망없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희망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닻과 같은 희망이요 희망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희망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습니다(Hope never disappoints)’.”
뿌리의 추억이 희망의 꿈과 하나될 때 부단한, 한결같은 진전이요 도대체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사랑의 좋은 추억 쌓기에도 턱없이 짧은 세상, 죄로 인해 자기를, 삶을 파괴하면 복구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죄도 젊고 힘있을 때 짓고 용서받을 일이지 늙고 약할 때 죄를 지으면 손실이 너무 크고 후유증도 오래 갑니다. 약먹으며 은총으로 살아가는 인생들인 데, 사랑하며 좋은 추억 만들어가기에도 너무나 짧은 황금인생들인데 죄짓느라 아까운 인생 낭비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라는 참으로 절박한 경고이자 명령입니다. 손이 죄짓게 하면 잘라버리고, 발이 죄짓게 하면 잘라 버리고, 눈이 죄짓게 하면 빼 던져버리라 하십니다. 이런 충격요법의 표현은 죄의 결과가 초래하는 불행이 너무 크기에 결코 죄를 짓지 말라는 깨우침을 주기 위함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소금과도 같은 사랑을, 추억의 힘, 추억의 기쁨, 추억의 향기, 희망과 꿈을 고이 지니고 서로 평화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제1독서의 야고보 사도의 부자에 대한 경고도 바로 탐욕에 눈멀어 죄짓지 말라는, 탐욕에서 당장 손을 떼라는, 재물을 쌓지 말고 나누라는 절박한 경고이자 명령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를 연상케 하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이 강렬합니다.
“여러분의 재물은 썩었고 옷은 좀 먹었습니다.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녹이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살라버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재물을 쌓기만 했습니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고,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이 또한 회개의 촉구입니다. 정의롭게 재물을 나눔으로 죄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과거 추억의 빈약함에 과거의 잘못에 아파할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사랑의 추억을 축적해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입니다.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 우보천리의 자세로 하루하루 사랑의 추억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행여나 어렸을 때 어머니 사랑 부족했다 원망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평생 어머니인 성모님이, 교회가 우리를 평생 사랑하고 위로하고 치유하고 격려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뿐이 답이 없습니다. 하루하루 한결같은 사랑의 맹훈련으로 사랑을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 사랑의 훈련입니다. 죄의 힘은 날로 약화되고 과거의 상처는 치유되며 추억의 힘, 추억의 기쁨, 추억의 향기가 풍요로운 인생으로 변모시켜 줄 것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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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3. (한상우 바오로 신부)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마르 9, 50)
회개의 삶이
바로 소금의
짠맛입니다.
소금의 무게가
십자가의
무게입니다.
하느님과
하나로
결합시키는
소금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일으키는
소금의 삶이
있습니다.
소금의 삶이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소금은
기꺼이 녹아
스며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죄와 욕심에
굴복하는 삶이
아니라
결단하고
결심하는
더 나은 삶의
결정체가
소금입니다.
거기서 시작되는
변화의 삶입니다.
소금의 삶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간직해야할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소금처럼
거짓을 다스리고
욕망을 다스립니다.
다스리는 삶이
짠맛의 삶입니다.
그래야
사람이 되고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밋밋한 신앙이
아니라
짠내나는
신앙의 맛입니다.
소금의 짠맛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참된
평화가 됩니다.
십자가 없는
평화는 있을 수
없듯이
소금의 짠맛
없이는
삶의 변화도
없습니다.
결단과 결심
실천과 행위로
참된 사랑을
나누는
소금같은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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