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잔상
도시는 언제나 또렷한 얼굴로 우리를 맞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의 도시는 기억처럼 흔들리고, 어떤 골목은 오래된 꿈처럼 번져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가로지르는 전깃줄, 층층이 매달린 간판, 좁은 길을 따라 이어지는 상점들. 분명 익숙한 풍경인데 바라볼수록 낯설다. 마치 빠르게 지나온 우리의 시간을 한 장면에 겹쳐 놓은 듯하다.
도시의 길에는 수많은 시간이 포개져 있다. 어제 누군가가 지나갔던 자리를 오늘은 다른 사람이 걷고, 오늘 내가 밟은 길을 내일이면 또 다른 발걸음이 지나갈 것이다. 사람은 떠나도 길은 남는다. 하지만 길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가게가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새로운 간판이 걸린다. 낮은 건물이 사라지고 높은 건물이 들어선다. 그렇게 도시는 끊임없이 자신의 얼굴을 지우고 다시 그린다.
가끔 오래전에 살던 동네를 찾아가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길은 분명 그 자리에 있는데 내가 기억하던 풍경은 없다. 문방구가 있던 자리에는 카페가 들어서 있고, 아이들이 뛰놀던 빈터에는 건물이 서 있다. 골목 어귀의 작은 슈퍼도 사라졌다. 변하지 않은 것은 길의 방향 정도뿐이다.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으면 깨닫게 된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그곳에 머물렀던 시간이라는 것을.
도시는 기억을 오래 보관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지운다. 그래서 사람은 마음속에 자신만의 도시를 하나씩 가지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지도에는 없는 도시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골목이 있고, 친구와 헤어지기 싫어 몇 번이나 돌아보았던 모퉁이가 있으며, 처음 사랑을 기다리던 버스정류장도 있다. 그곳에는 이미 사라진 가게의 불빛이 아직 켜져 있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바구니가 골목 끝에서 흔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삶도 도시와 닮았다. 우리는 날마다 무언가를 세우고 또 허문다. 꿈을 세웠다가 무너뜨리고, 사랑을 시작했다가 이별하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오래된 사람을 떠나보낸다. 마음속에도 수많은 골목이 생겼다가 사라진다. 한때는 세상의 전부처럼 여겼던 일이 세월이 지나면 희미한 간판 하나처럼 남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수록 선명한 것보다 흐릿한 것에 오래 눈길이 머문다. 젊은 날에는 모든 것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면 사랑, 성공이면 성공, 행복이면 행복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살아보니 삶은 그렇게 정확하게 나누어지지 않았다. 기쁨 속에도 쓸쓸함이 있었고, 실패 속에도 뜻밖의 길이 숨어 있었다. 헤어짐이 끝인 줄 알았는데 새로운 시작이 되기도 했다.
우리의 인생도 어쩌면 흔들리며 완성되는 한 장의 그림인지 모른다. 가까이에서는 선들이 뒤엉켜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조금 멀리 물러나 바라보면 비로소 하나의 풍경이 된다. 실패도 후회도 상처도 그 풍경을 이루는 선 하나였다. 지워 버리고 싶었던 시간조차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도시는 오늘도 바쁘다. 누군가는 출근하고 누군가는 집으로 돌아간다. 누군가는 새로운 가게의 문을 열고, 누군가는 오래 지켜온 가게의 불을 마지막으로 끈다. 수많은 시작과 끝이 같은 골목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우리는 그 사이를 걸으며 자신의 하루를 살아간다.
문득 생각한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선명하게 살았느냐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때로는 흔들렸고, 때로는 길을 잃었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같은 자리를 맴돌기도 했다. 그러나 그 흔들림 속에서도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왔다. 길을 잃은 시간조차 결국 나의 길이었다.
저 멀리 골목 끝으로 빛이 스며든다. 건물들은 흐릿하고 선들은 서로 겹쳐 있지만 길만은 앞으로 이어져 있다. 나는 그 길이 좋다. 끝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좋다. 모든 것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삶은 얼마나 밋밋할까. 도시는 흔들리면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사람도 그렇다. 수많은 기억과 상처와 그리움을 품은 채 우리는 다시 하루를 살아낸다. 어제의 내가 조금 흐려진 자리 위에 오늘의 내가 새로운 선 하나를 긋는다.
언젠가 먼 훗날 돌아보면 지금 이 순간도 한 장의 희미한 풍경으로 남을 것이다. 그때 나는 알게 되리라. 선명하지 않았기에 더 오래 마음에 남은 날들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흔들렸기 때문에 비로소 나만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을. 삶은 완성된 풍경을 찾아가는 일이 아니라, 흔들리는 선들을 끝내 나의 풍경으로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