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찻눈 오는 날 만나자고 한 사람을 마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로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 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을 만나 커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
누구나 밤사이에 내린 첫눈을 보고 탄성을 내지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와, 눈이 왔다!" 일어나!" 식구들 중에 먼저 일어난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치면 잠옷 바람으로 벌떡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다가 가슴 벅찬 감동에 파르를 몸을 떤 기억이 있을 것이다.
밤 사이에 한껏 내려 나뭇가지 소복소복 눈꽃을 피우고 있는 함박 눈을 보며 "올해 첫눈이야!" 첫눈이 내렸어"하고 중얼거리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한 이의 모습부터 먼저 떠올린 기억쯤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것일까.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그토록 기뻐하는 것일까. 왜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일까.아마 그건 서로 시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첫눈과 같은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 늘 도래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 것이다.
나도 한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첫눈이 오는 날 신설동 로터리 돌다방에서 만나자고, 첫눈이 오면 하루종일이리도 기다려서 꼭 만나야 한다고 약속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기다렸다가 첫눈이 내린 밤거리를 밤늦게까지 팔짱을 끼고 걸러본 적이 있다. 걷다가 눈을 뭉쳐 눈싸움을 해본 적도 있다.
너무 많이 걸어 배가 고프면 눈내린 거리에 카바이드 불을 밝히고 하나의 풍경이 되어 서 있는 군밤 장수한테 다가가 군밤을 사 먹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약속을 할 사람이 없다. 그런 약속이 없어지면서부터 나는 젊음을 잃기 시작했다.
약속은 없었지만 지금도 첫눈이 오면 나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눈내리는 거리를 서성거린다. 첫눈은 첫사랑과 같은 것인가. 다시 첫눈 오는 날 만날 약속 할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첫사랑이 아니더라도 첫눈이 오는 날 만나고 싶은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창밖을 본다, 거리의 나뭇가지마다 켜켜이 눈이 쌓여 있고 하늘은 더욱 푸르다, 첫눈이 내렸을 때 만나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 정 호 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