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49]아버지가 잠시잠깐 돌아오셨다
처서가 지나고 추석이 다가온다. 폭염주의보가 연일 난비하던 8월도 가고, 이제 9월 초하루.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졌다고 해도 낮에는 더운 게 아니고 너무 뜨거운(따가운) 햇빛으로 힘든 요즈음이다. 이렇게 한동안 뜨거워야 나락이 익겠지 하면서도 짜증이 난다. 한낮에는 아예 일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상기온의 징후일 것인데, 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라는 예보에 우울해진다. 가을도 없이 순식간에 겨울이 올 것만 같다. 그것 참, 초록별의 어리석은 인간들의 작태가 빚어낸 일일까?
아무튼, 최가네 효녀 세 자매가 ‘꾀’를 냈다. 명절 연휴도 얼마 안남았으니,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 외박을 신청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비슷비슷한 사람끼리 공동생활을 하는 게 얼마나 고적하고 고독한 일인가? 당신이나 일곱 총생들이 정말 바라는 것은, 당신의 90평생 무대인 고향집에서 자연스럽게 고종명考終命하는 것일텐데,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인까? 지난 설명절을 앞두고 전립선비대증이 심하게 온 탓이다. 수술은 하지 못하여 동맥색전술이라는 시술을 했는데, 의사의 예상과 달리 두 달도 안돼 소변줄을 빼기는 했으나, 큰 병과 함께 단기치매가 함께 왔다. 소변줄 때문에 주간보름센터를 다닐 수 없고, 정신도 온전한 것같지 않아 모신 게 보훈요양원. 입소 자격은 1순위가 국가유공자(독립운동, 한국전쟁, 월남전쟁 등) 어르신들. 보훈부에서 운영관리하는 요양원이기에 시설도 좋고 보호 시스템도 완벽하게 보여 다행이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희로애락에 대한 개념을 잃은 듯, 대부분 멍한 시간을 보내시는 것같다. ‘집에 가고 싶다’는 등의 생각도 전혀 없는 듯, 적응을 잘하고 계시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루 세 끼 밥도 잘 드시고 얼굴도 입소 전보다 더 좋은 것같다. 장담컨대, 앞으로 5년은 너끈히 사실 듯하니, 100세를 훌쩍 넘으실 게 틀림없다. 이제 보청기도 소용없는 듯, 잘 못알아들으니 소통이 안될 뿐만 아니라, 어떤 관심사항도 없는 듯하다. 누구누구를 못알아 본다든지 하지 않은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 당신의 먼 과거일은 지금도 충실히 기억하고 있다. 보통 때는 아무 의미없겠지만 활자중독인 만큼 어떤 책이든 읽거나 아니면 약에 취한 사람처럼 자올자올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은 괴롭다. 너무 안쓰럽기 때문이다. ‘참 총명하고, 큰 어른이고, 7개월 전만 해도 정신도 온전하고 그렇게 건강하셨는데’ 무심한 세월 앞에서는 참말로 배겨나갈 사람이 없는 것같다.
슬프고 재밌는 특징 하나는, 당신과 말년에 4년간 함께 지낸 넷째인 나에게 세 끼니 때마다 하루 대여섯 번 ‘문안인사’ 를 한다는 거다. 평생 그렇지 않은 자상한 말투로 “잘 잤어잉? 밥 해먹어야지. 잘 있어. 애쓴다. 고맙다”는 말을 금방 하고도 돌아서면 10분도 안돼 다시 한다는 것. 이른바, 단기 인지장애증상이다. 이 노릇을 어찌할꼬? 난감하고 민망하기 짝이 없다. 전화를 안받을 수도 없고(안받으면 이어서 5번도 더 한다), 받아도 당신처럼 나긋나긋 얘기도 할 수 없다.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돌아가시면 후회되니 친절하게 받으라”지만, 그게 또 말처럼 쉽지 않다. 전북 표준말로는 ‘숭시럽다(성가시다)’는 말이 어울릴 지경이다. 어떻게 잘 해드릴 방법이 없이, 그저 하루하루 날짜만 가는 셈이다.
어쨌거나 5개월여만에 고향집에 하루 주무시러 오는 아버지를 위해, 나는 아침부터 이 방 저 방 청소에 바빴다. 대문 앞에는 의자와 지팡이를 대령해놓았다. 이윽고 오후 4시, 둘째딸과 사위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서 내리신다. 얼른 달려가 반갑다는 인사를 해야 하는데, 주춤거려진다. 고향집에 모처럼 온 감회를 한마디 할 만한데, 아무런 말이 없이 툇마루에 앉아 앞을 바라보더니, 비척비척 뒷밭으로 가는 작은 문으로 가신다. 그 뒷모습에 또 마음이 무너진다.
이윽고, 거실 식탁에 정말 모처럼 9명이 둘러앉았다. 세 여동생 내외와 셋째형, 아버지 그리고 나. 하모회와 전어회, 구운 대하, 파전, 꽈배기 등 순식간에 식탁에 차려진 진수성찬 안주로 막걸리잔이 오고간다. 요양원에서는 술을 생각지도 못하건만, 습관처럼 술잔을 드니 맏사위가 얼른 따라드린다. 딸들은 그러면 안된다는 듯 눈을 흘긴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넷째는 속이 상해 연신 술잔을 들었다놨다한다. 어쨌거나 아버지를 모신다는 빌미로 5형제가 모인 게 얼마만인가. 흐뭇하고 행복한 순간이다. 벌써 62가 된 막내가 언니와 오빠들 앞에서 마음껏 수다를 떤다. 최근 시댁의 행랑채를 헐고 이동식 농가주택을 들여놓은 과정을 자세히 열거하는데 모두 배꼽이 빠진다. 열친척지정화(친척끼리 모여 정다운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며 즐거워 하는 일), 이보다 더 좋은 만남이 어디 있는가? 100% 참석지 못한 가족들이 있기에 아쉬울 뿐.
아아, 아버지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신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왜 기분이 좋지 않으시겠는가? 고향집에서 그 노래가 생각이 나셨나보다. 일동 모두 따라부르며 박수를 쳤다. 그냥 이대로라도 백수를 하시라 했다. 어머니와 함께 일곱 총생들을 낳아 기르고 가르쳐 제금내주기(결혼시킴)가 얼마나 험난하고 힘드셨을까? ‘수양산 그늘이 강남 3천리’라는 말이 있듯, 당신은 우리집의 영원한 대들보셨는데, 이제 나이 들어 정신도 온전하지 않고, 자식들에게는 천덕꾸러기처럼 돼가는 이 현실이 서럽다. 5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2-3년 안에 어머니를 따라 가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끔가끔 정신이 돌아오시니, 남원에 가 보청기약 좀 사달라고 하신다. 그것도 ‘시간이 있거나 갈 일이 있거든’이라는 미안해하는 단서를 달면서 말이다. 물론이다. 소용이 있거나말거나 그거야 당연히 내가 할 일. 다음날 만사 제치고 사서 요양원 간호사에게 건네줘야겠다. 하루 3교대, 간호사들도 참 욕본다. 동생들과 연말에나 2박3일 외박을 신청하자고 했다. 졸지에 아기가 되어버린 우리 아버지, 요양원 안에서 워커(walker. 보행기)가 없으면 한 발짝도 못다니시게 한다. 지팡이도 반입이 안된다. 할머니들이 유아보행기를 의지해 걷는 것과 같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의 ‘전화 치매’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신기한 일이다. 당신의 유일한 피붙인 숙부도 전화치매에 걸리셨다. 하루에도 열 번도 넘게 아버지께 “형님, 식사하셨소?”라는 전화를 하셨다. 금방 하고도 잊어먹고 또 하고. 어떻게 그런 것조차 형제가 닮았을까. 그때마다 대답을 퉁퉁하게 하는 아버지께 “아 하나뿐인 동생이 아파서 그렁개 좀 친절하게 대답하세요”라고 했던 게 바로 나였다. 그런데, 몇 년 후에 같은 상황에 처한 나는 도무지 친절하게 전화가 받아지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아버지가 ‘문안 전화’를 하지 않으면 좋겠다. 지금 세상에 아무리 혼자 산대도 밥 굶는 사람이 있는가?
오늘 아침과 점심은 집에 함께 있으니 전화를 하지 않을 것이다. 흐흐. 그래도 내 귀에는 당신의 목소리가 남아있어 들리는 듯하다. “잘 잤어잉? 밥 해먹어야지. 나는 방금 밥 먹었어. 잘 있어잉. 고마워” 이런 불효자에게 대체 무엇이 고마운 것일까? 죄송합니다. 아버지. 저야말로 진짜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