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33
1월12일[연중 제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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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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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X9XHur-kU
[인천교구 신형학 대건안드레아 신부님 집전(효성동 본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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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에게는 호의와 친절을 겸비한 따뜻한 이웃이 필요합니다!>
중증 중풍으로 인해 사람들에 의해 들것에 실려 예수님께로 온 환자를 바라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숨 쉬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갓난 아기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화장실 가는 것, 옷 갈아입는 것, 씻는 것, 밥숟가락 드는 것조차 스스로 할 수 없으니, 그 삶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이렇게 맨날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들었지만, 그것조차도 불가능했습니다.
살다 보면 때로 우리 역시 중풍 병자 같은 처지에 놓이기도 합니다. 깊은 수렁 속에서 한번 빠져나오기 위해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도무지 빠져나올 도리가 없습니다. 생각은 간절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민과 자비로 충만하신 하느님의 따뜻한 손길입니다. 더불어 호의와 친절을 겸비한 따뜻한 이웃, 내 이 비참한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줄 동료들입니다.
천만다행으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 병자에게는 바로 그런 이웃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치유자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은 네 사람은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실어 그분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거처에 도착해보니, 또 하나의 높은 벽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사도들로부터 대기 번호표를 받았는데, 500번이었습니다. 순번을 지키다가는 사흘을 기다려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고민 고민 끝에 그들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짜내고 즉시 실천에 옮깁니다. 지붕 위로 올라가 지붕을 뚫는 것이었습니다. 이쯤 해서 아래로 한번 내려가 볼까요?
아래 거실에서는 예수님께서 치유 활동에 전념하고 계셨습니다. 갑자기 지붕 위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리고, 지붕이 열리더니 나뭇가지며, 잡동사니들이 우르르 떨어졌습니다.
잠시 후에 밧줄에 매단 환자가 내려왔습니다. “자, 천천히. 조심조심! 수평을 맞추고, 지금 너무 왼쪽으로 기울었으니 오른쪽으로. 오케이!”
이윽고 예수님 바로 앞으로 내려온 중풍 병자! 너무나 특별한 광경에 많이 당황하셨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지극정성을 크게 평가하십니다.
중풍 병자 입장에서는 또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모습에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쉼 없이 흘렸을 것입니다.
나를 들것에 싣고 그 먼길을 뛰어온 공동체 구성원들의 모습, 나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모습에, 반드시 치유되어 백배 천배로 갚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일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흐른 어느 날, 우리도 오늘 중풍 병자처럼 하늘만 쳐다보고 누워있게 될 것입니다. 들것에 눕혀 어디론가 실려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들것이나 침대, 휠체어에 의지하고 계신 어르신들, 선배들, 부모님들, 환자들을 지극정성으로 대해야겠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잘 돌봐드려야겠습니다.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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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f8v8ZzAww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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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사람이 없다면, 이제 기적을 기대해도 좋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들것에 데려온 중풍 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는데 인간이 죄를 용서해 주니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알게 해주겠다며 그를 치유해 주십니다.
여기에서 병의 치유나 죄의 용서는 거의 동의어로 쓰입니다. 그리고 같은 권한으로 그 일을 한다고 하십니다. 이 권한은 ‘성령’의 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다면 동시에 타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도 지닐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도 타인의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권한은 하느님에게 있기에 우리도 자녀로서 그 권한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없는 게 무엇일까요?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면 기적도 기대해야 합니다.
1993년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된 에밀 카파운(Emil Kapaun) 신부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체코 이민자의 아들인 그는 미군 군종장교로 한국전에 참전했습니다. 그는 한국 전쟁 당시 이미 성인으로 불릴 만큼 군인들의 진정한 아버지였습니다.
대피하라는 소리를 듣고도 그는 뒤에 쳐진 군인들을 구하느라 빠져나가지 못했습니다. 중공군 포로가 되어 1951년 35세로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는 절망하는 군인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그가 목숨을 구한 사람 중 한 명인 허버트 밀러 하사는 상처를 입은 채 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한 중공군이 소총으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습니다. 카파운 신부는 달려가서 그 중공군을 옆으로 밀고 밀러 병장을 구해냈습니다.
그 군인은 두 사람을 모두 죽일 수도 있었지만, 카파운 신부의 용기와 사랑에 놀라 움직이지 못하였습니다. 죽음의 행진이 이어졌습니다. 낙오하거나 계속할 수 없는 사람은 바로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카파운 신부는 부상자를 끝까지 부축하여 수용소까지 도착하였습니다. 그 병사는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포로수용소에서 카폰 신부는 그 모든 병사에게 어머니와 같았습니다. 그는 배급을 보충할 음식을 얻기 위해 캠프에서 몰래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는 동료 병사들을 이질로부터 구하기 위해 물을 끓일 수 있도록 금속 조각으로 그릇을 만드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옷을 빨곤 했습니다. 그는 비밀리에 미사를 거행하곤 했습니다.
중공군 간수들은 그가 동료 수감자들에게 가져다준 희망 때문에 그를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몇 시간 동안 벌거벗은 채 혹독한 추위 속에 서 있게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아프게 되자 그들은 그를 없앨 기회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그를 죽음의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들은 그곳을 자신들의 병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중공군 간수들이 그를 끌고 갈 때, 그의 동료 포로들은 울부짖으며 자기들의 사제를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항상 가고 싶었던 곳으로 갈 것입니다. 내가 거기 도착하면 당신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들은 그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카파운 신부는 1951년에 포로 생활 중에 사망했지만, 그의 유산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의 동료 수감자 중 다수는 그의 영적 지도력과 보살핌 덕분에 자신들이 살아남았다고 여겼습니다. 그가 죽은 후, 특히 그의 도움을 간구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에게 한 기도로 기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2008년 장대높이뛰기 연습 중 사고를 당한 캔자스 출신의 대학 운동선수인 체이스 키어(Chase Kear)와 관련된 것입니다. 심각한 머리 부상에서 키어가 회복될 가능성은 의학적으로 제로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인 키어 가족들은 카파운 신부의 중재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체이스의 놀랍고 빠른 회복은 나중의 가톨릭교회에서 카파운 신부의 하느님의 종과 시복식을 위한 기적의 사례 가운데 하나로 제시되었습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힘, 곧 성령으로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기적도 일으킵니다. 카파운 신부처럼 자신을 죽이는 이들도 용서할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 그에게 기적의 흔적도 남겨주십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여자 주인공은 사형선고 받은 남자를 살리기 위해 자기 어머니와 자신에게 못된 짓을 했던 친척 오빠를 용서합니다. 물론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를 통해서 기적을 바라는 마음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기적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그 기적을 일으키시는 성령을 받기 위해 용서의 기적부터 일어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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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대림 때입니다. 저는 주로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글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대림시기에는 ‘대림성가’를 들으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대림시기에 성탄성가를 듣는 것은 수고하지 않고 열매를 얻으려는 마음과 같습니다. 대림시기에 성탄성가를 듣는 것은 출산의 고통 없이 아이를 낳는 것과 같습니다. 대림시기에 성탄성가를 부르는 것은 상업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성탄의 기쁨은 성탄시기에 찬양해도 좋습니다. 대림시기에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며 경건하게 대림성가를 듣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글을 읽은 후에 대림시기 동안 ‘대림성가’를 들으면서 지냈습니다. 주위 분들에게도 저의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대림성가를 들으면 마음이 경건해지고, 차분해졌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듣고 대림성가를 주로 들었던 분들도 같은 느낌이었다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대림시기는 주님의 오심을 깨어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2000년 전에 우리에게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앞으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억하고, 기다리는 않는 이들에게 성탄은 1년에 한 번씩 다가오는 축제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임금’을 세워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임금이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을 외적의 침입을 막아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임금이 있으면 이스라엘에 질서와 평화가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임금이 있으면 갈등과 분쟁을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임금이 있으면 벌어질 일들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다스릴 임금의 권한이오. 그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자기 병거와 말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오. 천인 대장이나 오십인 대장으로 삼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고 수확하게 할 것이며, 무기와 병거의 장비를 만들게도 할 것이오. 그는 여러분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 제조사와 요리사와 제빵 기술자로 삼을 것이오. 그는 여러분의 가장 좋은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밭을 빼앗아 자기 신하들에게 주고, 여러분의 곡식과 포도밭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 내시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이오. 그제야 여러분은 스스로 뽑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그때에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오.” 사무엘은 임금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세주가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임금은 큰 권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할 수 있다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임금을 세워달라고 하였고,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임금을 얻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또 다른 임금의 모습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권한이 있지만 권한을 내세우지 않고 백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주고, 묶인 이를 풀어주고, 갇힌 이에게 자유를 주고, 아픈 이를 치유해 주고, 굶주린 이를 배부르게 하는 임금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기꺼이 섬기는 임금입니다. 참새도 집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머무를 곳도 제대로 없는 임금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유함 보다 가난함을 택하는 임금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건강함보다 아픔을 택하는 임금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하는 임금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 임금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임금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새로운 임금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신앙은 선택입니다. 세상의 임금이 가지는 권한과 권력을 추구할 것인지, 하느님의 아들이 보여주신 겸손과 십자가를 추구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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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2,1-12: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신 사람의 아들
예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어느 집에서 가르치시는 동안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2절) 그때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와서 그분 앞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군중 때문에 데려갈 수가 없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에 젖어있으면, 우리가 달콤한 기도에 빠져 주님과 달콤한 속삭임을 나누는 동안에도 세상의 잡념들이 군중처럼 몰려와 영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갈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야 한다. 즉 말씀을 향하여 가야 한다. 예수님은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5절) 하신다. 주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고쳐 주셨다. 하느님 외에 아무도 죄를 용서해 줄 수 없다(7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고쳐 주셨으니, 참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 말씀이심이 분명하다. 그분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분이시다.
율법 학자들에게는 이러한 말이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그들 신앙의 본질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의 발언이었다. 이러한 죄는 레위 24,16에서 돌로 쳐서 죽이는 죄에 해당하였다. 그래서 율법 학자들은 분개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7절) 하고 중얼거렸다. 그들은 하느님 밖에 아무도 죄를 용서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분이 그러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 것을 모른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9-11절) 하시자 중풍 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요를 가지고 걸어 나갔다. 이 중풍 병자는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를 받았다기보다 친구들을 통하여 기적을 체험하였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이웃의 도움을 통하여 갖게 된 예도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지붕을 벗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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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레위기에 따르면 나병 환자는 사람들이 다가오거나 누군가 자신의 주변에 있으면,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 하고 외쳐야 하였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대서도 안 되고, 그 또한 누군가와 접촉하여서도 안 되었습니다. 진영이나 도시 밖에 살아야 하는(13,46 참조) 나병 환자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경멸과 모욕하는 마음으로 그를 피하였을 것입니다. 나병에 걸리면 병으로도 고통받았지만,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아마도 사람들에게서 겪는 깊은 단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는 오늘 복음에서 결코 하여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합니다. 예수님께 다가가 도움을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을 고쳐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그를 이렇게 움직이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마음은 ‘가엾은 마음’이었습니다. “가엾은 마음”으로 옮긴 그리스 말의 어원적 의미를 보면, ‘애가 타는 마음’, ‘심장이 찢어지는 마음’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은 그분께서 나병 환자의 몸에 몸소 손을 대시게 만듭니다. 사람들과의 단절로 상처받은 그의 마음과 영혼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나병 환자에게 정말로 필요한 말씀, 그가 생명을 누릴 수 있는 말씀을 하여 주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가장 절망적일 때 우리가 찾고 만나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성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성체 앞에 머물 때마다 나병 환자에게 행하신 기적을 그대로 일으키십니다. 그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는 우리 영혼의 깊은 상처에 손을 대시며, 생명의 말씀과 치유의 말씀을 하여 주십니다. 성체 앞에 머물러 보지 않은 사람은 이 신비를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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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1-5)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와서,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서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낸 일은, 병자 자신을 포함해서 그들 모두의 믿음과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동안에 그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던 군중의 모습은 ‘이웃의 사정’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이기적이고 ‘사랑 없는’ 모습인데, 예수님께서 복음 말씀을 전하시는 상황이기 때문에, 군중은 복음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귀로는 듣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듣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 상황을 보기만 하셨을까? 사람들에게 조금씩 옆으로 비켜서 통로를 열어 주라고 말씀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데도 사람들이 듣지 않고, 움직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떻든 그 상황은 병자 자신과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믿음과 간절함을 더욱 잘 드러낼 수 있는, 또 극복해야만 하는 일종의 시련(시험)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과 간절함과 딱한 사정 등을 모두 보셨다는 뜻입니다. <‘믿음만’ 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을 꿰뚫어보셨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씀에서 ‘얘야’라는 말은, ‘아들아’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은데, 이 말은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는 따뜻한 호칭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한다.”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권한으로, 당신이 직접 그 병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 병자를 구원하신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죄를 용서하신다고 표현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상황에서는 옳지 않은 표현이고, 지금의 상황에서는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고 표현해야 합니다. 또 여기서 ‘용서’라는 말은, ‘죄의 용서’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넓은 뜻으로 ‘영혼의 구원’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병자가 간절하게 바란 것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물론 그 구원에는 ‘죄의 용서’와 ‘몸의 치유’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8-10)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율법학자들이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의아하게 생각했다는 이야기는(마르 2,6-7), 예수님의 권한과 권능에 대한 증언을 좀 더 생생하게 부각시키기 위한 배경 설정 같은 것이고, 그들의 생각에 특별히 중요한 의미는 없습니다. “어느 쪽이 더 쉬우냐?”라는 말씀은, 둘 다 어렵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일, 또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 즉 하느님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당시에 중풍은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 즉 하느님의 힘으로만 고칠 수 있는 병이었습니다. <사도들의 증언으로 바꿔서 표현하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심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셨다.”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이제 내가 나의 권한을 너희에게 증명해 보이겠다.”라는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증명해 보이려고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아닙니다. <병자를 이용해서 당신의 권한을 증명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쳐주신 일은, 그냥 순수하게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입니다. <이 말씀도 사도들의 증언으로 바꿔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분이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느님의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도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곧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3-14)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하느님이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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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코 2장 5절)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말합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코 2장 7절)
유다인은 예로부터 죄의 용서를 하느님의 고유 권한으로 여겼습니다.(탈출기 37장 4절 / 이사야 에언서 43장 25절. 44장 22절)
그런데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코 2장 10절)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마르코 2장 11절-12절)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입니다. 이미 용서받은 이들이요,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제거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인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들것'에 매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기꺼이 들고 다녀야 합니다. 아니,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집으로 가야 합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인류를 태워 들고 아버지께로 가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들것’입니다. 진정 상처에서 흐르는 용서의 피를 마실 때라야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됩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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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듯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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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님]
<치유와 용서>
예수님께서 마귀도 쫓아내셨다는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중풍 병자도 있었습니다. 격리되어 살던 나병 환자는 용기를 내기라도 하면 되었지만, 사지가 마비된 중풍 병자는 아무리 용기를 내더라도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서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중풍은 거동이 불편한 것은 물론이고 심하면 말도 제대로 할 수 없고 사물을 보는 데에도 지장이 생길 수 있고 음식물을 삼키기 어려워지기도 하는 병입니다.
이는 사지근육과 언어 중추, 시각 중추 등을 관장하는 뇌혈관이 좁아지거나 막혀서 뇌세포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 생기는 뇌졸중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 병자는 이웃에 사는 네 사람이 드는 들것에 실려,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참으로 희한하고 눈물겨운 풍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중풍 때문에 겪어야 했던 신체적 고통 못지않게, 그가 중풍에 걸리기까지 겪어야 했던 사회적이고 정신적인 어려움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는 물론, 사람들 사이에도 의사소통의 통로가 꽉 막혀 있었습니다.
제사는 사두가이들이 독점하며 비싼 성전세와 제물을 요구했기 때문이고, 세상에는 율법과 재산에 의한 기준으로 정해 놓은 의인과 죄인이 분리되어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워낙 복잡해서 보통 사람은 다 알 수도 없어서 일일이 바리사이들에게 물어서 살아가야 했고, 재산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증표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죄인으로 취급받고 재산도 없어서 가난한 이들은 이중으로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낙인을 찍힌 채로 짓눌려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렇듯 잔뜩 움츠러든 상태에서 면역력이 증진될 리 만무하고, 그러다가 자칫하면 가장 약한 신체 부위로 질병이 찾아오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중풍 병자의 신체적 원인을 해결하기 전에 당사자도 사람들도 인식하고 있었던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원인부터 해결해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하고 마비된 사지도 풀어주셨습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다시 한번 치유 기적의 권능을 주신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는 한편 중풍 병자를 고쳐내신 예수님의 신적 능력에 경탄하였지만,
군중 속에 끼어 있던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죄의 용서를 한낱 사람인 주제에 감행하는 모습에 대해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신성모독죄의 혐의를 두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혐의가 성전모독 혐의와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게 만드는 빌미가 되지요.
이 사건으로 인해 그 중풍 병자는 일생일대의 행운을 얻었고, 이 광경을 지켜본 군중과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에 대해 확신이 굳어지게 되었으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마르 3,6), 예수님으로서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선포함으로써 인습적으로 너무나 멀게 느끼던 하느님의 본 모습을 알리는 기회로 삼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도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이제는 죄인들을 용서하기로 하셨다는 복음선포 활동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메시지의 연장선상에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보면 질병의 치유 기적도 용서하기 위한 행위입니다.
중풍을 비롯한 모든 질병은 신체적인 고통을 가져다주는 한편, 정신적으로 위축시키고 사회적으로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당사자를 더욱 힘들게 합니다.
용서의 본질은 죄인을 끌어안음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영역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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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2,10~11)
인생을 살면서 우리 자신이 예상하지 않은 재난의 희생자가 되거나, 심한 중병을 앓게 되었을 때 누군가가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고 함께 걱정해 줄 사람이 있다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는 사람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든 수많은 사람, 들것에 실려 온 중풍 병자와 그를 들것에 실어 예수님께 데리고 온 이웃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의심하고 판단하고 있는 율법 학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부류의 사람으로 예수님 곁에 서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율법 교사가 아닌 동료를 예수님께 인도한 네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네 사람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실어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께 자기의 이웃인 중풍 병자를 무척 힘들게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풍 병은 단지 신체적인 편마비도 문제이긴 하겠지만, 오히려 자신이 겪고 있는 편마비를 수용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체념하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혼란과 방황이 더 큰 압박이라고 봅니다. 영혼의 상태가 육체적 마비의 근본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그런 편마비로 장애를 겪는 사람은 오히려 그런 상태에 머물고 싶은데 그 까닭은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질병에 대한 체념과 포기에서 도피하려는 심사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료들이 마비된 사람을 설득해서 예수님께 데려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까지 하는 까닭은 건강하던 이웃이 중풍으로 몸도 마음도 무너져 버린 상태로 절망하고 체념하는 모습을 보기가 너무 애처롭고 측은한 마음에서 예전의 건강했던 상태로 되돌려 주고 싶은 원의가 강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자책하며 삶을 비관하는 동료의 투정하는 소리와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이렇게 아픈 이웃에 대한 순수한 마음 곧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예수님과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굳건한 신뢰와 믿음에서 과감히 그렇게 실행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갈6,2)라는 말씀대로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이었다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에 친구를 어렵게 데리고 왔지만,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기에”(2,2)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하면 중풍 병자인 친구를 예수님의 눈에 띄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한 결과 네 사람은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동료를 들것에 달아내려 보냈던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는 말처럼 동료를 돕고자 하는 선하고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에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따질 겨를도 없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들의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내가 만일 마비되어 치유 받을 수 있는 곳까지 인도해 줄 친구들이, 이런 사람들이 내게도 있는가, 그리고 나는 중풍 병으로 아파하는 동료들을 예수께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다시금 깊이 생각하게 하는 행동이며 모습입니다. 당대의 팔레스티나의 가옥 구조는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제는 바로 그들의 파격적인 생각과 실행이 큰 감동이 됩니다. 어쩌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사람들의 장벽처럼 우리 앞에 때론 그런 많은 어려움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다만 저는 다행스럽게도 나의 도움과 동행이 필요한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행복합니다.
이런 동료들의 놀라운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애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5)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율법 학자들은 물론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놀랍니다. 왜냐하면 중풍 병자는 예수님께 죄의 용서를 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곧 죄와 마비와의 관련성을 드러내 주고 있으며, 이를 예수님께서는 이미 파악하고 계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당대 모든 사람은 인과응보 곧 과거의 죄가 현재의 육적인 모든 질병의 원인이다, 는 점을 알고 믿고 있었습니다. 죄는 우리의 삶을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의 죄의 용서를 선언하였고, 육신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중풍 병자는 자신 안에 갇혀 살아왔고, 자신의 내적 문제와 갈등 속에 도피하고 회피하였기에 그런 갈등이 육신의 마비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치료 이전에 먼저 그의 마비 원인인 죄의 용서를 베풀면서 그 자신의 내적 치유와 구원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 병자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2,11) 물론 그 중풍 병자는 사실 자신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즉각적으로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2,12) 이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또 이것은 생명의 말씀인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결국 중풍 병자가 치유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동료를 예수님께 데려가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네 사람의 믿음과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일어나 들것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간 중풍 병자의 믿음과 치유의 능력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 낸 하느님의 놀라운 기적입니다. 사실 그 자리에 참으로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결국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를 체험하고 은총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동료를 데려간 이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일어난 중풍 병자는 충만한 은총의 기쁨과 하느님의 놀라우신 현존을 체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네 사람과 치유 받은 사람들은 믿음을 가졌기에 그 자리에서 하느님 자비의 안식처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2,12)는 표현에 드러난 놀라운 중풍 병자의 치유는 예수님 홀로 빚은 치유 기적이 아니라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이들의 측은지심과 함께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신뢰와 믿음이 이루어 낸 일이었기에 새삼 더 하느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은총은 바로 만남이며 소통이고 치유이며 기적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도 판단하고 방관하는 사람이 없이, 우리 모두 저들처럼, 우리 이웃의 고통받는 이들을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께 데리고 함께 나아갑시다. 아멘.(복음 환호송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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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신혼부부가 집들이로, 신랑이 결혼 전에 열심히 활동했던 본당 청년회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사실 이 초대는 아내가 먼저 제안한 것입니다. 젊은 시절 열심히 활동했던 남편의 친구들을 초대하면 남편이 좋아하리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남편이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마음이 집들이하면서 좋지 않아졌습니다. 남편이 특별히 청년회 안의 여성들과 유난히 친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질투인가?’라는 마음도 들었지만, 남편이 해도 해도 너무한 것 같았습니다. 자기는 부엌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로 바쁜데 도와주기는커녕 한 번도 들여다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남편 친구들이 도와준다고 들어왔지만, 남편은 자기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손님들이 모두 간 후, 이 부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내가 먼저 “여자 친구들 오니까 너무 좋아하더라.”라며 빈정대듯 말했고, 이 말에 “네가 초대하라며?”라며 대꾸합니다. 남편의 말이 틀리지 않았지요. 그러나 너무 서운했고 화가 나는 등 부정적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문제일까요? 아내는 처음에 가졌던 좋은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의 호의를 대수로이 생각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둘 다 사랑 자체에 집중해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 뜻을 따르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그 자리에 사랑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사랑을 말씀하셨고, 이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굳은 믿음을 통해서 완전해집니다. 우리 인간의 불안전한 사랑을 넘어 주님의 완전한 사랑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지붕을 벗겨서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풍 병자와 함께 한 사람들과 병자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병자가 낫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율법 학자 몇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에,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중풍 병자의 치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당신 신성을 보여주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주님께서는 사랑이 있는 곳에 당신 사랑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다가가야 합니다. 더군다나 중풍 병자를 내려보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는 모습을 보면, 우리의 사랑으로도 충분히 이웃을 도와줄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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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모독>
마르코 2,1-12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신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매우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모독>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람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니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이요
하느님의 사람임에도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모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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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은 명의이십니다>
몸에 향수를 뿌리고 얼굴화장을 하여도 근본적인 몸과 얼굴은 변하지 않습니다. 새 옷을 갈아입고 치장해도 그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겉모양이 달리 보일 뿐입니다. 마음은 그대로 두고 요란을 떨면 떨수록 본래의 모습은 찾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를 당신 앞에 내려놓은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외적인 중풍 병을 고치려고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원인을 치료시켜 주심으로 사람의 근본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평범한 의사는 상처를 다스리고 명의는 뿌리를 다스린다고 했는데 바로 우리의 주님이 명의이십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뿌리에 생명을 더하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또한 중풍 병자를 데려온 이웃 사람의 믿음을 귀하게 보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겉은 멀쩡한데 속이 뒤틀린 사람이 있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고, 탓을 남에게 돌리며 투덜대기 좋아하는 사람, 정말 치유를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처지를 다 꿰뚫고 계시니 그분 앞에 서슴없이 나의 모든 것을 열어드려야 하겠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하지 않는 영혼은 중풍 병에 걸렸거나 손발이 부자유스럽게 된 사람과 같아서, 손과 발에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만약에 이런 영혼들이 그 커다란 비참을 깨닫지 못하고, 따라서 스스로 바로 잡으려는 노력하지 않으면, 롯의 아내가 고개를 돌리다가 소금 기둥이 된 것처럼 자기한테서 머리를 돌린 탓으로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 것”(영혼의 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중풍 환자, 즉 영적인 감각을 잃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도 아무런 깨달음을 갖지 못하고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거나 또 설령 읽었어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가 중풍 환자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기도 안에서 치유 받기를 희망합니다.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생각합니다.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의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자 지붕을 벗겨내는 열성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마르 2,4)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위해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할 수 있는 마음을 담고 있는가? 또한 나를 위해 그렇게 해 줄 이웃이 있는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이웃사촌이라 하지만 요즘 세상은 서로를 너무 모르고 지내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웃을 향한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길 청하면, 주님이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겉모양도 중요하지만, 속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사람들이 중풍 환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넘어야 할 두 가지 장벽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군중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가니까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과 소신으로 가야 합니다. 나의 인생은 남이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요, 군중에 떠밀려 가듯이 가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자기 인생의 선장입니다.
두 번째의 장벽은 지붕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를 들것에 매달아 내려보냈습니다. 막히면 뚫고 걷어내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기적을 낳습니다. 그 믿음이 내 믿음이든 다른 사람의 믿음이든 믿음을 갖고 하는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들 것에 누워있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혹 누워있다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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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분별력의 지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의 삶-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주님, 그들은 당신 얼굴 그 빛속을 걷나이다.”(시편 89,16)
근-현대사 공부를 위해 <서울의 봄> 영화와 더불어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 다큐멘터리 기념영화 <길위에 김대중>을 보라고 권합니다. 예전에는 참 많은 반대파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좌우를 막론하고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국내보다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상가 반열에 들 수 있는 참 탁월한 위인이요 말그대로 전설적 신화적 인물입니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강조했고 또 그렇게 정치했던 참으로 분별의 지혜를 지니셨던 분입니다.
이상주의자냐 현실주의자냐? 좌파냐 우파냐?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둘을 다 아우르기 위해서는 분별의 지혜가 절대적입니다. 서생적 문제의식이 이상주의적 측면이라면 상인적 현실감각은 현실주의적 측면입니다. 이 둘을 아우를 때 모두가 선망하는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라 함은 이 둘을 아우른 경지라 할 수 있고, 바로 분별력의 지혜를 강조한 성 베네딕도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강대국 사이에 늘 전쟁의 위기속에 살아가는 남북의 지도자에게 참으로 절실한 분별의 지혜요 이런 양극단을 아우른 통합적 사고이겠습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다(the more spiritual...the more real)’,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명심하고 있는 말마디입니다. 영성과 현실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란 말입니다. 신적일수록 인간적이요, 진정 이상주의자라면 현실주의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분별의 지혜요 바로 예수님이, 성 베네딕도가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 그 모범이겠습니다. 지도자가 지녀야할 우선적 덕목으로 분별력의 지혜를 강조하는 성 베네딕도입니다.
“이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
분별의 지혜의 눈으로 보면 일률적으로 한 잣대를 사용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잣대를 필히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구약의 정의와 공정을 외친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시인이었음은 바로 이들이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였음을 입증합니다. 시인이나 예술가인 대통령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멋진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일 것입니다. 바로 가톨릭교회의 아름다운 전례은총이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인 신자들이 되게 함을 봅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깊이 뿌리내릴수록 분별의 지혜를 지닌 예수님을 닮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일수록 디테일에 강해야 한다는 뜻도 이상주의자이면서 지극한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겠습니다. 성 베네딕도 규칙을 보면 성인이 얼마나 디테일에 강한 섬세한 배려의 인물인지 감복하게 됩니다. 예수님 탄생시 하늘로부터 들려온 하느님 찬미도 생각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 바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서의 하느님의 진면목을 대하는 듯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자라면 땅에서의 평화의 현실주의자로 화답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70대 넘어서면서 집중해 보는 것이 자서전과 평전입니다. 참 감명깊었던 평전중 하나가 병자호란시 나라를 구한 충신, <최명길 평전>입니다. 당시 주전파와 주화파의 대결이 참 치열했던 때입니다. 주전파이자 명분론자 김상헌이 있었다면 주화파이자 실리론자 최명길이 있습니다. 만일 주전파 김상헌의 말을 들었다면 조선은 신흥 강국 청나라에 초토화되어 재기 불능했을 것입니다. 아니 진작 분별의 지혜를 발휘했다면 병자호란의 참화도 막았을 것입니다. 천만다행 늦게나마 인조가 최명길의 편을 들어 나라를 살렸습니다. 지도자의 역할이 나라의 존망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오늘에 주는 교훈이 참 큽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셔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저렇게 할 수 뿐이 없을까 하는 회의도 듭니다. 그렇게 많은 무고한 국민들이 죽었는데... 승패에 관계 없이 모두가 패한 어리석은 전쟁입니다. 물론 추호도 패권국가 러시아를 옹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국가지도자의 우선적 책무는 안보요 전쟁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전쟁나면 일상의 모두가 정지되고 그 상처가 너무 깊고 오래갑니다. 정말 한반도는 역사상 너무 많은 피를 흘렸으니 더 이상 전쟁은 없기를 바라며 기상하자마자 부르는 만세칠창중 세 번째 만세입니다.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최명길 평전> 겉표지에 말마디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인 그의 업적을 요약합니다. “망국의 벼랑 끝에서 나라를 구한 외교관, 도탄에 빠진 백성을 살린 정치가”, 명분도 좋지만 살아야 명분도 있지 죽으면 명분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제가 이런 묵상을 한 것은 오늘 제1독서 사무엘 상권의 내용 덕분입니다. 하느님을 대변한 이상주의자 사무엘과 주변의 엄중한 상황에 위기 의식을 느낀 현실주의자 이스라엘 원로들의 의견이 첨예한 대립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이미 나이가 많으시고 아드님들은 당신의 길을 따라 걷지 않고 있으니, 이제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 주십시오.”
사무엘이 언짢아 마음에 그대로 전달했을 때 주님의 반응입니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은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
자식이기는 부모없다고 백성이기는 하느님도 없는 듯 합니다. 왕정제도를 고집하는 원로들의 현실주의를 탓할수만도 없고, 하느님을 섬기고 따르는 이상주의를 고수하기도 힘드니 백성들의 처지가 참으로 진퇴양난입니다. 사무엘은 왕정제도의 폐단을 상세히 열거합니다만 백성들의 결정은 요지부동입니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다른 민족들처럼, 임금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앞에 나서서 전쟁을 이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주어라.”
하느님의 이상주의에 대한 백성들의 현실주의의 승리입니다. 폭군(暴君)이나 암군(暗君), 혼군(昏君)이 아닌 세종대왕 같은 성군(聖君) 만나기는 얼마나 힘든지요! 오늘날 반복되는 역사 현실 아닙니까? 참으로 백성을 사랑했고 백성의 신뢰와 사랑을 온몸에 받았던, 다방면에 천재라 일컬었던 조선의 두 성군인 세종과 정조는 결코 신하들에게 휘둘렸던 문약(文弱)한 인물이 아녔음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에서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극복대안을 찾았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참으로 날로 깊어가는 하느님 믿음이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의 삶을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중풍병자의 믿음 좋은 동료들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동료인 중풍병자가 주님을 만나 치유받는 것이 이상이라면 현실은 절망적입니다. 첩첩의 군중을 뚫고 주님께 이를 길이 없음이 현실입니다. 궁즉통(窮則通)! 바로 믿음의 기적입니다. 이상(理想)의 현실화(現實化)를 가능하게 한 믿음의 기적입니다.
네 동료들의 믿음은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했는지, 이들의 믿음의 눈이, 지혜의 눈이 열려 이들은 주님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내니 그 믿음을 보시고 감동하신 주님의 2차에 걸친 전인적 치유선언입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동료들 덕분에 죄를 용서받듯이 교회공동체의 믿음 덕분에 죄를 용서받는 우리들입니다.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의 치유에 이은 육신의 치유이니 전인적 치유가 뒤를 잇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모두가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니 해피엔드로 끝나게 하는 믿음의 위력입니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군중들의 믿음에도 큰 자극이자 도전이 됐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대한 간절하고 절실한 믿음이 주님을 닮아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가 되어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며 살게 함을 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영적 중풍병을 치유하여 온전한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자애를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내 입으로 그 진실하심을 대대에 전하리라.”(시편89,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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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용서와 치유 중에서>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중풍 병자가 죄를 용서받고 치유까지 받는 얘기인데 우리는 여기서 왜 병을 치유하면서 주님께서는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시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오늘은 그 의문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기보다 용서와 치유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자문하렵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하냐 하면 어제 여기 밥상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제가 오늘처럼 선택과 관련한 질문을 던졌는데 사랑의 하느님과 능력의 하느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하느님을 선택해야 할지 같이 얘기 나눈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자 능력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 한분을 선택하면 두 하느님을 다 선택하는 것이 되지만 그래도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사랑의 하느님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왜냐면 사랑없이 능력만 있는 것을 선택한다면 악령을 선택하는 것과 진배가 없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가 권고 5번에서 얘기하듯 악령도 능력으로 치면 대단하기에 우리의 병을 치유해 줄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병을 치유받기 위해서 악령의 하수인이 되곤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시면 우리는 죄의 용서와 치유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요?
이에 눈치 빠른 분들은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한다고 답하실 테지만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겠지요.
마찬가지로 용서가 아니라 치유만을 원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라 악령이나 의사에게 가면 됩니다. 그리고 치유만 받고 그 관계는 끝나거나 끝내도 됩니다.
우리는 병원에 가서 돈 주고 치유받고는 그것으로 끝나지요. 의사와 우리의 관계는 돈을 주고받는 관계지 사랑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런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려는 주님께 베드로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자 주님께서 그러면 너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게 된다고 하신 바가 있지요.
기실 우리의 모든 죄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죄이고, 그래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은 단절된 관계를 복원하는 것, 다시 말해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 말고도 죄의 용서를 선택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곧 건강을 위해서도 죄의 용서를 선택해야 합니다.
전에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 있지만 건강에는 육신의 건강, 마음의 건강, 정신의 건강, 영혼의 건강이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육신이 건강하지 않을 때는 건강을 회복하려고 하고, 그래서 병을 인정하고 나으려고 하고 어떤 치유든 받아들입니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처럼 심리적인 병도 인정하고 나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정신에 병이 있다거나 영혼에 병이 있다고 하면 대부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러기에 고치려고 들지도 않을 뿐 아니라 더 심각한 것은 육신의 병 때문에 자살하거나 남을 죽이지는 않지만 심리적, 정신적, 영적인 병은 자살하기도 하고 남을 죽이기도 하잖습니까?
사실 많은 병은 서로 유기적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라는 말이 있고, 뒤집으면 건강한 정신과 영혼에 건강한 육체와 마음이 있습니다.
죄를 용서받는 것은 관계의 회복일 뿐 아니라 영적인 병의 치유이고, 그래서 주님께 죄를 용서받을 때 우리는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게 될 뿐 아니라 영적인 건강을 되찾고 다른 건강도 되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근원 치유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의 치유부터 해야 하고, 영혼의 치유인 죄의 용서부터 우리는 받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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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1)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믿음과 희생!>
오늘 복음(마르2,1-12)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모여듭니다. 그들은 영육의 병으로부터 낫고자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네 사람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뉘어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하지만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그리로 중풍 병자를 내려보냅니다.
"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큰 믿음과 희생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이렇게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율법 학자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예수님 자신에게 있음을 선언하시면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오늘 복음은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로 몰려온 그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묵상합니다.
스스로 움직이기 힘든 중풍 병자를 들것에 뉘어 예수님 발 앞에 데려다 놓은 네 사람의 큰 믿음과 희생을 묵상합니다.
그토록 기다려 왔던 메시아가 눈앞에 계시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하느님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기득권 세력들의 모습을 묵상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
그래서 나의 영과 육의 병을 고쳐주시는 하느님!
매순간 그런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그리고 나도 '또 다른 큰 믿음과 희생'이 되어, 냉담 교우들과 믿지 않는 이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구원의 도구가 되어 봅시다!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만나, 믿는 사람답게 행동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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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코 2장 5절)
<나도 천사가 되자!>
예수님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듭니다. 그때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들것에 들어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데,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내려보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셨을 예수님의 땀과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네 사람의 정성(믿음)을 묵상해 봅니다.
지난 주님 성탄대축일 낮미사 때 두 명의 자매님과 한 명의 형제님께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들 모두는 누군가의 끊임없는 관심과 기도 속에서 주님의 인도를 받아 성당에 오게 되었고, 또한 신자들의 기도 속에서 6개월간의 예비신자 교리를 잘 받고 기쁘게 다시 태어났습니다.
우리 주변을 관심있게 살펴보면 나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이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주님께로 나아갈 수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천사,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천사가 됩시다! 주님께서는 천사인 나의 믿음을 보시고 너를 살려주십니다.
너의 천사가 되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 모두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땀'이고, 예수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실 '우리의 땀'입니다.
예수님 공생활은 모두의 구원을 애쓰신 예수님의 땀 흘림이고, 연중시기는 이 땀을 집중적으로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이 묵상과 함께 예수님처럼 모두의 구원을 위해 땀 흘리는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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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VDwnRbRx6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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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마르 2, 5)
오늘 복음은
특별히
우리들에게
던지는 의미가
큽니다.
우리의 믿음을
반성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나눔과
용서로 이어지는
정신의 참된
고양(高揚)입니다.
아픈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나눔이라는
소중한 역할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나눔이란
진심을 동반한
믿음과
언제나
일맥상통합니다.
믿음은
마음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는
나눔에서
시작됩니다.
주고 받는
나눔으로
믿음은
자라납니다.
마땅히
나누어야 할
나눔이
용서로 변합니다.
존귀한 연민
존귀한
믿음입니다.
존귀한 믿음은
따뜻한 마음으로
드러납니다.
따뜻한 마음은
이웃을 향한
자비와
사랑을
나누는
용서가
됩니다.
이와 같이
혼자만의
믿음은
거짓입니다.
함께 사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은
참된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용서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용서로
돌아가는
용서의 참된
여정입니다.
나눔으로
믿음을
이루십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용서를
이루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믿음의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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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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