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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길 CEO칼럼] 시애틀 추장(Chief Seattle) 연설문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아메리카 원주민 ‘시애틀 추장(1786~1866)’은 현재의 미국 워싱턴州에 해당하는 인디언 땅에서 ‘수쿼미시족’의 추장 아버지와 ‘두와미시족’ 어머니와 사이에서 태어났다.
169년 전인 1854년, ‘프랭클린 피어스(Franklin Pierce/1804~1869)’ 미합중국 제14대 대통령이 파견한 백인 대표자가 인디언 부족에게 인디언들이 전통적으로 살아온 땅을 미국 정부에 매각할 것을 강요한데서 이 연설문이 나왔다.
현재 워싱턴州에 해당하는 미국 서부지역 인디언들의 삶터를 미국 정부가 차지하는 대신에 인디언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보존지구를 마련해 주겠다는 게 ‘프랭클린 피어스’ 미국 백인 정부의 제안이었다.
그러자 체구가 장대하며 우렁찬 목소리의 시애틀 인디언 추장이 연설했다. 19세기라는 한정된 시대를 뛰어넘어서, 지금의 우리들에게 감동적으로 전해오는 백인들의 환경 파괴를 비판한 그의 명(名) 연설문은 우주와 세상을 조화로운 질서 있는 하나의 전체로 보는 통찰력을 담고 있다.
대자연을 바탕으로 한 소박한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비유를 통한 시애틀 추장 연설문은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삶터와 창조주와의 관계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을 진솔하게 표현한다.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 전문(全文)을 요약해 적는다.
시애틀(Seattle) 추장 연설문(演說文) 요약
워싱턴의 대추장(피어스 대통령)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대추장은 우리만 따로 편히 살 수 있도록 한 장소를 마련해 주겠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안을 잘 고려해 보겠지만, 우리에게 있어 이 땅은 거룩한 것이기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울과 강을 흐르는 이 반짝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피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을 팔 경우에는 이 땅이 거룩한 것이라는 걸 기억해 달라.
거룩할 뿐만 아니라, 호수의 맑은 물속에 비치는 신령스러운 모습들 하나하나가 우리네 삶의 일들과 기억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음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준다. 카누를 날라주고 자식들을 길러 준다.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에게 하듯 강에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아침 햇살 앞에서 산안개가 달아나듯이 홍인(아메리카 원주민 별칭)은 백인 앞에서 언제나 뒤로 물러났었지만 우리 조상들의 유골은 신성한 것이고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다.
그러니 이 언덕, 이 나무, 이 땅덩어리는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다. 백인은 우리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인에게는 땅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똑같다.
땅은 그에게 형제가 아니라 적이며, 그것을 다 정복했을 때 그는 또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백인은 거리낌 없이 아버지의 무덤을 내팽개치는가 하면 아이들에게서 땅을 빼앗고도 개의치 않는다.
백인은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저 하늘을 마치 양이나 목걸이처럼 사고 약탈하고 팔 수 있는 것으로 대한다. 우리의 방식은 그대들과는 다르다. 그대들 도시의 모습은 홍인의 눈에 고통을 준다.
백인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홍인이 미개하고 무지하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도시의 소음은 귀를 모욕하는 것만 같다. 쏙독새(검은 갈색의 30cm 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한밤중 연못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나는 홍인이라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 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향기를 사랑한다. 만물이 숨결을 나누고 있으므로 공기는 홍인에게 소중한 것이다. 짐승들, 나무들, 그리고 인간은 같은 숨결을 나누고 산다.
백인(白人)은 자기가 숨 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그러나 공기는 우리에게 소중하고, 또한 공기는 그것이 지탱해 주는 온갖 생명과 영기를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짐승들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이 사라져 버린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게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맺어져 있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딛고 선 땅이 우리 조상의 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들이 땅을 존경할 수 있도록, 그 땅이 우리 종족의 삶들로 충만해 있다고 말해주라.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을 그대들의 아이들에게도 가르쳐라.
땅은 우리 어머니라고, 땅 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들들에게도 닥칠 것이니, 그들이 땅에다 침을 뱉으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주는 피와도 같이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그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는 짓이다.
마지막 홍인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가 다만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기억될 때라도, 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백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돌본 것처럼 이 땅을 돌보아 달라. 온 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대들의 아이들을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이.
한 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을. 이 땅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백인들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연설문 요약 끝-
미합중국(50개 州) 지도의 왼쪽 맨 위가 Seattle 시가 있는 Washington 州 이다.
미합중국 수도(首都) Washington D.C는 오른쪽 상단에 있다.
1853년 미국 서부 워싱턴(Washington)주에 맨 처음 마을이 세워졌을 때 백인 정착민과 우호적 관계를 가졌던 인디언 ‘스쿼미시족, 두와미시족,’의 ‘시애틀(Seattle) 추장’을 기념하여 시애틀(Seattle)’이란 도시명(都市名)이 탄생한 것이다.
1890년 시애틀市에서 시애틀 추장의 묘지에 기념비를 세웠다. 한마디로 ‘시애틀(Seattle) 추장’이야말로 <ESG 경영의 창시자>이다.
최근 미국 하와이 마우이 섬, 캐나다, 스페인의 대형 산불로 인해서 고통받는 사람이 많다. 서구에서의 전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난세에 시애틀 추장의 연설이 가슴에 와닿는다.
http://www.catholicnews.co.kr/bbs/view.html?idxno=27307&sc_category=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시애틀 인디언 추장 연설
워싱턴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대추장은 우정과 선의의 말도 함께 보내왔다. 그가 답례로 우리의 우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그로서는 친절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대들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볼 것이다. 우리가 땅을 팔지 않으면 백인이 총을 들고 와서 우리 땅을 빼앗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홍인(紅人)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홍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
워싱턴의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온 것은 곧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달라는 것과 같다. 대추장은 우리만 따로 편히 살 수 있도록 한 장소를 마련해 주겠다고 한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들의 제안을 잘 고려해보겠지만, 우리에게 있어 이 땅은 거룩한 것이기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울과 강을 흐르는 이 반짝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피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을 팔 경우에는 이 땅이 거룩한 것이라는 걸 기억해 달라. 거룩할 뿐만 아니라, 호수의 맑은 물속에 비추인 신령스러운 모습들 하나하나가 우리네 삶의 일들과 기억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음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준다. 카누를 날라주고 자식들을 길러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에게 하듯 강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아침 햇살 앞에서 산안개가 달아나듯이 홍인은 백인 앞에서 언제나 뒤로 물러났었지만 우리 조상들의 유골은 신성한 것이고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다. 그러니 이 언덕, 이 나무, 이 땅덩어리는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다. 백인은 우리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인에게는 땅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똑같다. 그는 한밤중에 와서는 필요한 것을 빼앗아가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땅은 그에게 형제가 아니라 적이며, 그것을 다 정복했을 때 그는 또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백인은 거리낌 없이 아버지의 무덤을 내팽개치는가 하면 아이들에게서 땅을 빼앗고는 개의치 않는다. 아버지의 무덤과 아이들의 타고난 권리는 잊혀지고 만다. 백인은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저 하늘을 마치 양이나 목걸이처럼 사고 약탈하고 팔 수 있는 것으로 대한다. 백인의 식욕은 땅을 삼켜 버리고 오직 사막만을 남겨놓을 것이다.
모를 일이다. 우리의 방식은 그대들과는 다르다. 그대들의 도시의 모습은 홍인의 눈에 고통을 준다. 백인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봄 잎새 날리는 소리나 벌레들의 날개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다. 홍인이 미개하고 무지하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도시의 소음은 귀를 모욕하는 것만 같다. 쏙독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한밤중 못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나는 홍인이라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내음을 사랑한다. 만물이 숨결을 나누고 있으므로 공기는 홍인에게 소중한 것이다. 짐승들, 나무들, 그리고 인간은 같은 숨결을 나누고 산다. 백인은 자기가 숨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여러 날 동안 죽어가고 있는 사람처럼 그는 악취에 무감각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대들에게 땅을 팔게 되더라도 우리에게 공기가 소중하고, 또한 공기는 그것이 지탱해 주는 온갖 생명과 영기(靈氣)를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베풀어준 바람은 그의 마지막 한숨도 받아준다. 바람은 또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준다. 우리가 우리 땅을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잘 간수해서 백인들도 들꽃들로 향기로워진 바람을 맛볼 수 있는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그러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즉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개인이니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나는 초원에서 썩어가고 있는 수많은 물소를 본 일이 있는데 모두 달리는 기차에서 백인들이 총으로 쏘고는 그대로 내버려둔 것들이었다.
연기를 뿜어내는 철마가 우리가 오직 생존을 위해서 죽이는 물소보다 어째서 더 중요한지를 모르는 것도 우리가 미개인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짐승들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이 사라져버린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게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맺어져 있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딛고 선 땅이 우리 조상의 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들이 땅을 존경할 수 있도록 그 땅이 우리 종족의 삶들로 충만해 있다고 말해주라.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을 그대들의 아이들에게도 가르치라. 땅 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들들에게도 닥칠 것이니, 그들이 땅에다 침을 뱉으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주는 피와도 같이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그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는 짓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종족을 위해 그대들이 마련해준 곳으로 가라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는 떨어져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우리가 여생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패배의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의 전사들은 수치심에 사로잡혔으며 패배한 이후로 헛되이 나날을 보내면서 단 음식과 독한 술로 그들의 육신을 더럽히고 있다.
우리가 어디서 우리의 나머지 날들을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 많은 날이 남아있지도 않다. 몇 시간, 혹은 몇 번의 겨울이 더 지나가면 언젠가 이 땅에 살았거나 숲속에서 조그맣게 무리를 지어 지금도 살고 있는 위대한 부족의 자식들중에 그 누구도 살아남아서 한때 그대들만큼이나 힘세고 희망에 넘쳤던 사람들의 무덤을 슬퍼해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우리 부족의 멸망을 슬퍼해야 하는가? 부족이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인간들은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가는 간다. 자기네 하느님과 친구처럼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백인들조차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백인들 또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가지는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땅을 소유하고 싶어 하듯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하느님이며 그의 자비로움은 홍인에게나 백인에게나 꼭 같은 것이다.
이 땅은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이므로 땅을 해치는 것은 그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다. 백인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갈 것이다. 어쩌면 다른 종족보다 더 빨리 사라질지 모른다. 계속해서 그대들의 잠자리를 더럽힌다면 어느날 밤 그대들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멸망할 때 그대들을 이 땅에 보내주고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그대들에게 이 땅과 홍인을 지배할 권한을 허락해 준 하느님에 의해 불태워져 환하게 빛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불가사의한 신비이다.
언제 물소들이 모두 살육되고 야생마가 길들여지고 은밀한 숲 구석구석이 수많은 인간들의 냄새로 가득차고 무르익은 언덕이 말하는 쇠줄(電話線)로 더럽혀질 것인지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덤불은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독수리는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날랜 조랑말과 사냥에 작별을 고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의 끝이자 죽음의 시작이다.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가 거기에 동의한다면 그대들이 약속한 보호구역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서 우리는 얼마남지 않은 날들을 마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 홍인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가 다만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기억될 때라도, 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백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의 심장의 고동을 사랑하듯이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그러므로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우리가 돌본 것처럼 이 땅을 돌보아 달라. 당신들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이 땅의 기억을 지금처럼 마음속에 간직해 달라. 온 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대들의 아이들을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이.
한 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을. 이 땅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백인들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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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추장의 연설문은 날조됐다!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이 날조됐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며 의아할 사람도 있고, 그게 사실이냐며 분노할 사람도 있고, 그걸 아직도 몰랐냐며 혀를 찰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여간 나는 황당하다. 처음부터 소상히 설명하겠다.
【1】 시애틀 추장
스타벅스,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의 고향, 미국 시애틀. 그 지명은 옛날 거기 살았던 원주민 수쿠아미쉬족의 추장에게서 유래됐다. 추장의 이름은 시애틀(1786-1866).
【2】 시애틀 추장의 연설
1854년, 시애틀 추장은 백인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고 한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자기들 터전을 사겠다고 찾아온 백인들에게 "어떻게 하늘을 사고팔 수 있는가?"라는 말로 감동을 주었다는 것. 이 말은 이후 자연과 하나 된 삶을 대표하고, 무분별하게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경계하는 표어가 되었다. 시애틀 추장의 이름이 유명해진 것도 그 연설 때문이다.
시애틀 추장은 아동용 동화로도 많이 소개됐다.
물론 그의 명언이 빠지지 않는다.
"어떻게 하늘을 사고팔 수 있는가?"
나는 애초에 그 모든 걸 사운드가든(Soundgarden)의 노래를 통해 알게 됐다. 블랙 사바스의 명곡 <Into the Void>를 커버하면서 가사를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으로 바꾼 것이다. 시애틀 출신 록밴드다운 애향심이었다. 이 곡 덕분에 너바나, 펄 잼, 사운드가든 등의 '시애틀 그런지'를 더욱 좋아하게 됐다.
How can you buy or sell the sky or the warmth of the land?
어떻게 하늘을, 대지의 온기를 사고팔 수 있는가?
It's strange to us.
우린 너무 이상하다.
We don't own the freshness of the air or the sparkle of the water.
맑은 공기와 반짝이는 물이 우리 소유가 아닌데
How can you buy them from us?
어떻게 당신들에게 팔 수 있겠는가?
▶ Soundgarden, <Into the Void> (1991)
【3】 날조된 연설문
그런데 알고 보니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은 날조된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하늘을 사고팔 수 있는가?"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자세한 경위는 잠시 뒤에 설명하고 개요만 보자면, 그 말은 1972년, 테드 페리(Ted Perry, 1937~ )라는 이가 쓴 <Home>이라는 영화 대사였다.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20세기에 창작한 문장인 것이다. 이 말이 널리 퍼져 마치 시애틀 추장의 어록인 양 인식돼왔다. 나중에 테드 페리가 직접 나서서 사실을 설명하고 다녔는데도(그는 현재 Middlebury College의 영화학과 명예교수임) 별 효과가 없는 모양이다. 지금까지 그 말이 책이나 음악으로 계속 나오는 걸 보면.
【4】 실제 경위
▶ 1854년 초, 시애틀 추장이 백인들 앞에서 긴 연설을 하긴 했음
▶ 당시 그는 원주민 언어로 말을 했고, 그 말이 다단계 통역을 거쳐 영어로 전달됨
▶ 그것을 헨리 스미스(Henry Smith)라는 이가 받아 적었다가 1887년에 처음 발표함
▶ 이후 '진짜는 그게 아니다'라며 조금씩 다른 버전의 연설문들이 등장함
▶ 그 가운데는 (연설문이 아니라) 대통령에게 보냈다고 하는 편지글도 있음
그렇게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은 100년 가까이 혼란의 시기를 겪었다. 1983년 수쿠아미쉬 박물관(Suquamish Museum) 건립을 위해 치밀한 조사가 공식적으로 이뤄졌고, 결국 헨리 스미스 버전을 정본으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 있다.
※ 스쿠아미쉬 박물관, <시애틀 추장 연설문>
Chief Seattle Speech – The Suquamish Tribe
Yonder sky that has wept tears of compassion upon my people for centuries untold, and which to us appears changeless and eternal, may change. Today is fair. Tomorrow it may be overcast with clouds. My words are like the stars that never change. Whatever Seattle says, the great chief at Washington ca...
suquamish.nsn.us
나는 커트 코베인 30주기를 맞아 당시 음악들을 다시 듣다가 사운드가든의 시애틀 추장을 떠올렸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어떻게 하늘을 사고팔 수 있는가"가 조작된 전설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니까 극히 최근에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애틀 추장의 연설은 그 말이 전부인 사건이다. 말이 전부인 사건에서 말이 조작됐다면 그건 사기다. 이승복(반공 어린이)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한 적 없고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한 적이 없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보다 훨씬 크게 화가 났다. 그래서 지금 이 포스트에 열을 올리게 된 것.
【5】 결론 및 전문 감상
① 인생의 지혜를 담은 말들이라며 북미 원주민이나 인도, 티베트 등의 잠언을 출처 미상으로 남발하는 책들이 많은데 이 기회에 같이 고발(?)하고 싶다. 그런 텍스트들은 가급적 멀리합시다 ㅋ
② 이제부터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정본) 전문을 읽어보도록 하자. 국내에는 가갸날 출판사에서 번역본이 나왔는데 여기에도 <어떻게 공기를 팔 수 있다는 말인가>를 제목으로 붙여 씁쓸했다(대중이 그렇게 알고 있으니 ㅜㅜ). 물론 (연설문이 아니라) <시애틀 추장의 꿈>이라는 부제를 붙여 빠져나가긴 했지만 ㅋ
③ 글을 읽다 보면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 어디에도 "어떻게 공기를 팔 수 있단 말인가" 류의 아름다운 웅변은 없다. 그저 자책과 상념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백인 정복자들에게 백기투항하는 모습만 있을 뿐이다. 한 마디로 '당신들이 마련해 준 인디언 보호구역에 들어가겠다'는 게 결론이다. 실제로 시애틀이 이끄는 수쿠아미쉬 부족은 연설 다음 해인 1855년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모두 들어갔다. 백인들은 그에 감사하며 새로운 도시 이름을 시애틀이라고 붙였다.
시애틀 추장, <어떻게 공기를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이상 옮김, 가갸날, 2015)
<연설문 전문>
헬 수 없는 긴 세월 동안 우리 조상들에게 연민의 눈물을 뿌려주고, 영원할 것 같기만 하던 저 하늘이 바뀔지 모르겠다. 오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으로 뒤덮일지 모른다. 내 말은 결코 지지 않는 별과 같다. 당신네 백인 형제들이 계절이 다시 돌아옴을 믿듯이, 워싱턴 대추장은 나 시애틀의 말을 깊이 신뢰해도 좋다.
백인 추장이 보낸 젊은이가 말하기를 그들의 대추장이 우리에게 우정과 선의의 인사를 보낸다고 한다. 친절한 일이다. 그들 종족의 수가 무척 많아서 우리의 우정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 너른 대지를 덮고 있는 풀처럼 무성한 반면에, 우리 부족은 마치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벌판에 듬성듬성 남아 있는 나무처럼 수가 적다.
선한 사람으로 짐작되는 백인 대추장은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왔다. 우리가 편하게 살 수 있는 충분한 땅을 마련해 줄 용의가 있다는 말과 함께. 이것은 정말 관대한 일이다. 홍인(紅人)은 이미 존경 받을 권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더 이상 넓은 땅이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현명한 제안일지도 모르겠다.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가 조가비 가득 널린 바닷가를 뒤덮듯, 우리 부족이 온 대지를 가득 메운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버렸고, 부족의 위대함도 이제는 거의 잊혀졌다. 나는 우리의 때이른 쇠락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몰락을 재촉했다 하여 백인 형제들을 비난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도 비난받아야 할 부분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부족의 젊은이들이 불의에 대한 분노로 자신들의 얼굴에 검고 흉측한 문양을 새겨 넣으면, 그들의 마음 역시 일그러져 검게 변하고 만다. 그 불의가 사실이든 혹은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든. 그들의 잔혹성은 무자비할 뿐 아니라 그 끝도 없다. 하지만 우리 늙은이들은 그들을 만류할 수 없다.
홍인과 백인 형제들 사이의 적대감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해만 될 뿐 아무런 이득이 없다. 설령 목숨을 잃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젊은 용사들이 복수를 통해 얻을 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전쟁 때 집에 남아 있는 늙은이들과 아들을 잃게 될 어머니들은 생각이 다르다.
우리의 위대하고 선한 아버지 워싱턴은, 그의 종족 가운데 대추장의 한 사람임이 분명한 젊은이를 통해, 그가 원하는 대로 따르면 우리를 보호해 주겠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조지(George)가 그의 영토를 북쪽까지 넓혔으므로, 워싱턴은 이제 당신들뿐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용감한 군대는 우리의 든든한 보호벽이 될 것이고, 그의 거대한 전함들이 우리 항구를 채우면 북방에 있는 우리의 오랜 적 씸시안스(Tsimshians) 족과 하디아스(Hadias) 족이 더 이상 우리 부족의 여인네들과 노인들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녀들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당신들의 신은 당신들을 사랑할 뿐 우리 부족은 미워한다. 그는 튼튼한 팔로 백인들을 사랑스레 감싸 안고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끌어주듯이 그들을 이끌지만, 피부가 붉은 자녀들은 내버렸다. 당신들의 신이 하루가 다르게 당신들을 강성하게 만들고 있기에, 조만간 백인들이 온 대지를 가득 채울 것이다. 반면에 우리 부족은 빠르게 빠져나간 다음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썰물처럼 스러져가고 있다.
백인들의 신은 피부가 붉은 자식들은 사랑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를 보호해 주었을 것이다. 우리는 고아와 같아서 기댈 곳이라곤 없다. 어떻게 우리가 형제가 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당신들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에게 번영을 가져다 주고, 영광을 재현하려는 꿈을 일깨워줄 수 있겠는가?
당신들의 신은 우리에게는 불공평해 보인다. 그는 백인을 찾아왔다. 우리는 그를 본 적이 없다. 그의 음성을 들은 적조차 없다. 그는 백인들에게는 율법을 주었지만, 별들이 푸른 하늘을 채우고 있듯이 이 광대한 대륙을 가득 메웠던 수백만 명의 붉은 자식들에게는 아무런 말도 들려주지 않았다.
그렇다! 우리 둘은 서로 다른 종족이고, 언제까지나 그렇게 머물러야 한다. 우리 사이에는 공통점이라곤 없다. 우리 조상들의 유골은 신성하며, 그들의 마지막 안식처는 거룩한 곳이다. 하지만 당신들은 아무런 미련도 없이 조상들이 묻혀 있는 곳에서 멀리 떠나왔다.
당신들의 종교는 성난 신의 강철 손가락으로 석판 위에 씌어졌다. 당신들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홍인은 그런 것은 기억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전통이고, 위대한 정령(Great Spirit, 아메리카 인디언의 主神)이 가져다준 지혜로운 노인의 꿈이자 우리 추장들의 예지력으로서, 우리 부족의 가슴 속에 새겨져 있다.
당신들의 죽은 조상은 무덤 입구를 지나고 나면 더 이상 당신들과 자신의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저 멀리 별 무리 너머의 세계를 헤매고 돌아다닌다. 그리고는 곧 잊혀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 조상들은 그들이 살았던 이 아름다운 세상을 절대 잊지 않는다. 그들은 굽이쳐 흐르는 강과 웅장한 자태의 산, 그리고 그 사이의 외딴 계곡을 변함없이 사랑한다. 그리움에 사무쳐 하는 산 자들을 언제나 지극한 애정으로 보살피고, 종종 다시 찾아와 위로해 준다.
밤과 낮은 함께 살 수 없다. 떠오르는 아침 해에 산자락을 휘감고 있던 안개가 달아나듯, 우리 홍인들은 백인들이 다가오면 언제나 뒤로 물러서왔다.
하지만 당신들의 제안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부족원들이 그 제안을 받아들여 당신들이 제공하는 보호구역으로 이주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백인 대추장의 말이 짙은 어둠 속에서 우리 부족에게 들려주는 대자연의 목소리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한밤의 바다에서 육지로 밀려오는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안개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짙은 어둠이 우리를 에워오고 있다.
우리가 어디서 여생을 보낼 것인지는 별로 중요 하지 않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는다. 인디언들의 밤은 칠흑같이 어두울 것이다. 지평선 위에는 단 하나의 별빛도 보이지 않는다. 슬픈 바람 소리만이 멀리서 흐느껴 운다.
홍인이 가는 길 위에는 암울한 형벌이 도사리고 있다. 사냥꾼의 발소리를 듣고 있는 상처 입은 암사슴마냥, 어디를 가든 무자비한 파괴자가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달이 몇 번 찼다가 기울고 몇 번인가의 겨울을 보내고 나면, 한때는 이 광대한 땅을 가득 메운 강력한 주인이었건만 이제는 작은 무리로 흩어져 광야를 떠돌고 있는 위대한 부족은 아무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한때 당신들만큼이나 강하고 희망에 넘쳤던 우리 부족의 무덤 앞에서 울어줄 사람 하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왜 우리가 푸념이나 하고 있어야 하는가? 내가 우리 부족의 운명을 슬퍼해야 하는가? 부족이란 그저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이 모여 형성된 것일 뿐, 더 특별할 것도 없는 것이거늘. 사람은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가 간다. 눈물도, 기도도, 만가(輓歌)도, 사람도 우리의 그리운 시야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친구 사이에서 그러하듯 자신들의 신과 함께 걷고 대화를 나누는 백인들조차도 이 공통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형제일지 모른다.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당신들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 보겠다. 결정이 나면 알려주겠다. 하지만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더라도, 여기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하고 싶은 첫번째 조건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우리 조상과 친구틀의 무덤을 자유로이 방문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 땅의 구석구석 모두가 다 성스럽다. 언덕, 계곡, 벌판, 숲 모두 우리 부족의 아련한 추억이나 슬픈 경험이 깃든 성스러운 곳이다.
태양볕에 시달리며 고요한 해변가에 말 없이 누워있는 듯이 보이는 장엄한 바위조차도 우리 부족의 운명과 관련된 과거의 사건을 떠올리며 전율하고 있다. 당신들 발 아래의 흙도 당신들보다는 우리의 발소리에 더욱 정답게 응답한다. 그 흙은 다름아닌 우리 조상들의 유골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맨발 또한 대지의 다정한 어루만짐을 느낄 수 있으니, 우리 형제들의 삶이 그 속에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살면서 큰 기쁨을 누렸지만 이제는 이름조차 잊혀진 세상을 뜬 용사들과 다정한 어머니들, 생기 발랄한 처녀들, 그리고 어린 아이들 모두 이 땅을 여전히 사랑한다. 그래서 황혼 녘이 되면 그들의 숨은 안식처는 어렴풋한 모습의 정령들이 출현하면서 짙은 그림자에 드리워진다.
마지막 홍인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에 대한 기억이 백인들 사이에 신화가 될 때도, 이곳 바닷가는 우리 부족의 보이지 않는 영혼들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의 아이들의 아이들이 들판이나 상점, 찻길 또는 고요한 숲속에서 혼자라고 생각할 때도, 그들은 혼자가 아닐 것이다. 이 세상 어느 곳도 고독을 위한 곳은 없다. 밤이 되어 당신네 도시와 마을 거리에 정적이 내려앉고 모든 인적이 끊긴 것으로 생각될 때도, 한때 이곳에 살았고 아름다운 이 땅을 여전히 사랑하는 영혼들이 모여들 것이다. 백인들만 있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 부족을 공정하고 친절히 대해 주기 바란다. 죽은 사람이라고 해서 완전히 무력한 것만은 아니니.
- 시애틀 추장, <어떻게 공기를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이상 옮김, 가갸날, 2015), pp.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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