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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 2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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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 고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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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으로 가서 / 고은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 온 울음이었다
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
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
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
아니 이런 추운 곳의 적막으로 태어나는 눈엽이나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었다
너무나 교조적인 삶이었으므로 미풍에 대해서도 사나웠으므로
얼마 만이냐 이런 곳이야말로 우리에게 십여 년 만에 강렬한 곳이다
강렬한 이 경건성! 이것은 나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말하는 것을 내 벅찬 가슴은 벌써 알고 있다
사람들도 자기가 모든 낱낱 중의 하나임을 깨달을 때가 온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늙어버렸다 여기 와서 나는 또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자작나무의 천부적인 겨울과 함께
깨물어 먹고 싶은 어여쁨에 들떠 누구네의 어린 외동딸로 자라난다
나는 광혜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등지고 삭풍의 칠현산 험한 길로 서슴없이 지향한다
화살 / 고은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몇 십 년 동안 가진 것,
몇 십 년 동안 누린 것,
몇 십 년 동안 쌓은 것,
행복이라던가
뭣이라던가
그런 것 다 넝마로 버리고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이 소리친다.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단 한 번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정의의 병사여 영령이여!
나들잇길 / 고은
옆대기 만곤이 수곤이 형제와
전 이장 홍구씨와
너나들이 복술이
이렇게 허물없이 너댓이서
걸어둔 잠바 입고
평택 제일예식장에 갔다
이 얼마 만이냐
오래간만 대처에 갔다
담배도 누런 청자로다 한갑 샀다
공도면 사는 김주식의 아들 결혼식이
거기서 딴따라라 딴따라라 하며 열렸다
신부는 양성이씨 종산 근처
군계고개 가겟집 딸이라는데
화장 한번 진하여 미운지 고운지 몰라보아도
턱이 두툼해서 성깔은 잠들었겠다
우리는 부좃돈 천원 또는 이천원 내고
신랑측 손님 대접하는 일미식당으로 갔다
거기서 육개장백반에 소주잔깨나 주거니받거니
술 인심 하나 붙잡고 이 세상 사는 것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콧마루가 맹맹히 취하기 시작했다
주식이 자네 며느리 잘 보았네 암 잘 보았네
서로 잡는 손 나무등걸 같으나
우리들의 반가운 웃음에 이빨이 쪼르르 빛났다
거기서 이만저만 나와서
우리는 한푼씩 내기로 이차를 제의했다
큰거리 막걸리집에 들어가 당당해졌다
천장에는 파리떼 옴짝달짝하지 않고 붙어 있고
형광등에는 파리똥깨나 뿌려져 있다
그 밑에서 우리는 새 세상으로 둘러앉아
꽤나 독해진 막걸리 대여섯 병을 마셨다
어이 주모에게 농담을 걸어도
째진 눈매 하구선 대꾸도 없어 싱거웠다
우리는 어디메 쓰다 달다 하지 않고
거기서도 표표히 나와
바람 부는 거리의 먼지에도 끄떡없었다
안성 가는 일반버스에 어서어서 타고
꾀벽쟁이 동무 창수를 만나보러
만정릴 지나 문터에서 내렸다
그는 부쩍 야위고 수염발 희끗거렸다
농약에 중독된 이래
이날 저날 시름으로 앓고 있었다
창수 자네 어서 일어나세
일어나 술 한잔 하세
어쩌고 저쩌고 병문안했으나
한참 있다가 나와버렸다
야쿠르트라도 드시구 가셔요 하고
창수 마누라가
학교 앞 가게로 가려는 것을 말렸다
거기서 나와
우리는 술이 깨이면서 서로 두리번거렸다
이 세상이 천년이나 사는 곳이 아니라
우리들 하나하나 떠나야 할 세상이었다
그러나 복술이도 나도
여기서 상여 타기 전에는 어디로 가지 않는다
나그네는 칠성판 나그네로 그 한번으로 족하니
우리에게는 땅 부쳐먹는 일밖에는
배우 도둑질 하나 없는
늙은 황소 주암옹두리 아닌가
휘적휘적 고개를 넘자
우리 동네 뒷동산 리기다소나무들이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알아보고 바람을 쓸어내고 있다
*만인보의 전조로 서민의 정서와 80년대 초반 시대상을 능수능란하게 표현하고 있다
두 아낙 / 고은
추운 안성장날
먼지 날리는 날
동쪽 삼죽으로 시집간 사람하고
대덕 내리로 시집간 사람하고
딱 만났다
얼라 이게 누구! 봉순이 아녀!
아니 정림이 아녀!
이 얼마 만이냐
시집가서
친정 이름 다 없어지고
아무개 마누라 아니면
어느새
홍섭이 어머니
관호 인호 쌍둥이 어머니
그런 마누라로
그런 어머니로
언제 한나절 놀아본 적 없이 살아왔다
그러다가 안성장날 나와
친정동네 처녀 때 동무 만나
옛 이름 불쑥 튀어나왔다
제 이름 찾았다
봉순이!
정림이!
아 달 밝은 밤
그토록 밤새우고 싶었던
봉순아 정림아 그 이름 찾았다
늙은 아낙네 어디 하나 옛날 없이!
*사투리 사용으로 정감이 있고 재미 있는 시, 형상이 살아있는 시다. 여자는 자기 이름이 없는 가부장적 문화와 봉건적 현실을 질타한다.
아버지 / 고은
아이들 입에 밥 들어가는 것 극락이구나
* 유럽에서 고은 선시집이 많이 팔렸음. 시집을 낼려면 짧은 시도 넣어야 한다
선술집 / 고은
해 지고 나서
하나 둘 들어서는 집
선술집
처마끝 등불에 끼는 밤물컷들
*일반어보다 구체어를 사용하여 실감을 살리고 있다. 밤물컷은 하루살이
내장산 / 고은
병든 아우야 내년의 단풍 보고 죽어라
지나가며 / 고은
절하고 싶다 저녁연기 자욱한 먼 마을
그 꽃 / 고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할아버지 / 고은
아무리 인사불성으로 취해서도
입 안의 혓바닥하고
베등거리 등때기에 꽂은 곰방대는
용케 떨어뜨리지 않는 사람
어쩌다가 막걸리 한 말이면 큰 권세이므로
논두렁에 뻗어 곯아떨어지거든
아들 셋이 쪼르르 효자로 달려가
영차 영차 떠메어 와야 하는 사람
집에 와 또 마셔야지 삭은 울바자 쓰러뜨리며
동네방네 대고 헛군데 대고
엊그제 벼락 떨어진 건넛마을
시뻘건 황토밭에 대고
이년아 이년아 외치다 잠드는 사람
그러나 술 깨이면 숫제 맹물하고 형제 아닌 적 없이
처마 끝 썩은 낙수물 떨어지는데
오래 야단받이로 팔짱끼고 서 있는 사람 고한길
그러다가도 크게 깨달았는지
악아 알본은 우리나라가 아니란다
옛날 충무공이 일본놈들 혼내줬단다 기 죽지 말어라
집안 식구 서너 끼니 어질어질 굶주리면
부엌짝 군불 떼어 굴뚝에 연기 낸다
남이 보기에 죽사발이라도 끓여먹는구나 속여야 하므로
맹물 끓이자면 솔가지 때니 연기 한번 죽어라고 자욱하다
삼 년 원수도 술 주면 좋고 그런 술로 하늘과 논 삼아
8월 땡볕에 기운찬 들 바라본다
거기에는 남의 논으로 가득하다 작년 도깨비불로 떠오른다
이 세상 와서 생긴 이름 있으나마나
죽어서도 이름 석 자 새길 돌 하나 없이
오로지 제사 때 지방에는 학생부군이면 된다
실컷 배웠으므로
실컷 배웠으므로
* 표현의 재미, 구어체와 문어체의 교차, 인물 묘사가 선명하다
머슴 대길이 / 고은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그야말로 도야지 멱 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
밥때 늦어도 투덜 댈 줄 통 모르고
이른 아침 동네길 이슬도 털고 잘도 치워 훤히 가리마 났지요
그러나 낮보다 어둠에 빛나는 먹눈이었지요.
머슴방 등잔불 아래
나는 대길이 아저씨한테 가갸거겨 배웠지요.
그리하여 장화홍련전울 주룩주룩 비 오듯 읽었지요.
어린아이 세상에 눈떴지요.
일제 36년 지난간 뒤 가갸거겨 아는 놈은 나밖에 없었지요
대길이 아저씨더러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요.
살구꽃 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흩적삼 큰아기 따위에는 눈요기도 안 하고
지게 작대기 뉘어 놓고 먼 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나도 따라 바라보았지요.
우르르르 달려가는 바다 울음소리 들었지요.
찬 겨울 눈 더미 가운데서도
덜렁 겨드랑이 바람 잘도 드나들었지요
그가 말했지요.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대길이 아저씨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저서 밤새우는 불빛이었지요
감상
이 시는 화자의 어린 시절 장신적 스승이었던 대길이 라는 머슴의 삶을 통해서 건강한 민중의 생명력과 공동체적 삶의 소중함을 드러내고 있다.
대바구니 장수 / 고은
또 대길이 머슴방에는 등짐장수도 오지
아랫녘 대바구니 대소쿠리 겹겹이 매어 지고
멀리멀리 두만강 상상봉까지 서수라까지
하도 추워서 가다가 얼어붙고 가다가 얼어붙고 해서
봄이 와야 발바닥이 떨어진다는 그곳까지
내 나라 실컷 떠도는 등짐장수도 오지
그가 그만 장삿길에 대바구니 값이 없애고
딱한 처지가 되자
선뜻 대길이는 새경 밑천 뚝 떼어서 돈을 꾸어주었지
내년 이맘 때 갚으러 오시오
등짐장수 신바람 날리며 떠난 이래
한 해 두 해 되어도 감감 무소식이라
거 봐
거 봐
사람마다 대길이 돈 떼었다고 떠들어도
정작 대길이야 아무 내색도 없이
높이높이 가는새끼 꼬아올리지
그런 뒤 한 해포 지난 어느 초겨울
돈 꾸어간 대나무 장수 드디어 나타났지
허어 술 한 병하고 마른 가오리 한 죽도 사왔지
3년 전의 빚과 거기에 더 얹은 얼마 내놓으며
돌도 돌다가 이제야 왔네 미안스럽네
대길이도 대꾸 한마디
그동안 고생 많았지요?
한잔 먹세
그럽시다
복길이 얼씨구 좋아 한잔 얻어먹고 또 군침 돌지
암 그래야지 그래야지
*'또'로 시작하는 거침없는 시. 구어와 문어를 자연스럽게 섞어 표현. 말하듯이 자연스럽게 선명하게 썼다. 무당끼 광끼에 빙의되어서 거침없이 썼다. 툭 트인 경지를 보여주며 이야기 맛을 살렸다. 거대담론을 묘사하던 시기를 탈피하여 현실에 발딛은 민중 하나하나늘 묘사하며 자유로워졌다. 밑바닥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다
애꾸 양반 / 고은
옥정골 홀아비 애꾸 양반
발채 넘실넘실
고구마 넌출 한 짐 지고 가는데
쌀잠자리도 따라가는데
장난꾸러기 다목이 따라가다가
그만 고구마 줄기 하나 냉큼 잡아채어
지게째 넘어뜨리고 달아나버렸다
얼라 죽었나?
한참 있다가 애구 양반 넌출 걷고 일어나서
한마디
젠장 대낮에도 도깨비 양반 장난이구만 그려
대기 왕고모 / 고은
들길로 시오리 길 대기 마을에서
왕고모 올 때는 길 가득합니다
그 왕고모가 할머니 죽은 날
오자마자 큰 몸뚱이 들썩이며 울부짖었습니다.
땅도 치고 허벅 치고 울부짖더니
성님 이게 웬일이여
나하고 회현장에서 만나
국수가 오래 불어터져서 우동된 놈 사먹고
또 언젠가는 막걸리 한 사발에
국 뜨거운 국말이 밥도 사먹던 일 엊그제 같은데
하마 5년 6년 썸뻑 지나갔구려
작년 가을 왔을 때
성님 하는 말이 몇 달만 있으면
이놈의 병 썩 물러가서
내 사대삭신 훨훨 날아다닐 것이라고 하더니
어디로 날아가셨소그려 아이고 성님 아이고 성님
인제 가면 언제 오려오
개똥밭 쇠똥밭에 살아도 이 세상이 좋은데
성님 저승 가서
그 큰 저승 가서
어느 회상에 찡겨 사시려오
아이고 대고 아이고 아이고
이렇게 사설깨나 늘어놓으며 애통해 하다가
저기에 송말에서 시집 온 재종동생의 댁 보고는
이제까지의 청승 다 어디갔나 싶게
아이고 송말사람
자네 얼굴 한번 환하네 그려
애들 잘 크지
논 한 배미 또 사들였다며
그 우물 새로 앉히고 자네 운이 돌아왔네 그려
슬픔이란 것이 하나도 슬픈 것이 아니라
다음 고개 넘어가면
안 보이는 골짜기 개울 아닌가 한 판 판소리 아닌가
참 초상집 이런 아낙 들어서야 그나마
술맛 있고 사잣밥 밥맛 있지
안 그런가.
- 1986년 시집 <만인보> (창작과 비평사)
아버지 / 고은
강 건너 내포 일대
대천장 예산장 서산장
아무리 고달픈 길 걸어도
아버지는 사뭇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비 오면 두 손으로 비 받으며
아이고 아이고 반가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간명하게 이미지만 제시해서 아버지가 농민이었다는 것을 실감나게 묘사
관묵이 아저씨 / 고은
관묵이 아저씨네는
방앗간에다가
산지사방 장리쌀에다가
꿩 먹고 알 먹는 알부자지요
그런데 인색키가 이마빼기 찔러도 물 한 방울 없지요
오랜만에 나들이랍시고 나설 때도
농 속 좀약 냄새 좋은 옷 두고
거지 거지 상거지 누더기로
가진 돈이래야
딱 5전 7전 가지고 나서지요
십리길 항구의 으리으리한 이층집 거리 지나서
오정 때가 지나도
밥 사먹을 줄 모르고
볼일만 후딱 보고
빈 배 곯아 돌아오지요
오다가 남의 집 뽕나무 오디 따 먹고
그것으로 실컷 요기하고 오지요
일제 말 놋그릇 다 내놔야 할 때
그 집에서 산더미 놋그릇 나왔지요 다 빼앗겼지요
방죽말 도선이는 뱀 잡아 껍질 훑어내어
그 자리서 소금 뿌려
아작아작 잘도 먹지요
우리는 그가 징그러워 달아나지요
땅꾼 도선이 가는 데마다
살모사든 늘메기든 뭐든
그를 보면 꼼짝달싹 못하고 굳어져서 잡히지요
우리는 꿈에 볼까 달아나지요
그러나 그는 마음씨 하나 하늘이라
남의 집 초상 나면 궂은 일 다 하고
히일 하고 울어주기도 하지요 삼우제날도 울어주지요
그 주제에 마음 하나 약해서
*몇 개의 에피소드로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말의 재기를 보여줌
진달래 / 고은
할미산에 진달래 활활 타올랐으나
그건 내가 다섯 살 때였습니다
그 뒤로 몇해 지나는 동안
진달래 뿌리까지 다 캐어다가
겨울 방고래 데워야 하는 신세였으니
딱한 세월이여
봄이 와도 피어날 진달래 없었습니다
사람 가난이
어찌 할미산 뒷동산 가난 아니겠습니까
어쩌다가 한두 뿌리 남아서
그것이라도 진달래라고 피어나서
우리 마을 긴 붂은 댕기 딴 양금이
그 진달래한테 가서
그 둘레 돌멩이 주워다 울타리 치고 나서
한동안 집도 일도 다 잊고 거기 앉아 있다가
오마나! 여태 내가 여기 있었네 어쩌나 어쩌나
*구어로 절묘하게 맛갈스런 시를 창작
큰집 고모 / 고은
우리 집안 아낙네와 가시내들과
가운데오촌네 집 뒷방에 모였다
가마니틀 아래
큰집 고모 오복녀 데려다가
모시개떡 해서 나눠 먹었다
간도가 어디인가
간도로 가는 오복녀
모시떡은 고사하고 언제까지나 울음바다 이루어서
집안 가시내들도 울음바다 이루어서
동네가 떠나가는데
누가 나서서 말리지도 못했다
간도가 어디인가
그렇게 울고 나서
다음날 새벽 보따리 하나 들고
큰집 막내오촌 따라 간도로 가버린 뒤
거기는 오줌 싸면
오줌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얼어서
활이 되어 걸리는 추운 곳이라지
거기 가서 어찌 사나
그 어여쁜 오복녀 고모
웃으면 오목하니 볼우물 쌍으로 열리는 고모
자주고름 접은 가슴 오복녀 고모
이 땅에서 가지고 갈 것이 무엇이랴
가장 많은 눈물 가지고 간 고모
코피 / 고은
방죽골 달석이와 나는 아삼륙이었지 단짝이었지
달석이하고 짚 벼눌 밑에 있으면
소한 대한도 눈 깜짝할 사이 가버리지
재 소쿠리 세워놓고
그 아래 나락 뿌려
재 소쿠리 받친 막대에 매단 끈 잡아다리면
참새 한 마리 잘도 잡는 달성이하고 함께 있으면
그런 날이 아니어도
그애와 나는 배추 꼬랑이 찐 것 먹으며
코피 줄줄 흘리며
동고티 묫등에 왔을 때
나도 피 흘려야 했으므로
나도 내 코 때려 한 번에 안 되어
세번 네번 때려 코피 흘려서
피범벅된 얼굴로 서로 웃었지
야 나는 너하고 살고 싶다 도망가자
어디로?
옥산면으로 회현면으로 도망가자
*디테일 2-3개로 시를 씀. 바로 옆동네로 도망가자는 제안이 웃음의 포인트
필례 / 고은
동코티 멍석 많은 집 필묵이네 집
걸핏하면 필묵이 누나 필례 매맞는다
다 큰 딸 때리는 죄 살인죄 다음인데
필례 아버지
그런 것 알 까닭이 없다
똘에서 가물치 잡아 숫제 고추장도 없이
그냥 뼈 발라 먹는 사람이다
그런 아버지도 아버지거니와
아무리 매 맞아도
입 옹다물고
아프다 소리 하나 없는 필례도
단 한번 빌지 않는 필례도 모지락스럽기 여간 아니다
헌 멍석 빌리러 갔다가 듣건데
피례 아버지 매질에 거품 물고 욕사발 퍼붓기를
아 천하에 독살스러운 년
시집 가서 친정부모 죽어도 울지 않을 년
오사할 년 어서 내 앞에서 칵 뒈져버려라 칵
*필례 아버지와 필례의 디테일이 살아 있는 시. 민중들의 애환이 가득한 시. 획기적인 이야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