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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친타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여러분 편안하셨습니까?
여기 힐링 피스 가든, 제가 살고 있는 이곳도 아주 평화롭습니다.
저절로 기도하고 싶은 아름다운 장소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많은 교우분이 찾아오시어 기도하고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강복을 드리지요.
물론 그분들은 저와 얼굴을 맞대고 인사하고 싶으시겠지만, 제가 모두를 맞이하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냥 유리창 안에서 밖을 보면서 강복해 드립니다.
제 차는 차고에 있어, 차가 없다고 제가 밖에 나간 것도 아니고 또 집에 있는 것도 아니겠죠.
제가 없을 때 다녀가신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저는 나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오시는 분 대부분을 안에서 보며, 그분들 기도에 제 축복을 더 해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구약 성경에는 처음에 모세 5경. 그다음에 역사서가 나오죠.
지난 시간까지 역사서에서 제일 중요한 판관기와 룻기를 보았죠.
그 후에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에즈라기, 느헤미야기, 토빗기, 유딧기, 에스테르기, 마카베오기 등이 있지만
일단 건너뛰겠습니다.
그야말로 역사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시서와 지혜서 안에 있는 그 첫 번째, 욥기입니다.
욥기가 42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도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욥기를 무수히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욥에게 닥친 재난을 보고 위로하러 왔던 친구들은 그냥 위로로 끝나버리고,
또 욥이 당하는 고통에 뭔가 원인이 있지는 않나 자꾸 캐려고 하고, 아주 짜증 납니다.
몸도 아파 죽겠는데 친구들이 ‘너 죄지은 거 있으면 고백해 봐. 죄가 있으니 그렇게 엄청난 일을 당하는 거 아니니’
하면서 위로하러 온 건지 아니면 심판을 하러 온 건지.
아무튼 욥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참 고난이 많죠.
고난이 또 한 번 오면, 발뒤꿈치를 연달아 물고 늘어지면서 올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정말 예상치 않았던 고난이 올 때도 많습니다.
언제였던가요?
집으로 갑자기 덤프차가 밀고 들어와 밥 먹던 가족 중 2명은 중상을 입고 1명은 그 자리에서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집에 있던 사람들에게 아무런 죄도 없었습니다.
덤프차에 치여 죽을 만한 죄를 지은 분들이 아니었죠.
이러한 재해를 받는 사람들이 주변에 참 많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고난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고 한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겁니다.
이러한 고난 때문에 나오는 탄식이, 절규가, 또 울부짖음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에 그 정직한 사람이, 그 친절한 사람이, 그렇게 착한 사람이 등등 엄청난 일을 당했네’ 하며,
우리 주변에서 그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남의 일이지만 분노와 동정을 느낀 적이 있으실 겁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사제 성소를 받을 때도 아주 특이하게 받았고요.
신학교 들어가서 허리디스크 때문에 사제 서품 4시간을 남겨놓고 보류되는 아픔도 겪었죠.
또 사제가 돼서 참 산전수전 다 겪고 살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펴봤던 책이 바로 욥기입니다.
참 많이 읽어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경은 고난 중에 있는 자에게 희망과 새 힘을 부어주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욥기는 인생의 고난에 대하여 정말 큰 힘을 가져다주는 책이 분명합니다.
42장이라는 짧지않은 욥기는 욥 친구들 질문과 욥의 답변, 또 욥의 기도 등으로 이뤄집니다.
팔레스타인의 동방 우츠라는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성서에는 욥을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면서 악에서 멀리 있는 자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면서 악에서 멀리 있는 자’
우리들이 다 그렇게 살지 않고 있죠.
우리 인간이 온전하고 정직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요?
마음이 악에서 떠났고, 또 하느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아마도 대부분은 온전하지도 못하고 악에서부터 자유롭지도 못하지요.
그리고 하느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서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보다는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훨씬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다고 인정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욥은 정말로 정직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100% 맞습니다.
욥에게는 10남매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일곱 아들과 세 딸이었죠.
욥은 이 자녀들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번제물을 드립니다.
아들딸들이 죄를 범해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아들딸들이 죄를 범해서 마음속으로 하느님을 배반하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아들딸이 정말 죄를 지어서 아들딸들을 대신해서 바치는 번제물이라기보다는,
‘자식이 많으니, 자식들 가운데 생각이나 마음속으로 하느님께 죄를 짓고 사는 자식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내가 모르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 의미에 있어 철저하게 욥은 자식들을 대신해 일주일에 한 번씩 번제물을 드렸던 겁니다.
욥의 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진정 아름답습니다.
바로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이죠.
하느님을 심판자로 생각한다거나, 내 자식들의 죄가 있는지 하나하나 챙겨서 기록 해두는 그런 좀스러운 하느님이기 때문에
무서워했다는 것이 아니죠.
하느님의 크고 높으심 때문에 거룩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이 바로 욥이었던 겁니다.
욥은 인간으로서 정직한 사람이었고, 또한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이런 얘기를 하죠.
‘윤리적으로 건전하고 깨끗하게만 살면 됐지, 하느님을 굳이 믿어야 하느냐? 하느님은 마음이 약한 인간이 만들어 낸 허상이다.
사람이 정의롭게 살고 옳게 살면 인간이 만들어 낸 하느님은 결코 필요 없다.’
이런 그릇된 생각을 갖기가 쉽습니다.
그렇지만 욥은 정반대로 늘 겸손했습니다. 늘 정직했습니다.
욥은 10남매 외에 많은 재산이 있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재산인 양, 나귀, 낙타 합쳐서 1만 1천 두를 몽땅 빼앗기고 많은 종도 죽임당합니다.
그러나 그 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10남매가 태풍으로 죽었다고 하는 흉보가 전해집니다.
‘청천벽력’이라는 말은 이 욥에게 해당하는 말이었을 겁니다.
그야말로 참사가 일어난 것이었죠.
만일 우리도 자식 전부와 재산을 일순간에 잃어버린다면 어떤 행동이 나올까요?
‘하느님이 어디 있냐? 부처님이 어디 있느냐?’ 하며 세상을 저주하고 한탄하고 또 광란을 일으킬 겁니다.
자기 자신을 주체 못 하겠죠, 그 분노 때문에, 그 슬픔 때문에.
자식 하나가 죽었다고 해도, 그 탄식을 누구도 위로할 수 없을 겁니다.
하물며 전 재산과 10남매 자식의 목숨을 삽시간에 잃은 욥의 비탄은 상상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욥은 한탄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결코 하느님을 저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땅에 끓어 엎드려 하느님께 기도하며 말했죠.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여 죄를 짓지 않았고 하느님을 비난하지도 않았다고 1장 20절 이하에 나옵니다.
맨 처음 욥기를 읽으면서 이 대목을 읽었을 때 저는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 받았던 놀라움에 대한 기억이 지금도 있습니다.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신다.’
하느님이 하시는, 즉 주시든 다시 거두시든, 모든 일은 옳다고 욥은 얘기하는 겁니다.
자식 열을 잃고, 재산을 잃고, 종들을 잃은 그 처지에서 광란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으며 어떻게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이게 바로 신앙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궁극적인 모습입니다.
욥의 이 신앙 고백을 듣고 ‘맞다. 어차피 하느님을 믿으려면 이렇게 철저하게 신앙을 가져야만 한다.
이게 바로 참다운 믿는 자의 모습이다.’라고 생각하며 감동했던 것 같습니다.
‘진정 모든 것을 하느님이 주신다고 생각하면 모두 선한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은 절대 악한 짓을 우리에게 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설령 그것이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훌륭한 것이라는 겁니다.
신앙이란 믿는 것이죠.
저는 어릴 때부터 제 성격을 보면 굉장히 논리적이고 조금은 이성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한평생 저는 제 성격과 싸우면서 그것을 이기려고 애를 썼죠.
하느님을 체험하는데 이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것이 큰 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단순한 신앙으로 어린아이 같은 신앙으로 주님을 정말 알고 싶었습니다.
신학생 때부터 내가 가지고 있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지극히 합리적인 성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무던히도 애쓰고 싸웠던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욥의 재난은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정수리에서부터 발바닥까지 욕창으로 괴로움을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픔과 가려움으로 인해 잿더미에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어댔습니다.
몸은 무참하게 부어서 터지고 도저히 욥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욥의 외모는 변해갔습니다.
그래도 욥은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욥의 아내에게는 못마땅했죠.
그래서 뭐라고 그럽니까? 하느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윽박지릅니다.
사랑하는 10남매가 죽은 데다 전 재산을 잃고, 지금 또 문둥병에 걸려 사랑하는 아내 말에 콱 찔림을 받습니다.
이때 욥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우리가 하느님께 복을 받았으면 재앙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지각색의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느님께 기도하고 구합니다.
성서에도 모든 것을 하느님께 구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종종 우리들이 구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일방적인 소원만으로 그치기 쉽습니다.
우리가 병의 치유, 가계 번창, 가족의 안전만을 원하고 하느님의 뜻은 물리친다면 그것은 참다운 구함이 아닐 겁니다.
제가 늘 피정 때나 기도에 관한 강론할 때 이야기했습니다.
‘기도에 수많은 단추가 있다. 그렇지만 세상만사 첫 단추가 제일 중요한데 기도의 첫 단추는 뭐냐? 하느님과 흥정하지 마라.’
하느님은 여러분의 자판기가 아닙니다.
‘신부님, 구하라고 그랬습니다. 청하라고 그랬습니다. 두드리라고 그랬습니다.’ 하실 수 있죠.
물론 구하시고요. 두드리시고요. 청하십시오.
그렇지만 맨 마지막에 어떤 기도로 끝을 맺어야 한다고 그랬죠?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당신 뜻대로 하소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인성과 싸웁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끔찍한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고 싶었던 겁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모세 혈관이 터져서 나오는 혈한증으로 온 얼굴에 피땀이 흐릅니다.
그러면서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얘기하죠.
그것이 예수님의 솔직한 인성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즉시 그 인성의 기도를 누르는 신성의 기도를 하시지요.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바로 이 기도가 신성이 인성을 누르는 기도요. 겸손히 교만을 이기는 기도예요.
이것이 바로 사랑의 기도입니다.
모든 것을 청하시되, 반드시 기도 끝은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그러나 항상 우리들의 기도 끝은 어떻게 끝납니까?
‘하느님 뜻대로 하지 마시고 내 뜻대로 하이소.’
거의 협박이나 다름없습니다.
평상시 고난이 없을 때 고통이 없을 때 하느님에게 봉헌한 것도 없고 희생한 것도 별로 없고 하느님 대전에 올라간 것도
별로 없는데, 힘들고 어려울 때는 마치 맡겨놓은 것 많은 것처럼 하느님께 달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분명히 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원하시는 때,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실 겁니다.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내 손바닥에 이렇게 딱, 그 원함을 이루어 주십시오’라는
이기적인 기도, 기복적인 기도가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의 기도는 욥의 기도처럼 ‘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당신 뜻대로 하소서. 주신 것도 그분이요. 걷어가신 것도 그분 아닙니까?’라는
온전한 포기의 기도, 순명의 기도가 우리 입에서 나와야 할 겁니다.
여러분들 구하지 말라는 것 아니라고 그랬죠.
아프고 힘들고 외로울 때 하느님께 매달리십시오.
그러나 항상 기도 끝에는 ‘그러나 주님 제 뜻대로 마시고 주님 뜻대로 하소서.
내가 원하는 때 이루어지지 않아도 아직 주님이 생각하는 그때가 아닌 것으로 알고 더 기다리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겸손의 기도를 우리는 욥처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느님 앞에 손을 모으려면 좀 더 겸손하고 나를 감추고 맑고 깨끗해야만 합니다.
‘나에게 축복은 필요하고 화는 필요 없다. 그냥 복만 주시오. 십자가는 나한테 주실 생각하지 마세요. 나는 견딜 힘도 없습니다.
그냥 축복만 주면 되지 왜 십자가는 저한테 주려고 그럽니까? 저는 복만 받고 화는 필요 없습니다.’
아마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뿌리 깊은 본심이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이런 심리를 바로 잡아 균형 있는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온전한 신뢰할 때, 나에게 오는 재난, 고통조차도 마음 깊이 조용히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욥기 1강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시고
특별히 욥처럼 고통 중에 있는 분들에게 치유의 은혜와 분별의 마음, 담대한 믿음을 허락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첫댓글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