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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형씨 충신.열녀 배출한 명문대가 (네이버 지식in 에서 펌)
진주형씨(晉州邢氏)의 본관은 진주. 풍기 등으로 문헌에 나타나 있으나 진주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형씨는 1930년 국세조사 때 성씨 인구 순위 119위 해당되며 희성에 속한다. 전고 대방(典故大方)에 보면 형씨는 주공(周公)의 아들로 태어나 형후(邢候)로 반성:(지금의 진주의 고호)에 정착하여 시조는 미고(未考) 형순(邢順)은 고려조 때 사람으로 예빈경 벼슬을 지냈다. 진주형씨 미고 형사보(邢士保)는 조선조 중종 17년(152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 벼슬을 지내고 선조 12년(1579년)에 현양으로 천거되었다. 형씨세보의 기록에 의하면 시조는 형 옹(邢옹)이다. 그는 중국 당나라 사람으로 고구려 영류왕의 요청에 따라 서기 634년 8학사의 한분으로 동래, 우리나라에 왔다는 것으로 문헌에 있을 뿐이며 형 옹은 고구려에서 학문으로 크게 기여해 삼한벽상공신에 녹훈됐고, 삼중대광보국 벼슬에 이르렀으며 남양을 식읍으로 하사 받았다. 그런데 13명(代)의 인물은 확인 됐으나 소목을 알 수가 없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 때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재상급에 해당하는 벼슬) 대광보국(大匡輔國)의 벼슬을 지낸 형 방(邢肪)의 호는 의암(義菴)을 중시조로 1세로 하여 시원(始原)을 삼아 계승되고 있다. 경남 진양군 반성현(班城縣)에 정착 중시종인 형 방의 손자 형공미(邢工美) 이부상서(吏部常書)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그는 일본을 정벌할 때 도원수가 돼 일본이 일기도에서 왜군을 격파하는데 크게 공훈을 세워 충선(忠宣)의 시호를 받고 진양군에 봉해진 공미였다. 그의 호는 목정(目亭)이후로 이곳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또 다른 기록에 보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개국당시 인물로 알려지고 있는 형 순(邢順)이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형 순은 고려가 개국할 당시 공신 집안으로 눈부신 활약을 했음이 틀림 없다고 세보에서 밝히고 있다. [고려사]에 보면 형 순(邢順)은 예빈경(禮賓卿)으로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이 나라를 고려에 넘기고 신하가 되던 해인 서기 935년 후당(後唐)에 사신으로 들어가 이같은 사실을 알린 인물이다. 그는 다음해 석경당이 후당을 무너뜨리고 후진(後晋)을 세우자 937년 왕규와 함께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절로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왕건 밑에서 문장(文章)과 지모를 발휘해 밀직사에 추봉되었다.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또 한명이 있는데 형 적(邢積)이라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그는 형씨족보에서 신호위상호군(神號衛上護軍: 憲=奉습大夫禮儀判書)로 기록돼 있는데 고려사는 그가 장수로 활약한 당시의 전황을 설명하고 있다. 태조 11년(928) 고려는 후백제 견훤의 군사와 각처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고려군은 육지에서 우레같이 달리고 번개처럼 쳤으며 수전에서는 범같이 치고 용처럼 날세게 움직여 반드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견훤의 부하 윤변을 해안에서 쫓으니 병갑이 산처럼 쌓이고 추조를 변성에서 사로 잡으니 전사자의 시체가 들을 덮었다고 한다. 충남 연산군(연기)에서 길환을 목베고 마리성변(경남 거창군 마리면)에서 수오를 죽였다. [진주형씨세보]에 의하면 [형 옹]은 당정관(唐貞觀) 8년(593?) [고구려 영유왕](甲年) 때 홍(洪), 위(魏), 형(邢), 방(房), 여(呂), 은(殷), 길(吉), 봉(奉) 8학사의 한분으로 동래에서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보국의 벼슬을 지내고, 그의 아들인형 병(邢昞)은 이부상서, 형 적은 신호상호궁, 형 순은 예빈경밀직사, 형 명(邢明)은 중정대부 전객령(典客令), 형 시(邢時)는 정당문학, 형 연(邢연)은 한림겸 수찬 문하시중 평장사 시호 충장공(忠壯公), 형 홍(邢弘)은 생원 피천불사, 형 온(邢溫)은 문과급제 직문한, 형 항(邢杭)은 종묘 사령, 형 완(邢琓)은 판서 운관사, 형 존(邢存)은 문과급제 판로판서, 형 헌(邢憲)은 봉익대부 예의판서 등 14세 동안의 소목을 상고 할 수 없다. 전술한 내용을 보면 고려이전의 관작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동래이전의 선조인지도 모르고 있어 옛 문헌이 발굴되면 형씨의 상계보는 연구할 과제로 남아 있다. 고려초기부터 중홍을 누렸던 형씨는 조선조 세조 때 이르러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해 풍지박살이 되고 가문이 쇠퇴 해져갔다. 형씨를 중흥시킨 형군소는 정당문학으로 학문이 높아 시문(詩文:東文選)이 전래되고 있다. 그의 손자 형인기(邢仁奇)는 5형제를 두었고, 찬성사 벼슬을 지냈다. 맏아들 형 수(邢수)는 영광군수, 둘째 근(瑾)이 좌승지로 있을 때 수양대군에 의해 단종이 쫓겨나고 충신들은 단종을 복위하려 모의하다가 들통이 나 잡혔다. 이때 장남 수(수)는 대사간에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전남 장흥으로 피신했다가 수원으로 옮겨 대사간파를 이뤘다. 둘째 근(瑾)은 강직했다. 그는 성삼문(成三問) 하위지 등 사육신을 석방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못이루고 함께 순절을 했다. 그래서 이 시기가 진주형씨의 일문에 가장 어려운 수난기 였다. 그리고 셋째 형 박(邢박)은 거창으로, 넷째 균(均)과 다섯째 형 강(邢鋼)은 전주 방면으로 각각 피신하였다. 이들은 자신을 숨기기 위해 처가의 성(姓)을 따르기로 결의하고 발음이 비슷한 현(玄)씨의 성으로 고치기로 해 그때부터 희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족들이 위험한 처지에 놓이자 그의 아들 계선(繼善)은 15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5일장을 치르고 도피해서 지리산 속으로 숨은 곳이 현재의 전북 남원군 사매면 대산부락이다. 그는 겨우 목숨을 부지했으며 이때가 진주형씨의 일문에 있어 가장 어려운 수난기였다. 형대원(邢大元)은 임진왜란 때 반란을 일으킨 인물로 유명하다. 선조 25년(1592) 임란이 일어났다. [왜적]이 한양을 향해 쳐들어 오자 서도로 과천하면서 경상우감사 김수에게 교지를 내려 근왕병(勤王兵)을 모아 급히 오라고 했다. 이에 김수는 전라감사 이광에게 달려가 함께 임금을 호위하기를 청했던 것. 전라군영에 군령이 내려지자 순창 옥과의 군사들이 멀리 가기를 싫어해서 형대원과 조인을 맹주로 추대해 갈지를 검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군사를 돌려 향사당(鄕社堂)을 불태우고 난동을 부렸다. 이에 이광감사는 전라병사 최원을 시켜 토벌해 모두 목을 베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5년 뒤 다시 일어난 정유재란(1597)때 일이다. 남원의 원내촌(院內村)에 형씨들이 살았는데 외적들이 그해 10월 9일 남원에서 구례로 가면서 이곳에 주둔했다. 왜적들은 논에서 벼를 베어 군량미(軍糧米)를 준비하는 것은 물론 주민들을 마구 죽이고 가축들을 노략질해 갔다. 이에 이 마을 선비 형덕흥(邢德興)이 분개해서 인근에 주둔한 의병들에게 청하고 왜군의 진영을 살펴 적세(敵勢)를 파악한 뒤 밤을 이용해 왜병을 무찌른 공적은 [난중잡록]과 [호남지]에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진주형씨는 고려, 조선조 때 130여명이나 6품이상 벼슬을 지내고 효자, 열녀 30여명을 배출한 영, 호남의 명문대가에 버금가는 가풍을 어어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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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문보기 글쓴이: 려슈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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