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환의 음본세*
콩나물 시루와 팔길이 원칙(arm’s lenght principle)
정 두 환(문화유목집단동행 예술감독)
우리네 어릴적엔 집집마다 콩나물 시루 하나쯤은 다들 가지고 있었다. 콩나물 정도는 집에서 대부분 직접 키워 먹곤하였다. 콩나물을 만드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콩나물 시루에 콩을 넣고 매일 물만 주면 끝난다. 매일 물만 주었을 뿐인데 콩은 눈을 띄우고, 뿌리가 나오며 몸통이 자라기 시작한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어느날 빽빽하게 시루에 들어찬 콩나물 모습에 나는 가끔 놀라곤 하였다. 물만 주었을 뿐인데, 그 물이 콩나물 시루 밑둥으로 다빠져 나가는 것을 보았다. 헛수고 처럼 생각하였던 일이었으나 그 헛수고의 결과물인 콩나물은 성장하여 식탁위에 콩나물 무침으로, 때론 김칫국안에 한자리하고 앉아 있기도 하고, 각종 반찬으로 식탁 위에 화려하게 변신하여 나의 식욕을 부추기고 있었다. 가끔 어릴적 일을 생각하며 콩나물 시루의 마법같은 일들에 괜히 기분 좋은 미소를 혼자서 실없이 짓기도 한다. 부엌 한 곳에 조용히 자리하고 앉아 부어주는 물을 다 흘려보내는 것 같지만, 분명 필요한 분량만큼은 착실하게 먹고자라는 콩나물. 어쩌면 콩나물이 진짜로 원했던 것은 주인의 관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 자랄때까지 끊임없이 하루에도 몇번씩 물을 부어주는 관심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햇빛을 차단하여 주어야하기 때문에 천을 꼭 덮어야 한다. 물을 줄때마다 덮었던 천을 펼칠때 얼마나 자랐을까하는 호기심도 한 몫 한다.
문화예술의 지원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팔길이 원칙(arm’s lenght principle)’을 많이 인용한다. 이 팔길이 원칙은, 1945년 영국에서 처음 고안한 개념으로 공공지원 정책 시행의 기준 중 하나이다. ‘팔 길이만큼 거리를 둔다’는 뜻으로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공공에서 지원은 하지만 민간의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보장한다는 취지이다. 지원을 하면 관여하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그러다보면 자율성은 상실하게 되고, 지원하는 기관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되며, 결국 자율성이 상실되면서 문화예술의 생명인 다양성은 사라지게 된다. 문화예술을 꽃피우기 위해 지원하였던 많은 지원자들이 사라지는 상황이니 공염불이 아닌가?! 여기서 콩나물 시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을 모두 흘려보낸 것 처럼 보이지만, 그 흘려보내는 물속에서 필요부분의 영양분을 섭취하며 자란 콩나물 말이다. 아낌없이 부어준 물과 더불어 주인의 관심으로 잘자란 콩나물.
지원을 했으니 당연히 지원 당국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면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지원하는 목적이 지원처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일을 수행하라고 지원하는 꼴이니, 그 취지에 동의하는 단체만 지원해 주면 될 일이다. 하지만, 세상이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세상을 뒤바꾸는 힘이 생겨나고,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일이 터지게 되어있는 것이다. 지원의 목적이 나의 뜻을 따르라가 아닌 것이다. 자신의 걸음으로 걸어가야 하는 예술을 키우기 위함이라는 대명제가 맞다면 ‘팔길이 원칙’은 반듯이 지켜져야 한다. 이는 예술의 창의성과 다양성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공재를 투입하는 것이며, 이는 흘려보내는 지원같지만, 관심과 인내의 시간을 보내다보면 어느 듯 각자의 걸음으로 각자의 예술혼을 불태워 다양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나게 되어있다. 이것이 예술문화의 힘이요, 세상의 이치인 것이다. 이들 예술가들이 원하는 것은 진정성 있는 관심이다. 콩나물 시루에 물 붙듯이 지속적인 지원과 관심.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문화예술을 실행하는 예술가들의 행위이다.
콩나물 시루의 콩은 물을 다 흘려보내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이 필요한 부분을 반듯이 섭취하면서 자신을 키워내는 힘이있다. 문화예술인들도 같은 이치다. 그냥 지원을 하니 우선 받고 보자는 것이 아니라, 받은 만큼 자신의 예술행위에 진심을 담아 노력하여야 한다. 끝임없이 받아먹기만 하고 적당한 결과물을 만든다면 자신의 예술행위는 모조품이며 어쩌면 사기일 뿐이다. 이들이 생산해내는 결과물은 예술도 예술품도 아니다. 오히려 사회를 어지럽히는 행위이므로 퇴출되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지원하는 관의 개입이 있으면 안된다. 문화예술인들 스스로가 자생적으로 가려내야 한다. 오랜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직 이러한 일들에 훈련되지 않았고, 이러한 자생의 노력이 탄력을 받아본 경험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이 변하였다. 큰 틀이 변하고 있으며, 다양한 정보와 세상의 변화가 실시간으로 안방까지 전달되는 정보의 바다에 노출되어 있다. 세상의 시간과 공간의 거리가 점점 좁아지는 현 상황에서 끝까지 자신만의 시계를 주장하는 이들은 스스로 퇴출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지원을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하지만, 관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을 거치지 않으면 문화예술 창달이라는 시대의 화두에 뒤처질 수 밖에 없다.
부산은 정말 살기 좋은 곳이다. 바다와 강 그리고 산이 있는 자연의 혜택을 오롯이 받은 곳이다. 뭍에서 물을 바라보는 삶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이다. 물에서 뭍을 바라보는 경험이 많이 없는 부산 사람들은 바다와 강이 주는 새로운 시선을 별로 경험하지 못하였기에 물에서 바라보는 먼 산능성의 아름다운 곡선과 하늘을 병풍삼아 자신을 은근히 자랑하는 모습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이가 많다. 이런 경험하지 못함이 아름다운 산능성과 숲을 콘크리트 아파트 장벽의 빌딩으로 가로 막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물에서 바라보는 도시가 아니라, 거실에서 물을 바라보는 개인의 전망을 확보하기 위하여 아파트는 산만 막는 것이 아니라, 바다며 강으로 통하는 시선까지 차단한다. 일부의 독점을 위한 아파트니 아파트 값이 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계속 아파트 값이 오르기만 할까? 그럴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끊임없이 산으로 산으로 아파트 빌딩 숲은 올라가고, 바다며 강을 가로막는 힘들은 여전히 득세하고 있다. 새로움을 위한 변화의 바람은 시선을 바꾸는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살기좋은 부산을 더욱 살기 좋은 부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민들과 더불어 부산을 가꾸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늦게가는 것 처럼 보이고, 실적이 없는 것 처럼 보이지만,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있는 힘이 가장 큰 힘이며, 멈출 때 비로소 우리는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장이 열린다. 이 장에선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새로운 토론이 펼쳐진다. 이럴때 필요한 것이 예술이며 열린 장에서 새로운 시선의 예술은 펼쳐질 것이다. 서로를 이해하는 진진함, 생각하고 사유하는 도시 부산이 열리는 새로운 장 말이다.
필자는 부산의 문화예술을 다시금 점검하는 대토론의 공론장이 있으면 좋겠다. 그곳에선 각 개인들의 사심이든 공심이든 무엇이든지 좋으니 사소한 것이라도 이야기를 쏟아내면 좋겠다. 꼭 큰 그림만이 세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기에 개인들의 사소한 생각들이 모일 수 있는 공론의 장. 이러한 장이 곳곳에서 열리다 보면 큰울림으로 퍼지는 공론이 될 것이다. 부산을 대표한다는 새로운 공연장인 부산오페라하우스, 부산콘서트홀이 만들어지고 있다. 어느정도 진행이 되었는지, 잘 되어 가는 것인지, 시민들이 나서서 도와주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부산시민들은 궁금한 것이 너무도 많다. 그냥 기다리고 있으면 잘 지어서 시민들에게 놀라운 일, 기적같은 공연장을 소개 할 것이니 그때 잘 이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더불어 고민하고, 진행하며, 중간 중간에 서로의 소통을 통해 지원 할 것과 도움을 청할 것을 이야기하는 장을 시민들은 원한다. 부산의 문화예술을 품고 있는 기존의 대형공연장을 비롯하여 중소공연장의 보다 폭 넓은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이야기들이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강원도 태백의 황지연못에서 발원한 낙동강 칠백리의 종착지인 부산은 칠백리의 문화예술을 품은 곳이다. 긴 물길의 흐름은 남북으로의 문화예술을 이동시켜주었고, 종착지의 삶과 예술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종으로의 삶의 이동은 낙동강 각 지점에서 횡으로 만나는 각각의 문화예술도 함께 이동된다. 이런 풍성한 문화예술을 부산은 품고 있다. 긴 이야기를 품고 있는 부산, 풀어내야 할 이야기가 오죽 많겠는가! 다양성이 생명인 예술, 각자 서로의 분야를 이해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또는 협업을 통하여 다양하게 부산의 공간을 채워나가는 일이 어찌 쉽기만 할 것인가. 하지만, 예술인들이 꼭 이루어 내야하는 일이기도 하다. 서로를 이해하는 힘이 다양성과 독자성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니 이제 더이상 시간을 지체 할 수 없다. 지금까지 왔으니 조금 더 지체한들 무슨 변수가 있을까 하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기에 지금 이순간의 시간을 더욱 철저하게 잘 쌓지 않으면 지금의 허비된 시간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틀어질 수 있다. 다양한 문화유산을 품은 도시니, 다양하게 풀어낼 것이 그 어느 도시보다 많다.
Busan is Good! 부산이 좋다!
필자는 부산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다. 부산이 좋다. 그래서 부산을 떠나지 않는다. 아니, 떠나지 않았다. 자연이 좋고, 사람이 좋았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문화예술에 삶을 기댄지가 40여년이 되었다. 헤아릴 수 없이 생각하고 생각하였다. 그동안 부산 문화예술을 살리고 싶은 마음에 부산문화지도를 수백장 그려보기도 하였으며, 처음으로 시도한 작업도 많다. 지속적인 방해와 음해 그리고 다양한 도움의 손길들이 있었기에 늘 새롭게 시도할 수 있었다. 부산, 아니 부산의 문화예술의 관련된 분, 부산시민들께 간곡하게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부산은 좋은 곳이다. 이제 부산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생각하는 도시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생각이라는 것은 지속성에서 나온다. 순간적이고 단편성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더 좋은 부산을 만들기 위해 생각하는 도시, 사유하는 도시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는 서로의 생각을 인정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며, 상대를 인정한다는 것은 다양성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는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혼자서 살 수 없는 세상이라면 더불어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도시, 부산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개인의 기득권을 조금 내려 놓고 서로의 생각을 가감없이 들을 수 있는 환경 만들기를 먼저하자. 이를 위해 걷는도시 만들기부터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대중 교통이 발달한 도시, 자가용 운행이 조금 불편한 도시. 그렇지만, 걷기 좋은 도시. 걸으면서 주변을 살피고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의 도시를 만들자. 고령화가 되어가는 도시라 탓을 하지말고, 고령 친화적인 도시면 또 어떤가. 부모님들이 편안하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도시, 서로의 삶을 이야기하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의 도시를 보이면, 젊은이들 또한 자신들의 미래를 바라보며 부산에 정착하고 싶을 것이다. 세상은 생각보다 다양하게 돌아간다. 젊은이가 살고 싶은 도시, 어른들도 살고 싶은 도시가 된다. 결국 모두가 잘 살고 싶은 도시가 건강한 도시인 것이다.
생각의 힘을 키워주는 환경을 만들면 콩나물 시루 안의 콩처럼 물이 다 빠지는 것 처럼 보여도 필요한 영양분은 알아서 취하듯 생각의 힘은 알아서 자랄 것이다. 도시가 안정화되는 것은 결국 사람의 힘이며, 이는 생각의 힘이다. 문화예술의 발전도 생각의 힘에서 시작한다. 지원을 하되 간섭을 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며,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힘이 필요한 시점이다. 부산시와 관계자 그리고 부산시민들의 마음이 모일 수 있는 공론의 장이 자주 열려 서로 바라보는 생각의 차이점을 찾아 접점을 좁혀가는 일을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진행하면 서로를 믿고 신뢰하며 공감할 수 있는 여건이 훨씬 많아 질 것으로 믿는다. 모든 것은 서로의 신뢰에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