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AP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2006년 2월 이탈리아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 축하 공연에서 푸치니 오페라‘투란도트’의 아리아인‘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부르고 있다. 생애 마지막 공연이 된 이 무대에서 그가 립싱크를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해 사망한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2006년 생애 마지막 공연에서 립싱크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파바로티와 수년간 공연을 함께 한 지휘자 레오네 마지에라는 최근 출간한 저서 '가까이에서 바라본 파바로티'에서 이같이 밝혔다고 AP통신이 7일 보도했다. 본지 4월 9일자 보도
논란이 된 파바로티의 마지막 무대는 2006년 2월
이탈리아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 축하 공연이다. 그는 이날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의 아리아인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를 불렀다. 지휘자 마지에라는 "파바로티는 개막식 며칠 전 고향인 모데나에서 사전 녹음을 했고, 공연 당일 무대에 올라 부르는 시늉만 했다"고 주장했다. '세기의 테너'가 댄스 가수처럼 미리 녹음된 노래에 맞춰 입만 벙긋거렸다는 것이다. 파바로티는 정말 립싱크를 했을까. 오페라 가수들도 립싱크를 할까?
◆"건강 때문에…"
오페라 평론가 박종호씨는 "마이크를 쓰지 않는 오페라 무대에서 립싱크는 금기(禁忌)일 뿐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음악 칼럼니스트 유형종씨는 "다만 정통 오페라 공연이 아닌 갈라 콘서트나 야외 공연장 무대처럼 마이크를 사용하는 공연에선 가능할 수도 있다"며 "그렇더라도 관객 몰래 립싱크를 하는 건 명백한 사기극"이라고 했다.
파바로티는 왜 립싱크를 했을까. 마지에라는 책에서 "당시 파바로티는 췌장암 때문에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고, 파바로티의 매니저였던 테리 롭슨은 AP와의 인터뷰에서 "살인적인 추위 때문에 가수와 오케스트라 모두를 위해 립싱크를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파바로티의 립싱크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2년 이탈리아 모데나에서 열린 '파바로티와 친구들' 공연에선 루치오 달라와 함께 부른 '카루소'가 립싱크냐 아니냐는 논란이 뜨거웠다. 음악평론가 장일범씨는 "당시 공연 실황을 보면 파바로티는 마이크로 입을 계속 가리고 노래를 부른다"며 "노래와 입이 너무 안 맞아 누가 봐도 분명 립싱크였고, 그 뒤로도 그는 주로 마이크를 사용하는 이벤트성 공연만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전성기를 벗어난 이후의 파바로티는 고음을 두려워했고, 실연(實演)에서도 지휘자와 협의해 슬쩍 반음을 낮춰 부른 일이 많았다.
◆오페라 가수가 립싱크를?
원래 오페라 무대에선 마이크를 쓰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발성이 잘 된 성악가들의 목소리는 마이크 없이도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소리를 뚫고 홀의 맨 뒷좌석에 앉은 관객에까지 전달된다. 서울시오페라단 박세원 단장은 "몸이 악기인 성악가들은 구강과 비강을 열고 몸 안에서 증폭시킨 소리를 극장의 공명을 이용해 전달하기 때문에 마이크가 필요하지 않지만, 공명이 전혀 되지 않는 야외공연장이나 대형 체육관 무대에서는 불가피하게 마이크를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1998년 쯔진청(紫禁城·자금성)에서 공연한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도 주연 가수의 립싱크 논란에 휩싸인 일이 있다. 거장 주빈 메타가 지휘를 맡고 장이머우(張藝謨) 감독이 연출한 거대 이벤트로 화제를 뿌린 무대. 당시 칼라프 왕자 역을 맡은 테너 세르게이 라린이 감기에 걸려 립싱크를 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장일범씨는 "립싱크가 맞다면, 아마도 자금성이 거대한 야외무대였기 때문에 그런 '속임수'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차라리 대타를 쓴다
'은밀한 립싱크'가 금지된 오페라 무대에서 가수가 노래할 수 없는 돌발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대처할까. 주연 가수가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건강상의 이유로 노래하기 힘들 때는 종종 대역이 무대에 오른다.
2006년 12월 테너 로베르토 알라냐는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부르다 1막 1장에서 그대로 퇴장해버렸다. 주인공 라다메스 장군 역을 맡은 그는 유명한 아리아인 '청아한 아이다'를 부르다가 관객들의 야유를 견디다 못해 나가버렸고, 언더스터디(understudy·예비 배우)가 청바지 차림으로 황급히 뛰쳐나와 나머지 공연을 이끌었다.
만약 준비한 대역이 '노래'만 가능하고 '연기'는 안 된다면? 부득이하게 한 무대에 둘이 함께 오르기도 한다. 1990년대 중반 이탈리아에서 열린 오페라 '카르멘' 공연. 주연인 돈 호세 역을 맡은 테너 세르게이 라린이 공연 도중 목소리가 갈라져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됐다. 관객의 야유가 쏟아지자 주최측은 "지금부터 대역이 대신 노래를 하겠다"고 공표했다. 라린이 무대에서 입만 벙긋거리며 연기하는 동안 대역은 오케스트라 박스에 서서 노래만 불렀다.
◆불안한 고음을 해결
실황 공연이 아닌 레코딩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까. 음악 칼럼니스트 정준호씨는 "가수가 고령이라 고음 처리가 불안할 때 '특정음'만 다른 가수가 녹음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1952년 EMI에서 발매한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음반이 대표적인 경우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고 월터 레그라는 프로듀서가 제작한 명반이다. 당시 최고의 '이졸데' 가수로 정평이 나 있었던 소프라노 키르스텐 플라그슈타트가 이졸데 역을 맡았지만, 프로듀서 레그는 이미 57세로 전성기를 지난 그녀의 고음이 불안할 것을 우려해 자신의 아내인 젊은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를 스튜디오에 대기시켰다. 이졸데가 노래하는 '하이C' 음은 슈바르츠코프의 목소리다.
슈바르츠코프는 후에 "그 음보다 좀 낮은 소리부터 내가 노래를 시작했다. 최고음은 어느 소프라노나 소리가 비슷하기 때문에 나 자신도 이 녹음에서 내 목소리가 어느 부분인지 모르겠다"고 회상했다.
◆그렇다면 뮤지컬은?
뮤지컬에서는 어떨까.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뮤지컬 역시 반주와 노래 모두 100% 라이브 공연을 원칙으로 한다. 뮤지컬 평론가인 원종원 순천향대 교수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반주를 미리 녹음해서 틀거나 심지어 합창 부문을 녹음해서 넣기도 했다"며 "'노트르담 드 파리' '십계' 등 프랑스 뮤지컬은 원래 반주를 미리 녹음해서 무대에서 콘서트처럼 재현하는 걸 원칙으로 한다"고 했다.
가수의 노래는 물론 100% 라이브가 원칙. 다만 예외는 있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에서 여주인공 크리스틴이 팬텀과 배를 타고 지하로 가는 장면에서 '특정음'만 미리 녹음하기도 한다. 원 교수는 "크리스틴이 'The phantom of the opera'를 부르면서 강을 건널 때 단계적으로 음이 높아지면서 긴장이 고조되는데, 마지막에 내지르는 최고음은 정통 성악을 공부한 사람이라도 쉽게 낼 수 없을 정도로 높아 음색이 불안해지기 쉽다"며 "그 한 음만 미리 녹음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한 음만 녹음한 걸 틀면 튀지 않을까. 원 교수는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여배우가 마지막 음을 부르며 확 뒤돌아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