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제 발등 찍기
날마다 매서워지는 북풍 속에서 겨울이 깊어가며 세상은 얼어붙고 있었다. 그런데 겨울 추
위보다 더 혹독하게 세상을 얼어붙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총칼을 앞세워 피 냄새 풍기고
있는 계엄령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한겨울 추위에 몸이 얼고, 계엄령에 마음이 얼고 있었
다.
대통령이 술자리에서 총 맞아 죽고. 장장 9일장의 국장을 치루고. 이미 범인이 잡힌 상태이
니 계엄령은 해제되어야 했다. 그러나 계엄령은 해제될 줄을 모르고 서울 심장부는 장갑차
와 무장 군인들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대통령을 죽인 범인 여덟 명이 기소되었다. 그리고 국민이 직접 뽑은 것은 아니지만. 체육
관에서나마 새 대통령을 선출했으면 계엄령은 마땅히 해제되어야 했다. 그런데도 계엄령은
해제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가 나서서 계엄령을 해제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즉각 난동자로 체포되고. ‘난동자=용공=빨갱이’로 몰릴 수 있는 살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군인들이 아무리 총칼 들고 삼엄하게 진을 치고 있다고 해도 세상은 잠잠하지가 않
았다. 이상야릇한 가지가지 소문들이 북풍보다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세상은 자꾸 뒤숭숭하
고 불안스러워지고 있었다. 그 소문들은 분명 계엄령에 위배되는 것인데도 사람의 힘으로
바람을 잡을 수 없듯이 군인들의 총칼도 날로 심해지고 있는 소문을 잡지 못했다.
“박 통을 미국이 죽였다며?”
“그렇다더라니까 글쎄.”
“그럼 김재규가 미국하고 내통했다는 거야?”
“그야 말하면 잔소리지.”
“어찌 그럴 수가 있나. 심복 중에 심복이라는 사람이.”
“그러니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잖아.”
“근데 왜 미국은 남의 나라 대통령을 즈네들 맘대로 죽여?”
“그걸 몰라? 미국 말 안 듣고 박 통이 꼭 원자폭탄 만들려고 해서 그랬다는 거.”
“웃기는 새끼들이네. 즈네들은 수 만개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가 한 개 가지려는 걸 왜 못
갖게 해.”
“그걸 몰라? 천 년 만 년 즈네들 손아귀에 꽉 틀어쥐고 있으려는 속셈.”
“근데. 왜 정말 즈네들이 우리 대통령을 죽이고 그래? 독재해서 우리가 싫어하는 것하고.
미국이 죽이는 것하고는 완전히 다른 문제잖아.”
“이런 말 못 들었어? 미국 CIA에서는 각국 지도자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데. 집무실 도
청은 말할 것도 없고. 똥까지 수집해서 분석한대잖아. 똥을 분석하면 기질이며 성격까지 다
나온대니까. 그런데 똥을 분석한 결과 우리 박 통이 제일 독종이었다는 거야. 그 독종이 독
기를 발휘해 끝끝내 원자폭탄을 만들 테니까 미리 손을 쓴 거지.”
“그게 정말일까? 그럼 박 통은 그런 눈치를 전혀 못 챘을까?”
“근데 김재규 그건 뭐야?
“박 통 죽이고 지가 대통령 될 생각이었나?”
“이런 소문 있잖아. 미국에서는 박 통이 죽으면 사람들이 광화문으로 쏟아져 나와 만만세를
부르며 환호할 줄 알았다는 거야. 그런데 어떻게 됐어? 단 한 사람도 만세 부른 사람은 없
고. 온 나라가 쫙 얼어붙어 버렸잖아. 그 뜻밖의 사태에 미국이 그만 당황했다는 거야. 어.
어. 이게 아니로구나 하고 김재규를 모른척해 버렸다는 거지. 그러니까 김재규는 그만 얼떨
떨해져 있다가 쇠고랑을 차고 말았다는 거야.”
“하 그것 참. 말은 그럴듯한데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고 말야.”
“그나저나 이 판이 이거 어떻게 돼가는 거야? 계속 군인들이 설쳐대고 있으니.”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별들의 전쟁’인 거야. 진작 다 소문났잖아.”
“그럼 또 군바리들이 잡는다고?”
“그럼 어쩌겠어. 총 든 게 그쪽인데.”
“그렇지 뭐. 새로 들어앉은 대통령이 허수아비라는 건 어린애들도 다 아는 거니까.”
“이거 참 나라꼴이 뭐가 될려고 이러지? 그리 되면 박 통 죽으나마나 아냐?”
“누가 아니래. 박 통이 기를 써서 GNP 1천불 만들어 놓고 갔는데. 잘못하다간 그거 곤두박
질치게 된다구.”
“그런 소리 말어. GNP를 박정희 혼자서 다 올린 것처럼. 정치가 산으로 기어 올라가거나.
바다로 빠져 들어가거나 간에 국민들은 그저 잘살아보려고 죽자 사자 일하고 있으니까. 언
제라고 개판 정치 덕에 GNP 올랐나. 제길.”
계엄령은 유언비어 유포자들을 엄단한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지만 그런 소문들은 말이 보
태지고 부풀려지며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신문들이 죽은 시대를 대신하는 소문의 시대
였다.
그런 소문들과 뒤엉키는 또 다른 소문은 그날 밤 대통령 옆에 앉았던 여자가 대학생이니 미
스코리아 출신이니 하는 우김질이 이어지는가 하면. 그 방에서 노래를 부른 여가수를 놓고
여러 이름들이 떠돌아다니며 세상 떠난 대통령의 체면을 구기고 있었다.
양용석은 그런 소문들을 귓등으로 들으며 다른 일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는
건축회사 사장실에 버티고 앉아 있었지만 회사 일에서 관심이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넘어있
었다. 회사 일은 전부 전무한테 떠맡겨놓고 건성으로 결재를 하며 신경은 온통 군부의 움직
임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머나! 이를 어째. 나라 망했네.”
박 대통령이 시해되었다는 텔레비전 보도를 보는 순간 한정임이 소파에 주저앉으며 터뜨린
말이었다.
“어! 어! 이게 무슨 소리야.”
양용석은 이 말밖에 못하면서. ‘나라 망했다’는 아내의 말과 똑같은 마음이었다.
슬픈 조곡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되풀이되고 있는 보도를 들으며 한정임은 울었다. 양용석은
무언가 복잡하게 뒤엉킨 마음으로 담배만 피웠다.
양용석은 사무실에서도 하루 종일 뒤숭숭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보내다가 일찍 집으로 돌아
왔다. 사업상 술 마실 선약이 있었지만 서로 다음으로 미루었다.
“어차피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이고. 이젠 세상이 바뀌었어요.”
식탁에 앉은 한정임이 말했다. 그녀의 기색에서는 아침에 울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양용석은 아내를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최혜경. 그것 이젠 팔다리 다 잘렸어요.”
한정임이 싸늘하고 매섭게 말했다. 그 눈초리며 얼굴에서도 섬뜩한 냉기가 뻗치고 있었다.
“글쎄....... 그럴까? 도로 그 사람들이 잡을 텐데.”
자신이 하루 종일 생각해 온 문제라서 양용석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좋아요. 공화당에서 잡겠지요. 그치만 최혜경네는 끝장났어요. 그 남편이 다른 사람들한테
억시게 미움 산 것 당신도 잘 알잖아요. 그 사람은 각하 없으면 시체에요.”
한정임은 정신 차리라는 듯 남편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당신 말도 일리는 있는데. 그래도 속단할 수는 없어. 그 사람도 만만하지는 않으니까.”
“물론 그렇겠지요. 돈까지 많이 몰아잡고 있으니까 권력 안 잃을려고 온갖 짓 다하며 발버
둥을 치겠지요. 그치만 이젠 한풀 꺾인 건 틀림없어요.”
“그야 그렇지.”
“흥. 천 년 만 년 갈 줄 알았겠지만 이렇게 당하는 수가 있다구요. 아유 그 배신자. 속이 다
시원해.”
한정임은 끝말을 이빨로 와드득 물어뜯듯이 하며 입을 앙다물었다.
“그래. 당신 심정 알아. 그렇지만 다 잊어버려. 세상인심이라는 게 그런 건데 뭐.”
“어머. 당신 맘 좋은 척하며 그런 물러터진 소리 하지 말아요. 남자 매력 빵점이니까. 난 이
번에 최혜경이가 쫄딱 망하기를 바래요. 그렇게 돼야만 내가 복수를 할 수 있으니까.”
한정임은 싸늘한 냉기를 내뿜으며 파르르 기를 세웠다.
“여보. 복수는 무슨.......”
“여보. 당신은 배알도 없고 감정도 없어요! 내가 쇠고랑 차고. 감옥살이한 것 다 잊어버리셨
어요? 그러고도 내 남편이에요? 난 끝끝내 복수하고 말거에요. 꼭!”
한정임은 그때의 감정이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은 기세로 바락바락 소리치며 떨었다.
“알았어. 알았어.”
양용석은 건너편에 앉은 아내의 어깨를 두들기는 손짓을 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때 당한
일을 잊지 못하는 아내가 딱하기도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 발표가 있었다. 그 발표를 보면 그날 밤 박 대통
령은 죽지 않을 수 없도록 이중의 살해 계획망 속에 포위되어 있었다. 대통령이 가장 믿었
던 조직의 장과 그의 부하들에게 에워싸여 대통령이 죽어갔다는 사실이 세상 사람들을 놀라
게 했고. 또한 온갖 소문들이 퍼지는 의혹의 주머니가 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한정임이 남편에게 불쑥 물었다.
“당신. 수사 발표하던 그 사람 알아요?”
“알지.”
“아니. 그냥 아는 게 아니라 말이 통하게 친하냐구요.”
“아니. 그런 사이는 아닌데.”
양용석은 이상한 낌새를 느끼며 아내를 주시했다.
“아유. 어쩌면 좋아. 그 사람이 실세라는데.”
한정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실세? 그게 무슨 소리야?”
양용석은 이 말을 하면서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스치는 것을 느꼈다. 상황 파악을 하는데
자신이 아내보다 한발 늦었다는 것과. 장성들의 움직임이 심상찮다는 그저 스쳐들은 소문이
었다.
“척 들으면 모르겠어요? 당신 요새 뭘 생각하고 살아요?”
한정임은 마땅찮게 눈을 흘기며 짜증을 부렸다.
“나도 장성들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 정도는 듣고 있는데. 그런 것에 너무 신경 쓸
거 없어. 몇몇이 무슨 욕심이 있어도 자기들 뜻대로 될 세상이 아니니까.”
“그런 속 편한 소리 말아요. 총 들고 밀어대는데 안 될 게 뭐 있어요. 박 대통령은 뭐 한강
건너올 때부터 대통령이었어요?”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넘겨짚고 이래. 당신이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미안
하지만 5.16때하고 지금 하고는 상황이 전혀 달라. 5.16은 장면정권이 워낙 무능해서 민심
을 다 잃어버렸으니까 성공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유신으로 군부독재에 쓴 물이 나 있던
상황에서 박 통이 떠난 거야. 학생들이고 야당이고 일반 국민들이고 이제 민주주의 할 기회
가 왔다고 잔뜩 벼르고 있는데 또 군인들이 나서? 그건 어림없는 일이야. 절대 먹히지 않
아.”
양용석은 자신 있게 말하며 고개까지 내저었다.
“예에. 나도 그런 생각쯤 안 하는 게 아니에요. 그렇지만 세상사란 엉뚱한 일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돼요. 더구나 지금은 말할 수 없는 혼란기니까 그런 일이
더 잘 벌어질 수도 있잖아요. 군인들이 모든 걸 장악한 계엄 상태에서 그들이 정권을 잡고
나설 수도 있다구요. 우리가 그런 경우에 신경 써서 손해날 건 없잖아요. 이익이면 이익이
었지. 안 그래요?”
“그야 손해날 건 없지.”
“그러니까 당신은 그 사람들 움직임을 눈치 빠르게 살피고. 특히 그 사람하고 직코스로 줄
이 닿는 선을 찾아내라구요. 이번 기회가 우리한테 절호의 찬스가 될 수도 있다구요.”
“글쎄. 그거 너무 오버쎈스 아닐까?”
“당신은 참 이상해요. 신중한 건 좋지만. 왜 그렇게 군인다운 박력이 없어요. 안 되면 그만
이고. 되면 땡잡는 거다 생각하고 일단 시작해 봐야 되잖아요. 미리부터 안 될 거다 하고
손놓고 있다가 덜컥 정권을 잡아버리면 그때 가서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겠어요. 안
그래요?”
“글쎄. 그건 그런데. 당신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뭐. 특별한 소린 아니에요. 그 사람이 젊은 장군들 중에서 박 통한테 제일 신임을 받았던
사람이고. 지금 이 판을 틀어쥐고 있는 실력자라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만일을 생각해서
우리가 먼저 뛰자는 거지요. 또. 그 사람이 안 되더라도 앞으로 군 요직에서 계속 힘을 쓸
텐데. 그런 사람과 선이 이어지면 나쁠 것 하나도 없잖아요.”
“그야 그렇지. 군부대 공사만 따내도 땅짚고 헤엄치기지.”
“그러니까 당신은 내일부터 그 일에 최선을 다하세요. 나는 나대로 부인 쪽을 알아볼 테니
까요.”
양용석은 다음날부터 그 일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그쪽으로 접근해 가는 것은 그다
지 쉽지가 않았다. 계엄 상황의 핵심세력답게 차단막이 겹겹이었다.
그런데 새 대통령이 선출되고 나서 양용석은 바짝 긴장하게 되었다. ‘별들의 전쟁’이라는 소
문과 함께 군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될 거라는 말이 솔솔 퍼지고 있었다. 아내의 예감이
맞아들어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양용석은 그동안 현직에 있는 동창 몇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쪽 이야기
만 조금 비치면 당황하며 전화를 끊으려고 들었다. 그들은 계급이 더 높으면서도 잔뜩 몸을
사리고 있었다. 역시 군대는 직책 우선이었다.
아내도 생각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는지 자꾸 짜증을 냈다. 자신의 예감이 맞아들어 가고
있는 것 같으니까 아내는 얼마나 몸이 달 것인가. 남편 출세도 시키고. 최혜경에게 복수도
하고. 아내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 하고 있었다. 아내는 남편이 건설회사 사장
인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회사가 벌지 않아도 돈은 많으니 아내가 원하는 것은 권력이었
다. 자신도 그저 그런 건설회사 사장보다는 국회의원쯤이 한결 좋을 것 같았다.
건설회사를 인수하기 전에 야당 쪽에 접촉을 안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쪽에서는 턱없
이 많은 기부금을 요구했다. 그렇다고 국회의원자리가 확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선거를 하
게 되면 또 돈을 쏟아 부어야 했다. 그런다고 당선을 장담할 수도 없었다. 떨어지고 나면
막대한 돈만 날리고 빈손을 털게 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도박이었다.
양용석은 맛도 없는 담배를 뻐끔거리며 벌써 몇 번째 시계를 보았다.
그때 문을 두들기는 손기척이 울렸다.
“예에ㅡ.”
양용석은 목소리를 길게 끌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사장님. 다녀왔습니다.”
“아 고 상무. 어찌됐어요?”
양용석은 상대방이 소파에 앉기도 전에 물었다. 고 상무란 지난날의 고 중령이었다.
“예. 약간의 성과는 있었습니다.”
고 상무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잡고 허리를 굽혔다.
“약간의 성과?”
양용석은 눈을 치뜨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예. 그쪽의 핵심참모하고 며칠 있다가 만나기로 했습니다.”
“며칠 있다가?”
“예. 요새는 모종의 중대한 일이 있어서 전혀 시간을 낼 수 없는 모양입니다.”
“그저 막연하게 며칠이면 그게 언제지? 모종의 중대한 일이란 또 뭐고?”
양용석은 얼굴을 찌푸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죄송합니다. 전혀 눈치를 챌 수가 없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원래 군대일이란 그런 것 아닙
니까. 더구나 요새는 비상 상황이니까요. 다른 기관에서도 잔뜩 긴장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
지 아는 게 없습니다. 우리가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핵심참모라면 대령쯤 되나?”
“예. 그렇습니다. 대령입니다.”
“그럼 고 중령하고 같은 또래 아닌가.”
양용석의 입에서는 불현듯 ‘고 중령’이라는 말이 나갔다.
“예. 그러니까 만나기만 하면 얘기가 잘 통할겁니다.”
“한 가지 명심할 게 있어. 이렇게 암암리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 우리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야. 수없이 많이 뛰고 있는데. 이건 또 하나의 전쟁이야. 이 일만 잘 해내면 내가 크게 봐줄
테니까 정신 똑똑히 차리라구.”
양용석은 앉음새를 가다듬으며 고 상무를 응시했다.
“옛. 명심하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 상무는 군대식으로 고개를 꺾었다.
이틀이 지나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군인들의 총격전 끝에 계엄사령관이 밤사이에 연행된
것이다. 그 사태는 가뜩이나 불안하고 뒤숭숭한 세상을 여지없이 뒤흔들어놓았다. 신문이나
텔레비전보다 더 빠르게 또 온갖 소문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군부대들이 서울을 포위하듯이 둘러쌌다고 하는가 하면. 총격전으로 군인들 수십 명이 죽었
다고 했고. 유탄으로 민간인들도 여럿 죽었다는 등. 흉흉한 소문들이 차가운 겨울바람을 무
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놀란 것은 민가가 밀집된 서울 시내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것만이 아니
었다. 계엄사령관이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것만도 아니었다. 엄연히 계엄사령부
의 하급기관에 불과한 기관에서 총을 쏘아대며 계엄사령관을 잡아갔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있었다.
“봐요. 봐요. 내 말이 어때요. 내 말이 틀림없잖아요. 그 사람이 실세라니까요. 이번 사건은
그 사람이 ‘별들의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했다는 걸 보여주는 거라구요. 그렇지요?”
한정임은 텔레비전 보도를 보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숨 가쁘게 말했다.
“그래. 그런 모양이네....... 그리 도니 모양이야. ‘별들의 전쟁’.......”
양용석은 힘없이 중얼거리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머리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했다.
고 상무가 말한 모종의 중대한 일이란 바로 저것이었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쨌
거나 그 친구는 그것밖에 안 되는 계급으로 최강자가 되었는데. 나는 뭐지? 내가 예편을 당
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어찌 되어 있을까? 최소한 이런 꼴은 아니지 않겠어? 아니지. 계급이
높으면서도 지금 다른 친구들이 하는 것처럼 기죽어 눈치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건 차라
리 더 못할 일 아닌가? 어쩌면 지금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 사람이 대통
령.......? 글쎄. 글쎄. 그게 말이 되나? 영 안 어울리는데. 너무나 안 어울려. 야당이나 대학
생들이 가만히 있을까? 계엄.......? 아무리 계엄이라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그리고 또 미
국이 있잖아? 미국은 어떻게 나올래나?
“여보.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어요?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한정임은 남편의 팔을 질벅거렸다.
“응? 아. 아니야. 이거 판이 어찌 돼가는 건지 한치 앞도 안 보여.”
양용석은 혀를 차며 담배를 빼들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당신은 이럴 때 보면 참 답답하고 소심해요. 판이야 환하게 드
러났는데 뭐가 한치 앞도 안 보여요. 대통령은 어차피 허수아빈 거야 세상이 다 아는 일이
었고. 그 다음 실권자가 계엄사령관이 아니었냐구요. 근데. 그 사람이 당해버렸어요. 그럼
그 실권이 누구한테 가겠어요. 구구법보다 더 쉬운 걸 놓고 뭘 어렵게 생각하고 그래요. 증
말 답답해 못살겠네.”
한정임은 왈칵 짜증을 부렸다.
“이거 봐. 그리 잘난 척 좀 하지 마. 그까짓 걸 몰라서가 아니라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 말이야. 세상이란 혼자 밥상 차려먹는 게 아니라구.”
“예. 또 야당이고 학생들 얘기 꺼낼라고 하는 거지요? 그렇지만 당신 이거 하나만 생각하면
돼요. 당신. ‘별들의 전쟁’이란 소문 들으면서 계엄사령관이 잡혀갈 줄 알았어요. 몰랐어요?”
양용석은 아내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몰랐지요? 나도 몰랐어요. 우리만 모른 게 아니라 이 세상사람 전부가 몰랐어요. 안 것은
그 사람 편뿐이었어요. 근데 그 사람들은 그런 엄청난 일을 해치웠어요. 그 일은 계엄사령
관 한 사람이 잡혀가는 것으로 끝난 게 아니에요. 세상을 향해서 누구든지 까불면 가차 없
이 해치우겠다는 시범을 보인 거라구요. 그리고 서울 동서남북에 부대들이 여차하면 밀고
들어오려고 진을 치고 있다는데 여당이나 학생들이 무슨 수로 일어난다는 거예요? 간단하게
한 가지만 생각해요. 당신이 만약 그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물렁물렁하게 하겠어요. 짱
짱하게 독하게 하겠어요? 그 사람 군인이고. 한번 뽑은 칼이에요. 이런 상황에서는 복잡하
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생각하라구요. 괜히 복잡하게 생각했다간 죽도 밥
도 안 돼요. 알았어요?”
“이거야 원....... 당신이 군인이었으면 크게 출세했을 거야.”
양용석은 장식장으로 가서 양주병을 꺼냈다. 그는. 당신이 그렇게 단순하게 나대다가 최혜
경한테 당한 것 아냐. 하는 말이 곧 밀려나오는 걸 참으며 자리를 뜬 것이다. 그건 아내의
상차를 너무 심하게 찌르는 것이었고. 오늘의 재산은 아내가 최혜경을 끼고 이룬 것이니 오
히려 역공을 당할 위험이 더 컸다.
“당신 말이 일리가 있기도 해. 하여튼 어떻게 잘 좀 돼야 할 텐데.......”
양용석은 술잔 하나를 아내에게 내밀며 소파에 앉았다.
“우리 정신 차려야 해요. 모두 약아빠진 세상에서 이번에 판 뒤집어진 것보고 서로 빨리 줄
대려고 눈들이 시뻘게져 날뛸 거라구요. 그쪽에서도 정치하려면 결국 이것이 있어야 돼요.
이것 힘 당할 게 없으니까 아까워 말고 써야 해요. 이거야 원하는 자리 잡고 또 모으면 되
니까.”
한정임은 손가락 두개로 동그라미를 그려보였다.
“어쨌거나 당신 배짱 한번 대단해. 처남 찜쪄먹는다니까.”
양용석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사랑스럽다는 듯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유. 오빠 얘긴 꺼내지도 말아요. 군인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니고. 그따위로 정치하려면
뭐 하려고 해요? 오빤 배짱이 있는 게 아니라 바보 같은 통고집뿐이라구요. 차라리 정치가
라면 남재구씨가 훨씬 윗질이지. 오빠가 통고집 부려서 된 게 뭐가 있어요? 그 많은 재산
거의 다 까먹고 촌구석에서 초라하고 한심하게 됐지.”
“꼭 그렇게 말할 건 없지. 우리나라 여야 국회의원들이 거의 다 썩었으니까 그 속에서 오빠
가 어쩔 수 없이 파묻힌 거지. 모두가 오빠만큼씩만 양심이 있고 청렴했어 봐. 이 나라는
달라졌지. 오빠를 그리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어. 그런 분은 필요 해.”
“옛 상관에 대한 의리한번 잘 지키네요. 오빨 좋게 말하니까 기분 나쁠 건 없는데. 하여튼
오빠는 세상사는 데 서툴고 답답해요.”
“근데 남재구씨는 어찌 될라나? 혹시 모르니까 그냥 지나가는 셈치고 그 사람 한번 만나볼
까?”
“아니. 그럴 것 없어요. 공화당 국회의원들이 한물간 것처럼 그 사람도 이젠 쉰밥이에요. 자
기 살 구멍 찾느라고 정신이 없을 텐데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잘못하다간 괜히 우리 속만
내보이고 손해만 보게 되는 건데.”
“그도 그렇군. 이거 참. 세상 어지러워서.......”
“어지러워할 것 없어요.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이런 혼란기일수록 크게 잡을 수 있어요. 저
쪽에서도 이것 많고 믿을 수 있는 사람 찾을 건 뻔하니까. 우리야 이것 많겠다. 군 출신 족
보 확실하겠다. 선만 닿았다 하면 우리만큼 유리한 사람들도 없어요. 당신도 각오 새롭게
하고 나서요.”
한정임은 남편 앞으로 술잔을 내밀었다. 양용석은 아내의 술잔에 자신의 술잔을 부딪쳤다.
배가 불룩한 두 개의 양주잔은 잘그랑 경쾌한 소리로 울렸다.
이튿날 한정임은 동창회 미스 최와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마음이 바쁘다 보니 젊은 사람과
의 약속인데도 시간이 10분이나 일렀다.
한정임은 초조감을 덜려고 먼저 커피를 시켰다. 커피를 마시면서 또 생각을 짜내 봐도 뾰족
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건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면서 일을 해나가려고 하기 때문이었
다. 남편의 계급에 따라 알고지낸 군인의 아내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을 다 경계의 대상
으로 삼고 보니 고립상태가 되어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접촉해 보면 연줄연줄로 얻어
들을 소리들은 있겠지만 결정적인 도움을 얻기는 어려웠다. 괜히 그들에게 속내를 눈치 채
게 해서 경쟁자만 늘릴 위험이 더 컸다. 쥐도 새도 모르게 직코스로 가야했다. 최혜경을 구
워삶았던 것처럼. 과정이 좀 어렵더라도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어머. 선배님 먼저 와 계셨군요.”
“응. 미스 최 어서 앉어. 어떻게 됐어?”
한정임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해 놓고는 후회했다. 너무 속을 드러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
다.
“근데. 어쩌죠. 선배님”
미스 최라는 여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왜?”
한정임은 ‘틀렸구나’ 하는 낙담과는 달리 웃음을 지었다.
“그게 있잖아요. 아무리 뒤져봐도 연락처가 없어요. 그게 동창회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
고 살았다는 증거예요. 왜 그런 동문들 많잖아요. 졸업하면 동창회는 돌아보지도 않는 사람
들 말예요. 제가 딴 동문들한테 좀 알아볼까요? 선배님 같은 장군 사모님들께.”
“아니야. 그럴 건 없어. 뭐 별로 중요한 일 아니니까.”
한정임은 여유 있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아무 도움도 못 돼서.”
“죄송하긴. 도와 준거나 똑같지. 이거 맛있는 것 사먹고. 이건 미스 최하고 나하고만 아는
일인 것 알지?”
“네. 알고 있어요.”
한정임은 혼자 걸으며 이 상사를 만나 볼까말까 저울질하고 있었다. 어쩌면 효과가 이을 것
도 같고. 어쩌면 헛수고만 할 것 같기도 하고. 종잡기가 어려웠다. 자신이 이 상사와 친분을
두텁게 쌓았듯 다른 여자들도 남편을 모시는 장교들보다는 하사관들과 더 가깝게 지내는 걸
생각하면 효과가 있을 수 있었다. 장교에 비해 하사관들은 다루기 만만하고. 이것저것 궂은
일 시키기에 부담이 없었다. 그러나 이 상사가 제대한 지 오래된 것을 생각하면 얻는 것 없
이 괜히 헛김만 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상사가 재향군인회 일에 열성이면서 발이 넓
은 것이 마음 한 쪽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는 입이 무겁고 일 처리하는 것이 능란했다.
그 많은 부동산 건수들을 엎어 치고 뒤집어 치면서 한 번도 말썽이 나거나 실수한 적이 없
었다.
그래. 밑져봐야 본전이다!
한정임은 택시를 타고 다시 강남으로 달렸다. 강남 영동은 그동안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빈 땅들이 절반 가까이나 남아 있었다. 한 정임은 그 빈 땅들을 볼 때마다 옛추억이
새로워졌다. 자신에게 흡족할 만큼의 부를 가져다 준 그 땅. 제아무리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가 있다 해도 거기에는 당할 도리가 없었다. 이익이 엄청나게 남는 장사를 흔히 ‘열 배’장사
라고 하지만 땅은 스무 배. 서른 배도 우습고. 정보만 확실하게 잘 빼면 100배 장사는 예사
였다. 평당 1천원에 산 땅이 개발 계획이 발표되고 1년이 지나지 않아 10만원이 되기는 쉬
우니 돈을 갈퀴로 긁어모은다는 말도 시장스러울 지경이었다. 솔직히 말해 오늘날 누리고
있는 치부는 최혜경이 아니었으면 어려운 일이었다. 어찌 보면 최혜경의 입장은 오빠가 판
단한 것이 옳을지도 몰랐다. 또. 오늘의 치부를 생각하면 보석 사건으로 당한 고생은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런데 최혜경은 어찌 그리도 돈 욕심도. 보석욕심도 끝없이 많았
을까. 글쎄. 최혜경만 그런가....... 한정임은 스스로 멋쩍어져 씩 웃었다.
택시에서 내린 한정임은 고개를 젖히고 15층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개천에서 용 났지.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사모님. 이게 어쩐 일이십니까.”
한정임이 들어서자 꽃무늬 요란하게 붙은 커다란 책상에 버티고 앉았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
며 일어났다.
“그간에 잘 있었어요?”
한정임은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받았다.
“아이고 사모님. 어서 앉으십시오. 너무 오랜만입니다. 어찌 이리 직접 납시셨습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호출을 하시지요. 이거 원 황송해서. 참 장군님께서는 안녕하십니까?”
그 남자는 수선스럽다 싶게 말을 쏟아내며 굽실거렸다.
“이 사장은 재미 좋아요?”
한정임이 ‘이 상사’를 ‘이 사장’으로 우대해 부르며 소파에 앉았다.
“예에. 재미야 뭐 늘 그렇지요. 저 같은 놈이 이렇게 떡 벌어지게 사는 거야 다 사모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 때문이지요. 예. 그럼요. 예. 다 사모님 덕이죠. 헌데. 무슨 급한 일 있으십
니까?”
머리를 군대식으로 짧게 깎은 이 사장은 연신 손을 맞비비며 눈치 빠르게 물었다.
“저어....... 여기......”
한정임은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문 쪽을 눈짓했다. 칸막이 뒤쪽은 빌딩의 관리
사무실이었다.
“예에. 나가시지요. 조용한 다방이 있습니다.”
이 사장이 벌떡 일어나며 옷걸이의 오버를 내렸다.
“....... 그러니까 그쪽에 직코스로 통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으면 해요. 빠르고 조용하게.”
한정임은 아주 낮은 소리로 침착하게 말했다.
“예. 말씀 알겠습니다만. 제가 옷 벗은 지 오래돼서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허지만
재향군인회 쪽에서 더듬으면 금방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사관들이야 상하좌우로 금방금방
맥이 통하니까요. 2~3일내로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 사장 역시 낮은 소리로 그러나 자신감을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절대 극비예요.”
“예. 사모님. 어디 한두 번 해본 일입니까. 역시 사모님께서 판단 빠르시고. 잘하시는 것 같
은데요.”
이 사장이 은밀하게 웃었다.
“그래요? 빨리 좀 잘 해요. 내가 서운찮게 답례할 테니까.”
한정임이 눈으로 웃음을 받으며 일어났다.
“아이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이런 기회에 은혜 갚아야지요.”
사흘이 지나 한정임은 이 사장의 전화를 받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인사 받으시지요. 저하고 친한 강 상사입니다.”
이 사장이 한 남자를 한정임에게 소개했다.
“강 상사라고 합니다. 그저 조용조용 해야 될 일이니까 이름은 묻어두도록 하겠습니다.”
그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한 말이었다.
“네”
한정임은 고개를 까딱하며 찬 느낌의 웃음을 살짝 지었다. 그녀는 그 남자를 훑으며 제법이
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 후배 중에 그분을 오래 모셨고. 신임이 아주 두터워 비서처럼 지내는 김 중사가
있다고 합니다.”
이 사장이 설명했다.
“현역인가요?”
“아닙니다. 작년에 제대했는데. 지금도 그 댁에 무상으로 드나들 정돕니다.‘
강 상사라는 사람이 대답했다.
“왜 제대를 했지요? 그런 그늘이면 특과 중에 특괄 텐데.”
한정임은 예리한 점검에 나서고 있었다.
“예. 잘 아시다시피 그늘이 아무리 좋아도 중사 수입으로는 커나는 자식들 가르치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대해서 친구가 하는 사업체의 상무로 들어갔습니다.”
“상무? 무슨 사업첸데요?”
“예. 군납 하청업인데. 그 일을 바로 그 분이 뒤봐주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상무 만
들어준 셈이지요. 그래서 지금도 받들어 모시는 거구요.”
“.......”
입을 꼭 다문 한정임은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동안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럼. 그 사람 언제나 만날 수 있지요?”
이윽고 한정임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예. 오늘은 어렵겠고. 원하시면 내일은 만나실 수 있습니다.”
“좋아요. 내일 만났으면 좋겠어요.”
“예. 그렇게 하시지요. 그런데 저어....... 그쪽에서 꺼릴 수 있으니까 이 사장은 이 선에서
빠지고. 연락은 제가 직접 드리는 것이 어떨지......”
“그야 당연하지요. 단계마다 꼬리는 빨리 잘라야 해요.”
한정임은 마치 여두목처럼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수십 번 말했지만. 자네 일 빈틈없이 잘해야 해. 내위신이 걸린 문제니까.”
이 사장이 자기 임무를 마치는 마지막 당부처럼 강 상사에게 말했다.
“걱정 말어. 자네 덕 봐가며 사는 처지에.”
강 상사가 커피잔을 들며 말했다.
한정임은 다음날 강 상사와 함께 김 중사라는 사람을 만났다.
“자네에 대해선 다 말씀 드렸어. 성심껏 잘 도와드리도록 해. 다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이니
까.”
한정임에게 소개가 끝나자 강 상사는 김 중사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곧 자리를 떴다.
이틀 뒤에 한정임은 김 중사를 다시 만났다.
“여기에 내 명함을 넣었어요. 거기에 사모님의 싸인만 받아오면 돼요.”
한정임은 핸드백에서 사각봉투 크기의 얇게 포장한 것을 꺼내며 말했다.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김 중사는 포장된 것을 받으며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었다.
“안주머니에 잘 넣고. 곧바로 전해야 돼요. 조금이라도 가지고 다니면 절대 안 돼요.”
한정임은 김 중사를 응시하며 못을 박았다.
“그럼요. 지금 바로 갈 겁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만나요.”
“예. 알겠습니다.”
한정임은 김 중사를 먼저 택시 태워 보냈다. 사라지는 택시를 보며 그녀는 가슴이 뚫리는
것 같은 긴 숨을 내쉬었다.
이튿날 한정임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약속장소로 나갔다. 약속시간 5분전인데 김 중사는 나
와 있지 않았다. 커피를 먼저 시켜 마시는데 1분. 1분이 초조했다.
약속시간이 지나가고 있는데도 김 중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1분. 1분이 조바심이 일었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1초. 1초가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마침내 30분이 지났다.
혹시 이놈이!
온갖 생각을 다하던 한정임은 돌로 머리를 치는 것 같은 생각에 부딪혔다. 그녀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현기증으로 머리를 감쌌다. 심한 어지러움 속에서 수백 개의 돈다발들이 저 먼
허공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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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님의 한강
한 강 = 제 3 부 불신시대 4 (10권)ㅡㅡㅡ 53. 제발등 찍기
정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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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8.12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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