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3: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
(행11:27-30)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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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은 편할 날이 많이 없습니다. 바람 물 불 기온 화학무기 등으로 말미암은 전쟁 지진 홍수 해일 태풍 산불 기아 기근 폭서 전염병 대형 사고 등 재난이 매년 발생하여 우리의 삶에 큰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재해가 발생하여 재산과 인명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습니다.
재해에는 인재와 자연재해로 분류되는데 인재로는 대구지하철 참사,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 1995년 7월 19일 서울 삼풍백화점붕괴 참사, 9.11 미국 쌍둥이 빌딩 폭파, 제2차 대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들, 케냐와 우간다에서 있었던 폭발사고 세계 도처에 수없이 발생되고 있습니다.
자연재해로는 노아 홍수를 비롯해서 2000년도 고성·삼척·강릉·동해·울진 등 산불피해지역, 2002년 8월의 루사 태풍, 이탈리아 폼페이 화산 대 폭발, 일본의 고베 대지진, 4천만이 죽은 유럽의 흑사병, 미국의 세인트헬레나 화산 폭발, 중국의 양자강 일대의 세기적인 홍수 인재 못지않게 큼직큼직한 재난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금년에도 유럽에서는 가뭄과 폭서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봄에는 사스 전염병으로 홍역을 치렀고, 지난 9월11일부터 13일에는 우리나라의 남해안과 영남지역을 휩쓸고 지나간 태풍 제14호 매미(MAEMI)로 인하여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13일 12시 현제 기록적인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 `매미(MAEMI)'가 한반도를 강타, 80명이 사망·실종되고, 20여명이 매몰된 가운데 143만 가구에 전기공급이 중단되는 등 사상 최악의 정전사태를 빚는 가하면 강풍으로 대형 컨테이너 크레인이 줄줄이 넘어지고, 철도 및 도로가 유실되면서 대규모 산업피해가 발생했으며, 농작물 침수와 낙과 피해, 양식장 파손 등 수산물 피해도 상당한 규모에 달했다.
이러한 재해 중에 인재는 사람이 조심하고 철저히 대비하면 어느 정도 막을 수도 있지만 하늘이 가지고 온 천재(자연재난)는 불가항력적인 것입니다. 예보된 재난이었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막아낼 수 없는 것으로 그 때마다 인간의 나약함을 절실하게 느끼곤 합니다.
1. 세 종류의 재난들
1) (행11: 27) 예루살렘과 유대 전역에 찾아온 가뭄 때문에 전 지역에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이 기근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격은 천재가 있습니다.
2) (눅13:1-3) 빌라도가 총독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발생한 사건입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로마 제국에 항거하던 유대인 광복군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다가 습격해온 계엄군들에게 떼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어느 유월절에는 3천명, 어느 유월절에는 2만 명이 학살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비극 이였던 계획된 인재가 있습니다.
3) (눅13:4) 실로암의 기혼샘에서 솟아나는 예루살렘 백성들의 식수를 지키기 위해 세워놓았던 망대가 무너진 사고로 18명이 목숨을 잃은 부주의로 인한 인재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이해해야 할 점은 이 모든 재난들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2. 재난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들
1)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재난이라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유다 인들이 떼죽음을 당한 재난은 원초적으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세상은 글자그대로 낙원이었습니다. 거기엔 미움이 없었습니다. 살인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자연 환경도 지상의 천국이었습니다. 더위도 추위도 없었습니다. 가뭄도 흉년도 없었습니다. 비가 오지 않아도 아열대의 온실 같이 언제나 적당한 수분으로 모든 생물이 살기에 적합한 기후였습니다. 홍수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지상낙원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모든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①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불순종으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②인간과 인간 사이는 불신과 미움으로 원수가 되어 마침내 아담의 큰아들 가인과 작은아들 아벨사이에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③인간과 자연 사이에 조화가 깨지고 함께 타락하므로 엄청난 불행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 모든 재난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까? 창세기6;5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은 마음에 결심하셨습니다. 내가 이 백성을 물로 쓸어버리겠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홍수가 자연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큰 깊음의 샘들과 하늘의 창"을 터뜨림으로 이 때 지구가 지각 변동을 일으키고 기우러졌습니다. 균형이 깨어졌습니다. 이 때부터 이 지구는 엄청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태양이 여과 없이 직접 비칩니다. 지구가 기울어졌기 때문에 한쪽은 뜨겁고 한쪽은 춥습니다. 자연히 이 온도의 차이로 저기압, 고기압 골이 형성되면서 공기가 재빠르게 이동합니다. 바람이 너무 심할 때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나 ‘루사’나 매미와 같은 태풍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기상의 변화로 하늘은 비와 가뭄을 가져다줍니다. 땅에는 흉년이 옵니다. 배가 고픕니다. 잘 살아보려고 온갖 것을 다 만들어 냅니다. 공해가 생깁니다. 사람이 짜증이 납니다. 고혈압이 됩니다. 서로 싸웁니다. 죽입니다. 훔칩니다. 전쟁을 합니다. 이 모든 재난들이 어디서부터 시작됐습니까?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비롯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스리시는 방법이 단순하셨습니다.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을,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저주의 구체적인 방편이 가뭄, 흉년, 전염병, 지진 그리고 전쟁 이였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은 점점 더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순종하여 온통 세상은 불행의 창고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끝날 때가 가까울수록 " 난리와 난리 소문과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라"(마24;3-)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2) 이미 예고된 재난이란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 지방에 왔습니다. 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 이였습니다. 이 선지자는 "온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는 예언을 전했습니다. '한재의 재난'을 선포했습니다. 결과는 예보한 그대로 엄청난 기근이 닥쳤습니다.
남아메리카 서북쪽에 위치한 콜롬비아와 동부 유럽 카프카스 지역에 있는 아르메니아의 화산 폭발로 말미암아 약3만6천명이 한꺼번에 매몰됨으로 공동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프리카의 폭발재난은 직접적으로는 없었지만 이미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재난은 다 성경이 이미 예고한 것들입니다. 지금까지 발생한 한국과 중국의 재난, 그리고 이번에 발생한 매미태풍 역시 이미 예보된 재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이미 예보했습니다. 노아의 홍수 역시 예보했습니다. 자그마치 120년간의 유예기간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듣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바른 예고가 있어도 귀담아 듣지 않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심지어 가족들을 잃어버리는 비극을 만나도 시간이 가면 또 잊어버리고 충분한 대비 없이 살다가 똑같은 재난을 또 만나는 것입니다.
다음에 일어날 재난은 언제 누구에게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재난이 나에게 오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깨어있어 예비하라!"였습니다. 여러분! 깨어 준비하십시오!
3) 회개할 기회를 제공하는 재난
(눅13장)에 있었던 실로암 망대 사고와 로마인들의 유대인 학살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행13;15)을 모두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 사는 모든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무슨 말씀 같습니까? 이웃이 재난을 당할 때 박수치지 말라는 말입니다. 누가 내어놓고 박수칠 사람이 있겠습니까. “거봐! 내가 이민(移民) 백번 잘 왔지!”하며 잘난 척 하지 마시고, 또 “좀 산다고 거들먹거리고 뻐갤 때 나 알아봤어! 싸다! 싸!” 이런 마음도 갖는 것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것은 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마음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웃이 재난을 당할 때 죄의 결과로 보지 말고 차라리 우리가 회개할 기회로 삼으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인과응보론 적(因果應報論的)인 형벌사상을 버리고 저들이 당한 재난을 보면서 나에게 깊이 회개하라고 주시는 명령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들의 죄 값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 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아프리카에 있는 사람들보다 여기에 있는 우리가 더 의로운 사람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저 제주도나 영남권에 있는 사람들보다 여기에 있는 우리가 더 의로운 사람이라고 믿습니까? 아닙니다. 일본이나 중국에 있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의로운 사람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저들만 억울하고 재난을 당해야 합니까?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며, 언제 어느 때 재난을 당하더라도 믿음을 지키고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하려는 메시지임을 알아야 합니다.
3. 재난 당한 이웃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1)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함께 아파하며 울어야 합니다.
(롬12:15)"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마음을 같이하라." 작년에 많은 사람들이 태풍으로 낙망 좌절하고 있는 분들을 찾아 위로하고 함께 아파하며 수해 복구에 협력했습니다. 구호물품과 수해의연금을 모금해서 전했습니다. 마땅한 일입니다.
저는 어제 이 설교를 준비하며 몹시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을 느꼈습니다. 무릎이라도 꿇고 용서를 빌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수 일 전부터 사라 태풍보다 더 무서운 태풍이 우리나라 남해안을 향해 북진하고 있으니 피해가 없도록 조심하라는 보도를 수차 들었습니다. 남해안이라는 말에 안도의 한 숨을 쉬고 심각하게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11일 오후 집사람이 태풍이 분다는데 당신 교회에 나가서 기도 안 해요? 했는데 씩 웃고 진지하게 기도에 임하지 못했습니다. 금요일 제주도의 비 피해 소식을 들으면서도 태풍의 바람을 돌려놓을 기세로 전투하듯 하는 기도를 할 마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다른 때와 같이 밤늦게까지 말씀 준비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13일 아침 엄청난 피해 상황을 뉴스를 통해 접하면서 모자라지만 그래도 왜 진작 기도하지 못했나 하는 뉘우침이 생겼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의 하나님, 예수 이름의 권세가 얼마나 놀라운지 믿으면서 그 이름을 사용하지 못했다는 불신앙에 이 큰 재난이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재난은 저 남쪽 분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있어서가 아니라 마땅히 기도해야 될 신자들이 기도하지 않고, 전도해야 할 신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깨닫게 하여 다시 기도하고 전도하여 종말의 환난을 대비하게 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들이 그렇게도 좋아하고 의지하는 세상의 부귀공명이나 권세와 같은 인간의 바벨탑이란 심판 때에 하나님의 입김 앞에 한낱 지푸라기에 불과함을 깨닫게 하시려는 값비싼 교훈을 주시기 위함은 아닐까요?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현대인의 특징 중의 하나는 불감증입니다. 감정이 무디어진 것입니다. 하도 살기가 바쁘고 어렵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지극히 이기적인 시대의 당연한 현상인가요? 내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에는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동족이라고 하지만 내게 닥친 일이 아니라 난민들의 고통이 실감나지 않고 다행히 이 어려움을 모면했다는데 안도의 한숨만 쉬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동포들의 아픔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교훈 집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집에 어린아이가 태어났는데 머리는 둘이고 몸은 하나였습니다. 가족들이 이 아이가 한 사람이지, 두 사람인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랍비가 쉬운 걸 가지고 왜 고민하느냐며 쉽게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알아내겠습니까? 랍비의 가르침은 뜨거운 물 한바가지를 한쪽 아이 머리에 부어봐라. 그래서 한 쪽만 울면 두 사람이고 둘 다 울면 이는 한 몸이니라 하였습니다.
이 랍비의 교훈은 동족이 아픔을 당할 때 눈물이 없고 아픔이 없다면 그건 동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 이제 재난을 당한 이웃을 보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함께 울어주는 것으로 족하지 않습니다.
2)적극적인 방법으로 이제 친히 구제해야 합니다.
어떻게 구제할 것입니까? 사도행전 11;28이하를 보십시다. 이방 땅에 사는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유대에 흉년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떻게 구제했습니까?
① 각각 그 힘대로 구제비를 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이제 개척하여 1년 남짓 된 교회였지만 각각 모든 교인들이 빠짐없이 구제모금에 참여했음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구제해야 합니까? "각각 그 힘대로"해야 합니다. 이미 실시된 모금 상황을 보면 모 기업의 회장이 몇 억원하고 광고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몽땅 내는 것이 왜 나쁘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각각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구약시대에 드렸던 모든 헌금의 첫 번 사용 목적은 구제였습니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기업 없는 레위지파를 위해서 11조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의지할 때 없고 배경이 없는 고아와 과부들을 위해서 헌금을 실시했습니다. 이 때 드렸던 기본적인 기준이 11조 헌금이었습니다. 11조 헌금얘기가 나오면 어떤 사람들은 구약성경에는 11조 얘기가 나오지만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셨으니 이제는 율법을 초월해야 하지 않습니까? 어디까지나 헌금은 자유롭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옳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라는 기준이 자기 나름의 편리주의가 된다면 곤란해집니다.
신약성경의 헌금기준은 어떤 것입니까? 고전16;2에 보면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하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수입에 비례하여 일정한 액수를 드리는 원칙이 있습니다. 고후8:3에 보면 "힘대로"드리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억지로 하지 말라는 뜻도 있습니다마는 자기 힘에 미치지 못하는 헌금은 역시 바람직한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마게도니아 교회 교인들의 형편을 보면 헌금을 안 해도 좋은 합리적인 형편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환난의 많은 시련'이요 또 하나는 '극한 가난'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환난을 당하고 있을까요?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그들은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환난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궁핍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을 위한 어려움이었습니다. 이들은 헌금하지 않아도 하등에 책망 받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풍성한 연보'를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헌금의 본질은 쓰고 남은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의 현실이 언제 쓰고 남겠습니까? 늘 모자라고 빠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기쁨으로 드리는 성도들이 대부분입니다. 왜? 드립니까? 이 헌금은 당신의 독생자를 나를 위해 내어주시면서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친히 체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랑의 고백이 헌금입니다. 따라서 고후8장1절은 이 헌금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하나님께서 마게도니야교회에게 주신 은혜"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헌금의 본질은 은혜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동안 여러분의 헌금 기준은 "힘대로"드리는 것이기를 바랍니다. 아니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고후8;3) 드렸던 옛 성도들처럼 드리기를 바랍니다. 지나치게 만용으로 드려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성의가 부족한 헌금도 기준미달임을 알고 드리기를 바랍니다.
② 구제대상의 우선순위는 누구입니까?
"유대에 사는 형제들"이 먼저 이었습니다. 형제란 아버지가 동일한 자녀들입니다. 우리들의 아버지는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는 모두 형제요 자매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구제의 대상은 우선 믿음의 가족들부터 하라고 합니다. (갈6;10)에 보니 "그러므로 우리가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Therefore, as we have opportunity, let us do good to all people, especially to those who belong to the family of believers).” 예루살렘 초대교회도 교회 안에 헬라파, 히브리파 교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먼저 구제했습니다. 여유가 있다면 불신자에게도 반드시 해야 합니다.
③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합니까?
교회를 통해서 구제해야 합니다. (행11;30)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 니라."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들입니다. 장로는 누굽니까? 역시 예루살렘 교회의 목회자입니다. 이 말은 개인 대 개인으로 주고받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개인적으로 헌금을 전달하는 것은 아무리 선한 동기라도 그 속에는 공명주의가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구제하거나 헌금을 하면 받은 사람에게 상당한 부담과 구속감을 갖게 만드는 결과가 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나 단체를 헌금으로 돕고 싶습니까? 개인적으로 하지 말고 꼭 교회를 통해서 <지명헌금제-원하는 사람을 지명해서>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일부분이라도 좋습니다. 모든 헌금은 꼭 교회를 통해서 전달하도록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충실하게 여러분의 선교헌금이나 구제헌금을 용도에 따라 전달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헌금이나 구제나 봉사를 한 후에 그 결과를 인정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J. C. Penny는 현재도 미국 전역에 2천개의 백화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페니가 58세에 파산했지만 다시 신앙으로 실패를 이기고 성공한 크리스천 사업가입니다. 이 페니의 성공적인 좌우명은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마7;12)-So in everything, do to others what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는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이 페니는 교회와 사회사업을 위해 많은 돈을 드렸습니다. 처음부터 많이 드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점점 더 드렸습니다. 플로리다에 은퇴 목사님들을 위한 주택 100체를 지어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 페니가 만년에 이렇게 간증했답니다.
'처음엔 내가 피땀 흘려 번 돈인데 내 맘대로 할 권리가 내게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했다가 시험에 빠졌답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다시 일어설 때 주는 기쁨이 움켜잡고 있는 기쁨보다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페니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것을 더 많은 사람에게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일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잠언은 구제는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지 우리의 만족을 위함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예수님은 이런 아름다운 행위를 가르쳐 천국 창고에 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