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과 가냘픈 체격에 연민까지 불러일으켰던 ‘라면소녀’ 임춘애. 그녀의 달리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국민영웅’이라는 타이틀은 오래전에 내려놓았지만, 제2의 인생을 달리느라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가 20여 년 만에 자신의 영광 속에 숨은 이야기들과 최근의 일상을 공개했다.
“제일 가슴 아팠던 소리가 ‘배부르니까 못 뛰네’라는 거였어요. 사람들은 그 말을 너무 쉽게 하더라고요”
돌이켜보면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당시로는 초대형 국제스포츠제전이었던 1986년 제10회 서울아시안게임. 아시아 육상계에서도 비주류였던 한국이 중국을 제치고 육상 중·장거리 800·1500·3000m에서 무려 세 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그것도 어린 소녀가 거둔 성적이었다. 이후 소녀는 그야말로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라면소녀’라는 별칭을 달고 뛰었던 어린 소녀. 23년이 지났어도 이 소녀의 이름은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바로 임춘애다.
‘국민영웅’의 타이틀 벗고 ‘칼국수집 사장’으로 살아가는 일상 임춘애는 지금 남편과 함께 용인시 수지구청 부근에서 칼국수집을 운영하고 있다. 예전에 비해 살이 좀 붙은 모습이지만 호리호리한 체격과 날카로운 턱선은 오래전 모습 그대로였다. 취재진이 방문했을 때, 그녀는 남편과 함께 가게를 정리하고 있었다. 정리하는 손놀림이 꽤 익숙해 보였다. 정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요즘 장사하기 어떠냐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전보다 손님이 좀 줄기는 했지만, 요즘 경기에 비하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에요. 7∼8년 동안 운영돼온 가게를 인수해서 단골손님이 꽤 있거든요. 그리고 저를 보러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도 좀 있어요(웃음).”
세월의 힘일까, 그녀는 생각보다 사교성이 좋았다. 긴장한 빛이 역력해 보이던 과거 인터뷰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직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가게 매출이 좀 줄어서 이제는 저희 둘이 장사를 해요. 아침 열 시에 나와서 밤 열 시에 집에 들어가죠. 세 시까지 점심 장사를 하다가 아이들 학교가 끝날 무렵에 잠시 집에 가서 아이들을 돌봐요.”
그녀는 은퇴 후 프로축구 선수 출신인 이상룡 씨와 결혼해 올해 중3이 된 딸 지수, 초등학교 2학년인 쌍둥이 아들 강이와 산이를 두었다. 한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스포츠 스타는 가족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살며 소소한 행복을 즐기고 있었다.
세 개의 금메달에 숨은 눈칫밥 그리고 설움
임춘애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가게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세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고 수줍게 웃고 있는 앳된 소녀.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그날의 감동은 그녀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나 잊을 수 없는 짜릿한 추억이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이야기로 흘렀다. 사실 대회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가 금메달을 따리라고는, 더구나 세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아시안게임이 제 일생에서 컨디션이 가장 좋았던 때였던 것 같아요. 다 뛰고도 힘든 줄 몰랐으니까요. 일이 되려고 그랬나 봐요.”
금메달을 땄을 때 처음 느껴지는 감정은 환희보다는 ‘이젠 밥값을 했구나’라는 안도감이었다. 세 개의 금메달 뒤에는 ‘눈칫밥의 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시안게임이 열리기 4개월 전까지만 해도 저는 대표선수가 아니었어요.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하지도 않았죠. 그런데 제가 전국체전에서 3관왕을 하면서 추가선발이 된 거예요. 저로 인해 그 대회에 못 나간 선수도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대표팀 안에서도 미운 오리새끼였어요. 무조건 잘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사실 임춘애의 국가대표 선발을 놓고 육상계 안에서는 말들이 많았다. 육상연맹선발위원회가 다시 열렸고, 당시 막후 실력자이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인 이규동 씨의 지원 사격에 힘입어 그녀는 대표선수로 뽑혔다. 그 후 초등학교 때부터 스승이던 김번일 코치도 함께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와 김 코치는 태릉선수촌 안에서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느닷없이 들어온 이들에 대한 시선은 따갑기만 했다. 다른 육상 대표선수들과 별도로 훈련을 해야만 할 정도였다.
“코치님께서는 성적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매일 밤 가위에 눌리곤 하셨어요. ‘금메달 못 따면 너랑 나랑은 끝이다’라는 말도 자주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 800m에서 첫 금메달을 땄는데도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당시 임춘애는 1위보다 2초가량 늦은 2위로 들어왔으나, 1위였던 인도의 아브라함 선수가 규정보다 빨리 레인을 벗어난 것으로 판정되면서 뜻하지 않게 금메달을 받았다. 이를 두고 육상계 일각에서는 “금메달을 주웠다”며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 1500m와 3000m를 잇따라 우승하면서 실력을 입증해 보였다. 더욱이 3000m 우승 기록은 한국신기록이었다.
“어쩌면 모든 것이 우연과 행운 덕분인지도 모르겠어요(웃음). 대회 전 기록으로는 중국 선수들에 훨씬 못 미쳤거든요. 특히 3000m는 10초 정도 차이가 났죠. 그런데 저는 평소보다 잘 뛰었고, 중국 선수들은 한국에 와서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는지 10초가량 부진한 기록을 냈어요.”
‘헝그리 정신’의 대표 아이콘이 된 그녀
3관왕이 되자 사람들은 육상의 불모지에서 별이 떴다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모든 언론의 포커스는 임춘애를 향했다.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신데렐라가 된 것이다. 그리고 결승선을 힘겹게 통과한 당시 우승 소감은 전설처럼 전해져왔다.
“라면 먹으면서 운동했어요. 우유 마시는 친구가 부러웠고요.”
이 말에 국민들은 안타까움과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 ‘헝그리 정신’에 딱 맞아떨어지는 그 말은 언론에 집중 보도되면서 신화처럼 굳어졌다. 이때부터 그녀에게는 ‘라면소녀’라는 별명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이 일화가 한 언론사의 오보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초등학교 합숙 훈련 때 외부에서 증정 받은 라면을 간식으로 먹었다는 말이 와전됐어요. 운동선수가 어떻게 라면만 먹고 운동을 할 수 있겠어요. 특히 육상은 기록 경기이니만큼 체력이 중요해요. 사실 몸에 좋다는 좋은 보약이란 것들도 많이 먹었어요(웃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임춘애는 가난을 딛고 성공한, ‘헝그리 정신’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됐다. 그런 이미지 덕분에 2년 후에 열린 88서울올림픽에서 성화 최종 봉송자가 되는 영광도 안았다.
“고 손기정 선생님이 트랙 반을 돌고 제가 나머지 반을 뛰었어요. 너무도 영광스러운 일이었죠. 그런데 그 시나리오가 막판에 갑자기 바뀐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나중에 안 사실인데, 원래 최종 봉송자는 손기정 선생님이셨다고 해요. 그런데 개막을 3일 앞두고 이 사실이 외부로 새어나갔고, 조직위원회가 고민을 하다가 저한테 전화를 한 거죠.”
어부지리로 마지막 성화 최종 봉송자가 됐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이화여대 1학년 재학 시절, 88서울올림픽에 출전한 그녀에게 국민들의 관심이 다시 한 번 쏠렸다. 국민들은 그녀가 올림픽에서도 아시안게임만큼의 성과를 내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기록은 여전했지만 예선에서 탈락하고 만 것이다.
“그 후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배부르니까 못 뛰네’라는 것이었어요. 그 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말을 너무 쉽게 하더라고요.”
대학교 3학년 때 그녀는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했다. 전부터 골반에 부상이 있던 데다 대학에 들어가 키가 8cm나 자라면서 몸의 균형이 안 맞아 부상이 악화됐던 것이다. 어쩌면 부상당한 몸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깊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아시안게임 후에 몸이 계속 안 좋았어요. 부담이 많았던 경기여서 어떤 일이 있어도 성과를 내야 한다는 생각에 몸을 많이 혹사했거든요. 그러면서 부상이 오게 됐고, 체력적으로도 힘에 부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주위에서는 ‘멀쩡하던 애가 성공하고 나니까 정신상태가 틀렸다’는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이후에는 정말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싫어졌어요.”
스타보다 세 아이의 평범한 엄마가 나에게 맞는 옷
은퇴를 하고 나니 아쉬움도 있지만 큰 짐을 벗었다는 홀가분함에 마음이 가벼웠다. 은퇴 후 임춘애는 애초 일본 유학을 계획했었다. 어학도 배우며 스포츠에 관련된 공부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유학 대신 결혼을 택했다.
“은퇴할 무렵에 남편을 만났어요. 남편의 꼬임에 넘어갔다고 할까요(웃음). 계획했던 공부를 못하게 됐고, 아이들을 낳으면서 평범한 주부로 살아왔어요. 하지만 제가 살아온 삶에 후회나 불만은 없어요. 사실 저는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소원이었어요. 아이를 키우면서 힘든 적도 많았지만 아이들이 너무도 잘 자라줘서 고맙고 행복해요.”
육상 트랙과 축구장을 떠난 부부의 삶은 조용했다. 한동안 전업주부로 살던 그녀는 큰애가 두 돌이 지나고 나서야 운동선수가 아닌 직장인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그 첫 직업이 보험설계사였다.
“선배 언니가 집에만 있으면 안 된다고, 사회생활을 해보라고 권유를 하더라고요. 좀 내성적인 성격이라 쉽지 않은 직업이지만, 배운다는 생각으로 다녔어요. 그 경험은 현재를 열심히 사는 자양분이 됐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쌍둥이를 가지면서 그만뒀죠.”
그 후 임춘애는 수입차 딜러, 헬스트레이너, 육상동호회 코치 등의 일을 경험했고, 1년 6개월 전쯤에 남편과 함께 칼국수집을 열게 됐다. 육상에 대한 미련은 정말 없을까. 그녀는 이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
“아주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래도 지금은 아이들이 우선이에요.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엄마로서 책임을 다한 후에 생각해보려고요. 나이가 좀 들어서도 가능하다면 학교에서 코치부터 차근차근 지도자 생활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트랙에서 다시 임춘애를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가 인생이란 긴 트랙을 누구보다 열심히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두 부부의 일상의 모습이 곧 눈에 들어왔다. 남편은 배달준비로, 아내는 학교에서 온 아이들을 챙기러 나갈 준비로 분주했다.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과 가냘픈 체격에 연민까지 불러일으켰던 ‘라면소녀’ 임춘애. 그녀의 달리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국민영웅’이라는 타이틀은 오래전에 내려놓았지만, 제2의 인생을 달리느라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가 20여 년 만에 자신의 영광 속에 숨은 이야기들과 최근의 일상을 공개했다.
“제일 가슴 아팠던 소리가 ‘배부르니까 못 뛰네’라는 거였어요. 사람들은 그 말을 너무 쉽게 하더라고요”
돌이켜보면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당시로는 초대형 국제스포츠제전이었던 1986년 제10회 서울아시안게임. 아시아 육상계에서도 비주류였던 한국이 중국을 제치고 육상 중·장거리 800·1500·3000m에서 무려 세 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그것도 어린 소녀가 거둔 성적이었다. 이후 소녀는 그야말로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라면소녀’라는 별칭을 달고 뛰었던 어린 소녀. 23년이 지났어도 이 소녀의 이름은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바로 임춘애다.
‘국민영웅’의 타이틀 벗고 ‘칼국수집 사장’으로 살아가는 일상 임춘애는 지금 남편과 함께 용인시 수지구청 부근에서 칼국수집을 운영하고 있다. 예전에 비해 살이 좀 붙은 모습이지만 호리호리한 체격과 날카로운 턱선은 오래전 모습 그대로였다. 취재진이 방문했을 때, 그녀는 남편과 함께 가게를 정리하고 있었다. 정리하는 손놀림이 꽤 익숙해 보였다. 정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요즘 장사하기 어떠냐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전보다 손님이 좀 줄기는 했지만, 요즘 경기에 비하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에요. 7∼8년 동안 운영돼온 가게를 인수해서 단골손님이 꽤 있거든요. 그리고 저를 보러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도 좀 있어요(웃음).”
세월의 힘일까, 그녀는 생각보다 사교성이 좋았다. 긴장한 빛이 역력해 보이던 과거 인터뷰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직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가게 매출이 좀 줄어서 이제는 저희 둘이 장사를 해요. 아침 열 시에 나와서 밤 열 시에 집에 들어가죠. 세 시까지 점심 장사를 하다가 아이들 학교가 끝날 무렵에 잠시 집에 가서 아이들을 돌봐요.”
그녀는 은퇴 후 프로축구 선수 출신인 이상룡 씨와 결혼해 올해 중3이 된 딸 지수, 초등학교 2학년인 쌍둥이 아들 강이와 산이를 두었다. 한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스포츠 스타는 가족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살며 소소한 행복을 즐기고 있었다.
세 개의 금메달에 숨은 눈칫밥 그리고 설움
임춘애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가게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세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고 수줍게 웃고 있는 앳된 소녀.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그날의 감동은 그녀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나 잊을 수 없는 짜릿한 추억이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이야기로 흘렀다. 사실 대회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가 금메달을 따리라고는, 더구나 세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아시안게임이 제 일생에서 컨디션이 가장 좋았던 때였던 것 같아요. 다 뛰고도 힘든 줄 몰랐으니까요. 일이 되려고 그랬나 봐요.”
금메달을 땄을 때 처음 느껴지는 감정은 환희보다는 ‘이젠 밥값을 했구나’라는 안도감이었다. 세 개의 금메달 뒤에는 ‘눈칫밥의 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시안게임이 열리기 4개월 전까지만 해도 저는 대표선수가 아니었어요.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하지도 않았죠. 그런데 제가 전국체전에서 3관왕을 하면서 추가선발이 된 거예요. 저로 인해 그 대회에 못 나간 선수도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대표팀 안에서도 미운 오리새끼였어요. 무조건 잘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사실 임춘애의 국가대표 선발을 놓고 육상계 안에서는 말들이 많았다. 육상연맹선발위원회가 다시 열렸고, 당시 막후 실력자이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인 이규동 씨의 지원 사격에 힘입어 그녀는 대표선수로 뽑혔다. 그 후 초등학교 때부터 스승이던 김번일 코치도 함께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와 김 코치는 태릉선수촌 안에서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느닷없이 들어온 이들에 대한 시선은 따갑기만 했다. 다른 육상 대표선수들과 별도로 훈련을 해야만 할 정도였다.
“코치님께서는 성적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매일 밤 가위에 눌리곤 하셨어요. ‘금메달 못 따면 너랑 나랑은 끝이다’라는 말도 자주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 800m에서 첫 금메달을 땄는데도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당시 임춘애는 1위보다 2초가량 늦은 2위로 들어왔으나, 1위였던 인도의 아브라함 선수가 규정보다 빨리 레인을 벗어난 것으로 판정되면서 뜻하지 않게 금메달을 받았다. 이를 두고 육상계 일각에서는 “금메달을 주웠다”며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 1500m와 3000m를 잇따라 우승하면서 실력을 입증해 보였다. 더욱이 3000m 우승 기록은 한국신기록이었다.
“어쩌면 모든 것이 우연과 행운 덕분인지도 모르겠어요(웃음). 대회 전 기록으로는 중국 선수들에 훨씬 못 미쳤거든요. 특히 3000m는 10초 정도 차이가 났죠. 그런데 저는 평소보다 잘 뛰었고, 중국 선수들은 한국에 와서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는지 10초가량 부진한 기록을 냈어요.”
‘헝그리 정신’의 대표 아이콘이 된 그녀
3관왕이 되자 사람들은 육상의 불모지에서 별이 떴다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모든 언론의 포커스는 임춘애를 향했다.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신데렐라가 된 것이다. 그리고 결승선을 힘겹게 통과한 당시 우승 소감은 전설처럼 전해져왔다.
“라면 먹으면서 운동했어요. 우유 마시는 친구가 부러웠고요.”
이 말에 국민들은 안타까움과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 ‘헝그리 정신’에 딱 맞아떨어지는 그 말은 언론에 집중 보도되면서 신화처럼 굳어졌다. 이때부터 그녀에게는 ‘라면소녀’라는 별명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이 일화가 한 언론사의 오보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초등학교 합숙 훈련 때 외부에서 증정 받은 라면을 간식으로 먹었다는 말이 와전됐어요. 운동선수가 어떻게 라면만 먹고 운동을 할 수 있겠어요. 특히 육상은 기록 경기이니만큼 체력이 중요해요. 사실 몸에 좋다는 좋은 보약이란 것들도 많이 먹었어요(웃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임춘애는 가난을 딛고 성공한, ‘헝그리 정신’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됐다. 그런 이미지 덕분에 2년 후에 열린 88서울올림픽에서 성화 최종 봉송자가 되는 영광도 안았다.
“고 손기정 선생님이 트랙 반을 돌고 제가 나머지 반을 뛰었어요. 너무도 영광스러운 일이었죠. 그런데 그 시나리오가 막판에 갑자기 바뀐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나중에 안 사실인데, 원래 최종 봉송자는 손기정 선생님이셨다고 해요. 그런데 개막을 3일 앞두고 이 사실이 외부로 새어나갔고, 조직위원회가 고민을 하다가 저한테 전화를 한 거죠.”
어부지리로 마지막 성화 최종 봉송자가 됐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이화여대 1학년 재학 시절, 88서울올림픽에 출전한 그녀에게 국민들의 관심이 다시 한 번 쏠렸다. 국민들은 그녀가 올림픽에서도 아시안게임만큼의 성과를 내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기록은 여전했지만 예선에서 탈락하고 만 것이다.
“그 후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배부르니까 못 뛰네’라는 것이었어요. 그 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말을 너무 쉽게 하더라고요.”
대학교 3학년 때 그녀는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했다. 전부터 골반에 부상이 있던 데다 대학에 들어가 키가 8cm나 자라면서 몸의 균형이 안 맞아 부상이 악화됐던 것이다. 어쩌면 부상당한 몸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깊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아시안게임 후에 몸이 계속 안 좋았어요. 부담이 많았던 경기여서 어떤 일이 있어도 성과를 내야 한다는 생각에 몸을 많이 혹사했거든요. 그러면서 부상이 오게 됐고, 체력적으로도 힘에 부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주위에서는 ‘멀쩡하던 애가 성공하고 나니까 정신상태가 틀렸다’는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이후에는 정말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싫어졌어요.”
스타보다 세 아이의 평범한 엄마가 나에게 맞는 옷
은퇴를 하고 나니 아쉬움도 있지만 큰 짐을 벗었다는 홀가분함에 마음이 가벼웠다. 은퇴 후 임춘애는 애초 일본 유학을 계획했었다. 어학도 배우며 스포츠에 관련된 공부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유학 대신 결혼을 택했다.
“은퇴할 무렵에 남편을 만났어요. 남편의 꼬임에 넘어갔다고 할까요(웃음). 계획했던 공부를 못하게 됐고, 아이들을 낳으면서 평범한 주부로 살아왔어요. 하지만 제가 살아온 삶에 후회나 불만은 없어요. 사실 저는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소원이었어요. 아이를 키우면서 힘든 적도 많았지만 아이들이 너무도 잘 자라줘서 고맙고 행복해요.”
육상 트랙과 축구장을 떠난 부부의 삶은 조용했다. 한동안 전업주부로 살던 그녀는 큰애가 두 돌이 지나고 나서야 운동선수가 아닌 직장인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그 첫 직업이 보험설계사였다.
“선배 언니가 집에만 있으면 안 된다고, 사회생활을 해보라고 권유를 하더라고요. 좀 내성적인 성격이라 쉽지 않은 직업이지만, 배운다는 생각으로 다녔어요. 그 경험은 현재를 열심히 사는 자양분이 됐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쌍둥이를 가지면서 그만뒀죠.”
그 후 임춘애는 수입차 딜러, 헬스트레이너, 육상동호회 코치 등의 일을 경험했고, 1년 6개월 전쯤에 남편과 함께 칼국수집을 열게 됐다. 육상에 대한 미련은 정말 없을까. 그녀는 이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
“아주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래도 지금은 아이들이 우선이에요.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엄마로서 책임을 다한 후에 생각해보려고요. 나이가 좀 들어서도 가능하다면 학교에서 코치부터 차근차근 지도자 생활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트랙에서 다시 임춘애를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가 인생이란 긴 트랙을 누구보다 열심히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두 부부의 일상의 모습이 곧 눈에 들어왔다. 남편은 배달준비로, 아내는 학교에서 온 아이들을 챙기러 나갈 준비로 분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