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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가 표준원기인 킬로그램원기는 미터원기와 더불어 국제미터협약(우리나라는 1959년에 동 협약에 가입함)에 의하여 1885년에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국제도량형국(BIPM)에서 백금 약 90%와 이리듐 약 10%로 제작된 국제원기로 킬로그램원기는 고유번호 no.39, 미터원기는 no.10c로 1894년 조선 고종 31년에 도입되었고, 당시 국제원기는 55조가 제작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킬로그램원기와 미터원기를 한 조 이상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을 포함하여 23개국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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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조선 고종황제 때부터 선진 23개국만이 보유하고 있는 국제 미터원기와 킬로그램원기를 도입하여 100여 년이 지나고 과학이 고도로 발달된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킬로그램원기를 사용하고 있다. 모든 나라의 국가원기는 주기적으로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국제도량형국에 보관하고 있는 국제원기와 상호 비교 교정을 실시하고 있다. 우리 원기도 1971년 국제원기와의 비교 교정을 받았는데 국제원기급의 정밀도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국제도량 형국에서도 우리 원기가 진품임을 확인하였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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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원기는 1902년 도량형 규칙이 제정 공포됨에 따라 조선 왕궁에 평식원이 설치되고 평식원 청사 건물이 현 용산구 원효로 1가에 원기실 등 3동을 건립하여 독립된 원기실에 보관하였다
이 후 1905년 근대 법률의 효시인 대한제국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이 제정 시행됨에 따라 이들 원기는 국가의 계량계측 표준원기로서의 자리매김을 굳건히 하게 되었고 당시 농상공부 대신이 보관하였다. 그리고 평식원은 1904년 조선통감부 농상공부 평식과로 개편되고, 1910년 조선통감부 용산분실에서 관리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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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원기 중 미터원기는 1960년 10월 국제미터협약에 의한 제11차 도량형 총회(GCPM)에서 1미터의 기본 단위를 크립톤86 원자의 2준의 2pic와 5d5 사이의 전이에 해당하는 방사선이 진공에서 전파할 때 1,650,763.73파장과 같은 길이로 정의함에 따라 미터원기는 국가원기로서의 기능을 종료하고 각 나라마다 부원기로 사용하였으며, 킬로그램원기는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국가원기의 자리를 변함없이 지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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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의 수난 일제 강점기가 다하여 일본이 패망 직전 군수품 제작에 필수적인 귀금속 조달을 위해 백금 90%와 이리듐 10%인 우리 국가원기는 1945년 2월 일본 군부에 의해 징발되어 일본 나가사끼 해군공창으로 이송되어 용광로에 들어갈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킬로그램원기와 미터원기는 식민지인 한국의 것이기에 앞서 국제적인 보물로서 이를 용해하여 군수품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국제적인 망신이 된다고 주장하는 학계의 요청을 받아들여 용광로에 들어가는 것을 잠시 뒤로 미룬 사이 8.15 광복과 더불어 세상에서 사라질 뻔한 운명을 면하게 되었다.
그 후 1945년 9월 주한 미군정청 상무부 상무국에 도량형소를 설치하였는데, 초대 소장 페나쓰리 씨와 한국인 소장 이호식 씨가 맥아더사령부에 진정하여 1946년 4월 한국 국제미터원기와 킬로그램원기를 일본으로부터 되돌려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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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우리나라 원기가 처음에 국제 도량형국(BIPM)에서 주 프랑스 일본대사관에 넘겨주었다는 사실과 일본계량연구소의 원기실 앞에 쓰여 있는
“일본은 국제원기급의 국가원기를 3조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중 1조를 1946년 점령군 사령부의 명령에 의하여 한국에 이양하였다”기록 때문에 우리 원기가 참으로 우리의 것인가를 의심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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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수난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상공부에 중앙도량형소가 설치되어 국가원기를 관리하게 됨에 따라 용산 청사(조선조의 평식원 건물)의 원기실에 이들 원기를 보관하였으나 6.25사변으로 우리 국가원기는 또 한 번의 수난을 겪게 되었다.
6.25 당시 중앙도량형소에 근무하였던 조원태 씨에 의하면, 6월 27일경 근무지인 중앙도량형소에 출근하니 이상한 군복을 입은 사람 10여 명이 원기실을 지키고 있었는데 원기를 탈취하기 위한 특수부대임을 훗날 알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우리나라는 9.28 수복과 함께 군·경과 중앙도량형소 직원으로 특수부대를 편성하여 제일 먼저 한강을 건너 용산에 있는 원기실을 열어 보았으나 원기실에는 원기보관함만 남아 있고 원기들은 없었다.
그러나 수복 후 여러 날 지났을 무렵 한국은행으로부터 상공부장관실로 전화가 걸려와 한국은행 금고 속에 잣대모양의 이상한 물건이 있으니 와서 확인하라는 통보를 받고 중앙도량형소 직원이 달려가 보니 은행금고 속에 미처 가져가지 못한 귀금속, 장신구 등이 널려 있는 가운데서 미터원기와 킬로그램원기를 찾아냈다고 한다. 그 후 이 원기들의 분실을 우려하여 최근까지도 한국은행 금고에 기탁하였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우리 원기가 6.25사변 때 없어졌으며, 현재의 원기는 부산으로 후퇴할 때 잘 보관하지 못한 책임이 두려운 나머지 누군가가 모조품을 만들어 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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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 어느 날 동아일보에 ‘우리나라 국가표준원기가 진짜인가? 가짜인가? 그리고 정말 대한민국의 것인가?’라는 가사가 크게 게재된 적이 있다. 우리 원기는 진짜다. 모든 나라의 국가원기는 주기적으로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국제도량형국에 보관하고 있는 국제원기와 상호 비교 교정을 실시하고 있다. 우리 원기도 1971년 국제원기와의 비교 교정을 받았는데 국제원기급의 정밀도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국제도량형국에서도 우리 원기가 진품임을 확인하였다.
일본은 자기나라의 국가원기인 미터원기 no.22와 킬로그램원기 no.6, 부원기 no.20c와 no.30에 대하여는 그 도입 경위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나 우리나라 원기 no.39와 no.10c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으며, 조선 고종 황제 때 지은 평식원 건물과 원기실, 원기함은 조선 고종 때부터 우리가 원기를 보유하고 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는 프랑스와 1886년에 수교하였으나 1897년 1월 처음으로 프랑스 파리에 주불 조선공사관이 개설되었으므로, 파리에 대표부가 없는 우리나라로서는 1894년에는 원기의 인수를 부득이 다른 나라의 대사관에 의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1905년 광무 9년 제정된 대한제국 법률 제1호 도량형법에서 도량형의 원기는 백금제의 막대와 분동으로 하고 이들 국가원기는 농상공부 대신이 보관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미 우리 원기를 가지고 있고 국가적으로 보존했다는 확실한 증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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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필자가 계량계측 업무에 20년 이상 종사하면서 1970년대 중반, 조선 고종 때 도입한 우리나라 국가원기의 구입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를 방문했다. 이 때 모 위원이 자기가 조선 고종 시대 궁 내부의 금전출납부와 같은 내탕금을 살피던 중 원기가 도입될 무렵 내탕금에서 큰 돈이 외국으로 빠져나간 것을 발견하고 몹시 궁금해했다. 그것이 혹시 국가원기의 대금이 아닐까하는 말을 듣고 다음 해 예산에서 약 150만원의 용역비를 마련하였으나 2년 뒤 턱없이 모자라는 인건비 때문에 거절당한 후 다시 시도하지 못했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지금이라도 뜻있는 인사가 나타나 내탕금관련 자료를 조사해보고 조선 고종 때 원기 도입을 위해 자금이 나간 것을 확인했으면 한다.
둘째, 1973년 중앙계량국이 없어지고 새로 신설된 공업진흥청에서 계량계측 업무를 주관함에 따라 서울 용산구 중앙계량국 청사를 비워줄 때 100년이 넘는 원기실을 문화재로 보존하지 못한 일이다. 이후 원기실은 헐려버렸고 지금 그 자리에는 용산구청이 들어서 있다.
셋째, 중양계량국의 문서 창고를 두어 달 이상 뒤져서 찾아낸 원기 도입 시에 딸려 온 프랑스어로 된 관련 문서를 5부 이상 복사하여 원본은 관리부서에 넘겨주고 복사본은 당시 관심이 많았던 직원 몇 사람이 나누어 가진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현재 관리부서와 담당자가 몇 차례 바뀌면서 원본은 물론 복사본까지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넷째, 100여 년을 모아 전해 내려오던 각종 계량계측기의 원기, 표준기, 기준기와 검·교정시설과 장비, 옛날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였던 소머리가지자, 세종대왕 때 자와 되로 사용하였던 황종척, 돌로 된 저울 추, 조선조 평식원에서 검정을 받아 당시의 검인이 뚜렷하게 찍혀 있는 척관법으로 된 되와 말 등 각종 도량형기 등의 유물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초대 중앙도량형 소장 이호식 씨와 과학자 권영대 박사가 일본으로부터 우리나라의 국가원기를 찾아올 때 찍은 사진과, 당시 맥아더사령부에 제출한 진정서와 귀국 보고서 등을 잘 챙겨두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