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박정희대통령을 존경하는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곰돌이담덕
인터넷에서 받은 글입니다. 누가 적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올립니다.
글재주가 이정도만 되어도 좋을텐데..워낙 글재주가 없어서..ㅡㅡ;;;
카리스마적 리더쉽의 소유자 박정희(朴正熙)
1. 도 입
박정희에 대한 현재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그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대통령의 치적을 보면 ■ 경부고속도로
건설 ■ 새마을 운동 실시 ■ 포항종합제철소 건립 ■ 수출 100억불 달성 ■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
■ KAIST 설립 ■ 자주국방을 위한 미사일, 핵무기 개발시도 등이 있다. 경제분야에서 이룩한 일련의 업적과
관련하여 우리 나라를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의 위치까지 이르게 하였으며,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주국방의 길을 열기 위한 노력했던 모습에서 민족주의자로서의 박정희의 리더쉽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점에 대해 박정희의 독재적 리더쉽에 대한 비판의 의견도 만만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재 노무현 정권의 리더쉽 부재와 관련하여 지난 60~70년대의 박정희 정권을 통해
박정희의 지도자로써의 리더쉽에 대해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박정희의 리더쉽에 관한 사례
1) 철저한 친인척 관리
그동안 우리나라 역대정권은 친인척의 부정부패로 인해 정권에 불명예스런 오점을 남긴 경우가 많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친인척을 엄격히 관리해 잡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제가(齊家)에
실패한 대통령이 치국(治國)이나 평천하(平天下)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이권으로부터 친인척을 떼어놓는 데에 무척 엄격했다. 아무리 가까워도 예외가 없었다.
◦제조업을 하는 박대통령 누이의 아들이 어머니를 통해 쉽게 대출받으려 한다는 정보가 청와대에 보고된
적이 있다. 그 누이는 어머니 대신 朴대통령을 업어 키운 무척 가까운 혈육이었고 아들은 이를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대출청탁이 바로 청와대에 보고된 것은 이권개입을 감시하는 제도 덕분이었다.
朴대통령 누님같은 청탁건이 또 있겠다 싶어 조치를 취했다.
◦1973년 봄 어느날 뉴스시간에 「연희동에서 교통사고가 나 사람이 죽었는데 가해자가 권력층 인사라
경찰이 제대로 수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갔다. 박대통령이 진상을 알아본 결과 가해자는
박대통령 누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 사실을 알자 박대통령은 대노하여 직접 서울시경국장을
불러 조카를 구속시키도록 지시했다
◦박대통령은 금융기관과 조달청. 전매청에“ 국회의원이나 권력기관에서 엉뚱한 부탁을 하면 바로 보좌관 에게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보고하지 않으면 기관장을 문책하겠다”는 엄명을 내려놓았다. 실제로 몇몇 은
행장으로부터 “공화당의원 누구 누구가 대출을 부탁한다”는 정보가 들어왔고, 朴대통령은 의원들에게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되며 다시 그런 일이 있으면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는 친필 경고서한을 보냈다.
◦朴대통령 내외는 일가 친척에게 엄한 얼굴만 보인 것은 아니다. 생계나 다른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을 때는 직접 자상하게 보살펴주었다. 그 대신 친인척 한사람 한사람에게 대통령 일가를 빙자해서
이권에 개입하면 절대로 안되며 이를 위반할 때는 엄벌하겠다는 방침을 알리고 자숙을 당부했다.
이권개입이 생기면 이를 예방하지 못한 비서실 담당자도 엄한 문책을 받았다. 朴대통령은 문제가 있을 때는
시정을 엄하게 지시했기 때문에 친인척에 관한 정보보고는 사실과 틀려서는 안되었다.
민정비서실 직원들은 다른 비서실 못지않게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2) 주변인을 압도하는 인간 박정희
◦1974년 육영수여사 피살 사건 당시 국립극장에서 박대통령은 연설을 하던 중 총성이 나자 박대통령은
연설대 뒤에서 몸을 낮추었다. 경호원들이 옆에 붙었다. “『잡았나?』 『총쏘지 마!』”
이것이 박대통령의 첫 반응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는 순간에도 경호원들이 청중석을 향해 사격을
할 때의 유혈극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여사가 피격당한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이도 박대통령이었다.
경호원에게 “『저기 우리 식구한테 가봐!』”라고 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연설을 계속하겠습니다』라면서
8․15 경축사를 다시 읽기 시작하였고 총성으로 중단되었던 귀절 바로 뒷문장을 정확히 짚어내 읽어갔다.
퇴장할 때 박대통령은 육여사의 고무신과 핸드백을 자신이 직접 주워 갖고 나오다가 경호원에게 넘겼다.
그리고 박대통령은 독립유공자들을 위로하는 리셉션장에 들러 공식행사를 끝낸 뒤 서울대 병원으로 갔다.
박대통령은 그 위기의 순간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대담하면서도 세심하게 처신하였다.
공인과 사인의 갈림길에서 보여준 박대통령의 이 같은 태도는 너무나 인상적이었으며 보는 이에 따라 가슴을
아프게 했다. 박대통령을 평하기를 「청탁을 같이 들이마시는 사람」「작게 치면 작게, 크게치면 크게 울리는
큰북 같은 분」이라고 한 말이 있었다. 박대통령은 담대해야 할 때는 무섭게 담대하였고, 자상해야 할 때는
자상했으며, 슬플 때는 누구보다 눈물이 많았던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그의 주변인들은 박대통령이 당황하거나 서둘고 허둥대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늘
정리하고 계획하며 대비하는 사람이었다. 박영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일할 때였다.
박대통령이 동남아 순방에 나서기 하루전인데 갑자기 박비서관을 부르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박대통령은 『내가 깜박 잊고 갈 뻔했다.』면서 민정반 활동비를 건네주었다고 한다. 『출국을 하루
앞둔 시기에 그렇게 사소한 데까지 신경을 쓰는 데 질려버렸다』고 박영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회고했다.
◦박대통령은 늘 긴장된 자세를 유지하고 집무에 임했다고 한다. 집무실에서는 소파에 거의 앉지 않고 회의용
의자에 꼿꼿이 앉아 일을 보았다. 이 의자는 L자로 딱딱하게 생긴 것이었다. 박대통령은 집무실에서는 물론
차중에서도 낮잠을 자거나 졸지 않았다.
항상 정신을 칼날처럼 곧추세우고 있었거나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또 사람을 긴장시키기도 하고 감동시키기도 하며 그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사례로 박대통령이 무역 진흥확대회의에 참석한 기업 대표들과 인사를 하는데 효성그룹의
사장과 악수를 하면서 『조홍제 회장께서 입원해 계시다면서요. 꼭 안부를 전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병상에서 대통령의 그말을 들은 조회장은 기분이 좋아서 『적자를 봐도 좋으니 수출량을 늘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 72년 가을 국립교향악단 정기 연주회에 박대통령이 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일 연주회는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아니라 국립합창단과 소년 합창단 등을 동원한 교성곡(交聲曲)이란 이름이 붙은 대합창제였다.
막이 오르자 음악연주 대신에 사회자가 대통령 업적을 칭송하는 시를 읊고 있었다. 청와대 정무비서실과
문공부 당국자들의 과잉충성이 발동한 것이다. 옆에서 보니 박대통령의 눈꼬리가 올라가면서 불쾌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관람을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온 박대통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런 연주회는 당장 그만 두라는 것이었다. 계획에 따르면 그 연주회는 지방순회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박대통령의 모처럼의 교향악단 참관은 그 후로 다시 이루어지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전 보좌관의 이야기이다. 박대통령에게 아들 지만군이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저는 학교공부도 복잡해서 제대로 머리에 정리가 안 되는데 아버지는 그 복잡한 나라일을 어떻게
다 보십니까?』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내 책상의 서랍들이 정치, 경제, 문화, 사회로 분류돼 있다고 하자.
나는 정치 서랍을 빼내어 일을 볼 때는 거기에 정신을 집중하고 그것을 닫은 다음, 경제 서랍을 빼내 일을
볼 때는 정치는 싹 잊어버리고 경제에 온 정신을 쏟는다. 그런데 너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서랍들을
한꺼번에 열어놓고 있으니 어느 하나도 제대로 공부하고 있지 못한 거야』그렇게 박대통령은 서랍을 빼고
닫는 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분이었다고 전해진다. 아침에 어느 장관에게 화를 냈다가도
다음 면담자를 맞을 때는 언제 그랬던가 할 정도로 냉정하게 변했다. 변화하는 그 순간순간의 상황에
진지할 수 있는 분이 박대통령이었다.
박대통령은 기억력이 비상했지만 쓸데없는 것은 아예 외우려 하지 않았다. 라디오 주파수를 몰라 라디오에
다가 KBS, MBC란 표지를 붙여 놓았다. 사소한 것에는 무관심하고 중요한 것에는 신경을 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럼으로 해서 일의 중요한 가닥이나 흐름, 그리고 사물의 핵심을 결코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포항제철 확장공사 계획을 박대통령께 보고하게 된 외지 담당 비서관이 계획안과 포철의 현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장사진과 브리핑차트를 들고 집무실에 들어가 열심히 설명을 했다.
설명을 다 듣고 난 박대통령이 공장 사진을 보면서 「이 공장 옆에 있던 배수로를 어떻게 처리했느냐」고
물었다. 모든 것을 암기했던 그 비서관이었지만 대통령이 관심있게 보아 온 배수로를 알 턱이 없었다.
박대통령의 꼼꼼함을 알게 해주는 부분이다.
◦박대통령은 고위인사이외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세세히 신경을 쓸줄 알았다고 한다. 1970년 가을에
박대통령은 2군 사령부 관할 지역을 시찰하기 위해 헬리콥터 편으로 날아가다가 헬기고장으로 논에
불시착한적이 있었다. 박대통령, 박종규실장, 경호원이 황급히 뛰어내리고 뒤따르던 경호헬기도 긴급
착륙하였다. 박대통령은 혼이 났을 터인데도 사고헬기 조종사에게 『수고했다』고 위로한 뒤 다른 헬기로
갈아타고 목적지까지 날아갔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청와대 목수에게도 『수고 많습니다』고 존칭을 썼다.
추석 등 명절이 되면 수첩을 꺼내놓고 선물이나 금일봉을 돌릴 대상자들을 직접 뽑았다. 아들 지만군이 다닌
고교 교장에게까지 인사를 했는데 사적인 경우에는 대통령이란 직함을 안쓰고「박정희」란 이름만 썼다.
박대통령의 이런 부분들은 그의 수하들의 자발적인 충성심을 유도하는데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박대통령에 대한 비판사유중에 자신의 권력욕때문에 3선개헌도 하고 10월 유신조치도 취했다는 비판이
있는데, 그것은 요즘의 정치인들처럼 권력 그 자체나 축재를 위한 욕망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을 장악한 바탕에서 국가건설을 하자는 것이 그 권력욕의 핵심이었다. 국가가 어려울때는 국가 권력이
중앙에 집중되어야 한다. 박대통령의 권력욕은 일을 위한 욕심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박대통령은 사후에 아무런 재산도 남기지 않았을 정도로 청렴한 지도자였다.
3) 경제위기 극복과 근검절약
◦70년대 박정희의 경제위기 극복의 핵심은 지도력이다. 한국은 60년대초 경제개발을 시작한 이래 두차례
극심한 경제위기를 겪었다.
첫번째는 63~64년 외환보유고가 1억달러에도 미치지 못한 외환위기였다. 오일 쇼크로 불리는 73~74년의
에너지 파동은 가장 심각한 위기였다. 청와대에서 박대통령이 실천한 근검절약은 너무 심할 정도였다. 여름에
냉방기를 켜지 못하게 하고는 자신은 집무실 문을 열어놓고 선풍기와 부채로써 더위를 견디었다. 겨울에도
난방기 트는 데 인색하여 직원들은 속옷을 두껍게 입고 더운물이나 커피를 자주 마시면서 한기와
싸워야 했다. 박대통령은 집무실 화장실 변기속에 벽돌 한 장을 넣어 두게 했다.
그만큼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10․26사건 뒤 청와대를 정리하던 직원들이 박대통령의 침실의 변기 물통에서도 벽돌을 발견하고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침실이면 다른 사람이 들어갈 리가 없는 곳이고 그런 절약을 억지로 할 필요도 없을 터인데
박대통령은 절약을 쇼로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정직한 방법으로 했던 것이다.
박대통령은 전력을 아낀다고 집무실에서 책상 위 전등만 켜 놓고 일을 보았다. 어둑어둑한 저녁 때 누가
들어서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야?』라고 기웃거리기도 했다
박대통령은 여름 휴가를 진해에서 보냈다. 진해 앞바다에는 저도라는 섬이 있었다.
대통령은 낮에는 이 저도에 가서 쉬다가 진해로 돌아오곤 하였다. 박대통령은 1972년 여름에 박종규실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도에 있는 일제시대의 목조건물을 수리해서 잘 수 있도록 해놓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1973년 여름 박대통령은 고속도로를 따라 진해에 도착하였다. 그날 진해에 밤에 도착한 박대통령일행은
밤늦게 저도에 상륙하였다. 거기에는 목조건물은 없어지고 새 돌집이 한 채 서 있었다. 일반주택만한
2층건물이었다. 호화주택으로 분류할 정도는 아니었다. 박대통령은 새집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실장을 불러』라고 했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나타나자 벼락치듯 꾸중을 했다. 『집수리하라고 했지 누가
새로 지으라고 했어? 너는 뭘 시키면 꼭 이렇게 하더라. 짐 내리지마! 도로 나가자』며 화를내자 당시 건물
건축을 담당했던 정주영 회장은 『각하, 제가 새로 짓도록 했습니다. 각하께서 쓰시는데 저의 사재인들
아깝겠습니까. 돈이 많이 들지도 않았습니다』고 해명을 해 대통령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경제성장의 수단으로 재벌의 필요성을 인정했지만 가진 자들의 호화판 생활이나 재벌의 횡포에
대해서는 체질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공화당 중진의 김모 의원은 신축한 자택에 박대통령을 모셨다가
혼이 난 경우도 있었다.
◦70년대 위기 극복사를 다시 들여다보면 야전 점퍼가 등장한다.
중동전쟁으로 오일 쇼크가 터진지 한달후인 73년 11월8일 정부는 국민.기업.정부가 참여하는 대대적인
에너지 10% 절감운동을 발표했다. 朴대통령과 청와대가 운동에 앞장섰다.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金正濂)씨의 기억. "朴대통령이 근무 하고 기거한 청와대 구본관은 난방 온도를
낮추고 전등불을 줄여 춥고 컴컴했습니다. 朴대통령은 집무실에서 5.16혁명 때 입었던 그런 야전 점퍼를 입고
일했습니다. 朴대통령은 집무실의 샹들리에 (천장 전등) 도 끄고 스탠드 하나만 켜고 서류를 봤습니다."
대통령이 먼저 절약을 실천하니 장관과 공무원들도 자연히 따랐다고 한다. 실장방엔 인왕산쪽으로 창문이
나있어 그는 스탠드 조차 켜지 않았다. 장예준장관은 "정부청사도 전등을 형광등으로 바꿨고 그나마 줄여서
켰다"고 회고했다.
73년 10월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침공하자 이집트를 미는 아랍국가들은 원유값을 올려 무기화했고 미국 등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나라들엔 원유판매를 금지.제한했다. 한국은 제한 대상이었다. 이것이 그 공포스런
오일 쇼크다. 한국의 충격은 무척 컸다.
당장 원유 부족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고 세계를 휩쓴 물가인상은 대외 의존도가 큰 한국의 물가를
폭등시켰다. 73~75년 3년간 한국의 도매물가는 1백%가 뛸 정도였다. 원유값이 오르자 무역수지가 극도로
악화돼 국가경제는 파산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정부가 발표한 에너지 10% 절감운동을 보면 당시의 위기상황이 생생히 찍혀 나온다. 전등 하나 덜쓰기 운동,
실내온도 18도 유지, 목욕탕 영업 단축, 출퇴근. 통학때 2㎞ 걷기, 차종별 경제속도표 부착등등 한 나라의
절체절명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던 것을 알수 있다.
위기가 터지자마자 외국에 '경제특공대' 를 급파하는 대통령의 결단은 위기극복에 큰 역할을 했다. 朴대통령의
친서를 품고 미국 석유 3사의 회장을 만난 특보는 유조선 몇 척의 원유분량을 추가로 따왔다. 朴대통령은
이스라엘과 가까운 한국을 무척 미워한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는 최규하 (崔圭夏.전직 대통령)
외교특보를 밀파했다. 崔특사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도착하자마자 친 (親) 아랍정책 4개항을 발표해야 했다.
사우디는 공급제한을 해제했고 쿠웨이트는 우리나라 대우를 중립국 차원으로 올렸다.
朴대통령은 위기를 관리하기 위해 헌법이 부여한 권한을 행사했다. 朴대통령은 74년 1월14일 긴급조치 3호를
가지고 TV 카메라 앞에 섰다. 그는 달러를 잡아먹는 에너지의 절약과 국민의 협조를 호소했다.
"우리는 값 비싼 수입자원을 최대한 절약해야만 합니다. 우리 경제는 어느 때보다 어려운 고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심기일전해 자신과 용기를 갖고 정부.국민이 합심해…. "고 국민에게 호소하였다. 그 결과
74년 많은 나라가 마이너스 성장에 시달렸지만 우리는 GNP 8.1%, 수출 38.3% 성장이라는 국난극복의
기록을 세웠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은 위기극복을 위해 인사를 만사로 여기고 매우 중시하였다.
73~74년 에너지위기 돌파는 하나의 전쟁이었다. 참모들은 작전을 수립했고 총사령관으로 나선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군단장.사단장에 해당하는 부처장관을 지휘했다. 승리의 요인은 팀워크였다.
朴대통령은 경제참모.장관을 치밀하고 신중히 골랐으며 일단 쓰면 믿음을 주고 오랫동안 일을 맡겼다.
경제기획원.재무.상공.과기처 등의 장관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각종 경제성장기록은 군단장.사단장들이
그런 사령관을 믿으며 전투를 훌륭히 치러냈음을 보여준다. 일선지휘관의 능력과 열정은 안정적인 재임에서
자연스레 드러났다. 5.16을 일으키느라 신세진 군동료.후배도 많았고 이중엔 가신 (家臣)급도 있었지만
朴대통령은 70년대 경제개발이라는 공익(公益) 앞에선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능력있는 테크노크라트를
중용했다. 발탁과정은 실사구시 (實事求是)였고 사조직의 천거는 끼어들지 못했다고 한다.
3. 엇갈린 평가
1) 긍정적 견해
현재 노무현 정부의 정치 위기상황과 맞물려 박정희의 카리스마적인 정치 리더쉽에 대한 평가는 더욱더
높게 평가되고 있다. 현재 노무현 정권과 비교해 볼 때 두 정권의 초기상황은 상당히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대통령이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고, 실제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면에서는 비슷한 점이 많지만 집권후 두명의 대통령은 상당히 다른 길을 간 것같다.
첫째, 박정권은 사회 각계 각층에서 실력있는 사람들을 다 끌어 모았다. 계획없이 시작한만큼 일 잘하는
사람 찾는 일에 비중을 많이 두었다. 그것이 경제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노무현정권은 코드가
맞는 사람만 찾다보니 경험없는 인사기용으로 정권초기부터 흔들리며 결국은 대통령 재신임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둘째, 60년대는 박정희라는 강력한 리더쉽를 중심으로 국민들이 강하게 결집했다. 지금 리더쉽 부재의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을 결집시키지 못하고 있다.
셋째, 박정희 정권당시는 자의든 타이든 간에 국민들은 '잘 살아보자'는 구호아래 똘똘 뭉쳤고,
이념적으로 통일되어 일사분란한 체계로 경제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룩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국민소득 2만
달러라는 구호를 외치며 선진국 진입을 시도하고 있지만 이러한 외침은 국민들에게 공허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념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그동안 많은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어려운 조건하에서도 그들만의 「리더쉽」을 발휘해 왔다.
어떤 인물의 리더쉽에 대해서 연구하려면 먼저 그 자신의 성품을 알아 보는 것이 중요하다. 박정희는
앞의 사례에서도 보았듯이 추진력과 결단력, 청렴결백 등의 성품을 소유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에
옳다는 판단이 서면 꼭 해내고 마는 성품은, 그 자신에게 때로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 온 때도
있었으나, 그의 생애를 통해 일관되게 실천되어졌다. 박정희가「리더쉽」에 관해 어떠한 생각을 가졌는지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5.16 직후에 그가 쓴「지도자도」에 보면, 그는 지도자의 자격요건으로서
탁월성과 공정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도자라는것은 무엇보다 그 지도의 역량이 다른 여러 사람보다
뛰어나야먄 하며 아울러 지도자체가 오로지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뛰어남과 올바름이라는 가장
중대한 요소를 지니고있는 지도자라야만 능히 다른 여러 사람들을 훌륭하고 공정하게 지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국가와 민족을 지도해야 할 정치라는 것도 요컨대, 그 절대적인 근거로서 '올바름'이라는 것을
지녀야만 비로소 국가를 지도할 수 있는 진정한 정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지도자의 참된 길은 오로지
올바름에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라고 나와있다. 그는 또한, "지도자는 대중과
유리되어 그위에 군림하는 권위주의자나 특권계급이 아니라,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동고동락하는 동지로서의 의식을 가진 자라야 한다. 국민을 지도함에 있어서 친절하고 겸손하며 모든
어려운 일에 솔선수범하여 난국을 돌파하고, 사를 버리고 오직 국민을 위하여 희생한다는 숭고한 정신을
가져야 한다."면서,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한 도덕감정을 강조했다.
박정희의 「리더쉽」스타일은 여러 가지 그의 경력과 연관되는 경험적 소산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부에서 그의 군사독재적 정치방식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는 견해도 다수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오랜 군대생활을 통해서 군인정신이 뼈 속까지 스며든 전형적인 군인이었기 때문에 군대식 행동방식이
그의 정치행태에도 반영되었고, 해방 이전에 성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근대적 계층의식
또는 군대식 사고 방식을 다분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5·16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집권초기에는 추종자들의 토론을 주도하는 민주적 지도자의 면모를
보였고, 국민의 여론에 따르는 자세도 보였다. 그러나 통치에 경험이 쌓이면서부터는 서서히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인「리더쉽」스타일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경부고속도로건설에 관한 결정을 예로 들면,
박정희는 당시 국내외의 저항과 측근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가 민주적인 지도자였더라면, 자신이
판단하기에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압도적 반대 밑에서는
자기의견을 후퇴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고속도로를 건설했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그의 독재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결정이 국가에 더러 이익을 가져다준 면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재 정권이 민주적으로 정치권과 이익단체, 노동권에 끌려다니면서 휘청거리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볼 때 과거의 이러한 박정희 방식의 추진력은 때론 국가발전을 위해
필요하리라 본다.
2) 부정적 견해
박정희가 한국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박정희 식의 산업화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형태의 산업화도 가능했을 것이고, 일련의 경제발전의 성과의 공을 일개 개인의
정치 지도자에게 모두 환원시킨다는 것도 무리가 있다. 현장에서 노력했던 노동자야말로 경제발전의 최대
공로자이고, 주인공이다.
무엇보다도 박정희의 리더쉽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그 박정희가 가진 아집과 독선이라 볼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결정에서도 보았듯이 아무리 국가발전에 지대 공헌을 했다고 하더라도 다수가 반대하는
계획에 대한 독단적 결정이 현재의 상황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비민주적이라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또한 박정희는 자기 아니면 안된다는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고로 결국 유신변혁의 전조가 된
삼선개헌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3선개헌을 단행할 때에는 그와 함께 5·16을 일으켰던 동지들도 정치도의상
옳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는 이유로 개헌에 반대했다는 사실은 특히 주목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고집스러운 권위주의화된 통치방식으로 민주적 토론을 외면하고 국민의 여론을 조작하여 자신의 의사대로
3선개헌을 단행하였다. 집권초기에 농민들과 막걸리도 같이 마시고,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찾기도 하는
대중성을 가졌던 그의「리더쉽」스타일은 3선개헌을 고비로 권위주의적인 유형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10월 유신후에는 거의 비민주화된 권위주의적 지도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박정희는 대중과 호흡을 같이하고 동지의식을 갖는 서민적인 지도자에서 서서히 독선과 아집의
권위주의적이며 독재적인 지도자로 변모해 갔던 것이다. 자신과 같은 강력한「리더」만이 한국의 생존권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자기도취의 사고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의 영향력과 관련하여 박정희의「리더쉽」행태를 정리해 보면, 5·16이 미국의 개입없이 발생된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5·16의 성공여부가 미국의 태도에 달려있다는 것을 잘알고 있던 박정희로서는 그후,
미국의 정책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로는 미국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시도도 하였지만 결국은
미국의 냉전정책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국내외적으로 위신을 높이고 정치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던 시기는 바로, 그가 미국의 정책에 부합하는 한·일 국교정상화와 월남파병을 단행함으로써
한·미간에 밀월관계가 지속되던 때라는 점을 보더라도 그의「리더쉽」이나 정권안보가 미국에 의해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박정희가 자신의 종신집권 의욕을 구체화 해주는
유신변혁을 단행했을 때 미국은 군사적으로 한반도에 매우 불리한 정책을 채택하고 있었다. 모든 면에서
위기로 파악한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위해 핵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체제보위를
위해 대미로비활동을 강화했다. 박정희의 핵개발 시도노력은 미국으로서는 극동정책에 대한 일종의
도전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의 박정희의 인권탄압 문제는 그를 더욱 곤경에 빠뜨리고 말았다.
4. 결 론
박정희가 고인이 된지도 약 24년이 지났다. 박정희가 집권한 18년의 기간이 한국 정치사상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박정희를 높게 평가하는 가장 핵심은 그의 정치적 리더쉽 측면일 것이다. 비록 그가
집권하면서 정책을 집행하기 위해 잘못된 수단을 동원한 것에 대해서는 많은 비난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결과론적으로 볼 때 그의 리더쉽은 우리나라를 한단계 더 도약시켰고 한국의 발전을 세계에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독재자로 인식되고 있는 현재의 현실을 볼 때
박정희의 리더쉽이 독재적인 「리더쉽」이 아닌 민주적인「리더쉽」을 행사하는 바탕위에 이루어
졌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