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너리굴 문화마을//글,사진─백야 유인현 님
안성 너리굴 문화마을
너리굴 문화마을(엄마목장)은
임계두 원장이 30여년간 가꾸어 놓은 안성의 산속 문화 마을입니다.
너리굴 마을로 오르는 입구에는 붉은 기와로 예쁘게 지여진 집들이 이국적인 풍경으로 반깁니다.
너리굴이란 너르디 넓은 골이라는뜻의 안성 토박이 말로 너리굴의 전설이전해집니다.
지금으로부터 250여 년 전, 너리굴의 골짜기에 스님이 기거하는 작은 암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암자에서 멀리 내다보이는 작은 마을은 조금만 가물면 식수가 없어 곤란을 겪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어느 해는 가뭄이 극심하여 더 이상 마을에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때 마을 어르신들은 암자의 스님은 물자리를 알고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스님을 찾아가 청하였는데, 스님은 묵묵히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수차례의 간곡한 청을 받고는 마지못한 듯 이르기를, 동네 가운데 큰 느티나무를 베고 그곳에 우물을 파면 물이 나올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스님의 말대로 하였더니 정말로 맑은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 나왔습니다. 덕분에 마을은 활기를 찾고 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스님이 기거하는 암자에 빈대가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스님은 암자에 불을 지르고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풍수지리상 마을의 느티나무는 너리굴암자를 배라고 볼 때 그 돛대에 해당하는 곳이었습니다. 배의 돛대를 베어 버리니 배가 좌초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스님은 이를 알면서도 백성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이곳 암자터에서는 기와조각, 사기조각, 상평통보 등 옛것들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때의 우물이 비봉약수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보존되어오고 있습니다.
암자에서 멀리 내다보이는 작은 마을은 조금만 가물면 식수가 없어 곤란을 겪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어느 해는 가뭄이 극심하여 더 이상 마을에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때 마을 어르신들은 암자의 스님은 물자리를 알고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스님을 찾아가 청하였는데, 스님은 묵묵히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수차례의 간곡한 청을 받고는
마지못한 듯 이르기를, 동네 가운데 큰 느티나무를 베고 그곳에 우물을 파면
물이 나올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스님의 말대로 하였더니 정말로 맑은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 나왔습니다.
덕분에 마을은 활기를 찾고 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스님이 기거하는 암자에
빈대가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스님은 암자에 불을 지르고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풍수지리상 마을의 느티나무는 너리굴암자를 배라고 볼 때
그 돛대에 해당하는 곳이었습니다. 배의 돛대를 베어 버리니 배가 좌초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스님은 이를 알면서도 백성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이곳 암자터에서는 기와조각, 사기조각, 상평통보 등 옛것들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때의 우물이 비봉약수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보존되어오고 있습니다.
너리굴 입구에서부터 시원한 계곡에서 불어오는
상큼한 바람과 함께 야외의 곳곳에 전시한 미술 조각 작품들이 눈길을 끕니다.
산속 넓고 넓은 너리굴 곳곳의 건축물들도 콩크리트가 아닌 목조 건물과 유명 작가의 모자이크등으로
예술 마을의 멋스러움이 묻어 납니다.
미술관, 어린이들의 공예방, 공작실,극기훈련장 ,천문대,사슴목장등 부대시설과 예식장,
전문 강사가 지도하는 단체 수련회,문화예술 체험등 할수 있는 시설과
수영장이 구비되여 있어 어린이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불어로 "별"을 의미 하는 "에뜨알"은
너리굴 문화마을의 훈제 요리 전문점으로 맛이 일품이란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시간에 쫒겨 맛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넓은 너리굴 산책길을 따라 유명 작가의 조각품을 감상하면서 산책하는 코스도
좋았고... 꽃사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과 인사를
나누는 즐거움도 마냥 좋은
너리굴 문화마을.
너리굴 문화마을 홈페지
http://www.culture21.co.kr
출처: 장유 친구들 원문보기 글쓴이: 열락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