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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는 양반 사회였다. 원래 양반은 관제상 문반과 무반을 칭하는 단어였지만 점점 지배 신분층을 뜻하는 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조선초 신흥 양반 세력으로 형성된 士大夫, 사대부란 문관 5품 이하를 士, 4품 이상을 大夫라 한데서 나온 지칭어였지만 문관 관료 전부나 문, 무 양반 관료를 지칭하는 단어가 된다. 그러나 이것도 점차 사림, 사류 순으로 바뀌어 가며 넓은 범위로 양반층 즉 기득권층을 확장해 놓는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사회적 경제적, 변동과 軍功, 納粟에 의한 신분 상승 등으로 양반층이 증가된다. 유학은 사족으로서 벼슬하지 못한 유생을 지칭하던 확실한 양반직이였으나 그 수가 사회적 변동으로 帳籍上 급격하게 증가된다. 이런 현상은 유학 재생산, 충의 위의 유학으로 이동, 서얼 후손의 합법화한 유학 호칭 등에 기인된 것이다. 유학을 통해 신분이 상향 조정되면서 신분 해체가 가속화된다. 이때 양인의 입장에 있던 여사울 이존창은 명재상 이항복의 7대 손 이기양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하게 된다.
이기양은 영조(50년) 1774년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천재였다. 그는 다시 정조 19년(1795년) 정시문과에서 급제한 후 부수 찬이 된다. 1800년경 청나라에 가서 천주실의 등을 직접 대하고 귀국 후 이가환, 이벽과 사귀며 우주의 기원과 질서, 인간의 영혼과 후세 상벌 등에 대하여 토론을 한다. 이로서 천주 교리를 신봉하고 믿음으로 다가선다. 이를 안 이익의 제자로서 남인 공서파를 자처하던 안정복은 서신을 보내 질타한다. 이를 받은 이기양은 겉으로는 남인 공서파들과 어울리며 위장하지만 아들 이충억이 천주교에 연루되면서 반대파들이 천주교 교주라 비난 끝에 단천으로 귀양가 생을 마감한다. 이존창은 신분상승을 목적으로 유학을 배우지만 이벽, 이가환, 권철신을 만나면서 가성 직제도에 편승한 후 고향 여사울로 내려와 전교를 시작한다.
이존창의 별명은 단원(端源)으로 충남 예산 농민 출신 학자로 이기양을 통해 이가환, 이벽 등을 만나고 권철신 제자가 되어 체계적으로 교리를 배운다. 고향에서 전교를 하던 중 가성직 제도가 잘못된 것을 안 후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하여 윤유 일에게 여비를 주어 북경으로 보내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게 된다. 그러나 1791년 정조 15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배교를 하고 홍산으로 가 칩거한다. 그러나 곧 배교를 뉘우치고 더욱더 열성적으로 전교에 매진한다. 이 당시 집중적으로 전교하여 천주교를 뿌리내린 곳이 바로 삽교천 주변 신평 일대였다. 그러다 그는 1795년 다시 체포되어 고향으로 옮겨진 후 6년 동안 연금되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서울로 압송되어 정약종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은 후 공주 감영으로 가 참수되어 순교의 길으로 나서게 된다. 여사울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전교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순례와 걸음 여행이 바로 오늘의 신앙적 여정이다.
내포란?. 내륙 깊숙이 발달된 천 안에 조성된 포구를 말하는 것이다. 충남 삽교천과 무한천 주변에는 작고 큰 포구가 많았다. 남쪽 방향에 있는 웅천을 중심으로 곳곳에 조성된 내포도 있는데 천주교사에서는 삽교천 무한천 중심의 내포를 상부 내포라 하고 웅천 부근 내포를 하부 내포라 칭 하고 있다. 특히 내포지방에는 수산물과 곡물이 풍부하여 경기지방과 거래가 많았는데 이를 바탕으로 신흥 부자들이 이조 중엽 이후부터 향반의 위치에 서서 양반을 뛰어넘어 신흥 세력으로 사회적 기여도가 높아지고 국가에 받치는 공물도 수량이 엄청났다. 이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간척사업을 벌여 더 많은 토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환경적 중심에 있던 사람이 바로 이존창이라는 사람이었다. 무심천이 있는 곳이 바로 이존창이 태어난 여사울이다. 이런 지형적인 바탕으로 재력을 늘린 그는 향반으로서 존경받으며 살고 신분적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농민 출신으로 유학에 접근하여 이기양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이 바로 천주교를 접하는 동기가 된다. 그리고 그는 가성직 자로서 고향에 돌아온 그는 자신이 부리던 노비들을 풀어 주고 전답을 나누어 주며 신앙의 근간이 평등사상을 실천한다. 내포 어느 지역 보다도 제일 먼저 천주교가 태동하고 끈끈한 공동체가 구성된 신평지역이라는 사실은 바로 이존창의 전교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박해의 피해도 많을 수밖에 없었지만 제대로 된 성지는 아직은 없고 개발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원래 원머리는 언머리였다. 언머리란 뜻은 간척사업을 하며 뚝을 쌓은 간척지의 첫머리를 뜻하는 이야기로 세월이 바뀌며 음이 변하여 원머리가 된 것이다.
원머리에 도착한 후 기도를 드리고 severinus의 설명을 청취한 후 성지 주변에 있는 공소를 참례하기 위하여 원머리 공소로 자리를 옮겼다.
원머리 공소는 약 140년이 된 거룩한 복음을 증거 하는 장소다. 현재 있는 건물은 약 50여 년 된 건물이지만 최초로 공소가 만들어진 시기는 140년 전이었다. 대전교구 신평 본당에서는 원머리 공소 14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하였고 원머리 성지를 개발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33살의 나이를 떠올리며 원머리 성지개발 토지를 매입하기 위하여 1인 월 3만 원씩 납부하여 33만 원이 대지 한 평 가격인 한 평씩 봉헌할 수 있도록 성지 개발사업 재원 기금 조성하기도 하였었다.
신앙의 사랑방 역활을 하던 곳이 바로 공소다. 선조들의 신앙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소다. 50여 년전, 이러한 공소를 건축하여 봉헌하려면 수많은 난관이 따라야 하였다. 재정도 열악하지만 당시 건축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시설들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신앙의 시대상을 증거할 수 있도록 보존되어야 한다.
원머리 공소를 참례한 후 떠나기 전 외아들을 성직자로 봉헌하신 촌부를 만났다. 쉽지 않은 일인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옛 그날처럼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는 신앙의 못자리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다음 순례지인 음섬공소로 순례의 발 길을 옮겼다.
당진 신평에 있는 공소는 다음과 같다. 한정리, 원머리 공소, 매산리, 새터 공소, 음섬 공소이다. 음섬은 삼 면이 바다로 되어 있어 밀물이 들면 섬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다. 또한 음섬 물이 들면 물의 높이를 가늠할 수 있던 곳이다. 박해 시 피신했던 교우들이 다시 박해가 끝난 후 돌아와 피아티라는 곳에서 공소가 봉헌되었다가 지금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피아티는 피난 터라는 말이 변한 것이다. 음섬 공소는 새터 공소에서 독립하여 봉헌된 공소로서 1895년 당시 신자수는 모두 37명, 합덕 성당 천신이었던 양촌 성당이 관할이었으며 사제는 퀴클리 사제였다. 그러다 다시 새터 공소와 합류되었다가 다시 1929년 독립한다. 당시 관할은 합덕성당으로 사제는 피리 외방 전교회 소속 페롱 신부였다.
음섬 공소 참례 후 다시 포구로 나갔다.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는 조선에 개항 전 모두 21명의 선교사를 파견하였었다. 갈매못에서 3명의 선교사가 순교하시고 새남터에서 9명의 선교사가 순교하신다. 그리고 병사로 7명이 선종하시고 3분의 선교사는 살아 조선을 떠나게 된다. 그 세분의 선교사는 다음과 같다. 페롱( Feron ), 리텔(Ridel), 칼레(Calais) 신부다. 이 중 칼레 강신부는 상주에서 사목활동 중 박해를 만나 백두대간 상 한실에 머물다 연풍을 거쳐 배티 성거산으로 피신 후 리텔, 페롱 신부와 합류하여 솔뫼를 경유하여 신자들의 안내를 받아 서해 이곳 포구를 이용하여 조선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떠난다. 물이 맷돌처럼 돌아 들어온다 하여 붙여진 포구. 칼레 강 신부님은 고향 프랑스로 돌아가 수도원으로 들어 가 평생 조선 천주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생활을 하시다 선종하시고 페롱 신부는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 묘를 파헤쳐 국제적인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이 된다. 많은 질책을 받다 다시 인도 고아 지방으로 전교를 하다 병사로서 선종하고 리텔 신부는 주교가 되어 조선에 다시 한불 수호조약 이후 입국하지만 조선 왕에 의하여 입국 거절되어 다시 만주로 떠나게 된다. 병인박해는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하여 박해중 가장 길고 참혹하게 이어져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고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동진하여 깊은 산중으로 숨어 들어가 교우촌을 형성하고 살아가게 된다. 오늘 찾은 성지에는 미사가 없어 참례할 수 없어 대신 부근에 있는 공세리 성당으로 가 미사에 참례하기 위하여 버스 편으로 공세리로 이동하기 위하여 포구를 떠났다.
4년 전 그리고 이 후에도 여러차례 다녀 간 곳이다. 한적하고 고요하였던 공세리 성지 입구 마을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커피 전문점 여러곳이 문을 열었고 마을 분위기도 산뜻하게 변해 있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많이 찾는 곳이 바로 공세리 성지다. 그 영향으로 입구 마을도 많은 변화가 온 것 같다.
한국의 천주교는 믿는 사람들의 순교의 피에 따라 성장하고 지켜졌고 또한 전교를 막으려 고문하고 배교 시키고 참수하였지만 오히려 순교의 혈이 튀는 방향으로 전교가 이루어지고 꺼지지 않는 종교의 등불이 되어갔다. 순교자 개개인이 지녔던 신앙의 등불은 하늘에 올라 하늘의 불빛 즉 미리내가 되어 지금도 밝게 빛나고 있는 중이다. 4월, 공세리 성지의 모습은 순교의 역사성을 빛으로 표현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빛을 순교자가 흘린 피라고 생각하곤 한다. 주홍빛 잔디꽃과 다홍색 철쭉이 언덕을 감싸고 만개되어 피어 성지를 순교의 선혈로 감싸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생각으로 4월 일정에 미사참례 성지로 정하 것임을 고백한다.
지주와 선주들이 국가에 낸 세금류의 건어물과 곡물을 쌓아 두었던 창고가 있던 곳이 바로 지금의 공세리 성당 자리다. 양촌성당, 합덕 성당을 이어서 봉헌된 공세리 성당은 신평일대와 합덕, 신리, 여사울 등이 조망되는 곳에 서 있다. 그리고 한국의 최초, 두 번째 사제의 출생지가 조망되는 곳에 서 있을만큼 높은 곳에 서 있다. 그것은 성당에 모셔지는 천주님의 사랑과 은총의 표현인 것이다. 한국 천주교의 터전은 순교터나 그 터가 내려다 보이는 곳 언덕에 세워져 있다. 박해를 하는 권력자들이 정하는 장소는 국가의 존립를 상징하는 단과 묘가 있는 성안을 피해 이동 인구가 많고 물이 흐르는 장소를 선택하여 참수의 장소로 정하였다. 서소문이 그렇고 새남터가 그러하고 남한산성 동문 밖 처형장이 그렇다. 지방의 대부분 처형장소도 다를바가 없었다. 이에반해 개항 후 종교의 자유가 이루워지자 성전이 신축되어 봉헌되기 시작하는데 순교 터 자리거나 순교터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성전이 산축되어 봉헌된다. 공세리도 이러한 기본틀을 충족하고 있는 성전이다.
1895년 6월양촌성당(陽村本堂, 구합덕성당의 전신)에서 분리 창설되었으며, 공세리란 명칭은 조선시대 충청도 서남부의 조세를 보관하던 공세창(貢稅倉)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충청도 내포(內浦) 지역에 위치한 공세리 일대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에 이미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李存昌)에 의해 복음이 전래되었다. 이 후 박해기를 거치면서도 신앙을 보존하던 이 지역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에는 양촌본당의 관할 아래 있다가 1895년 6월드비즈(Devise, 成一論) 신부가 공세리로 부임하면서 본당이 설립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드비즈 신부는 이미 매입한 10칸 정도의 기와집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꾸몄고, 1897년 6월에는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공세창이 있던 일대를 매입한 다음, 1899년 그 자리에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또 1905년에는 조성학당(1927년 폐쇄)을 세워 교육 사업에도 앞장서 공세리 발전에 기여하였다.
한편 1920년대 들어 신자수가 증가하자 기존의 성당으로는 늘어나는 신자들을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드비즈 신부는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지휘 감독하여 1922년 9월에 현재의 고딕 양식의 서양식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였다. 이 후 9대 주임 이인하(李寅夏) 신부는 1958년 초에 강당을 신축하였고, 1971년 1월에는 13대 주임 김동욱(金東旭) 신부가 성당을 증축하고 별관을 완공하였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던 고약으로 유명한 이명래(요한)는 바로 공세리가 고향이며 신자였던 관계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전교사며 공세리 초대 신부 드비즈 신부를 통해 고약을 만드는 법을 배워 나중에 고약으로 유명세 날렸던 것이다.
오늘, 공세리를 전국에서 찾는 신자들이 300 명이 넘어 야외 미사를 할 수 밖에 없어 순교자 현양비 앞에서 미사 집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사전 성당 사무실과 교감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알게 되었다. 식사문제를 성지 식당을 통해 해결하려다 수많은 신자들이 이용하려면 많은 시간이 지체되어야 하고 또한 지방 성당 현실은 대부분 신자들이 고령인 관계로 관리의 어려움이 따른다. 이를 감안하여 점심을 다른 순례객들에게 양보하기로 하고 성지 입구에 있는 단골 집으로 정하고 점심을 해결하였다.
입당 성가와 함께 미사가 집전되고 주례사제는 부제께서 집전해 주셨다. 입당성가와 함께 제대로 나오신 주례사제께서 오늘의 의미를 새기는 말씀 나눔을 해주시고 독서를 이어서 복음 들려 주신 후 강론 중에 성지와 관련된 이야기를 중심으로 장 시간 이끌어 주셨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거룩한 하느님의 한국에서의 역사성을 재인식하며 기쁨으로 모셨다. 파견성가를 부르고 성지개발 사업과 관련된 회원가입 안내를 고지 받은 후 미사참례를 마쳤다.
공세리 성지를 떠나기 전 성모님을 모시고 기념촬영을 한 후 마을 입구 식당으로 가 예약한 음식 나눔을 형제적 친교 안에서 함께 하였다.
오후 일정은 귀경하면서 탐방하기로 한 사도세자 능과 정조대왕 능을 찾아 수원화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28세의 나이로 요절한, 그것도 부왕에 의하여 뒤주에 갇혀 죽어야 하였던 사도세자, 아비가 죽어가는 광경을 지켜봐야 하였던 어린세자 정조, 나이가 들어 나라의 군주가 된 정조는 양주 배봉산 아래에 묻힌 사도세자를 수원 화산으로 옮겨 융능이라 하고 모신다. 그리고 후에 자신이 묻힐 능을 아버지를 매일 올려다 보일 수 있는 위치에 만들어 놓고 그곳에 건능이라 하고 후에 묻힌다. 수원 화산 기슭에 살아 있는 孝心을 통하여 오늘의 혈연, 가족 등에 대한 정체성을 다시 살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원래 계획은 화산 능선을 걸어 융건능 전체를 조망하며 역사와 오늘을 비교하며 ..... 그러나 5월 말까지 산불 예방 기간이라 출입이 통제되어 융능과 건능 사이 숲길을 오고 가며 걸으며 사색하기로 하였다.
용주사는 융릉을 수호하고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정조 14년(1790) 세운 절이다.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 때 세워 고려시대 때 소실된 갈양사의 옛터라고 전한다. 천보루는 절을 세울 당시에 지은 누각으로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짜맞춘 익공 양식이다. 좌우에 있는 요사채보다 앞쪽으로 나와 있으며, 2층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좌우 요사채 앞의 계단을 통해야 한다. 정면에서 보면 요사채 건물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 대웅보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천보루 아래를 통해야 한다.
천보루의 건축 형식이 일반 절과 전혀 다른 기법을 사용하였다. 일반절에 樓閣을 세울 때 기초석 위에 가둥을 세우나 天保樓는 대웅보전으로 올라 가는 유일한 통로로서 여섯개의 돌 기둥 위에 짧은 목재 기둥을 세워 궁궐식 기법을 따랐다. 기초석이 아니라 돌기둥 역활을 하고 있으며 또한 주련처럼 각 돌기둥 마다 孤輪獨照江山靜, 고륜이 홀로 비추니 강산이 고요하고, 自笑一聲天地驚 스스로 웃는 한 소리에 천지가 놀래네 적혀 있는데 뜻은 다음과 같다. 부처께서 홀로 깨달으시니 자연도 숨죽이는데 부처님께서 깨달아 웃는 소리에 만물이 놀랬다. 가운데 돌 기둥에는 眞歸祖師在雪山, 진귀조사(문수보살)가 설산 숲속에서 叢木房中待釋迦 석가모니 부처님을 기다렸네 傳持祖印壬午歲, 임오년에 조인을 전해 받으니 心得同時祖宗旨 동시에 조사의 종지를 얻었네라 각인해 놓았다 내용으로 보아 임오년에 본찰로 인정 받고 사도세자 묘의 원찰로 지정받았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나무 주련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걸려 있다. 空看江山一樣杕 빈 마음으로 강산을 바라다 보니 한 모양으로 우뚝 서있고, 不得東風自有春 동풍을 기다리지 않고 봄은 스스로 있네. 母年一百歲, 常憂八十兒 백살먹은 어미가 팔십먹은 아들을 항상 걱정하시니 欲知恩愛斷, 命震始分離 은혜와 사랑은 명이 다해 비로소 떠나누나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깊은 것을 보아 용주사를 아버지의 원찰로 정한 후 정조의 효심을 표현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孝란?. 인간의 아름다운 가치다. 그런데 그 가치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으니~~^^ 인간의 미래가 밝은 것만은 아니다. 물질이 앞서는 세상. 많은 것을 생각하는 시간을 등 아래를 서성이며 갖어 보았다. 그리고 천불전 벽에 그려져 있는 심우도를 보며 空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며 절을 걸어 나왔다. 나를 버리는 일, 그 길이 믿음의 길이고 사부를 닮아가는 길이임을 자각하며 불가의 空의 깨달음을 화두로 붙들고 용주사를 떠났다. 그리고 가만히 趙芝薰 청록파 시인의 승무를 노래 부르며 절 집 그늘을 걸었다. 혜화전문대학 재학중 이곳 용주사에서 祭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단숨에 달려 내려 온다. 그리고 祭의 전반을 본 후 僧舞라는 시를 완성한다.
승무의 유래에 대해서는 세존이 영취산(靈鷲山)에서 법화경을 설(說)할 때 천사색(天四色)의 채화(綵花)를 내리니 가엽(迦葉)이 이를 알아차리고 방긋 웃으며 이 광경을 모방했다는 설과 악신 건달파(乾達婆)가 법화경을 설할 때의 광경을 온갖 풍류로 아뢰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승무의 구체적인 기원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한국의 전통춤에는 중들이 추는 춤이 많은데 부처의 공덕을 찬미한 작법(作法)은 의식춤으로서 절에서 지내는 큰재(49재, 영산재)나 승려들의 포교방법 등으로 사용했으며 제석거리·제석굿 등이 있고, 탈춤에서는 상좌춤·노장춤, 한량무에서의 중춤 등이 한국 전역에 남아 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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