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지 않는 기도
2022년 1월 30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4:17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세상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은 뜨문뜨문 기도하는 겁니다. 아쉬울 때나 혹은 자랑할 할 게 생겨서 기분 좋을 때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쉬지 않고 기도’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에게 낯선 기도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기도는 인간들이 해내는 기도입니다. 모든 종교가 다 들어 있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쉬지 않는 기도’는 일반성에서 벗어난 기도입니다. 일반적인 기도는 다양한 기도들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그것을 포괄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기도하는 당사자의 사정이 내용으로 담겨지는 기도합니다. 이런 일반적인 기도의 성격을 한꺼번에 규정하시는 기도가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님의 겟세마네기도입니다.
이 동반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제자입니다. 이들은 기도하다가 곧장 잠들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그렇게 다급하고 시급한 일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계속 일반적인 기도에 머물러 있었던 겁니다.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하고 있는 모든 기도는 보편적 기도로 묶어버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는 그 보편적 기도로부터 벗어나십니다. 보편적 기도란, 인간들은 그 어떤 기도를 한들, 동일한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함이 확정되었음을 말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기도입니다. 이 보편적 기도의 특징은 ‘자기 원대로’하는 기도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기도는 ‘자기 원대로 마옵시고’의 기도입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즉 하나님 아버지를 아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확정된 그 뜻, 그 내용을 아시는 분도 예수님뿐입니다.
그 담긴 내용을 다 이루신 바가 바로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왜 죽음이 성공이냐 하며는 모든 인간들이 알고 있던 신은 모조리 우상이었습니다. 인간들이 기도할 때에 자신들은 엉터리 신에게 기도한다는 사실을 본인이 알아 챌 수가 없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가 산 위로 올라가고 난 뒤, 산 밑에 남아 있던 백성들은 모세가 빠진 자리를 뭘로도 채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든 것이 금송아지였습니다. 인간들의 내부에 어떤 신이 들어 있었는지를 알때까지 모세는 산 위에서 하나님에게 붙잡혀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뒤늦게 제대로 모세가 타이밍 맞춰 산에게 내려와서는 금송아지를 가루로 만들어 백성들의 마음 속으로 되돌려주었습니다.
즉 모든 인간들의 보편적 신은 곧 ‘우상’이었다는 겁니다. 이런 비율법적인 상태를 집약해낸 사건이 유월절 사건입니다. 여기에는 ‘무엇이 우상이 아닌 신’인가를 사건으로서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본심이 드러났습니다. 다 죽입니다. 모든 가정의 맏아들을 죽인다는 겁니다. 더는 대를 이를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인들을 죽었습니다. 하지만 어린양의 피를 보고서 넘어갔기에 이스라엘은 그후에 줄곧 어린양의 죽음에 종속되는 나라이어야 그들이 살 수 있습니다. 잠언 28:9에 보면,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인간들은 우상만을 신으로 알고 있기에 아무리 기도한들 소용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기도 응답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자신들을 버리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반대로 지키는 것을 내용으로 기도합니다. 인간이 악마에게 습득한 본심은 그저 행복이 아닙니다. 그 누구로부터 무시당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자신의 자존감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결코 이용당하지 않으려고 하고 이용당하다 싶으면 자기쪽에서 먼저 관계를 끊어 철저하게 자신의 가치를 지키는 본심으로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냥 기도하려니 미안하니 선악체계에 의해서 착해보이는 일과 성스러운 일에 종사한다는 것을 근거로 기도 응답을 받아내려고 합니다.
이는 곧 죄 지은 자가 저 받을 벌을 본인이 선택하겠다는 식입니다. 인간들의 기도가 얼마나 미친 깃인지 마치 달보고 기도하니 달이 직접 그 사람에게 반응을 보이면서 “날 찾아어요?”라고 대꾸하는 식입니다. 이런 경우가 과연 있을까요? 없지요. 마찬가지도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엉터리 신에게 기도해놓고서 응답을 바라면 응답하는 것은 배후의 악마 뿐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려는 응답은 누가복음 11:11-13에 나옵니다.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자기에게 다급한 것을 달라고 하셔도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께서 오직 성령을 주십니다. 이렇게 되면 기도 응답은 백성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히브리서 7:25에 보면,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의 기도 응답의 내용은 이런 겁니다. “너는 이미 죽고 너는 이미 없는 자이다” 즉 내가 따로 나답고 나의 자존감을 챙기기 위한 그 모든 시도는 하나님께서 용납해주시지 않는 것이 곧 주님의 기도의 응답이요 성령님께서는 이 기도 응답에 따라 움직이십니다. 율법이 집약된 유월절 사건에 의해서, 인간은 이미 죽은 존재 맞습니다.
따라서 죽은 인간을 살리는 몫은 주님에게 달렸습니다. 그런 주님은 성도에게 사랑을 주십니다. 사랑이란 아가서 2:16에 나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성도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쉬지 않고 자기 자신을 떨어내는 반응을 보이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광야에 만나 내리듯이 쉬지 않고, 멈추지 않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 당연한 것을 아무 것도 모두 의외의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냐를 말하며 주님 주신 연락에 반응을 보이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22-01-30 19:49
23강-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쉬지 않는 기도)220130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기도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기도는 성령 받은 사람들에게만 하는 그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복음이 없는 상태에서 기도하는 것과 복음이 있는 상태에서 기도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복음이 없는 상태에서의 기도라는 것은 “쉬지 말고” 라는 것이 성립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냥 아쉬울 때, 필요할 때, 그야 말로 우야다가 기도하는 이것은 성령을 받지 못하고 복음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모든 종교가 하는 그런 기도를 하는 겁니다. 자기 아쉬울 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는 것은 우리 아쉬움 차원에서 기도하는 것을 이미 넘어서 버린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 일 따로 있어요. 쉬지 않아야 될 자기 일 따로 있고, 그냥 쉬었다가 마음 생길 때, 마음 편할 때 하는, 기도하는 그 시간을 따로 정해놓고 그렇게 되어 버리면 이것은 자기 위주의 기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이것을 떼버리고 그냥 “기도하라” 이렇게 되어버리면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저 하늘에 있는 해나 달보고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늘 유난히 달이 밝지. 그지?” 오늘 유난히 달이 밝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는데 메시지 받은 사람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고 갑자기 달이 “나 찾았어?”라고 나온다면……, 물론 그런 경우가 있을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사람보고 이야기했지 달 보고 이야기한 것 아니거든요. 복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은 마치 달 보고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아요. 달이 우리한테 연락준 것 없잖아요. 없는데 자기가 자기 맘대로 그냥 달에게 달 이야기하니까 갑자기 달이 응답하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달이 응답하라고 달을 거론하지 않듯이 사람들이 그 기도하는 것은 이것은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 응답하는 것을 원하지를 않아요.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 자기가 갖고 놀기 삼아 믿는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해서 그냥 기도가지고 매달려 보는 겁니다. 모든 종교가 다 그래요. 불교도 그렇고 이슬람교, 힌두교, 천주교, 기독교, 기도 빠진 종교가 있던가요? 없지요. 자기가 한이 맺혀 있으니까 풀어야 되지 않습니까?
출애굽기 32장 1절에서 4절에 보면 여기에 어떤 순서가 나오는데요. 백성들이 뭘 보고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느냐 하면 모세를 보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나왔는데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이 부른다고 후딱 시내산 꼭대기로 올라갔었어요. 산 밑에 있던 아론과 남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산 밑에 대기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루 이틀……, 기다립니다. 40일 있다 올게, 라는 그런 사전의 약속은 없었고요. 시내산이 지금의 시내산이라면 2천 2백 90미터 정도 올라갔다 내려오는데 빡세게 하면 하루면 될 일입니다. 그래서 1절에 보면 하도 모세가 안 내려오니까 사람들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2절에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지요. 뭔가를 아론이 만들었습니다. 만든 이유가 분위기, 사람들의 마음이 우왕좌왕하고 단합되지 못하고 곧장 혼란에 빠질 우려가 있어서 마음 잡아주려고 여호와의 신, 마음을 여호와께 잡아주려고 송아지를 만든 거예요. 그들이 송아지 형상, 우상으로 신을 만들기까지는 모세는 못 내려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꼭대기에서 딱 붙잡고 있기 때문에 내려올 수가 없어요.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태에서 산 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라는 말이지요. 그럴 때 그들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여호와, 여호와가 다 나오는 겁니다. 각자의 여호와가 다 나오는데 그 여호와를 종합해 보니까 그게 바로 우상이었습니다. 송아지 우상이에요. 송아지형상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지 않는 사람들에요. 보지 않고서는. 달을 보든지 해를 보든지 뭘 봐야 돼요. 보지 않고 신의 것을 믿을 수 없는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각자가 모여서 송아지 우상이 되었기 때문에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그 우상을 쪼개보는 거예요.
그 우상을 쪼개서 한사람 당 한 사람 당, 금목걸이 뺀 사람들에게 다시 다 나눠준다고 생각한다면 모든 마음속, 각자 속에는 이미 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상이라는 이름으로 신이 있어요. 인간이 자연스럽게 믿는 신은 모조리 다 우상입니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기도하는 것은 전부 다 있지도 않은 우상보고 기도하는 거예요.
실제로 그 모세가 송아지형상을 가루로 만들어서 돌려줍니다. 출애굽기 32장 20절에 “모세가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 마셔라. 우상을 마셔라. 이스라엘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 모세를 믿었고 모세 없으니까 없는 상태에서 없음을 있는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우상을 만든 겁니다.
그러면 이 우상이라 하는 것은, 그들이 이미 신의 내용으로, 그들이 생각하는 신의내용으로 꽉 잡고 있는 거예요. 인간들이 하나님, 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모조리우상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여호와가 되었든, 예수가 되었든, 하나님이 되었든 그 명칭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섬기는 신은 다 우상이고요, 인간이 기도하는 모든 대상은 다 우상한테 기도하는 것, 그게 인간의 전부에요. 인간은 우상 외에 기도하는 데가 없습니다.
평생 교회 와서 새벽기도 했습니까? 우상한테 한 거예요. 따라서 인간이 신에게 기도한다는 말은 복음적 입장에서 뭐냐 하면, 인간은 지금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주제파악이 안되었기 때문에 기도라는 것을 하는 겁니다. 본인은 지금 우상을 섬기고 있는데 그 우상을 섬긴다는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신이여 도와주소서” 왜? 왜 도와줘야 되는데?
이런 경우가 마태복음 3장에도 나옵니다. 3장 7절에 세례요한이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복음이라는 것이 딴 게 아닙니다. 회개하라 심판 날이 가까웠다. 세상 이제 끝났다. 그걸 전하고 있을 때입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일단 선방 날리고요. 그 다음에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즉 “너희들은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가 무슨 내용인지 알아먹기는 알아 먹냐? 너희들이 여호와를 섬긴다고? 그거 우상이야.” 이런 뜻이에요. 여호와 섬기고 임박한 진노에 얻어터지고, 지옥 불 받고. 섬기는 것은 여호와인데 그 여호와한테 얻어맞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너희들 형편이.
그래서 이 기도라는 것, “쉬지 말고 기도하라.” 오늘 이 대목, 딱 한 문장이거든요.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것은 뭐 저도 보고 있지만 여러분도 보고 있잖아요. 묻고 싶어요. 여러분, 이게 무슨 뜻입니까? ‘기도하기는 기도하는데 드문드문 기도하지 말고 야무지게 빡세게 이렇게 기도시간 오래 하라’ 그런 뜻이겠지요.
그런데 오랫동안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거예요. 쉬지 말고. 오랫동안 하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평소에 기도시간 좀 늘이라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자주 교회에 들락날락거리라는 그런 뜻이 아니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 말이에요.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뭐든지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겁니다. 모든 게 의외라는 거예요. 우리는 아침에 7시부터 8시까지 뭐하고, 또 9시부터 뭐하고, 이렇게 드문드문 해요. 스케줄 잡아서 드문드문 해요. “쉬지 말고”라는 것, 우리한테는 하나의 일로 쉬지 않고 하는 일은 인간에게는 있을 수가 없어요. 잠잘 때 잠자야 되고, 밥 먹을 때 잠자지 않아야 되고, 잠 잘 때는 밥 먹지 않아야 되고, 뭐 이런 게 구분되어 있거든요.
쉬지 말고, 라는 것은 이 구분 자체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 는 이 말은 뭐냐 하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인의 의사에 관계없이 의외로 새벽마다 쉬지 않고 주어진 게 있습니다. 그게 바로 만나입니다. 만나는 인간이 범죄를 하든, 하나님께 불만을 하든 불평을 하든 상관없이 그냥 쉬지 않고 쏟아진 거예요. 새벽마다.
‘기도하려면 이정도로 해야지’ 이런 뜻이거든요. 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 가. 따라서 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결국 인간에게는 이 기도라는 것, 아,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다고 성급하게 달려들지 말고, ‘기도 하나는 잘 한다’ 뭐 이런 것 하지 마시고요, 내가 과연 기도할 사람인가, 자기의 죄부터 관련지어서 생각해야 돼요. 자기 죄부터 관련지어서.
잠언서 28장 2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기도하게 되면 모든 기도가 무효니라.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께 뭐 달라고 하기 전에 네가 법부터, 율법부터 온전하게 다 지켰는지 한번 돌아보라, 그 말입니다. 그렇지 않거든 나한테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뜻이에요.
시편 109편 7절에도 유사한 말씀이 나와요. “저가 판단을 받을 때에 죄를 지고 나오게 하시며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율법을 지키지 않은 상태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상태에서 기도하게 되면 그 기도하면 할수록 죄를 더 가중처벌, 받는 죄를 더욱 더해서 기도하면 기도 자체가 죄가 돼요. 너는 기도 할 자격이 없다고 그렇게 하나님이 이야기했는데 “주여, 주시옵소서.” 이렇고 있다고요. “저리 안가나!” “주시옵소서” “가! 이제는. 기도하는 죄 지은 것 봐!”
복음을 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가끔은 그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복음 알고 난 뒤에 기도할게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속으로 묻고 싶어요. ‘그래서 걱정되십니까, 아니면 기쁘십니까?’를 묻고 싶어요. 설교 처음에 한 이야기 다시 하면 인간에게는 신이 있다고요. 우상이 있어요. 가짜 신이지요.
가짜 신이 있으니까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가짜 신과 상대해요. 아쉬울 때, 어려울 때, 진짜 중도 엎어지면 “아이고, 하나님!” 안 합니까. 엎어질 때는. 그러니까 가짜 신이 있는 거예요. 가짜 신. 그 가짜 신은 항상 배후에서 악마가 작용해서 인간이 그 가짜 신으로부터 스스로 그 가짜 신을 떼 낼 수가 없어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인간의 목적은 행복이라고.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정말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사는 목적은요,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남한테 이용당하지 않으려고 해요. 심지어 하나님한테도 이용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의 목적입니다.
창세기 11장에 바벨탑 지을 때에 ‘아, 진짜 하나님한테, 신한테 눌리지 말고 우리가 신까지 올라가면 되지 않느냐?’ 그런 일치된 마음을, 일치된 마음 그게 우상이거든요, 그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게 자존감이라 할 수 있는데요. 내가 남한테 이용당하기 전에 내가 먼저 깐다. 그런 정신이지요.
거기에 대해서 배후에서 악마가 그렇게 하니까 인간으로서는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알려준 바는 이거예요. 어떻게 죄지은 자가 저 받을 복을 본인이 왜 선택하느냐 그거예요. 악마의 선악체계에 있다 보니까 자기가 믿는 신에게 여호와든 예수든 부처든 신에게 기도하려니 좀 미안하게 있잖아요.
그래서 빈손으로 오지 않고 뭐 ‘제물, 예물 드려요’ 하면서 바쳐놓고 그 다음에 이제 본론 들어가지요. ‘내가 살면서 이런 아쉬운 게 있는데 부처님, 하나님, 천지신명님, 좀 도와주소.’ 그거거든요. 그러면 진짜 이것은 달한테 비는 것인데, 달이 말 안하겠지만 말 한다 칩시다. 달한테 ‘좀 도와 주세요’ 하고 정화수 떠놓고 기도한다면 정화수가 말을 한다 칩시다. 당나귀도 말하는데요 뭐 정화수도 말할 수 있지요.
“왜 도와줘야 되는데?” 묻는다면 인간들은 뭐라고 답변하느냐 하면, 그 속내가 이래요. ‘남한테 무시당하기 싫어요.’ 그러니까 도와달라는 거예요. 행복이 목적이 아닙니다. 남한테 무시당하기 싫고 남한테 이용당하기 싫은 거예요. 만약에 어떤 가족이 있는데 가족이 따님한테 전도한다고 “너 교회 안 갈래? 예수님은 이렇게 좋은 분이거든.”
또는 “사위야, 예수님 알고 보면 참 좋은 사람이야.” 이렇게 이야기하면 뭐 예수 안 믿는 사위가 노골적으로 그런 이야기는 할 리가 없겠지만 속으로는 ‘알고 싶지 않은데요.’ 알고 싶지 않대요. 예수에 대해서, 십자가에 대해서 알고 싶지를 않대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아는 내 인생의 목적은 꽉 차 있어요. 더는 빈틈이 없어요. 여지가 없어요. 꽉 차 있어요. 남한테 무시 안당하면 그걸로 됐어요. 오케이에요.
내 타입은 내가 만들어나가요. 내 타입은요, 내가 만들어나가거든요. ‘필요할 때, 어머니 필요할 때 기도할 테니까 지금은 예수라는 분이 누군지 알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쉬울 때 드문드문 주일학교 다닌 그걸 근거로 해서 기도하고 옛날에 교회 다닐 때 하던 가락으로 ‘주님, 한번만 봐주세요.’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율법의 의미를 모르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거부하십니다. 인정을 안 해요. 신명기 23장 18절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그런 돈 갖고 오지 말라 그 말이지요. “네가 평소에 살아가는 그 모습이 그게 개 아니었던가? 그게 창녀모습 아니었던가? 율법과 상관없이 율법을 살리는 게 목적이 아니고 자기 자존감 살리는 목적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이 기도를 해? 미친 거 아니야 이거? 뭐 네 자존감 올리는데 하나님이 보태줄 일 있어? 왜 나한테 찾아오는데? 너 혼자 네 맘대로 살면서, 네 멋대로 살면서!”
율법대로 산다는 것은 너무 내용이 포괄적이면 사건으로 설명하면 간단해요. 이스라엘이 애굽에 나왔을 때에 애굽사람과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 될 사람의 구분을 아주 제대로 보여준 사건이 유월절 사건입니다. 그 사건 때, 제가 여러 번 했지만 하늘에서 두건 쓰고 일본 사무라이 칼 차고 천사들이 집집마다 허락도 없이 들어가서요, 맏아들 다 죽여 버렸어요. 다 죽여 버렸다고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어요, 그냥.
이 말은, 인간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 마땅한 존재에요. 율법은 그 사건에서 나왔거든요. 그 사건을 다시 거꾸로 다 집약해보면 뭐냐 하면, ‘죽인다’에요. 하나님이 ‘너 죽여 버리겠다.’ 이거예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 맏이는 살았잖아요.” 그냥 살았습니까? 그들이 그냥 살았어요? 그렇지 않잖아요. “나 이스라엘 사람이에요. 히브리 사람이에요. 저 착해요. 여호와 믿어요.” 이래서 살았습니까? 하나님 믿는다고 살았습니까? 죽여 버립니다.
하나님 믿는다고 산 게 아니에요. 네가 말하는 하나님이 그게 우상이기 때문에 “잘됐다. 걸렸다. 나와!” 또 죽여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자체가 갖고 있는 그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게 신학을 하든, 과학을 하든, 유신론 철학을 하든지 간에, 하여튼 신이라고 끄집어내면 전부다 우상이에요. 전부 다 우상입니다.
그러면 우상이 아닌 신은 뭐냐? 바로 하나님이 나를 죽이는 대상으로 보는 것을 그걸 인정하는 게 우상이 아닌 사람이에요, 그게. 모세를 시내산으로 따로 빼돌려서 산에서 못 내려가요. 뭘 만들기까지? 우상 만들기까지 못 내려간다고요. 우상 만들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시내산에서 내려와서 그 다음에 시내산에서 본 스케줄대로, 설계도대로 율법주고 그 다음에 제사법 주고, 이게 세트로 되어 있어요. 율법 주고 제사법 줘서 율법을 읽게 하고 거기다가 피, 바가지로 해서 피 뿌려버리고요.
이게 언약 아닙니까! 언약으로 나타난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언약, 언약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개인의 가정에 나타난 하나님께서 하나의 국가단위로 나타난 하나님이 뭐냐? 유월절 사건입니다. 나는 너희들을 데리고 다닌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어디에 복속되어 있을 때, 종속되어 있을 때 유월절 죽음이라는 거기에 종속된 상태에서 그 유월절 양의 피를 보고 그들을 데리고 가는 거예요. 그럴 경우에만 이게 우상이 아니에요.
그래서 인간은 나는 뭐 바르게 한다고 기도할 때 바르게 하는 기도를 한답시고 성경의 유명한 구절들이 있잖아요, 그거 총동원해가지고 오직 하나님께 찬미합니다, 하면서 손바닥 들어 올려 가면서 ‘주여, 이렇게 나는 십자가만 사랑하고 이렇게 나는 복음만 사랑하니 하나님, 제 아쉬운 것 좀 들어주면 안 되겠습니까?’ 이런 거요. 실컷 앞에 전 깔아놓고요, 하나님을 향하여 호객행위 하는 거예요.
나는 복음도 알고, 이것저것 십자가도 알고, 뭐 나는 돈도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고 그 나라 의를 구합니다, 해놓고 뒤에 와서는 ‘이정도 아니까 우리 좋게좋게 해서 이게 내 마지막 소원인데 이거 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나님, 나한테 어떤 것이라도, 어떤 상황을 조성한다 할지라도 저는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단 저 여자만큼은……’
저 여자만큼은 내 여자 되게 해 달라’고. 임 재범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제발 그 여자만큼은 허락해 달라고 얼마나 벌써 몇 천 번 노래 부르면서 고백했을 거예요. 노래방에서! 주님께서 우리보고 기도를 하게 하십니다. 그게 일반적 기도에요. 일반적 기도는 아쉬울 때 하는 게 일반적 기도입니다. 또 기분 좋을 때는 감사로 기도하는 게 일반적 기도에요. 일반적 기도의 특징은 다양성을 갖고 있습니다. 다양성을 한데 모으면 일반적기도가 돼요.
주님께서는 그 일반적인 기도,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나는 너보다 기도 오래했다, 또는 시간 정해서 기도했다, 오후 세시에 시간 정해서 기도했다, 또는 나는 꿇어앉아 기도하고 너는 그냥 양반다리 하고 했지, 나는 꿇어앉아 기도했다, 또는 손 모아서 기도했다, 또는 새벽에 기도했다,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런 것 있잖아요.
새벽을 깨워가지고 윤 석열 선거운동하고 있고. 새벽을 깨우고 뭐 어떻게 한다, 그런 것이 일반적 기도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기도요. 우상에서 나온 기도지요.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무슨 기도로 바꾸느냐 하면, 보편적 기도로 바꿔버립니다. 여기서 일반성의 반대말은 다양성이고 보편성이라는 것은 그것을 한데 모은 어떤 것도 그걸 이미 내용을 확정짓고 규정해 버린 것을 보편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말이 어렵게 되어버렸는데 성경말씀으로 하는 게 더 편하겠지요. 마태복음 26장 3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인간이라고 생겨먹었다면 다 할 수 있는 기도를 전부 다 자기에게 긁어 와요. 그러면 그 일반적인 기도가 예수님한테는 무슨 기도냐 하면,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보편적인 기도로 변합니다. 일반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으로 나눕니다. 보편적의 반대말은 다양성이 아니고 특수성이에요. 이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기도, 그게 바로 예수님의 겟세마네기도에요. 인간들의 모든 기도는 남들과 서로 비교하는 거예요. “너 기도 요새 왜 안 해? 나 기도 요새 열심히 해.” 이것은 일반적인 기도에요. 히스기야가 죽을 병 걸렸을 때에 죽을병에서 낫는 그것을 가지고 자기는 기도할 타임이라고 여겨서 기도하는 것, 그것은 일반적인 기도에요.
히스기야가 죽을 병 안 걸렸으면 기도 안했을 기도에요. 이것은 쉬어가면서 하는 기도에요. 쉬지 않고 기도하는 그 기도가 아니고. 아쉬울 때 하는 기도에요. 병들었을 때 또는 어려움 당할 때 하는 기도, 일반적인 기도입니다. 일반적인 기도를 주께서는 그 성격을 규정시켜 버렸어요. 어떻게? 보편적인 하나의 기도로. 뭐냐? 내 뜻대로 해 달라는 기도.
그게 바로 마태복음 26장 3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 옆에 있던 제자들 일반성을 대표하는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합니다. 제자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이 기도하자고 하니 하기는 하는데 굳이 기도할 기도거리가 별로 없어요. 관심사가 거기 없다니까요. 없으니까 기도하는 척이나 하다가 잠이 와서 다 자버린 겁니다.
밤새도록 기도하신 분은 주님 밖에 없어요. 기도하면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에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해서 내 뜻에서 아버지 뜻에로 이동하는 기도는요, 이것은 예수님만 할 수 있는 특수한 기도에요.
예수님의 기도에 의하면 인간들은 자기 뜻대로 하는 기도에 다 갇혀 있습니다. 그 기도를 못 벗어나요. 자기의 우상성에서 못 벗어납니다. 기도해서 내가 얻을 이익은 뭐냐, 그걸 자기 속에서 잊지를 못해요. 지금 예수님 옆에서 잠자고 있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그 기도가 그렇게 시급하거나 절박하지가 않습니다. 이거 하나 안하나 내 일 아침에 밥 먹으면 되는데요 뭐. 절박하지가 않아요.
절박한 것은 예수님만 절박해요. 제자들은 절박하지 않고 왠지 잠이 와요. 그냥 자는 거예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에요. 아쉬울 때나 기도하는, 띄엄띄엄 쉬어가는 기도만 생각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보편성 안에 집어넣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 일반적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 기도 어떠냐, 할 여지가 있지만 보편성이라는 것은 어떤 여지도 없도록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기도를 전부 다 꽉 쥐어서 압축을 시켜놓고 어떤 인간이 기도하든 기도 하든 안하든 인간들은 똑같다, 하고 확정지은 기도가 보편적 기도입니다.
그렇게 보편적 기도로 확정 시켜 놓고 주님께서는 홀로 거기서 빠져나옵니다. 특수한 기도로. 그 특수한 기도가 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만이 할 수 있는 기도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만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뜻을 몰라요. 다른 사람은 전부 다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아버지, 아버지, 말은 하지만 아버지 뜻이 뭔지 모르고 자기 원통하고 절통하고 자기 아쉬운 것만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의 일반적인 기도는요, 사실은 자기가 자기한테 중얼거리는 거예요. 최면 거는 겁니다. 자기가 질문하고 자기가 답변하고, 그렇게 해놓고는 ‘아이고, 벌써 한 시간 동안 기도했다.’ 한 시간 동안 자기가 자기보고 이야기했겠지요. 그게 무슨 기도입니까? 보편적 안에 갇혀 있는 기도인데. 일반적인 기도인데요. 지금 자기에게 달빛, 햇빛이 누구 기도 때문에 오는지를 몰라요.
따라서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만 아는 기도입니다. 그 기도는 십자가에서 응답을 받고 다 이루었다, 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하는 쉬지 않고 하는 그 기도의 응답은 뭐냐? 궁금해요? 그 응답은 이겁니다. ‘나는 없다’입니다. 그리고 ‘나는 죽었다’입니다. 이게 응답이에요. 이게 응답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은 이미 아버지하고 예수님 선에서 이미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 응답의 기도 말고 더 끼어들 기도의 응답은 더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2천년 역사의 모든 기도응답은 다 거짓말입니다. 이제는 말한다. 다 거짓말입니다. 기도 응답받을 당사자가 없어져요. 기도응답은 항상 예수님 쪽으로 쏠리게 되어 있기 때문에 없는 나한테, 죽은 나한테 기도응답이 새삼스럽게 부여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 믿게 해달라고 기도해봤자 소용없어요. 주님의 응답은 이제는 예수 믿었다, 가 응답이 아니라 너는 ‘예수 안’에 있는 거예요. 예수 안에. 이거 안 놀라네. 이거 큰일 났다. 누가복음 11장 11-13절에 보면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 중에 아들이 생선 달라 하면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라는 말씀을 하신 이유는 인간이 기껏해야 생선 달라고 하는 수준밖에 안돼요. “그 생선 먹어서 뭐하는데?” “맛있잖아요” “맛있어서 뭐하는데?” “오래 살잖아요.” “오래 살아서 뭐 할 건데?” “오래 살아서 남한테 자랑질하려고요.” “자랑질 해서 뭐하는데?” “남한테 무시 안 당하잖아요.” 바로 그거다 그 말이지요. 너희 존재 자체가 무시당하지 않는 존재.
그래서 인간은 아쉬운 것이 없을 때는 굳이 예수님 십자가에 대해서 알고 싶지를 않은 거예요. 아쉬운 것이 없으니까, 아직까지 숨 쉴 만 하니까요. 인간이 내가 있으면요, 반드시 말썽을 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인간은 결국은, 인간의 가장 속마음은 뭐냐 하면, ‘나 빼고 다 꿇어’ 이거거든요. 나 빼고 다 꿇어.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그런 소식이 들려왔어요. 어떤 모임에 가기 싫다는 거예요. 말하면 그게 누군지 다 알기 때문에 조심스러운데요. 어떤 모임에 가기가 싫다는 거예요. 대구모임은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대구모임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오는데 그 사람은 내 타입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 타입이 아니다. 그래서 그 모임에 가기 싫다.
가면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그 사람 보는 즉시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막 미워 죽겠어요. 그냥 보기만 해도. 존재자체가 싫어. 그분이 그런 말을 한 것이 굉장히 감사한데요. 왜냐하면 사무엘하 13장 15절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곧 저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암논이라는 배다른 오빠가 배다른 여동생을 강간을 했어요. 너무 좋아해서 강간을 했는데 아주 좋아할 때는 내가 저 여자를 어떻게 뒷마무리 하게 될 줄을 본인도 몰랐어요. 본인 마음이 아니에요. 그런데 사무엘하 13장 15절에 보니까 일단 범하고 난 뒤에는 전에 자기도 모르고 되게 미워지는 거예요.
이것은 연애할 때는 내가 그런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본인도 상상도 못했습니다. 내가 그 여자를 그렇게 싫어할 줄을. 그런데 일단 관계하고 난 뒤에는 너무너무 미워하는 거예요. 좀 전에 사랑했던 것, 좋아했던 것 다 날아가 버렸어요.
이걸 약간의 심리적으로 분석하면 이렇습니다. 암논은 결코 저 다말이라는 여자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인간의 내 타입은 누구냐 하면, 내가 내 타입이에요. 인간은 자기가 구상하고 있는 그 타입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자기 타입하고 유사하면 그걸 내 타입이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거짓말이에요. 내 타입은 내 타입으로 끝나요. 내 타입이라고 결혼해놓고 버린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뭐냐? 여자를 미워하면서 뒤늦게 이제는 핑계거리를 찾는 거예요. ‘너는 내가 전에 좋아할 때의 매력이 왜 내가 너하고 관계하고 난 뒤에는 여전히 안 살아 있느냐? 그것은 네 책임이다.’ 본인이 매력 있게 봐놓고 이제는 그 매력이 일순간 다 날아가 버렸어요. 매력이 하나도 없어요. 재미가 없어요. 꼭 어떤 물체, 돌멩이 같아요. 귀찮기 짝이 없어요.
그런데 그 잘못에 대해서 본인이 그런 인간이라고는 생각 안하고 네가 전보다 더 매력을 유지 못시킨 네 책임이라고 돌려버리는 거예요 그래놓고 내 타입 아니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 22절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것은 형제보고 미련한 놈이라고 평생 동안 입을 열어서 말하지 않더라도 그냥 간단하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지옥 간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아주 간편합니다. 모든 인간은 다 지옥 간다. 로마서 14장 10절에도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5절에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어떤 인간도 본인이 신앙으로 살겠다고 마음 굳혀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본인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감당 못해요. 싫어지는 것이 싫어지는 것을 내가 어떡하란 말입니까? 미워지는 것이 미워지는데 내가 어떡하라는 말이에요? 형제고 뭐고 꼴 보기 싫은데. 마음에서 싫은데 “형제여, 사랑합니다.” 아이코, 개~코! 그게 됩니까? 되지를 않는데.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요, 나 있음이 이게 말썽거리에요. 기도할 자격도 없이 율법과 완전히 위배되는 나로 있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뭐냐? 쉬지 말고 너를 떨어내라, 그 말입니다. “너를 떨어내라. 네가, 예수 안에 있는 네가 예수 안에 들어온 그 취지를, 그 다 이루었음을 네가 지금 방해하고 있다.” 네가 나 이거 얻었다, 이거 응답받았다, 그게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떨어내라는 거예요. 주님이 주신 주님자체의 응답으로만 살아라 그 말입니다. 만나처럼. 받아나 먹어라.
그러니까 주님의 기도거든요. 이게. 히브리서 7장 25절에 나오는데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항상 살았다. 즉 쉬지 말고 기도하시는 분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하는데, 우리는 그 응답인데 그 응답이 뭐냐? 이미 기도응답은 다 받았어요. 이미 영생은 다 받은 겁니다.
공장에서 상품 만들기 전에 이미 주문할 때부터 돈 지불 다 했어요. 그 값이 제사고요. 그 제사를 뚫고서 멜기세덱 하늘에 족보에 이르는 것, 그게 히브리서의 핵심입니다 제사를 뚫고 멜기세덱 하늘의 사람의 족보에 하늘의 가족으로 입적되는 것, 그 족보에 들어가는 것, 그게 히브리서의 핵심이에요.
그게 뭐냐?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이미 한꺼번에 주님의 응답으로 다 받았어요. 그냥 사랑의 대상이에요. 기뻐하심을 입은 겁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다시는 정죄함이 없는 거예요. 다 받아놨는데 내가 자꾸 그 사랑을 훼방질하네요. 사랑, 하면 아가서잖아요.
아가 2장 16절에 보면, 참 이 아가서가 너무 좋은 책인데 2장 16절에 보면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이게 응답이에요. 이게 선악과 따먹고 분리된 자기 백성을 신랑신부로, 남자와 색시가 한 몸이 되어서 이미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걸 ‘예수 안’이라고 해요. 예수 안에서 두 사람이 아니고 한 몸이 되어 가는 거예요. 아니 한 몸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한 몸이 된 겁니다.
상태가 이미 한 몸이 된 것이고 그 상태의 상태 됨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보여주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쉬지 말고 기도’하는 거예요.
그 사랑에 대해서 표현하는 외국 노래가 있어요.
당신은 나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
어느 여름날 아침처럼
당신은 나에게 해오름 같은 미소를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그런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은 나의 모든 희망
내 두 손에 고인 신선한 빗물 같은 사람
강한 빛과 같은 당신
그런 사람이, 그런 사람이 바로 당신이랍니다
당신은 마음의 샘에서 솟아나는 샘물과도 같은 사람
바로 당신은 그런 사람입니다
당신은 내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꽃
당신은 내 빵에 쓰인 밀가루와 같은 사람
당신은 한 편의 시와 같은 사람
밤하늘에 들리는 기타소리와 같은 사람
당신은 내 맘의 지평선과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그런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가사를 보세요.
“당신은 내 손안에 있는 떨어지는 빗방울입니다. 당신은 끝없는 지평선 같아요.” 항상 쉬지 않고 계속 낮추니까. “당신은 내 집에 있는 벽난로 같아요. 당신은 모닥불 위의 따스한 불꽃 같아요. 당신은 내가 읽는 한편의 시 같아요. 당신은 항상 미소를 지어주는 사람이에요. 당신은 내 삶 속의 산들바람 같아요. 당신은 내가 먹는 빵에 항상 들어 있는 밀 같아요.”
그러니 이 사랑의 특징은 ‘항상’ 이에요. 쉬지 않고, ‘항상’이에요. 당신의 말을 항상 듣고 있고요, 당신의 밤은 들려오는 기타소리에요. 이 노래가 <에레스 뚜>라는 스페인 <모세다데(Mocedades, 젊은이들)>이라는 밴드가 1973년도에 불렀던 노래입니다. 자기생각 안 해요. 쉬지 않고 계속해서, “당신은 나의 한편의 시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늘 읊어줘요. 당신은 나에게 만나요 당신은 나에게 햇빛이고 단비입니다.”
둘이 한 몸이 된 이상에 신랑 말고 신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흔한 말로 하면 자기, 당신, 당신 때문에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기도의 응답이에요. 그러니까 기도는 계속 연락이 와요. 연락이 오는데서 반응을 나타나게 되면 연락이 항상 오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도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겁니다. 연락도 안 오는 데 기도하지 마세요.
그런데 그 연락이라는 것이 햇빛과 공기, 심장 뜀, 주변에 있던 내가 우연히 만나는 모든 사람, 뭐든지 당연하다 하는데 당연한 것이 아니고 전부 다 의외의 것, 어떻게 나한테 이런 아들이 있지, 어떻게 어머니는 돌아가셨는데 아직 아버지는 살아 계시지, 모든 것이 내 뜻이 아니고, 내 원대로가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그 원대로 주어진 전부 다 지금도 쉬지 않고 기도하는 주님의 기도소리가 왕, 왕, 왕, 늘 이렇게 만나처럼 매일같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 응답하는 것이 뭐냐? 지상에서 응답하는 것이 바로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가 끝이 없어요. 그냥 ‘아버지, 밥 먹고 하겠어요. 잠자고 난 뒤에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평소에 늘상 모든 것을 공급받고 있고 제공받고 있으니까요. 그게 바로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 주님께서 자식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고요, 자식을, “너는 내게 속했고……” 하고 잡아당겨요. 잡아당기는 거예요. 강하게. 확 당겨버리는 거예요.
너는 내 안에, 그리고 나는 네 안에. 이걸 늘 확인시키는 그 기도, 그 기도가 가능한 것은 뭐냐? 유월절의 어린양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월절의 피 때문에 그래요. 일제시대 때요, 어떤 사람은 일제 강점기라 하는데 강점기라 하면 더 싫어요, 그냥 일제시대 때 박선양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백정출신이에요. 백정출신에 외과의사에요. 백정출신인데 외과의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초창기에 간호학교에서 해부학을 가르치니까 학생들이나 학부형들이 백정출신이라고 무시하는 겁니다. ‘천한 것, 근본도 없는 것이 우리 양반을 가르쳐?’ 이런 시대였어요. 일제시대 때. 1920년대나 30년대 그 때. 그러니까 화가 난 그 박 선양 외과의사가 손 딱 내밀고 칼 가지고 손바닥을 그어서 피가 확 나오는 거예요. “이 피가 백정의 피인가? 5백년 조선의 피다!” 왜 바깥만 보고 안에 흐르는 피를 모르느냐 그 말이지요.
우리가 자꾸 예수님을 성화로, 눈에 보려고 하지 마세요. 보이는 것을 봐서 믿겠다는 것, 어떤 실적을 믿겠다는 것은 전부 다 우상적인 본성 때문에 그래요. 일반적인 기도입니다. 히스기야가 더 살게 해달라는 것은 그래서 15년 더 살게 된 것은 그 몸이 보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15년 더 살게 되어서 자기의 더러운 본성만 더 갈겨 놔 가지고 그 15년 때문에 나라가 망했어요. 15년 동안 한 짓이 뭔지 압니까? 자기 자랑질 하는 거예요.
제가 아까 다 했지요.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자기자랑질 하려고, 날 무시하지 말라고. 까이기 전에 깐다는 그런 사고방식. 나는 비록 못 먹고 못 배웠어도 이용당하지는 않으리라. 이런 거요. 응답 없습니다. 율법을 모르는 것은 주께서 응답 안합니다. 기도 하면 기도할수록 죄 더 짓지요.
저는 이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어요. 목사님은 성경은 이야기하고 복음은 이야기하면서 기도하라는 소리는 왜 안하느냐고. 이게 어딜 우상에 끼어들어가려고요. 지금 기도하고 있잖아요. 주님이! 신랑이! 얼마나 예수 바깥에 나와 있으면, 예수 바깥에 나와 있으면서 믿는 척 하려고 하면서 어디서 그렇게 기도를 거론하고 언급을 합니까!
기도는 현재되어진 상태를 보여주는 과정입니다. 키는 크지만 더 이상 크지 않는 사람, 이게 상태를 표현한다면 키는 작지만 계속 크는 사람, 이게 바로 과정을 설명하는 거예요. 미지의 상태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주님께 대한 감사의 기도가 평소에 늘 걸어가면서도 늘 이어진다는 거예요.
그게 에베소서 4장에서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야 돼요. 에베소서 4장 8절에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선물을 주게 되면 그 선물 안에, 기도라는 그것도 성령 안에서 함께 주어지게 되면 그 기도는 이미 우리로 하여금 ‘너는 이미 죽었어. 너는 이미 없는 거야. 없어도 괜찮아. 죽어도 괜찮아. 너에게 사랑이 있잖아. 내가 있잖아.’
주님이 있어야 될 그 자리에 내가 있어 버리면 이것은 말썽장이에요. 내가 주님한테 짜증내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화내고, 그렇게 살아가요. 마치 만나는 줬는데 만나를 고마워할 줄 모르고 물 없고 뭐 없다고.
만나가 물이나 양식을 대신하거든요. 우리를 대신해서 주께서 기도했는데 왜 그것도 모르고 기도응답 안하냐고 따지고. 그만큼 우리는 얼마나 위험한 세계에 삽니까? 일반적인 기도의 다양성 속에 살고 있어요. 그 종교성을 벗어나게 해주신 것은 오직 주님의 기도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