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비포 유 Me before you」 – 'before'트릭의 의미 모든 생명체는 죽지만 인간만큼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생물은 없는 것 같다. 요즈음은 특히나 죽음에 대한 담론이 자주 보인다. 지난해 나온 「Me before you」도 죽음에 대한 영화로 볼 수 있다. 불구가 된 한 청년이 주변의 모든 호소와 간청에도 불구하고 존엄사를 선택하는 이야기이다. 2011년에 나와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언터처블 1%의 우정」과 비슷한 구도라고 하는데, 결말은 반대방향으로 빠진다.
잘 아는 대로 「언터처블 1%의 우정」는 억만장자 불구자와 가난한 백수 청년의 감동적인 우정을 형상화한 것이다. 운동신경 손상으로 전신마비가 되어 수많은 간병인을 갈아치우며 신경질적이고 자학적인 나날을 보내던 억만장자 필립에게 가난한 흑인 청년이 간병인으로 등장하면서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다는 이야기이다. 즉, 필립은 전신마비에도 불구하고 결혼도 하고 애까지 낳으며 행복한 여생을 보낸다.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실화를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 제목처럼 1퍼센트도 안 되는 희귀한 우정이다. 「미 비포 유」도 불구가 된 남자와 가난한 여자의 만남에서 전개되는 영화이다.

억만장자를 부모로 둔 윌(Will)은 어릴 때부터 공부, 운동, 연애 등 못 하는 게 없는 최고의 엄친아이다. 이제 30대 초반이 된 윌은 탁월한 사업가가 되어 승승장구하고 있다. 미모와 지성을 갖춘 애인까지 있다. 그런 그가 교통사고로 하루아침에 하반신 마비가 되어 휠체어 운전수가 된다. 성 같은 저택에서 최고의 의료진과 간병인의 서비스를 받지만 다시 일어설 희망은 제로이다. 물론 그는 평생 아무 것도 안 해도 잘 먹고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만큼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한 1년 반쯤 휠체어에 앉아 타인의 힘으로 살던 윌은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을 내린다. 안락사를 결심한다. 그러나 부모님의 간청으로 6개월만 더 살기로 한다. 이쯤에 혜성처럼 등장한 문제적 간병인 루이자, 물론 이 영화의 여주인공이다. 그녀는 일단 매일 새로운 패션으로 나타나 윌의 눈을 즐겁게 해 준다. 그러나 그녀의 진정한 매력은 지옥에 가도 바뀔 것 같지 않은 천진난만한 낙천성에 있다. 얼마 안 있어 윌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비관도 낙천도 전염성이 강한 법. 집 안에 갇혀 좌절과 자학의 나날을 보내던 윌은 그녀와 함께 음악회를 간다, 여행을 한다 하며 활기찬 나날을 보낸다. 심지어 자신을 떠나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옛 애인의 결혼식에까지 간다. 루이자와 함께. 문제는 윌보다 루이자한테 발생한다. 건강하고 젊은 여인이 평생 전신불구로 살아야 하는 환자에게 대책 없이 빠져버린 것이다. 7년간 사귀어오던 남친과 아무렇지도 않은 듯 헤어진다. 게다가 남친은 만능 스포츠맨으로 윌의 식물적 육신과 완연히 대비를 이루는 남자다. 그러나 그런 것은 윌의 내적 존재감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녀의 삶 자체가 변한다. 아래의 고백을 들어보시라.
난 당신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어요. 당신 없이 산다는 게 두렵다는 걸 깨달았어요. I have become a whole new person because of you. I realized I was afraid of living without you. 물론 윌의 상태도 만만치않다. 당신은 나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당신이 끔찍스러울 때조차도 그래요. You make me happy, even when you’re awful. I would rather be with you. 느낌과 고백만 있는 게 아니다. 노골적인 액션도 따른다. 신체 형편상 루이자가 주도하지만 아래 장면의 경우, 야하다고 해야 할까 성스럽다고 해야 할까. 나는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하려고 애쓰며 키스를 했다. 내 입술을 그의 입술에 맞대고 키스를 하는 사이 우리 숨결이 섞이고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그의 뺨에 소금이 되어 떨어졌다. 나는 속으로 어딘가 그의 작은 입자들이 나의 입자가 되어 소화되고 삼켜져서 영원히 살아있기를 바랐다. 내 몸의 모든 조각을 그에게 밀착하고 싶었다. 내가 느낀 모든 생명의 조각을 그에게 주어 그를 생으로 밀어붙이고 싶었다. I kissed him, trying to bring him back. I kissed him and let my lips rest against his so that our breath mingled and the tears from my eyes became salt on his skin, and I told myself that, somewhere, tiny particles of him would become tiny particles of me, ingested, swallowed, alive perpetual. I wanted to press every bit of me against him. I wanted to give him every bit of life I felt and force him to life. 이쯤 되면 6개월만 살겠다는 윌의 결심에 변화가 생길 법도 하지 않는가. 실제로 그의 가족은 물론 해피엔드를 기대하는 관객들도 6개월 선언이 번복되길 바라고 또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No! 이 영화의 승부처가 바로 이 'No'에 있다. 예정된 6개월이 다가오자 윌은 안락사가 허용되는 스위스로 가 차질 없이 죽음을 준비한다. 루이자가 울고불고 발버둥 쳐도 흔들림이 없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세상을 하직한다. 대신 루이자가 공부를 하며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기에 충분한 돈을 물려준다. 실제로 루이자는 파리로 가 디자인 학교를 다니며 씩씩하게 미래를 설계해 나간다. 밝고 씩씩한 낙천성엔 변화가 없다.
이렇게 영화의 스토리가 끝이 나는데, 문제는 제목의 미스터리이다. 'Me before you'라는 타이틀이 저러한 내용의 이야기와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You before me'라면 몰라도. 그냥 낚싯밥인가? 당연히 목에 걸리는 가시는 전치사 'before'.
알다시피 before는 대략 세 가지 뜻이 있다. 시간적으로 무엇 '이전', 공간적으로 무엇 '앞', 가치론적으로 무엇 '보다'로 쓰인다. 이를 두 주인공에 대입하면 첫째, 당신을 만나기 전의 나. 그러나 루이자가 됐든 윌이 됐든 서로를 알기 전의 나(Me)는 영화의 흐름상 주안점을 두기가 어렵다. 둘째, 당신 앞에 선 나. 윌 앞에서 변화된 루이자, 루이자 앞에서 변화된 윌에 주목한다면 어느 정도 말이 된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윌이 죽어 서로의 앞에 서는 사태 자체가 없어진다는 점에서 절반밖에 맞지 않다. 마지막으로, 당신보다 내가 우선이라는 것. 그렇다면 영화의 메시지는 이기주의란 말인가? 물론 도킨스의 말마따나 모든 유전자 자체가 이기적이라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어의로 이해하는 이기주의를 윌이나 루이자에게 들이대기에는 둘 다 그런 인성으로 보기는 어렵다. 최소한 둘 다 이기주의가 주는 밉상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최소한 루이자는 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된, 철저한 이타주의자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윌은 루이자의 이타적 희생을 원치 않는다. 존엄한 죽음이라는 자신의 결정은 루이자의 출현 '이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다. 천하의 루이자라해도 그걸 바꿀 수는 없다. 윌의 의지는 확고하다. 괜히 Will이 아니다. 루이자가 파리에 가자고 하자 윌은 "나는 파리에 나로, 즉 예전의 나로 있고 싶다 I Want to be in Paris as Me, the old Me."고 말한다. 어떤 경우라도 사고 '이전의' 찬란했던 육신에 비할 바는 아니다. 루이자의 존재 앞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되면 Me before you의 Me는 일단 윌이고, 영화는 사실주의를 넘어 자연주의에 육박하고 있는 셈이다. 같은 차원의 논리로 루이자에겐 삶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다. 물론 긍정과 낙천적 의지는 윌을 만나기 전에 이미 성격 지어진 것이다. 그녀의 '가차 없는 낙천주의 the relentless optimism'는 그 무엇에도 영향 받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윌이 마지막 편지에 쓴 '잘 살아라'는 부탁은 부탁이라기보다 확신이고 덕담일 뿐이다. Don’t think of me too often. I don’t want to think of you getting all maudlin. Just live well. Love. Will. 날 너무 자주 생각하지마. 난 줄곧 짜고 있는 널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냥 잘 살아. 사랑해. 윌

루이자는 이 편지를 받기 전에 이미 벌꿀 스타킹으로 한껏 멋을 내고 파리에서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있다. 윌 '이전에' 형성된 자신의 존재방식에 따른 것이다. 인생이란 모든 주변 조건 '이전에' 나의 것. 죽음 또한, 아니 죽음이야말로 그러하다. 죽음만큼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 만의 것도 없을 것이다. 죽음에 대해 수많은 담론이 있지만 죽음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겪은 자는 말 할 수 없고 말 할 수 있는 자는 아직 죽음을 겪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 어쩌면 가장 고유한 삶의 한 형태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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