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감독 김지환 | 제작 스튜디오박스 | 출연 재희, 박신혜 | 개봉 5월 23일
포인트ㅣ 흙냄새와 피비린내가 뒤섞였다. 기억 너머로 꿈틀대는 사극호러, 그 풍성한 이야기의 부활.
한국 장르문화 전반, 특히 공포물에서 우리만의 고유한 옛 것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오래된 것이라도 일본 혹은 홍콩을 베껴온 것이 대부분이고 근대화 과정에서 이뤄진 토속신앙에 대한 금기의식이 많은 이야깃거리를 증발시켜버린 탓이다. 하다못해 귀신의 숫자만 따져봐도 거의 일 천 가지에 이른다는 일본과 비교해보면 한국은 초라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오랜 기간 방영됐던 KBS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의 존재감은 유난히 빛난다. <전설의 고향>이나 <수사반장> <형사>의 납량특집 에피소드는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생생한 흥분으로 남아 있다. 특히 <전설의 고향>은 제목만으로 각별한 아우라를 불러일으킬 정도다. 공포영화 마니아로 알려진 김지환 감독의 데뷔작이자 동명의 드라마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영화 <전설의 고향>은 80년대 이후 싹을 감췄던 한국 토속호러물의 부활을 알린다. <월하의 공동묘지>나 <여곡성>, 사극의 외피를 갖지 않고 개발독재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소복귀신과 가족제도 사이의 갈등을 잊지 않았던 <망령의 웨딩드레스> <깊은 밤 갑자기> 등의 70, 80년대 호러영화들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뛸 듯이 기뻐할 일이다. 흙냄새와 피냄새가 뒤엉킨 한국 사극호러물 특유의 분위기가 얼마나 잘 재현되고, ‘옛 것’이라는 데서 오는 구태의연함이 얼마나 해소됐느냐에 따라 완성도가 크게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이야기는 이렇다. 한날한시에 태어나 똑같은 얼굴로 살아온 쌍둥이 자매의 운명에 비극이 찾아온다. 무슨 일인지 자매가 인적이 드문 숲 속 호수에 빠져버린 것. 동생은 죽고 언니는 살았으나 말문을 열지 못하는 상태다. 십 년이 지난 어느 날, 한 선비가 소복귀신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고 같은 시각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언니가 의식을 되찾는다. 집안에선 경사가 났지만 비극은 이제부터다. 평화롭던 마을에 느닷없이 끊임없는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고, 한 맺힌 귀신의 망령은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사실 쌍둥이 중 하나는 살고 하나는 죽었으니, 언니가 죽었는지 동생이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영화는 그런 의문점을 굳이 감추지 않고, 그것이 후에 반전으로 작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서도 열린 태도를 취한다. 요컨대, 그것이 반전이든 아니든 간에 관계없이 연출자가 의도하고자 하는 진짜 공포는 다른 데서 출발한다는 자신감이다. 이러한 의도가 어떤 식으로 표출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공포가 구현되는 방식에 대해 유난히 많은 고민과 해법을 갖고 있는 감독의 역량을 봐선 낙관해도 좋을 듯싶다.
사실 작은 소동이 있었다. <전설의 고향>의 포스터와 예고편을 통해 <링>의 사다코를 연상케 하는 귀신의 모습이 드러나자 네티즌들의 성토가 이어졌던 것이다. 지난해 공포영화에서 숱하게 지적됐던 귀신 비주얼의 문제, 특히 사다코, 가야코식의 ‘기고 꺾고 젖은’ 비주얼을 다시 답습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조선시대에 일본 귀신이 나타났으니 한일 교류냐는 말부터 이것이 진정 임진왜란이라는 비아냥거림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말들이 난무했다. 감독은 예고편과 포스터가 자신의 의도대로 연출되지 않았음을 털어놓으면서, 실제 영화는 그와 다를 것임을 공언하고 있다. 특히 클로즈업이나 무분별한 효과 장치들을 이용해 순간적인 자극만을 안겨줬던 기존 공포영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음을 자신한다. 귀신이 상대를 습격하는 과정을 광각렌즈로 롱테이크 촬영하거나 관객의 시선이 쉽게 가지 않는 부분에 아무런 힌트 없이 귀신의 이미지들을 끼워 넣는 색다른 전략 등, 관객의 허를 찌르는 요소들도 눈여겨 기대해볼 만한 포인트다.
공개된 정보들만으로 추측해보건대, <전설의 고향>은 “무섭지 않은 공포영화는 아무런 존재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감독의 소신이 철저하게 투영된 영화로 볼 수 있다. 연출자가 의도한 공포 장치들이 관객들에 의해 얼마나 발견되고 소통될 수 있을지 그 결과의 향방에 관심이 쏠린다. 올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여름 공포영화다. 허지웅 기자
단순히 TV판의 확장이 아니다 김지환 감독
원래 지난해에 개봉할 계획이었는데? <전설의 고향>이 개봉하기로 계획돼 있었던 시기는 <괴물>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던 때였다. 사실 그때 개봉돼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작사와 투자사에선 개봉을 미뤄서라도 좀 더 많은 관객을 만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연장된 기간 동안 못다 끝낸 CG 작업도 마저 하고 해외 영화제 마켓에 선보이기도 했다.
사다코를 닮은 포스터와 예고편의 귀신 이미지 때문에 말이 많다. 영화를 보면 불만이 사라질 것으로 본다. 내 의도와 너무나 다르게 예고편과 포스터가 만들어졌다. 사실 소복귀신의 이미지라는 게 사다코의 모습을 완벽하게 탈피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본다. 일본에는 매장문화가 없고 죽은 사람에게 소복을 입히지도 않는데 <링>의 사다코가 긴 머리에 하얀 소복을 입고 있다는 건 역으로 그들이 우리 것을 따라했다는 의미와 같다. 하지만 이제 와 그런 이야기는 별 소용이 없고, 어떻게 하면 다른 식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을 했다. 촬영기법이나 관객에게 보이는 호흡의 차원에서 기존과 많이 다른 방법을 시도했고, 그 결과를 자부할 수 있다.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을 얼마나 염두하고 만들었나? 원래는 <슬리피 할로우>의 한국 토종 버전을 생각했다. 나중에 제작사에서 드라마 <전설의 고향> 이야기를 꺼내면서 제목과 컨셉이 수정됐다. 이 영화를 드라마의 확장판이나 극장버전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모티브만 가져왔을 뿐, 토종의 공포와 세련된 공기를 동시에 포착하려 애썼다. 실제 드라마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만 그 제목에서 오는 아우라만을 특별하게 생각할 뿐, 오히려 유치하다고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토속적인 공포가 가져다주는 흥분과 재미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구태의연하거나 유치하다고 여겨질 만한 구석은 모두 없앴다. 올해 가장 먼저 개봉하는 공포영화인만큼, 폭넓고 당양한 관객층이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노력했다. 기대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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