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푸르스트 현상에 대하여/채 선-
만약 그가
비스킷을 커피에 적시다 돌발적 행동을 해도 놀라지 말 것.
사소한 그 순간에 그는
비스킷 혹은 커피, 아니면 밖을 적시는 비 냄새를 맡음으로써
때마침 어떤 기억과 마주쳤을 지도 모르는 일.
그는 언제나 오래된 상처에 몰입해 간다.
돌개바람 몰아치는 강가
좀약처럼 울렁거리는 첫사랑,
함정 같은 블랙홀 속에서
가끔 웃는다.
그가 거느리는 슬픔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기억은 소멸과 함께 시간에 속해 있는 가장 확실한
생의 조건,
모질게 잠재된 황홀한 힘이기도 하다.
기억은 알리바이가 아니라 해석에 지나지 않는 것.
끝없이 진지하고
끝없이 묵직한 것들이
긴 밤을 지나갔다.
-냄새를 통하여 과거로 거슬러가는 지점
서서히 포르말린 냄새 풍겨드는 이 아침, 나도
기억만큼 사소해진다.
<2>-봄의 레퀴엠/채 선-
움터 오르는 살의殺意를 비집고
아기가 운다.
신생아실 유리창, 몰려든 사람들 웃음이
흡반처럼 들러붙어 있다.
붉은 리본에 묶인 꽃다발 흔들린다.
삼키지 못하는 저 울음과 웃음은
서로 닮아 있다.
흔들리는 꽃다발처럼
밑도 끝도 없이 수척해지는 풍경을
나는 병상에서 오래도록 듣는다.
못 견디게 나른한 수액의 속도는
불길한 문장.
멈칫멈칫 가느다란 혈관을 통과한다.
이를테면, 컴컴한 대낮 같은
진통이 발가락 끝까지 뻗칠 때면
나는, 배지 않은 아이를 사산하고
아이가 터뜨리지 못한, 붉은 리본에 묶인 울음
이 불룩해진 쪽으로 돌아눕는다.
온데간데없는 뜨거운 것들의 이름
그림자가 너무 길다.
<3>-솔리로퀴(soliloquy)/채 선-
오랜만이에요, 몸살 같은 날들이 지나갑니다. 오늘도 짜내지 못해 불어터진 혼돈으로 미완된 몸속 기호들. 몇 차례씩 소
용돌이 쳤지만 제대로 물려보지 못한 내 젖가슴은 참외꼭지처럼 말라붙고 말았어요.
비가 많이 왔습니다. 종일 비를 맞은 것들은 얼어 죽었거나 움을 틔웠지요. 그러거나 말거나, 나도 모르게 봄이에요. 어
리둥절, 새까만 고약처럼 찌들어 붙은 내 몸에도 물을 줍니다. 오랜만에…,
당신 몸살은 어떤가요. 오래 쓴 약은 약발도 떨어지기 마련이니 내성을 키우는 건 위험한 짓이에요. 얼마나 더 아파야
할까요. 위태롭게…… 우린 자주 앓았지요. 멋대로 날뛰는 심장을 달고 우리의 진통은 진행형으로 진화할 뿐,
오랜만이군요, 어젯밤에도 오락가락 비가 내렸습니다. 빗줄기가 다시 내 몸을 긁기 시작하네요. 차가운 욕조에 잠겨
안락사를 기다리고 있는 나의 노래들. 이 불안한 평화 속에서 용기를 내야 할 때는 언제일까, 그때가 지금이라면, 미안해
요. 그렇지만 눈물처럼 따뜻하지 않은 빗속, 오락가락하는 몽상을 이해하시리라 믿어요.
사실은 좀 쑥스러운 얘기를 하려 합니다. 오늘과 다르지 않은 어제 또 내일, 비오는 날에도 물을 뿌려가며 오래오래 달
래주고 싶어요. 딱딱해진 내 젖꼭지, 어쩌면 예쁜 꽃을 피우게 될 지도 모르잖아요. 그때까지도 우리 몸살은 끝나지 않겠
지만 박동을 다스리며,
참! 오랜만이지요?
<4>-마른장마/채 선-
기침 흉내로 장난치던 어린애 앞서 불려가고
쿨럭쿨럭, 때 아닌 감기를 쏟아내고 있던 나는
까까머리 어린애의 병상을 짐작해 본다.
타인의 고통을 더듬는 것은 나를 위무하는 일.
철없이 찾아든 병을 철없이 앓는 어린애의
까르르까르르 민머리 같은 웃음소리
깨진 유리알 밟고 내지르는 외마디로 듣는다.
검푸른 손목 뚫고 아이 몸속을 흘러 다니는 바늘은
어떤 내성耐性일까.
죽은 척 있던 어항 속 금붕어들
바늘 모양을 한 내 기침 물고 움찔거린다.
청태 낀 어항 같은 내 몸 속에서
붉고 노란 아이의 심장 팔딱거린다.
마른 날에도 젖는 것들이 있다.
까르르 번져오는 울음, 멈추려고
가느다란 목구멍으로 털어 넣는 가루약.
포르말린 냄새나는 한여름의 희망이란
아이의 병상기록 같은 것.
쿨럭쿨럭
어지럽게 바라본 빈 대기실 유리창으로
마른 장마철
오래된 안부 같은 낮달 슬고 있다.
<5>-리멘시타/채 선-
첫 번째 열린 문이 내게 물었어.
여긴 왜 왔지?
두 번째로 열린 문이 다시 물었지.
무슨 냄새를 맡고 왔니?
세 번째로 열린 문이 또 내게 묻네.
언제부터 여기에 살고 있었지?
마른 곰팡이 풀풀대는 마당
비가 퍼부어도 절대 씻겨가지 않는
외려 투명해져버리는 것들의 발작
곰팡내 잔뜩 물고 핀 고요가 나는 싫었다.
대책 없이 넘쳐버린 빗물, 수압 속 미세한 균열을
내가 말했든가.
두텁게 방수막을 처바르고 얼마간은 말짱한 듯 고슬거리지, 그러나
막은 곳을 다시 뚫고 들어오는
균열 속의 또 다른 균열에 대해선
아직 말 안 했지.
비가 그칠 때까지
그 세상 속에 있던 내 알리바이를 지워버려
폭우와 함께 흘러드는 어떤 세상을
푸른 빙산처럼 둥둥 떠다니며
느리게 젖어들다
눈물 속에 부풀어오르는,
위태로운 꽃.
<6>-서른아홉/채 선-
처음부터 그녀는 서른아홉
오늘은 색색으로 포장된 솜사탕 같은 날
지난 해 오늘 그녀는 서른아홉이 되었지요, 그러니까
올해엔 서른아홉
맞아요. 그녀는 서른아홉
그해에 그녈 보았지요, 서른아홉
서른아홉의 몸에 돋친 날개와
서른아홉의 루머,
거듭되는 서른아홉의 여름.
왜 항상 서른아홉일까 묻지는 않았죠.
처음부터 그녀는
서른아홉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요.
나는 서른아홉 살짜리 아이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죠.
바다에 들러 선인장을 사요. 또
지느러미 달린 서른아홉 개의 풍선을 사죠. 정말
그녀는 내가 바다에 다녀온 줄 알아요.
나는 두렵지요, 어느 날 문득
그녀가 제 몸의 날개를 뽑아버리면 어떡하나.
바다에는 선인장이 없다고
터져버린 풍선은 가짜였다고
오늘은 다시
그녀의 서른아홉 번째 생일.
그녀는 알까요? 서른아홉 번이나
서른아홉 개의 풍선이 터지는 동안
구름모자 쓴 나 혼자 여기서 다
늙어버렸다는 걸.
<7>-삐라-부재의 구성/채 선-
함정 혹은 합정역, 매일 도굴당하는 도시의 유적
다시 지상으로 올려지면
이목구비 사라진 생의 부장품들 뿔뿔이 흩어지고
종점과 종점을 도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습관적으로 빵을 뜯는다.
아무도 동승하지 않은 버스 안,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가 보이는 사람이었다가
이목구비를 놓친 차창 속
여러 겹의 내가 하나인 나를 에워싸고 있다.
껌껌한 서랍처럼 구석진 자리
한 덩이 토르소,
둥그렇게 웅크린 내 등 위로
허겁지겁 닫아두었던 아침이 쏟아진다.
뒤집혀진 채 널브러진 속옷
헤벌쭉하게 니체를 흘리고 있는 책상
혼자 울다 목이 다 쉰 뻐꾸기시계
우편함 속 수신대기 중인 존재들에게
늦은 밤, 나는 인사를 한다.
굿모닝?
그때 길게 끌리는 초인종 소리,
이목구비를 잃어버린 채 두 발만 보이는
한 겹의 또 다른 내가 문 밖에 서 있다.
<8>-삐라-웃는 비, 혹은/채 선-
내겐 세상의 감각이 너무 빨리 와.
다리가…, 절.름.절.름. 몹시 아파. 비가 오려 했기 때문이야 대책 없는 비. 그런데도 나는 젖질 않아, 젖을 수가 없어. 왜
냐구? 내가 바로 비, 심심한 비 당신에게로 가는 비 당신을 묶는 비 떠내려버리고 싶은 비 흐느끼는 비 안고 싶은 비 타버
리고 싶은 비 흐르지 못하는 비 갇혀 있는 비 범람하는 비 파묻어버리고 싶은, 비 흔들리는 비 무너지는 비 폭파되는 비,
저 혼자 어슬렁거리는 비
오르고 내리고
오르고 내리고
오 르 고 또 오 르 다
찢어지는
비
비
비
떠내려가는 지붕에서 그, 비가 운다.
나는 킬킬대고……
<9>-그래도 나는 잔다/채 선-
내가 속한 바다에는 입이 몸통보다 큰 어족이 산다.
거품을 먹고 사는 그들,
입 주위 촉수를 뻗어 서로의 몸에 달라붙어 있다.
화려한 산호초들의 섬을 만들어내는
루머라 불리는 족속들.
지나던 바닷새들 그 위에 똥을 지리고 간다.
그건 어쩌다 웃을 일
눈처럼
똥이 쌓인다.
웃는 것도 치우는 것도
바다가 하는 일
종일 물비질 쳐 화석을 만든다.
말이라 부르는 하등식물과 공생하며
조금씩 자라나는 섬.
꼭 그만큼씩만 수면에 떠오른 채
밑으로는 띠를 두르며 자라는 환초環礁.
그 끝엔 바다 전체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아가미가 달렸다는데
수문 없는 바다는
그저 공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나는 잔다.
거품처럼 쏟아지는 눈발
잠꼬대로 비질한다.
<10>-삐라-울음의 방식/채 선-
물기 흥건한 냉장고 바닥을 닦는다.
며칠째
목을 가늘게 늘인 빗줄기
질척질척
여닫을 때마다
차가운 방식으로 고여 있던 빗줄기의 공중
조금씩 바닥으로 끌어내렸을
저 오래된 문 안쪽
허공 받아 넣어두었다는 걸, 깜박
칙칙한 구름으로 떠다니는
나를 넣어두었다는 걸,
살갗 긁어대면 피가 흐른다는 걸,
깜박깜박
빗줄기에 긁힌 공중 어떻게 다물어
검붉은 생각들 다시 띄우나.
한겨울
딱딱하게 앉은 피딱지의 가려움
무심 잠결 긁고 또 긁어
차가운 방식으로 피 흐르듯
드러나지 않는 내부에서 응고 되는 것.
허공일까 빗방울일까
젖은 구름 모양 무거워진 입술
겨울 속에 밀어 넣고 낡은 문, 꽉 닫는다.
<<채 선 시인 약력>>
*서울 출생
*2003년 격월간 시사사로 등단
*이형기문학상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현 시사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