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린 드 메디시스.
이탈리아 어로 카타리나 데 메디치인 그녀는 피렌체의 황금기를 연 위대한 자 로렌초의 증손녀로, 국부 코시모부터 시작한 메디치 가 장자 계열의 마지막 적자손이었다.
마지막 계승자여서일까. 불행한 자 피에트로(할아버지)와 로렌초(아버지)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던 메디치 장자 계열 조상들의 특징들인 뛰어난 능력과 정열, 향학열, 예술에 대한 취향, 상식, 사람을 사로잡는 흡인력, 강인함 등이 다시 카트린에게 충분히 나타나게 된다.
거기다 그녀는 메디치 가 특유의 고운 눈과 함께 지적인 외모와 우아한 몸매, 훤칠한 키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친절하고 따뜻하며 쾌활한 성품은 어린 시절 3년간 살았던 무라토리회 수녀원의 수녀들과의 관계에서 잘 나타난다.
15세 때 아저씨뻘인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그녀를 프랑스 왕자 앙리와 결혼시키는데 만약 많은 사람들과 그녀의 희망대로 사촌인 훌륭한 이폴리토와 결혼했다면 아마 메디치 장자 계열은 몇 대 더 이어졌을 것이다.
그래도 어린 그녀는 같은 나이의 남편을 무척이나 사랑하게 되었는데 남편은 스페인서의 오랜 포로생활 때문인지 우울하고 무거우며 무능해서, 자신과 정 반대인 지적이며 활발한 카트린을 처음부터 싫어하였다. 게다가 아버지인 프랑수아 1세가 아들인 자신은 탐탁치 않게 여기면서 카트린은 사랑해 주었기에 앙리는 카트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지적인 그녀의 외모와 학식도 그를 사로잡지는 못하였다. 그렇기에 카트린에게는 남편 앙리 2세의 무관심이 일생 큰 슬픔이었었다.
또한 프랑스 인들은 왕의 아들이 일개 상인 가문 출신의 여성과 결혼한 것이 프랑스의 자존심과 민족의 명예에 커다란 모욕을 끼쳤다고 느꼈다. 이 편견은 점차 이탈리아 여자에 대한 증오로 바뀌어 그녀를 모든 죄악의 주범으로 기록했는데 "그들은 프랑스의 모든 범죄를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게 전가하지 않고는 못배겼다." 라고 현대 프랑스 한 작가가 쓸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스페인 포로 생활로 병을 얻은 황태자가 죽고 앙리가 황태자가 되자 왕족도 아닌 이탈리아 여자가 미래 왕비가 된다는 사실은 프랑스 인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고 카트린이 죽은 황태자를 독살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이렇게 외국인이라고 천대받던 그녀를 오직 시아버지인 프랑수아 1세만이 총애했다. 궁정 여느 귀부인들보다도 재기발랄하고 지적이며 스포츠에 열광하는 며느리가 자신의 르네상스적 취향에 딱 맞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행사에 동행시키며 애정으로 감싸 주었고 훗날 이혼당할 위기에서도 시아버지만이 그녀를 감쌌었다. (그런데 이런 총애는 오히려 더 큰 질투를 가져왔음)
그리고 카트린은 시아버지를 수행하며 화려하게 장식된 내실들마다 웃음과 장난이 끊이지 않던 앙부아즈 성, 레 투르넬레 궁전, 숲으로 둘러싸인 퐁텐블로 블루아 궁전까지 쉬지않고 다니며 프랑스 전역을 둘러보게 된다.
그러나 그런 총애에도 결혼 2년만에 교황이며 이폴리토며(교황의 서자 알레산드로에 살해됨) 친인척이 다 죽자 카트린은 자신을 쫓아낼 빌미를 찾는 적들의 한 가운데에 홀로 놓여지게 된다. 카트린에게는 친정의 배경이 다 사라져 버렸고 교황이 그녀의 지참금으로 약속한 땅을 주지 않고 죽은 것도 카트린을 쫓아낼 좋은 빌미였었다.
이런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카트린은 더욱 겸손하고 분별력 있게 처신했고 또한 살얼음 판 같은 상황은 정이 많고 따뜻한 소녀였던 그녀를 대단히 분별력 있고 차가운 여성으로 만들게 된다.
전 프랑스 사람들의 경멸과 위협에도 그녀는 꿋꿋이 견디어 냈지만 단 하나. 남편의 20년 연상의 정부 디안 드 푸아티에가 큰 불행이었다.
19세의 앙리를 사로잡은 39세의 디안은 유명한 미인으로 황태자 세력을 조종하는 실력자였고 카트린은 매사에 뒤로 밀려나 공개적인 모욕을 받았으며 (디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파리 사람들은 메디치가가 약사 집안이고 문장인 여섯개의 구가 환약을 상징한다는 이야기를 꾸몄음.) 그에 덩달은 남편의 무시도 프랑수아 1세의 분개를 살 만큼 대단했었다.
결혼 9년동안 자녀가 없자 열린 비밀 가족회의에 참석해 그녀를 이혼시켜 쫓아내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한 사람도 디안이었으며 앙리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만의 특권인 즉위식 때의 특별세도 하사받은 사람도 디안이었다.
그 여자는 왕비인 카트린 대신 대관식의 상석을 차지하는 기막힌 뻔뻔스러움을 보여주었고 관직, 성직을 모두 참견하며 자신의 신하들인 기즈 가를 주요 관직에 등용해 국사를 농락했다. 한편으로 디안에게 궁정 사람들과 함께 '이탈리아 여자'를 경멸하고 모욕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었으며 '장사꾼의 딸'에 대한 농담을 끊임없이 지어내 궁정의 스타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합법적 계승자를 보기 위해' 카트린의 침실로 일부러 앙리 2세를 떠미는 디안의 행동은 사랑하는 남편에게 있어 자신은 오직 자식 생산만을 위한 여자라는 생각을 들게 해 카트린을 더욱 슬프게 하였다.
또한 국왕이 부재 시에는 왕비에게 섭정권이 주어지는 것이 관례인데 디안은 그것을 막음으로써 카트린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기도 하였는데 카트린은 섭정권을 주지 않는다는 결정을 공개 낭독하라는 명령에 다만 미소를 지으며 극단적인 자제력으로 참아내었다고 한다.
카트린의 인격에서 끊임없이 언급되는 것 중의 하나인 자제력과 분별력으로 그녀는 이런 시련 속에서도 쾌활함을 잃지 않았으며 오직 침묵과 기도하는 마음으로 20 여 년 간의 시련을 견디어낸다. 하지만 이때 그녀의 영혼에는 쇠심이 박혔다는 것이 후에 사랑하는 딸에게 보낸 편지 중 오랜 세월 꾹 눌러 참은 슬픔을 얘기한 대목에서 잘 나타난다.
이렇게 자신의 합법적인 왕비의 지위를 강탈당한 카트린은 더 나아가서 자신의 친정 가문인 메디치가 상인 출신이라 하여 디안의 끝없는 조롱과 멸시를 받는 아픔을 겪었는데 디안은 프랑스 왕 루이 2세와 첩 사이의 딸이 자신의 외할머니라며 늘 뻐기고 다녔었다. (그러나 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보모인 메디치 가는 일개 프랑스 귀족, 그것도 천한 첩 출신의 여자에게 비교한다는 것 자체도 모욕적일 만큼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푸아티에'가 명예롭게는 아니라도 역사에 남아 있는가? )
그런데 더 괴로운 일은 카트린이 자녀를 낳았을 때도 디안이 아이들의 유모장이 되겠다고 고집한 것과 산후조리를 맡는 등으로 궁정과 왕에게 "왕비에게 베푼 선하고 칭찬할 만한 행동" 이라며 무수한 칭찬을 받으며 막대한 돈을 받아 챙겼다는 것이었다.
그런 속에서 매 순간 자신을 억제하는 것만이 그녀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카트린이 아들 샤를을 낳았을 때 앙리가 겨우 사흘 뒤 아내의 곁을 떠나 디안과 함께 있기 위해 아네로 갔는데 그것은 왕실의 예절에게, 자기 자식을 낳은 아내에게 크게 모욕적인 행동이었다.
항상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베네치아 대사들 중 대사 콘타리니는 '재위 초에 왕비는 왕이 여공작을 사랑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왕을 위해 절박히 기도하는 심정으로 그런 마음을 버리고 이제는 꾹 참고 지내고 계십니다.' 라고 쓴다.
카트린은 26년 간의 남편과 디안에 의한 전 궁정의 따돌림 속에서 한적한 곳으로 홀로 기거하며 자녀들의 교육에 몰두하였었다. 그 반면 앙리는 디안이 화려하게 꾸민 아네와 슈농소 저택의 '도금양과 장미 숲에서, 조각상들과 연못들과 왕성하게 솟는 샘에서' 디안과 쾌락의 나날을 보낸다.
아이들 교육을 맡으면서 아들들이 불행히도 부친의 무능력을 빼닮아 실망했지만 세 딸과 장래 며느리인 메리 스튜어트도 맡아 공주로서 엄격히 가르쳤다. 딸들은 모두 어머니를 경외했으며 그것은 가장 말썽을 피워 카트린에게 매를 맞기도 한 마르그리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메리 스튜어트에게 디안은 카트린을 '장삿꾼의 딸'로서 경멸하도록 가르친다. 아무것도 모르는 메리는 디안과 함께 그러한 농담을 하며 즐길 뿐이었다.
그래도 카트린은 메리를 아껴 '우리의 작은 스코틀랜드 여왕이 미소만 지어도 모든 프랑스인들의 마음은 설렙니다.' 라며 그녀를 칭찬하고 후에 메리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갈때 교황이 준 자신의 결혼선물이었던 대단히 커다랗고 희귀한 7개의 진주를 선물한다.
디안에게 당한 이런 기억은 카트린의 뼈저린 고통으로 남아있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지워지지 않았는데 그러나 볕들 날도 있다고 1557년 프랑스가 생 켕탱 전투의 패배로 인한 대위기에 처했을 때 였다.
앙리가 다른 전쟁터에 있었기에 왕 없이 위기를 맞은 궁정은 우왕좌왕 했고 평소 의기양양해 하던 디안도 어쩔 줄을 모르고 결국 카트린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 동안 디안에 의해 억눌려 있던 용기와 지혜, 능력을 발휘해 프랑스를 구해내게 된다. 이에 남편도 그 행동에 감명받아 아내를 평생 무시하다 죽기 전 2년 동안은 그녀를 존중하는 태도로 대하게 된 것이었다.
1559년 앙리 2세는 누이와 딸의 결혼 축하 행사로 열린 마상 창시합서 사고를 당하게 된다. 인과응보일까. 한 인간으로 감정이 있고 살아 있는 아내를 30년 동안 천박한 첩의 치마폭에 싸여 철저히 무시했던 앙리 2세는 10일 간 끔찍한 죽음의 고통에 시달렸었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디안을 보게 해달라는 남편의 후안무치한 청을 거절한 카트린은 남편이 죽자 이제 섭정 여왕으로 프랑스 최고 권좌에 오르게 되었다.
자신의 사랑과 헌신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 남자에게 매여 있던 30년. 이제 억눌려 있던 재능을 펼칠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권력을 잃은 디안 드 푸아티에에게 카트린이 한 30년 동안 쌓인 복수는 단지 영원한 궁정 출입 금지와 앙리 2세가 준 왕관의 보석을 돌려받은 것, 왕자비 시절 때부터 몹시 사랑했었고 갖고 싶어했지만 앙리가 디안에게 선물함으로써 또 하나의 슬픔을 자아낸, 슈농소 성 압수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섭정모후로서 종교 분쟁으로 혼란스러운 프랑스에 카톨릭과 신교가 공존하는 평화와 강력한 왕권을 위해 투쟁을 하게 된다. 이것은 그녀의 할아버지인 국부 코시모에게 부여된 어떤 과제보다도 더 혹독한 것이었다.
*이것은 G.F 영의 <메디치>의 한 파트를 참고로 한 것이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 대한 평은 오늘까지도 극과 극으로 나뉘는데, 비록 메디치가에 대한 영의 시선이 따뜻하다해도 나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 대한 그의 글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카트린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서가 없는데 비해, 영은 카트린이 살았던 시대의 사료들을 방대하게 모아서 활용하고 있으며 시대 상황과 내면 심리 등을 연결시키며 깊이 연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트린이 독약을 쓰고 학살을 지도하고 아들을 독살하고..그런 자극적인 흥미 위주의 글들은 그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전혀 밝히지 않고 있을뿐더러, 그 때의 상황같은 건 전혀 무시하면서 써내려 간 게 보이기에 상당히 의심이 간다.
**그리고 바르톨로뮤 학살, 아들을 독살한 (설) 등을 들어 이 글이 카트린을 너무 두둔했다, 좋게만 썼다 하는데, 바르-사건은 1572년이고, 이 글은 디안과 카트린의 관계 즉 1533~1559년의 얘기이다. 마치 '20년 후 얘는 나쁜 짓을 할테니, 어렸던 시절 일은 그 무어라도 두둔해서는 안 됨.' 처럼 되지 않는가.
출처 : http://www.yulia0818.com.n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