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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黃渾)의 연가(戀歌)
나는 1952(호적:임진생 1953)년에 충남 아산시 배방읍 구령리 1구 357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님은 내가 기억이 흐릿한 5세때에 위장병(胃腸病)으로 타계(他界)하시고 농사일을 하시는 어머님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6남매(4남2녀의3남임)의 슬하(膝下)에서 성장했다 어릴 때 4세때로 기억된다 나보다 3세 위의 작은형님이 계셨는데 어린시절의 흐릿한 기억으로는 작은형은 소아마비(小兒痲痺)를 앓고 난후로 다리를 저는 장애인(障碍人)이었다 형님은 지팡이를 짚고 다녔는데 내가 4살때인지 5살때인지 기억이 흐릿 하지만 태풍(颱風)으로 비가 많이와서 지방(地方)하천(河川) 곡교천(曲郊川)의 제방(堤防)둑이 터져서 낮은 지대에 있는 우리 마을 거의가 침수(侵水)되어 집안으로 뻘건 황토물에 침수(沈水)되어 마을에서 침수가 안된 높은 지역으로 피난(避難)을 가야했다 장마가 물러간 후 마을에는 침수 되었던 가옥(家屋)이 무너진 곳이 많이 있었다 그 장마(將魔)의 여파(餘波)로 작은형은 놀라서 장마가 물러간 후 한많은 세상을 하직(下直)하고 말았다 그 이듬해 겨울에 아버님께서도 위장병(胃腸病:위게양胃詭養)으로 타계(他界)하셨다 그 당시 큰 형님은(나와 12세 차이가 났음)고교를 재학중 누님은 중학교를 재학중에도 가사(家事) 일을 돌보고 있었스며 아버님의 유언(幽言)에 따라 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 체육대학(體育大學)에 진학을 하였다 대학을 졸업후 형님은 대학을 졸업후 2~3년을 어머님의 가사일을 돌보다가 인근의 둔포(屯浦)중학교에 체육교사(體育敎師)로 교직생활(敎職生活)을 하였스며 지금은 정년퇴임(定年退任)후 학교이사(學校理使)로 재임(在任)중이시다 이야기가 잠시 다른 곳으로 흘러 갔스나 나도 어머님의 가사일을 돌보며 중,고교를 졸업후 대학을 진학하려 하였스나 가사사정(家事事精)이 매우 어려운 시기라 고교 졸업후 조그마한 화학공장의 보일러 업무를 3년여를 다녀 보았스나 특별한 기술과 자격도 없어서 공장을 사직하고 얼마전에 타계(他界)하신 매형(妹兄)의 도움을 받아 고향 근교의 천안시에 있는 전문대학(專門大學)이 새로 개교하여 야간학부(夜間學部) 전기과(電氣科)에 입학하여 군복무 3년여를 마치고 학교를 졸업 하였다 재학시 전기기사(電氣技師) 2급(지금의 : 산업기사産業技師)을 취득(取得) 하였스며 또 재학중에 체신공무원(遞信 公務院) 5급(지금의 9급 공무원):현재의 통신공사(通信公社) 공무원(公務員)을 시험을 치루어 합격을 하여 대전에 있는 체신부연수원(遞信部 硏修院)에서 통신 교환기(通信 交換機) 기술을 4주 교육후 충북(忠北 )진천(珍川)의 전신 전화국(電信 電話局)에 임용(任用)되어 3개월을 근무하다 전공(專共)이 아니어서 사직(捨職)을 하고 경북 경주에 있는 특급 호텔인 코오롱(KOLON) 호텔의 전기기사(電氣技士)로 취업(取業) 했다가 여건이 맞지않아 1년 6월을 근무 하다가 동국대학교가 경주분교(慶州分校)가 세워져 기능직(技能職)인 전기기사(電氣技士)로 취업후 10여년 근무를 하다가 동국대학교 의료원(醫療院)이 개원되면서 동국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경주병원에 개원(開院)팀으로 자리를 옮겨 근무를 하였다 개원시 대학교의 기능직에서 의료원(醫療院)의 사무원(事務員)으로 직종(織種)을 전환(轉還)하여 근무를 했는데 개원시에 병원 건물 시공업체(施工業體)인 우성긴설(宇星建設)이 부도(不度)가 나서 건물공사 마무리가 덜 된 상태였스며 감독(監督)을 맡았던 파견(播遣)했던 대학의 직원들도 사직(捨織)을 하거나 학교로 복귀(復歸)한 상태여서 건물이 한동안 텅 빈 상태로 비어 있어서 신축 건물이 폐허(廢虛)가 되다시피 되었다 그로 인해 개원이 안되어 공사 감독을 담당하였던 직원들도 개원이 지연(止聯) 되니까 신분(身分)에 불안을 느껴서 사직(捨織)을 하고 다른 직장으로 이직을 하는 바람에 신축한 건물이었지만 병원건물이 준공도 못하고 1년이 지난후에 개원을 하려니 엉망 진창이 되어 그런 와중에 여름이 닥쳐 보수공사 업체를 찾아 보수를 하는중에 여름에 태풍까지 불어 닥치고 많은 장마비로 강건너 성건동 일대가 침수(侵水)되어 개원(開院)도 못한 병원건물로 피난까지 오고 개원을 준비하던 포항,안강의 직원들이 퇴근을 해야 하는데 엄청난 장마비로 도로가 침수되고 끊겨서 개원을 해야하는 건물에 피난민(避難民)들의 임시 대피소(待避所)가 되었스며 폐허(廢墟)가 되어 있었다 부도(不到)가 난 우성건설(建設)의 분야별(分野別) 시공담당자(施工擔當者)를 찾아내어 미비(未備) 된 곳을 완료하여 겨우 건물 준공검사(竣工檢査)를 끝낸후 병원설립(病院設立) 허가(許可) 받아 부분적으로 개원 하였다 개원후에 엄청난 가뭄으로 식수가 끊겨서 시 수도과와 소방서의협조를 얻어 상수원을 찾아다니며 부족한 식수를 공급하였스며 소방서에 협조 요청을 하느라 소방차로 비상급수로 환자와 의료진들의 식사를 공급하느라 또 비상 급수용 지하수를 찾아 암반관정(巖盤管井)을 뚫고 지하수를 공급하느라 퇴근후는 뒤늦게 밀린 문서처리와 결재서류 작성정리를 하느라 정시퇴근(定時退勤)은 생각도 못하고 병원에서 날밤을 새우다 아침에 잠깐 들어가 세면과 옷을 갈아입고 병원으로 달려와 업무를 하다 보니 10여년 후에 병상수(病床數) 450베드 22개의 진료부서(診療附書)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신설대학(新設大學)의 종합병원(綜合病院) 였지만 초기(初期)에는 병원업무(病院業務)를 제대로 아는 이가 없어서 다른 병원에 의뢰하여 업무(業務)협조(協助)를 구하고 의료진과 직원 500여명을 신규채용하고 개원 하였스며 또한 지역 실정에 맞게 진료 공간을 확대 구조변경 하느라 업무가 폭주하여 개원후 10여년까지 정해진 시간에 퇴근을 하지 못하고 휴일도 없이 쉬지않고 일하다가 과로하여 심장 마비로 1997년 9월 교직원 산악 회원과 산행후 귀가차량(歸嫁車輛)내에서 심장마비로 쓸어졌으나 함께 산행(山行)했던 동료 이윤경 간호사(看護士)의 헌신적(獻身的)인 응급구호(應急救護)로 살아나 연세 의료원 심혈관(心血管)병원에서 심장전기충격소생기(RCD)를 왼편 심장혈관(心臟血管) 부위에 삽입(揷入)후 계속 인사과(人事課) 계장(係長)으로 근무를 하였스나 그 당시 인사과 상사인 GSC과장(:훗날국장)과의 아무런 이유도 잘못도 없이 미움으로 인사계장이면서 업무를 받지못하고 바닷가 하계 수련장에 3개월이나 파견을 나가야 했스며 결국에는 대학에서 파견 나오신 AJO 국장(局長)에게 얘기를 하여 총무과(總務課) 총무계장(總務係長)으로 내려와서 근무를 하는데 그자리도 잠시 안정(安定)되나 했는데 AJO국장님이 대학으로 복귀(復歸)하자 심장부정맥(心臟不整脈) 환자(患者)라는 이유를 붙여 보직박탈(補職剝脫)과 병원의 기능직(技能織) 근무지인 전기실(電氣室)로 쫓겨 났다가 당시 JJH 의료원장(醫療院長)님의 퇴임시 보직변경을 기획관리실장(企劃管理室長)이었던 PSH(일반외과전문의(一般外科專門醫)실장(室長)(훗날포항병원장)에게 명(命)을 의뢰(依賴)했스나 GSC국장(局長)에게 미움을 받아 끝내 이뤄지지 못하였다 그분은 국장이라기엔 그릇이 너무 작았다 그러기에 정식으로 국장이 되었다기 보다 의료원장의 모교 D대학 B학과 후배라는 연(蓮)줄을 이용해 국장으로 발탁(拔擢)이 되었기에 따라 주는이가 적어서 나를 자기편(自己便)으로 만들려다 안되니까 심장부정맥(心臟不整脈) 환자라는 이유를 붙여 총무계장 보직(補職)을 떼어놓고 기능직(技能職)의 근무지인 전기실로 좌천(左遷) 시켜버렸다 그리고 또 노조(勞組)에 가입(加入)할까봐 사전에 노조 위원장과도 없는 계략(計略)을 만들어 놨었다 훗날 알았지만 인사과에서 좌천(左遷)시킬 때 안식구 한테 인사계장 재직시에 노조문제로 고심하여 노조를 와해(瓦解)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안식구를 불러다가 내용의 탄원서(歎願書)를 만들어 서명(書名)까지 받아놓은 글월을 받아놔 훗날 노조에 가입하려 위원장에게 갔는데 그 서명(書名)된 탄원서(歎願書)를 노조 위원장이 보여줘 내가 인사계장 재직시에 노조를 없애야 한다는 안식구도 모르는 자필(自筆) 글월을 내 보여주어 노조(勞組)에도 가입(加入)을 못하게 하는 간계(奸計)의 일인자(一人者)였다 총장(總長),이사장(理事長)의 공로패(功勞牌)와 표창(表彰)도 모두 필요(必要) 없었스며 파벌(派閥)과 세력(勢力)싸움만이 존재(存在)하여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GSC 국장의 정년퇴임(停年退任) 무렵인 2005년 2월에 진료공간(診療空間) 확대(擴大) 공사(工事)라는 퇴근후(退勤後)의 병원 업무중(業務中)에 좌반신(左半身)이 마비(痲痺)되어 쓰러졌스나 1년간 휴직(休職)을 하였다가 복직(復職)을 신청(申請)하였스나 장애인(障碍人)이라 복직이 불가(不可)하다는 통보(通報)와 함께 면직(免職:복직(復職)을 안시키고 퇴직(退職)처리의 일종) 처리되어 결국(結局)엔 사직(辭職)을 하고 말았스며 또한 업무중에 일어난 사고 였스나 법정((法定))에서 승소(勝訴)하여만 보상(報償)을 받기 때문에 사립학교(私立學校) 교직원(敎職員) 연금공단(年金公團)과 송사(訟事)을 제기(提起)하였스나 증인으로 세웠던 전기실의 기능직원(技能職員)인 CHY직원이 재직(在職)시에 진급(進級)을 시켜 주지를 않았다고 지방법원(地方法院)에서 僞위증(僞證):거짓증언)을 하여 송사(訟事)에 패소(敗訴)하여 고법(高法) 대법원(大法院)까지 항소(抗訴)하였스나 정치욕(政治慾)에만 눈먼 경주(慶州)의 JJB 정치변호사(政治辯護士)로 인해 고법,대법원까지 갔스나 승소(勝訴)할수 있는 송사(訟事)였지만 최모(崔模) 동료료직원(同僚職員)의 위증(僞證):거짓증언 패소(敗訴)로 상대(相對)했던 사학연금공단(私學年金公團)의 변호사(辯護士) 수임료(受任料)와 송사비용(訟事費用)을 배상(賠償)해주어야 했다 혹 떼려다 혹을 더 하나 붙이고 말았다 좌반신(左半身) 장애(障碍) 3급을 보상(報償)받으려다 2,000여만원의 송사(訟事)비용(費用):(변호사(辯護士,수임료受任料),법정(法定) 송사비(訟事費)[패소로 인한 연금공단 기타비용포함])를 날려 버렸다 그리고 결국엔 병원에서 그간 각종 치료비와 진료비로 채무변제(債務辨濟)로 인하여 선대(先代)로 상속(相續)받은 부동산(不動産)을 매각(賣却)하여 채무를 변제(辨濟) 하였다. 그 당시에 똑같은 뇌경색(腦梗塞)으로 좌반신이 장애(障碍)가 되어 한방병원(韓方病院) 병실(病室)에 입원(入院)했던 포항(浦港)에 삼성 S.D.I 직원 LSJ씨는 일찍 지방 법원에서 승소(勝訴)하여 보상(報償)을 연금(年金)으로 받고 있어서 나도 가능성이 있스리라 해서 나도 대법원(大法院)까지 항소(抗訴)하였스나 정치욕(政治慾)에만 욕심(慾心)많은 경주(慶州)의 JJB 변호사(辯護士)를 잘못 만나 안식구는 그의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운동(選擧運動)에 뛰어 들었스나 선거에만 신경 쓰느라 4~5배의 비싼 수임료(受任料)만 챙기는 그로 인하여 송사에 패소하고 재산만 날려 버렸다 모두가 내탓이고 게으르고 욕심많은 전기실의 CHY직원을 현재 문을 닫고 폐업한 DG대학교 PH병원으로 보내려 하는것을 못가게 당시에 인사과장이었던 GSY과장을 찾아가 CHY을 PH병원으로 보내면 안된다고 강력하게 되돌려 놓는 바람에 GSC국장의 미움을 받아서 나는 보직(**과 **계장)을 박탈(剝脫)당하고 기능직원 근무지인 전기실로 쫓겨났다 그리고 나는 퇴근후의 병원 업무중에 일을 하다가 나는 좌반신이 장애(障碍)가 와서 정년(整年)도 못 채우고 채무(송사비와 기타 심장진료 수술비 약값)에 허덕이며 백수인 아들을 대학도 졸업도 못시킨채 미약한 심장약을 삼키며 좌반신이 장애(障碍)인이 된채로 오늘도 희망없는 2013년 계사년(癸巳年)의 해를 맞았지만 죄없는 아내만 고생시키며 경주장애인 복지관 운동실에서 재활 운동을 하며 죄많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다행이 딸은 대학을 졸업후 서울의 모병원의 간호사로 복무 하다가 너무 힘이들고 어렵다고 작은 병원으로 자리를 옳겼다고 딸아이가 얼마전에 와서 얘기를 해서 근무 병원을 옳긴 것을 알았다 나는 딸아이한테 아직은 옳기는 것은 안좋고 3년후에 딸아이가 가고 싶은곳으로 좋아하는 낭군(郎君)을 만나 금년내로 결혼을 해야한다고 얘기를 하는데 더 이상 직장에 가라고 얘기를 하기가 어렵다 아들은 지인(知人)의 도움으로 경주시 외동공단에서 직원(職員)으로 근무를 하고 있다....고은내
베스트 유머:웃고 넘어 가세요
{작지만 단단한놈}
어느대학 단과대학(單科大學)학생의 회장선거때의 일이다
공교롭게도 한쪽이 여성 또 한쪽은 남성이 회장후보였다
남자는 키가 155의 단신이이었지만 여자후보는 170의 장신이어서 남자쪽이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
와중에 90%가 여학생이었다
하지만 작은고추가 매운법!
남성측이 작은 키를 장점으로 삼아서 프랭카드를 걸기로 했다
작지만 단단한놈 “김.아무개”로
친구들이 스티로품에 색테이프를 붙여서 정성껏 만든다음에 건물옥상에 올라가 간신히 붙였다
그런데 다음날! 슬로건 맨첫글자의 받침“ㄱ”자가 바람에 날려간겻이었다
슬로건을 올혀다 보니 거기에는 “자지만 단단한놈”
선거결과 유효표268표 가운데 가운데 255표를 얻어 압도적(壓倒的)으로 단단한 놈이 당선(當選)되었다{“유모어 펀치 2011년 5월호에서 퍼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