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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17세기의 프랑스 작가 라 퐁텐의 우화에 맨 처음 나온 것으로 알고있다.
이것은 로마 제국과 길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로마는 기원전 8세기 경 라틴 인이 티베르 강변에 세운 도시 국가다.
왕정을 거쳐 모든 관직을 귀족이 독점하는 귀족 정치로 진행하더니 평민이 중장보병으로 국방에 참여하면서 부터 참정권을 부여받게 되었다.
귀족 정치시대 7번째 왕인 타르퀴니우스는 행동이 거만하고 독선적 이었다.
이에 로마인들은 왕을 축출하고 원로원, 민회 그리고 1년마다 선출되는 집정관으로 구성되는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이후 로마는 주변의 부족들과 거의 해마다 전쟁을 벌이며 세력을 넓혀가게 되었는데 로마의 영토가 확대되어 재정이 늘어남에 따라 귀족과 평민간에 대립이 점점 심화되어 갔다.
그것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획득한 전리품이 평민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고 오히려 전쟁에 따른 부담이 평민 층에게 더 가중 되었기 때문이었다.
스칼라극장
공화정 초기는 로마에 상비군이 존립하지 않았다.
전쟁이 발생하면 일반 시민 중에서 추첨하여 군단을 편성하고 종군을 하도록 하였는데 추첨은 대체로 공정한 편이어서 로마 시민의 경우 평생 동안 10여차례 이상 전쟁에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평민들에게 육체적,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평민들은 여러차례 이러한 문제의 불합리성을 상부에 건의하여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원로원이나 집정관, 민회의 구성이 귀족적 성향이 짙었기 때문에 평민들의 건의가 묵살되거나 사장되어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평민들은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폭 넓은 참정권을 주장하였으나 이것 마져도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불만을 가진 평민들은 로마 동북쪽에 위치한 성산에 올라가 진을 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려 하였다.
당시 평민들은 귀족 대비 인원이 다수이고 대부분은 중산층이었다.
이들은 전쟁이 발발하여 종군할 때마다 자비를 들여서 장비를 마련한 중장보병들 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만약 로마 공화 정에 반기를 든다면 로마 공화정은 군사적으로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로마시에 침략해 온 적의 침공을 귀족의 힘으로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을 뿐 아니라 로마시가 공중 분해될 수 있는 위기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마 공화정의 위정 자들은 스스로 평민들의 의사를 받아들여 권력의 일부를 평민들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
그 결과 채택된 것이 B∙C 5초 호민관 제도이었다.
호민관은 군사적인 문제를 처리하거나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평민 중에서 선출한 관리였다.
이들은 집정관의 의견조차 거부권으로 무효화시킬 수 있었다.
이후 평민들의 권리가 점점 향상되면서 여러차례 법이 개정되어 귀족과 평민은 합법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이들의 합작 품이 곧 지중해 해상 권 장악이라 할 수 있었다.
지중해 해상 권을 장악할 수 있다면 도시국가에서 벗어나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로 밀라노를 상징하는 쇼핑 아케이드다.
프레스코로 만든 루넷에 늘어선 샵과 카폐가 걷는이의 발걸음을 절로 멈추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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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었던 국가는 페니키아인의 식민지 카르타고이었다.
페니키아는 해양민족으로 일찍이 바다로 진출하여 지중해 연안에 카르타고 등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814년 서부 지중해 연안에서 거대한 상업과 산업 도시로 변모해갔다.
카르타고는 지중해의 심장부에 위치한 만큼 해상 무역이 발달해 일찍부터 '지중해 최대의 부자 도시'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알렉산더의 공격으로 페니키아 본국이 무너진 다음에는 사실상 지중해의 주인으로 군림 하여 '지중해의 여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소원이 많아서 질근질근 밟아보지만
카르타고인들은 로마 제국에 많은 영향을 남겼는데 예컨대 로마인들에게 그들이 발전시켜왔던 재배형 농업을 전수한 것이 하나의 예로 들 수 있겠다.
또한 로마 제국도 카르타고 정치 제도의 일부를 도입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카르타고인들은 지중해 해상 권을 계속 장악하기 위하여 페니키아인의 항해 활동과 해상 무역의 오랜 전통을 이어받아 해군력 증강에 힘을 쏟았다.
카르타고인들은 지중해 서부 스페인 영토인 발레아레스 제도의 이비자 지역에 교역 기지를 설치하고, 대규모로 염전을 건설하여 그리스인 들의 통상 활동을 차단하였다.
이후 기원전 535년 코르시카 알레리아 해전에서 승리한 카르타고가 아프리카 북부와 이베리아 반도의 남단, 시칠리아, 세르데냐 및 지중해의 등 옛 페니키아인의 식민지를 거의 독식 하면서 서부 지중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아울러 이베리아반도 내에도 여러 식민 도시를 건설 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 거점이 바로 스페인의 동부 카르타헤나 항구였으며 스페인 최대의 항구 도시이자 지중해에서 가장 큰 도시인 바르셀로나 역시 카르타고인들에 의해 건설된 도시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 이후, 로마와 100년 이상 치렀던 포에니전쟁에서 패배 함으로써 카르타고는 지중해 의 패권을 로마에게 넘겨주어야 하였다.
포에니전쟁은 로마와 카르타고 간에 발생한 전쟁으로 지중해 해상 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한니발 이라는 세계적 명장을 탄생 시키기도 하였으나 끝내 승리는 로마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늘을 찌를듯 솟아오른 밀라노 성당 앞에서.
로마가 도시국가에서 대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군단으로 조직화 된 로마 군대의 역할과 국론을 아우르는 통치자의 능력때문이었다.
로마 초기의 군대는 로마 시민(평민)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평상시에 농업에 종사하다가 전시에는 병사로 활약하였다.
각자가 무기를 갖추고 종군에 나선 보병은 그리스 장창 밀집 보병 부대와 별반 다를 바 없었으나 장창과 쌍 날 단검을 가지고, 갑옷과 큰 방패로 무장 한 인간 병기라 할 수 있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흡사 무기가 몸의 한 부분인 것처럼 싸웠다'고 하였다.
로마군은 기병과 투석병 그리고 공병대, 보조병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의 공병대는 점령지와 로마를 잇는 도로를 건설하였다.
이 공병대가 닦아 놓은 길은 견고하고 내구성이 강했다.
우선 지면을 1, 2m 파내려가 그 위에 모래를 깔고 롤러로 다졌다.
다시 그 위에 30㎝ 정도의 자갈을 깔고, 또 그 위에 주먹만한 돌을 깔아 다져 놓았으며 그 위에 다시 호두알만한 자갈을 깔았다.
그 자갈은 아스팔트로 접합되어 틈새가 전혀 없었다.
그 위에 또 다시 자갈과 모래를 깔았고, 끝으로 크고 평평한 돌을 깔았다.
이렇게 로마시대 만들어진 도로가 오늘날까지도 끄떡없이 유지돼 온 것은 철저하게 감독하고 견고하게 건설한 탓도 있겠으나 뇌물이 없었던 시대 이었기 때문이다.
밀라노 성당과 비토리오 에말누엘레 2세 동상
로마 인은 '길은 직선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길이 직선이 되게 하기 위해서 산에 굴을 뚫기도 하고, 골짜기에 높은 다리를 놓는 등 당시에는 생각해볼 수없 방법과 특수한 공법을 활용하여 도로를 건설해 나갔다.
이렇게 닦은 길의 전체 길이가 대략 8만 5천㎞에 이르렀다.
고대사회의 경제 수준으로 보았을 때 도로공사 공정이 난공사였음 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완성 시켰다고 하는 것은 로마의 정치와 경제 및 군사력이 안정단계에 달하였다 는 증거이며 세계를 아우를 수 있는 현명한 통치자가 계속 등장 하였기 때문이다.
제2차 삼두정치를 승리로 장식한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온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격파하고 제정을 시작한 것은 기원전 27년이었다.
이후 로마는 200년 동안 주변 국가를 정복하여 평화를 누렸다.
이 시기를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라 일컬었다.
로마의 평화를 이끌어낸 인물이 5현제였는데 후계자가 반드시 자신의 아들 이어야 만 한다는 굴레를 던져버리고 재능과 능력을 갖춘자에게 황제의 지위를 선양하였다.
이들의 선진적인 사고가 있었기에 로마제국 건설이 가능하였다.
5현제는 네르바, 트라야누,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피우스, 마르크스아우렐리우스황제 등 5명이었다.
5현제 중의 한 명 이었던 트라야누스황제는 지중해는 말할 것도 없고, 아프리카 북부, 멀리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와 티그리스 강 및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들의 안정적이고 현명한 통치술이 있었기에 로마 라는 도시국가를 세계 최강 국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물소의 거시기를 밟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데 망서리는 동심
그러나 근세 이탈리아는 지방의 제후나 영주의 권한이 왕권을 능가하여 단일화된 정부를 구성하지 못하고 여러 도시국가나 공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서기 375년부터 단행된 게르만족의 대 이동으로 서로마 제국이 무너짐과 동시에 이탈리아 반도에 동고트 족과 롬바르드족이 이주해왔으며,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황제,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 대제의 지배를 받다가, 962년 오토 1세에 의해 성립된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11세기 이후 교황 권에 도전 하려는 황제가 등장하면서 차츰 교황과 황제간의 세력 다툼이 격화 되더니 7차에 걸친 십자군전쟁의 실패로 권위가 실추된 교황은 정∙교 분리 원칙에 따라 종교 권 만을 겨우 소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세시대에 봉건제도가 고착화되면서 왕과 영주, 기사 사이는 쌍무 적 계약관계가 성립 되고 평민은 영주나 기사와 소작관계를 유지하면서 어려운 삶을 영위해 나갔다.
생활이 어려운 평민은 신분이 농노로 추락 되어 주인으로부터 어느정도 구속을 받기는 하였으나 전쟁에 동원되는 것을 면할 수 있어 정신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농촌에서는 삼포 식 경작이 실시되고 도시 근처나 성곽 주위에서는 수공업 및 상업이 발달하면서 베네치아, 제노바, 파비아, 밀라노, 피렌체 등 도시들은 산업, 상업, 금융의 중심지로 변화해 갔다.
이러한 가운데 18세기 말의 프랑스 혁명이 자유, 평등 사상을 이탈리아에 전파 함에 따라 이탈리아에서도 점차 민족의식이 싹터가게 되었다.
어느덧 시간은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인들은 1820년대 결사 조직, 카르보 나리당 등의 비밀조직 활동을 해오다가 1831년 주세페 마치니가 결성한 이탈리아 청년당을 중심으로 외세로 부터 독립과 국가 통일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1848년 이후 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국왕과 카밀로 벤소 콘테 디 카보우르 재상, 주세페 가리발디 장군이 중심이 되어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은 프랑스, 오스트리아와 외교 교섭을 벌이고, 3차에 걸친 독립전쟁을 거쳐 1870년에 드디어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탈리아에도 과거에 시련이 많았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이 이탈리아 반도를 휩쓸었기 때문이다.
화산재가 또 하나의 산을 만들었다.
화산재에 덮여진 인근 마을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악마가 덮치기도 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중에서 가장 가슴을 조이게 하고 안타깝게 하였던 것은 죽음에 직면하였으면서도 모성애를 잊진 않았던 한 어머니의 주검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지워진 것은 오래 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밝혀진 것은 최근이었다.
언론이 공개한 내용을 보고 이탈리아 뿐 아니라 세계 사람들 모두 울음을 터뜨리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발생한 베수비오 화산 폭발은 이탈리아 국민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베수비오산은 1,281m 높이의 산으로 나폴리 동쪽 1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서기 79년 8월 2일 한낮에 베수비오 산에서 발생한 대분화 때문에 눈 깜짝할 사이에 산 아래 있는 작은 도시 폼페이가 화산재로 묻혀 죽음의 도시로 변해버렸다.
이 작은 도시 폼페이 시민들은 예전에 나폴리 만을 앞에 두고 뒤로 8㎞ 밖에 떨어져 있지는 않는 베수비오 산 인근에서 인구 2만여 명이 평화롭게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닥친 화산재 때문에 아름답고 부유한 도시는 죽의 도시로 변해버렸다.
순식간에 화산재 속에 묻혀 버렸던 건물들 대부분은 유흥 시설 이거나 부호들의 별장이었다.
이 환락의 도시가 18세기 경 우연히 발굴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예전 로마시대의 생활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폐허 되고 황량하게 변해버린 작은 도시 폼페이에는 신전, 관공서, 공중 목욕탕, 극장, 경기장 등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으며 그 외도 부호들의 별장과 서민들의 주택, 가게들, 그리고 환락가의 모습 마져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느 부호의 저택 정원의 분수는 예전처럼 기운차게 물줄기를 뻗고 있었으며, 술집 구석에 진열되어 있는 술 항아리는 맛 좋은 포도주가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여 이 도시의 평상시 경제 활동이 얼마도 활발하게 진행 되었는가를 짐작하게 하였다.
그러나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린 것을 보면 처연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도로는 돌로 포장 되어 있었고, 차도와 인도의 구별이 분명하였으며, 곳곳에는 건널목이 설치되어 있기도 하고 수도 설비도 시가지 전체에 거의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고도로 발달된 문화를 향유 했던 폼페이 마을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여야 하였던 삽화를 들고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다.
언젠가 한번은 폼페이 마을에 가서 로마시대 생활 모습을 탐구해보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태양처럼 솟았다가 사라지는 역사를 바라보며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과 같이 로마인들이 정복지 어디에나 고도의 문화를 전파 했던 것처럼 우리 민족도 과거에 높은 문화를 향유 했었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래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분단을 거듭하더니 결국 국토가 남북으로 반 토막나고 말았다.
또한 우리나라는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부존 자원이 빈약하여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었다.
이탈리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 했듯 우리 민족 또한 민족의 화합으로 통일을 달성해야 하는 무거운 의무를 어깨에 걸머지고 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는 젊은 혈기에 교육만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교육계에 투신하였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육현장에 진출 하고보니 전공 과목이나 인성, 교육 등 모든 것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학생들이 너그럽게 웃고 넘어가 주어서 사제간의 정은 점점 쌓여져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재 양성에 투신 한 것이 만족스럽고 긍지를 가지게 하였다.
더욱 나를 만족스럽게 하였던 것은 학부모들의 자녀들에 대한 교육 열의와 뒷바라지가 어려운 가정환경을 초월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아 보였다.
나는 예전부터 로마의 유적지를 확인하여 그들의 신념과 정신을 알아보고 싶었고 그들이 무엇때문에 세계를 정복하려 하였을까 하는 것이 궁금하여 여러 해 전부터 이탈리아를 방문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의 생각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시간적으로 약간 늦은 감은 있으나 늦은 것이 아니라 시대에 앞서간다는 생각으로 가슴에 묻어 두었던 세계사와 역사를 다시 불지펴서 세계에 대한 안목을 넓히고 이론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을 현장에서 확인시켜보고 싶었다.
지도를 책상 위에 놓고 어느 곳으로 여행을 갈 것인가 살펴보다가 아직 탐방하지 못한 이탈리아를 보고 불똥이 사방으로 튄 것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로마 시에 있는 바티칸 시국과 콜로세움, 로마시대 당시 포럼의 화려한 건축과 회화의 모습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였으나 로마가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사상과 문화를 느껴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더욱 밤잠을 설치게 하였다.
지금까지 해외 여행을 하였을 때 아침 6시에 줄곧 집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아서 바삐 서둘러야 하였는데 이번 롯데 여행사가 주관한 [카프리 섬] 이태리 일주 9일 여행은 오후 1시 45분 인천공항에서 이탈리아 밀라노 말펜사 국제공항으로 출발하는 KE 대한항공 927편 항공기 이어서 훨씬 느긋하고 여유있게 인천공항으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인천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 날이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흥분되어 밤잠을 설치기는 하였으나 기대했던 모든 것이 실 타래가 풀리듯 여행이 즐거웠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 10시까지 인천국제공항 3층 출국장 동편 A카운터 창측 롯데관광 전용데스크 앞에 집합 하라는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에 늦어도 오전 08:30분 까지는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였다.
여행을 할 때마다 그러했듯 여행용 큰 가방에 옷가지와 세면 도구만 넣고 가볍게 출발하려 하였으나 나도 몰래 이것 저것 쑤셔 넣다보니 가방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가방 무게는 적어도 23kg이 한계인 데 걱정되기 시작하였다.
집사람과 함께 집을 나와 포이사거리에서 택시를 타고 KT 양재동 지점 앞으로 이동하였다.
인천국제공항행 6009번 버스에 승차하기 위해서였다.
금요일부터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가 있어 출국하는데 애로가 될까바 컴퓨터를 켜고 기상청 일기 예보를 확인해보았다
다행히도 출극당일 오후 6시부터 비가 내릴 것이라고 지도에 표시되어 있어 인천국제공항까지 이동하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오전 5시에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밖을 바라보니 걱정은 기우였다.
밖이 화창하여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오전 8시에 집에서 출발하기로 하여 하는 일 없이 방에서 서성이다가 큰 가방을 끌고 집사람과 함께 공항버스 6009번 승강장으로 이동하였다.
평일이고 출근시간과 거의 일치하는 시간대라 공항버스는 한가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착석하고 있었다.
버스는 강남역을 지나 88고속도로로 진입하고 있었다.
한강물이 아침 햇살을 받아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면서 눈을 부시게 하였다.
한강은 유사이래 지금까지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삼국시대는 한강을 놓고 백제, 고구려, 신라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기도 하여 민족의 각축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아쉽게도 우리의 영토 일부가 한반도에서 떨어져 나가는 슬픔을 겪기도 하였으나 한강은 중국 산동 성을 잇는 대외 역할을 톡톡히하여 중국 당나라와 교역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도 통일신라시대의 영토를 약간 확대 시키기는 하였으나 한강은 여전히 한반도의 젖줄역할을 하고 있었다.
조선시대가 되면서 지방의 수령이 백성들로 부터 징수한 조세를 서울의 경창으로 운송 하면서 왕실과 한성부는 분주 하였고 오일장을 오가며 상행위를 하였던 경강 상인들의 선박들도 쉴 틈 없이 한강을 오가곤 하였다.
그러나 한강은 과거의 역사를 잊은 채 햇볕이 강물에 반사되어 반짝거리고 있었을 뿐 평화스럽고 아름답게 보였다.
어느덧 공항버스는 경인아라메길을 따라 인천공항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인천공항이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고속도로변 골프장에서 이른 아침부터 평화스럽게 골프를 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남녀가 이른 아침부터 골프를 치고 있어서 의아해하였으나 모든 사람들의 직업이 다르듯 각자의 사회적 역할이 다르기때문일 것이라 생각이 들어 어느정도 수긍이 갔다.
내가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듯 그들도 직업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라 생각을 하면서 모두가 국위를 선양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기 때문에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번 여행은 친구들과 합류하여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우리 부부만 별도로 롯데여행사 관광객과 합류하여 떠난 이탈리아 여행이었다.
KE 대한항공 927편 항공기는 오후 1시 45분에 인천국제공항을 이륙 하려했으나 다른 항공기와 제공거리를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20여분 가량 이륙을 연기하였다.
제공권이 확보 되었는지 오후 2시 5분이 돼서야 KE 대한항공 927편 항공기는 땅을 박차고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하였다.
이륙한지 한 시간만에 갑자기 항공기가 심하게 요동을 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몽고 고원에 있는 고비 사막을 횡단 하면서 나타나는 기압차이에서 인 것 같았다.
항공기 위치를 살펴보니 울란바타르와 울란우데 사이를 빠져나가 소련 이르크추크 위를 날고 있었다.
항공기의 요동은 이 지역의 상공을 비행할 때마다 나타는 현상이었다.
항공기에서 지도를 살펴보니 사막과 호수가 어우러져 있었다.
천공기와 따뜻한 공기가 충돌하면서 생기는 기압의 변화 때문에 항공기가 요동을 치고 있었으나 항공기는 러시아 영공 깊숙이 진입해 스페인을 방문했을 때의 항로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국은 아마도 오후 6시 10분일 것 같았다.
이탈리아 여행을 준비하느라 밤 잠을 설친 것이 무리가 되었는지 몸에 이상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이제부터는 눈을 충분히 붙여야 할 것같다.
항공기는 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 상공을 비행 하다가 원을 그리며 헬싱키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만미터 이상 상공에서 내려다 본 러시아는 구름때문에 산하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나 하얀 동토가 눈을 부시게 할 것 같았다.
북극해의 차가운 공기가 하늘로 치솟아 따뜻한 공기를 밀어내고 냉각시키는 기능을 하는지 항공기 기체 내부의 온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러시아의 북방 북극해는 한국시간으로 오후 12시 50분 정도 가량 되었을 것 같은데도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었고 구름 사이를 유영하는 항공기 엔진 소리만 윙윙거리고 있었다.
다시 항공기는 모스크바상공에서 이탈리아 밀라노 말펜사 국제공항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비행 잔여시간이 3시간 50분이어서 이탈리아 시간 6시50분이면 현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항공기 아래에 하얀 눈으로 덮힌 알프스 산맥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보병 4만 5천명과 코끼리 40마리를 거느리고 로마원정을 단행 하였을 때도 이렇게 아름답고 눈 덮힌 알프스 산맥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로마에 원정 했을 것이라 생각을 하니 인간의 능력과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위와 굶주림을 극복하며 이동해가는 한니발의 군대가 지금도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항공기는 이제 막 밀라노 서쪽 말펜사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은 국내가이드가 직접 동반하여서 훨씬 정신적 부담을 줄일 수 있었고 한국과 이탈리아 간 직항 노선을 이용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도 있었다.
이탈리아 밀라노 말펜사국제공항은 변두리의 작은 공항 이어서 그런지 어둡고 한산해 보였다.
그러나 입국하는 한국 관광객에게 인사 한 마디를 건넬 줄 아는 멋쟁이 항공사 직원들도 있었다.
일부 항공사 직원들이 일상적이고 행정적인 업무에 젖은 습관성 때문에 방문국에 대한 첫 인상을 흐리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 이탈리아 여행은 항공사 직원들의 붙임성있는 태도와 친절함 때문에 이탈리아 문화에 대하여 쉽게 동화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탈리아 역사와 문화를 탐구해보려고 이번 이탈리아 여행을 추진 하였던 나는 그들의 선진 의식 까지도 빠짐없이 공부해보리라 생각하였다.
이러한 소망이 현실화되고 꿈이 달성 되었으면 하면서 밀라노 대성당으로 이동하였다.
밀라노 대성당으로 이동하는 도중 스칼라 극장에 도착하였다.
잠시 하차하여 스칼라극장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다.
스칼라극장은 밀라노에 있는 오페라극장으로 세계의 오페라극장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오페라극장 중 의 하나였다.
스칼라극장은 1778년 당시 밀라노를 지배 하였던 오스트리아의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의 명에 따라 교회 자리에 세워진것으로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개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 되었으나 전후에 재건되어 1946년 A.토스카니니가 지휘한 역사적인 콘서트로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그 후 V.사바타, T.세라핀 등이 음악감독으로 재임 하였다가 2000년 리카르도 무티가 음악감독으로, 파올로 아르카가 예술감독으로 다시 부임하여 관중의 수가 늘어나더니 현재 수용인원은 약 3,600명이라 하였다.
1778년 8월 A.살리에리의 오페라 “Europa Riconosciuta”를 개관 기념으로 공연하였으며, 베르디의 “오베르트”, 푸치니의 “나비부인”을 비롯한 많은 오페라가 이곳에서 시연되었다.
설립 당시에는 사립극장으로 시작되어, 후원자들 각자가 자신들의 박스를 구입하여 사용해오다 1921년 토스카니니, E.칼다라, 상원의원 L.알베르티니 등의 노력으로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자치법인이 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부속기관으로는 스칼라극장오케스트라와 스칼라극장필하모니, 스칼라극장합창단, 스칼라극장박물관 등이 있었다.
드디어 죽기 전에 방문해보리라 소망하고 기대 하였던 밀라노 대성당에 도착하였다.
1386년, 대주교 안토니오 다 살루초는 옛 로마 유적지 자리에 십자가형 옆면과 돌출부위로 이루어진 고딕 양식의 대성당을 짓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로 인해 고딕 양식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에 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500년 가까이 재정과 설계상의 문제로 공사의 진척이 늦추어 지더니 건물의 외양은 모순투성이 상태로 변해버렸다.
육중 하면서도 섬세하고, 혼란스러우면서도 영감이 빛을 발했다.
수많은 첨탑에 외부에서 지탱해주는 버팀 벽, 복잡한 격자무늬 창살로 장식한 동쪽의 둥근 반원형은 프랑스 고딕 스타일을 모방하고 있었다.
17세기 양식의 복도, 18세기 스타일의 첨탑, 거기에 신고전주의 정면. 뾰쪽한 지붕과 괴물 석조상, 대리석 상으로 가득한 경이로운 지붕은 밀라노 라는 도시에 멋진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정면에서 바라본 밀라노 대성당의 지붕 첨탑이 마치 송곳처럼 꼿꼿이 하늘로 치솟아 있어 천당이라면 한 치라도 양보할 수 없다는 인간 본연의 내면을 보는 것 같아 가톨릭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였다.
밀라노 대성당의 장엄하고 엄청난 규모는 나를 잠시 혼란에 빠뜨리게 하였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스페인의 세비야 대성당과도 우위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웅장하고 장엄하여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다섯 개의 통로가 입구에서 제단까지 이어지고, 거대한 석조 기둥이 사람이 모이는 곳을 지탱해주는 실내는 약 4만 명의 방문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벽과 벽면에 움푹하게 뚫려진 부분인 벽 감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조각 작품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총 3,159개의 조각상 중 2,245개는 건물 외부에서만 볼 수 있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조각상은 '작은 성모'라는 뜻의 “마돈니나”여는데 높고 뾰쪽한 지붕위에 서 있었으며 3,900장의 금박으로 덮여 있었다.
하늘을 찌르는 듯한 대성당(두오모)은 정신 나간 건축가들의 자만심을 찬양하는 놀라운 걸작 들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대성당 전면의 광장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마 상이 우뚝 솟아 있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모든 이탈리아 사람들의 우상이자 수호신이었다.
사르데냐의 제2대 국왕으로 출발하여 이탈리아의 제1대 국왕이 되었으며 지략과 전술에 탁월한 인물이었다.
막강한 권력을 거머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왕권체제에서 입헌군주제 체제로 행정과 재정을 근대화 시켰고 이로 인해 사르데냐는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1849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패배하여 퇴위한 부왕 카를로 알베르토의 뒤를 이어 사르데냐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부왕이 도입한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며 다제리오∙카부르 등을 수상으로 기용하여 행정∙재정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또한 영국∙프랑스 와도 협조외교를 맺는 한편, 크림전쟁에 참전하여 국제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 하였으며, 1859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롬바르디아를 획득하였다.
1860년 가리발디의 남이탈리아 원정 뒤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병합하여 1861년 3월 초대 이탈리아 국왕이 되었다.
1866년에는 베네토를 1871년에는 로마를 병합하여 이탈리아의 통일을 완수 함으로써 이탈리아의 국부라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었다.